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에 대해서 설명좀

석굴암에 대해서 설명좀

작성일 2009.12.31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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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초등학교 4 학년 한 여자 학생입니다

제가 겨울 방학 숙제중에 교과서에 나온 문화재에 대해서 조사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줸장!!!!!!!

암튼  저는 석굴암에 대해서 조사를 할려구;;;;;;

글자 크기 12 로 했을때 A4용지 2장으로 될 만큼의 내용으로 해주세요

참고로 내공냠냠 저주글 등을 올리면 알지?????????????????
바루 신고!!!!!! 자칫 잘못하면 112눌를수도???크캬캬!!

되도록이면 빨리 부탁드립니다~!?/~!~!..~!>>..~!>..~!>!>..~!>...~!>...

제가 부탁드리는것은

1. 석굴암의 지정번호와 지정년 월 일

2. 일본넘들이 우리 석굴암을 어떻게 훼손시켰는가?
3. 예전 석굴암과 현재 석굴암의 차이점

 4. 석굴암은 누가 지었는가?

5. 석굴암의 특징

등등등 좀 많져???
이것만 해주시면 감사감사

무성의 하게 아주 짧게 쓰는놈

죽여버린다!!!!!!!!!1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총 정리해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석굴암은 국보 24호로 지정되어있고,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뛰어난 가치가 있습니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불국사와 같은 시기에 처음 세워졌으며,

토함산 중턱에 위치하고 1913년 일제가 해체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습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석굴암으로 개칭됐습니다.
  

아주 단단해 조각하기 힘든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석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화강암으로 제작하고 위를 흙으로 덮었습니다.

티벳지방등에서 볼 수 있는 석굴을 흉내낸 것인데

건축, 수리, 기하학, 예술이 종합적으로 어울려 완성된

통일신라 예술의 극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석굴암은 국보 제24호이다.

    신라의 토함산 마루에 위치한 석굴암은 재상 김대성이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창건하기 시작한 절로 774년 김대성이 죽자 국가가 끝을 맺어

    완성한 석굴 사원이다.

   

    석굴암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인공석굴로 전실로부터 비도를 지나서

    부처의 세계인 굴실의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구조는 방형과 원형, 직선과 곡선, 평면과 구면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천장은 네모난 돌들을 한치의 틈도 없이 쌓아 올렸고 중앙에는 화려한 연화문개석을 덮어 둥근 형이다.

    큰 절에 있는 여러 상들은 좁은 굴 속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중 본존불은 원굴 중앙에 봉안된 여래좌상이며 걸작으로 꼽힌다.

   

    불신은 비례를 갖추고 근업가 자비를 겸비하고 있으며 손끝 발끝에까지 세심한 손길이 미친

    석공의 기술은 아름다운 예술과 심오한 종교의 경지가 하나로 되어 신라 조각의 최고봉이며

    한국 불교 조각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구조

주실 천장은 돔 구조로 축조하여 지붕의 무게를 적절하게 안배시켜 석재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독특한 축조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천장 맨 윗부분에 연꽃무늬를 아로새긴 커다란 돌을 놓아 천개(天蓋)를 삼고 그 옆으로 원을 그리면서 여러 개의 돌덩이들이 둥그런 천장을 자연스럽게 구성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작은 돌들은 표면이 튀어나와 자연스러움을 주면서 바깥쪽으로 튀어나간 부분은 천장 위에 덮인 흙을 지탱해 주므로 그 형태와 구조가 기가 막힌 조화를 보이고 있다. 주실 내부에는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보살과 제상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고, 전실에는 사천왕상과 인왕상이 각각 마주보고 있어서 그 안정감과 균형감각이 또한 뛰어나다.

