한국전쟁 당시 일본은 직접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참전국은 아메리카 합중국,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튀르크(터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벨기에, 에티오피아, 프랑스, 헬라(그리스), 필리핀, 남아프리카연방, 타이 등 16개국이며, 의료지원국은 인도,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5개국입니다.
유엔군이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 공장등을 세우고 전쟁 물자를 보급했고, 일본은 연합군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후방에서 소해 및 보급 · 보수를 담당했습니다.
특히 국제연합군의 중핵을 맡고 있던 아메리카 합중국이나 영국 점령군이 일본을 출격 및 후방 지원 기지로 삼고 있었고, 무기의 수리나 탄약의 보급, 제조 등을 일본에 맡겼고, 이때 발전된 공업력은 전후 경제 부흥에 이바지하였습니다.(이른바 전쟁특수죠.) 그리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국제 연합군의 지시를 받고 '특별 소해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개전 직후 인민군은 기계수뢰전 활동을 개시하여, 미해군 제7 함대 사령관은 9월 11일 기계수뢰 대처를 명했으나 국제연합군 내의 소해 부대는 극히 적었습니다. 그래서 원산상륙 삭전을 결정한 국제연합군은 일본에 소해 부대 파병을 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요시다 시게루 수상의 승인으로 10월 16일부터 소해 부대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소해 부대는 일장기가 아닌 국제연합기를 사용해야 했고, 국회의 승인 없이 파견하였다는 사실이 표면화되면, 헌법 상의 균형 문제로 국회에서 논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10월 10일 일본 소해대는 10월 10일 원산 앞바다에 도착했고, 12일 오전부터 소해 작업에 착수, 미해군 소해정 2척이 촉뢰에 의해 침몰하는 가운데에서도 3개의 기계수뢰를 처분했습니다. 그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었으나 10월 17일 MS14호가 폭발하여 1명이 행방불명되고 18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이후 전진 임무 부대 지휘관 알렌 E. 스미스 미해군 소장에서 작업 순서의 개선을 요구했으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포격도 불사한다'라는 말을 듣고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10월 20일 다른 일본 소해대가 원산 앞바다에 도착했고, 소해 작업이 다시 실시되었습니다. 10월 10일부터 12월 4일까지 일본 소해대는 8개의 기계수뢰를 처분하였습니다.
원산 이외에도 인천, 진남포(2개 처분), 군산(3개 처분, MS30호가 좌초해 침몰하나 사상자 없음) 등에서도 소해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후 12월 15일 국제연합군 아메리카 합중국 극동 해군 사령관은 소해 작업 종료를 지시하고 특별 소해대는 해대됩니다.
정리하자면, 1950년 10월부터 12월 15일에 걸쳐 46척의 소해정등이 원산, 인천, 진남포, 군산 등지에서 소해 작업을 벌여 기계수뢰 27개를 처분하였고, 해운과 근해 어업의 안전을 확보한 동시에 국제연합국의 해상권을 확보해 한국 전쟁에서의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이 소해 작업에 대해 반발이 많았습니다. 1950년 10월 박헌영 북한 외상은 '국제 연합군에 일본군이 참전하고 있다'라고 비난했고, 소련 또한 '아메리카 합중국이 일본군을 참가시키고 있다'고 하면서 국제연합을 비난했습니다. 또한 이승만 남한 대통령도 1951년 4월 연설에서 '최근 국제연합군에 일본인 병사가 들어가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 일본이 우리를 돕겠다는 이유로 한국에 출병한다면, 우리는 공산군과 싸우고 있는 총신을 일본에게 돌리고 싸울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