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실록에 나오는 실존인물 홍길동의 기록입니다.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듣건대, 강도
홍길동(
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연산군일기
전교하기를,
“
홍길동(
洪吉同)의 초사(招辭)를 보건대, 엄귀손(嚴貴孫)은 비단
홍길동의 와주(窩主)일 뿐 아니라 바로 같은 무리이다. 이같은 행동이 있는데도 어떻게 벼슬이 당상(堂上)에까지 올라간 것인가. 그 정승들을 불러 이 초사를 보이라.”
하매,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엄귀손이 당상이 된 것은 군공(軍功)이 있는 까닭이고 조행(操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관(朝官)으로서 그 행동이 이러하였으니 신 등이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였다.
- 연산군일기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이행 등이 와서 아뢰기를,
“금부에 갇혀 있는 도둑 순석(順石) 등이 서로 고인(告引)하여 경기의 군읍(郡邑)이 매우 소요되고 있으니, 어찌 도둑의 무고(誣告) 때문에 경기 군읍의 백성들로 하여금 처소를 잃고 떠돌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포획(捕獲)하라는 명을 우선 늦춰 놓고 지금 금부에 갇힌 자들을 속히 판결하도록 명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아뢴 뜻이 과연 나의 뜻과 부합된다. 그러나 다만 요즈음은 재계하는 때이므로 속히 판결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도둑들은 옥관자(玉貫子)를 갖추고 있다 하니
홍길동이 당상(堂上)의 의장(儀章)을 갖추고 있던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길동의 예(例)를 따라 금부에서 추국하는 것이다. 고인된 자를 포획하는 일은 늦추라.”
- 중종실록
또 일본의 사신을 구류시키고 이를 천자(天子)에게 고하여 문죄(問罪)를 단행한다면 종계(宗系)를 개정(改正)하는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또 선왕조(先王朝)에서는
복상(卜相)1203) 에 적격자를 얻어 풍속이 순미(淳美)하므로 강상(綱常)의 변(變)이 없고 다만
홍길동(
洪吉同)·이연수(李連壽) 두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항간에서 욕을 할 때는 으레 이 두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았는데, 지금에는 복상에 적격자를 얻지 못하여 풍속이 괴패(乖敗)하고 강상의 변이 곳곳마다 일어나므로
홍길동·이연수의 이름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 선조실록
조선왕조실록에서 빈번하게 등장할 만큼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었습니다. 허균은 실존인물이었던 홍길동의 이야기에 살을 덧붙여서 소설을 쓴 거지요. 실존했던 위에서부터 죽 훑어보면 실존인물 홍길동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홍길동을 잡은 일이 조정에서 논하여집니다. 일반 잡범이나 좀도둑을 잡은 일로 임금까지 보고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홍길동이 국가를 뒤흔든 도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홍길동의 일파가 조정에서 당상관(오늘날로 치면 장관이나 차관급)까지 올랐다고 하네요. 역시 상당히 대담한 도둑임을 알수 있죠.
-홍길동이 당상관의 의복을 갖추고 돌아다녔답니다.
-마지막 선조실록때는 홍길동이 처형당하고 몇십년 지난 후의 일인데 홍길동의 이름이 욕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홍길동이 허균의 소설에 나오는대로 의적이었다면 항간에서 홍길동의 이름을 욕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겠죠?
종합하면...
실존인물 홍길동은 임금까지 골머리를 앓을 정도로 대담한 도둑이었으며, 자신이 당상관의 옷을 입고 다닐 뿐 아니라 자신의 일파를 조정에 심어 놓을 정도로 스케일이 큰 도둑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홍길동의 이름을 욕 대신에 사용한 것으로 보아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부자의 돈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하는 의적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