 

역사적 사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의 명을 받아 김대성이 현재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착공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 보아 불교가 가지는 호국불교(나라를 지키기 위해 부처님의 힘을 빌리는 것)의 의미로 볼 때 석굴암을 지어 부처님에게 나라를 수호해 달라는 바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보존상태
일제 시대 때 우체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완전히 헐어 시멘트로 보수공사를 했다.
하지만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자 다시 박정희 대통령 때 2차 보수공사를 한다. 이 때도 시멘트로 했는데 마찬가지로 시멘트로 보수하면서 석굴암 보존에 치명적인 문제를 발생시켰다. 서리와 이끼가 끼어 한 때는 석굴암 안에 항온항습기를 둘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지금은 어느정도 해결된 상태지만 여전히 시멘트로 보수공사된 이후 3차 보수공사를 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원래의 모습에 대한 관련 자료들을 수집해 정확하게 보수를 하려고 준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가치와 의의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뛰어난 가치가 있다. 아주 단단해 조각하기 힘든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석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화강암으로 제작하고 위를 흙으로 덮었다. 티벳지방등에서 볼 수 있는 석굴을 흉내낸 것인데 건축, 수리, 기하학, 예술이 종합적으로 어울려 완성된 통일신라 예술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만들어진시대

통일신라751년(경덕왕10년)


만든사람
김대성

소재지
경북 경주시 토함산

종목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지금까지도 여러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오며 가치를 인정받아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되기도 한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중 하나가 되기도 한답니다.

 

답변확정부탁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도 4학년인데여...

재가 아는 것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일단 대리석??????????(대리석이 아닐수두 있습니다...)으로 만들었고 습기가 잘 안차는 것으로 보아서 온도조절이 옛날엔 잘 됬다고하던데

그리고 대리석이란 돌을 잘 다듬은 것으로  보아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알수있습니다

또한불국사와 함께 세계유형문화재에 등록 되었구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입니다

그리고 이건 들은것인데...

일본도 우리의 석굴암을 보고 감탄???? 했다구 하던데여.....

 

허접해 죄송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도 4학년 여학생이예요~

답변확정 부탁하고요. 그냥 문제와 답을 적은후 뒤에 줄글로 적을께요;;

절대 어디서 빼긴게 아니라 100%제가 찾은 것입니다.

 

1. 석굴암의 지정번호와 지정년 월 일

석굴암의 지정번호는 국보 제 24호이며, 지정년도와 월 일은 1962년 12월 20일이다

2. 일본넘들이 우리 석굴암을 어떻게 훼손시켰는가?

일본의 학자들이 1907년 우연히 석굴암의 존재를 전해 듣고 그들이 최초로 발굴한 것으로 오인,

석굴암 전체를 분해하여 반출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주민의 반발에 부딪혀 무마되기도 하였다.

 

일제는 석굴암이 훼손되어 무너지기 쉬운 위험한 상태라 판단, 1913년 ~ 1915년에 모두 해체하여

돌 사이와 천정 바깥쪽에 시멘트를 발랐다. 그 뒤로 물에 잠기는 현상이 발생하여

1920년, 1920년에 중수를 시도하였으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처음 해체·복원한 뒤로 원형이 훼손되었다.

 

당시,일제가 석굴암을 발견했을때는 보존불상에는 부처의 이마의 솜털을 표현하기위해 보석이 박혀있었으며,

바닥을 차갑게해 습기를 아래로 모이게 하기위한 감로수가 흘렀다. 일제는 보석을 훔쳐가고, 또한 신라인들의

지혜를 모르고 감로수를 석굴암 밖으로 빼돌려 버린다. 일제는 이를 복원공사라 하며 끝마쳤다. 그러나 시멘트를 바르며 환기구멍들을 모두 막아버리고 감로수를 밖으로 빼돌렸기에 석굴암에 습기가 끼기 시작해 석굴암 벽면에 물이 맺히고 이끼와 곰팡이가 끼기 시작한다. 일제는 이를 방지하기위해 벽면을 부수고 유리창을 설치했으나

상태는 더욱더 심각해졌다.

 

광복후,1960년대 한국정부는 석굴암을 복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위에 시멘트를 더 덧발라버린다.

그후 석굴암 벽속에 온풍기와 에어컨을 설치해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고,겨울에는 온풍기를 틀어

습기조절에는 성공하였으나 기계의 소음때문에 석굴암에 미세한 금이 가고있는 상태다.

3. 예전 석굴암과 현재 석굴암의 차이점

석굴암은 특징이 불상을 자세히 보시면 머리 어깨 어깨 다리 비율이 1:2:2:4 이다.

이건 우리나라사람들이 신라시대부터 비례배분을 할 수 잇었다는것을 알 수 있다.

석굴암은 예전에는 수학적으로 제대로 계산해져 만들어져서 습기 조절이 되었지만, 조선시대 때 사람들이 석굴암 관리를 잘 안하고 방치한 상태를 일본인들이 보수를 한답시고 시멘트를 발라서 망가지고 이끼도 끼고요. 현재도 그 기술을 못 따라간다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은 공기청정기를 이용하고 있다.

 

4. 석굴암은 누가 지었는가?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

기록이 있어서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석굴암은 김대성이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5. 석굴암의 특징

굴내(窟內)는 둥근 평면이며, 천장은 궁륭상(穹隆狀, 반구형 또는 아치형) 석굴을 짓고

위에 흙을 덮은 것으로 동쪽을 향하였고, 좌우의 너비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이며,

그 앞에 장방형의 전실(前室)이 있다.

 

석불사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높이 약 3.4미터,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본존 뒷벽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의 원만한 자태는 신라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범천(梵天)·제석천(帝釋天)을 반육각하였고,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을 안치하였다.

 

그 중 두 개만은 지금 비어 있는데, 대한제국 때 일본 사람이 반출하였다고 전한다.

천장은 궁륭상(穹隆狀)으로 되었고 중심에는 연판(蓮瓣)을 새긴 둥근 돌로 눌러놓았는데,

그 교묘한 구조와 우아한 조각은 놀랄 만하다. 입구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각 2개씩 반육각하였으며, 그 앞 전실 양쪽 벽의 인왕(仁王) 및 팔부신장(八部神將)은 내부의 것에 비해

그 수법이 정교하지 못한 듯하다.

 

즉, 내부에는 여러 불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데,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제자들의 입상이, 

비도 양쪽으로는 사천왕상이, 그 바깥쪽에는 금강역사가 놓여 있다. 본존불 윗쪽으로는 10개의 감실이 있는데,

그 가운데 8개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줄글:석굴암의 지정번호는 국보 제 24호이며, 지정년도와 월 일은 1962년 12월 20일이다.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

기록이 있어서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석굴암은 김대성이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석굴암을 일본의 학자들이 1907년 우연히 석굴암의 존재를 전해 듣고 그들이 최초로 발굴한 것으로 오인,

석굴암 전체를 분해하여 반출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주민의 반발에 부딪혀 무마되기도 하였다.

 일제는 석굴암이 훼손되어 무너지기 쉬운 위험한 상태라 판단, 1913년 ~ 1915년에 모두 해체하여 돌 사이와 천정 바깥쪽에 시멘트를 발랐다. 그 뒤로 물에 잠기는 현상이 발생하여 1920년, 1920년에 중수를 시도하였으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처음 해체·복원한 뒤로 원형이 훼손되었다.

당시,일제가 석굴암을 발견했을때는 보존불상에는 부처의 이마의 솜털을 표현하기위해 보석이 박혀있었으며, 바닥을 차갑게해 습기를 아래로 모이게 하기위한 감로수가 흘렀다. 일제는 보석을 훔쳐가고, 또한 신라인들의 지혜를 모르고 감로수를 석굴암 밖으로 빼돌려 버린다. 일제는 이를 복원공사라 하며 끝마쳤다. 그러나 시멘트를 바르며 환기구멍들을 모두 막아버리고 감로수를 밖으로 빼돌렸기에 석굴암에 습기가 끼기 시작해 석굴암 벽면에 물이 맺히고 이끼와 곰팡이가 끼기 시작한다. 일제는 이를 방지하기위해 벽면을 부수고 유리창을 설치했으나 상태는 더욱더 심각해졌다.

 광복후,1960년대 한국정부는 석굴암을 복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위에 시멘트를 더 덧발라버린다.

 그후 석굴암 벽속에 온풍기와 에어컨을 설치해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고,겨울에는 온풍기를 틀어

습기조절에는 성공하였으나 기계의 소음때문에 석굴암에 미세한 금이 가고있는 상태다.

옛날 석굴암과 현재의 석굴암의 차이점은 예전에는 수학적으로 제대로 계산해져 만들어져서 습기 조절이 되었지만, 조선시대 때 사람들이 석굴암 관리를 잘 안하고 방치한 상태를 일본인들이 보수를 한답시고 시멘트를 발라서 망가지고 이끼도 끼었다. 현재도 그 기술을 못 따라간다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은 공기청정기를 이용하고 있다.

 석굴암의 특징은  굴내(窟內)는 둥근 평면이며, 천장은 궁륭상(穹隆狀, 반구형 또는 아치형) 석굴을 짓고

위에 흙을 덮은 것으로 동쪽을 향하였고, 좌우의 너비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이며, 그 앞에 장방형의 전실(前室)이 있다.

석불사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높이 약 3.4미터,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본존 뒷벽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의 원만한 자태는 신라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범천(梵天)·제석천(帝釋天)을 반육각하였고,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을 안치하였다.

 그 중 두 개만은 지금 비어 있는데, 대한제국 때 일본 사람이 반출하였다고 전한다.

천장은 궁륭상(穹隆狀)으로 되었고 중심에는 연판(蓮瓣)을 새긴 둥근 돌로 눌러놓았는데,

그 교묘한 구조와 우아한 조각은 놀랄 만하다. 입구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각 2개씩 반육각하였으며, 그 앞 전실 양쪽 벽의 인왕(仁王) 및 팔부신장(八部神將)은 내부의 것에 비해

그 수법이 정교하지 못한 듯하다.

 즉, 내부에는 여러 불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데,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제자들의 입상이, 

비도 양쪽으로는 사천왕상이, 그 바깥쪽에는 금강역사가 놓여 있다. 본존불 윗쪽으로는 10개의 감실이 있는데, 그 가운데 8개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옛날과 오늘날의 석굴암의 차이점은 예전에는 수학적으로 제대로 계산해져 만들어져서 습기 조절이 되었지만, 조선시대 때 사람들이 석굴암 관리를 잘 안하고 방치한 상태를 일본인들이 보수를 한답시고 시멘트를 발라서 망가지고 이끼도 끼었다. 현재도 그 기술을 못 따라간다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은 공기청정기를 이용하고 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굴암은 751년(경덕왕 10)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웠습니다.


처음 일본이 석굴암을 발견했을 때에는 거의 방치된 상황 이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유물을 가져가기위해 석굴암을 분해했다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구지 무거운

 돌을 자기 나라로 가져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이 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석굴암을 지으려다가 너무 급하게 석굴암을 분해한 탓에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일본방식대로 지었습니다.

 게다가 둥그런 천장이 무너질까봐 걱정되어 겉에 시멘트를 발랐습니다.

 그러자 석굴암은 공기가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천장에 습기가 찼습니다. 이 습기를 막기 위해 공기를 순환하는 기계를 설치하고 그 기계가 돌아갈 때마다 진동이 생겨 조금씩 기울어 간다고 합니다.

 또 비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앞에 지붕을 설치하고 그 지붕 때문에 햇빛이 안 들어와 전구를 쓴다고 합니다. 그 전기 때문에 공기가 뜨거워져, 에어컨을 틀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는 석굴암 밑에 물이 흘러서 바닥이 차가웠습니다.

 습기는 찬 곳으로  맺히기 때문에 바닥에 습기가 찼습니다.

 그리고 석굴암 안으로 햇빛이 들어와 부처님이마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밝혔다고 합니다.


 지금도 석굴암은 조금씩 조금씩 기울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석굴암의 원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정도면 되나염 ?  추천 부탁해요

석굴암에 대해서 설명좀

... 암튼 저는 석굴암에 대해서 조사를 할려구;;;;;; 글자 크기 12 로 했을때 A4용지... 석굴암은 누가 지었는가? 5. 석굴암의 특징 등등등 많져??? 이것만 해주시면 감사감사...

석굴암에 대해서 설명좀 해주세요.

... 석굴암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좀 해주시길 바랍니다. 간단하게 5~6줄 정도로 중요한것만 설명해주세요. 길게 써주시지 마세요. 내공걸어요. 석 굴 암(국보 제24호...

석굴암에 대해서 국보 제 (...)랑 간단하게...

... 석굴암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좀 해주세여. 간단 간단 해야되구요 그냥 우리가 꼭 알 것만 적어주시면... 제목을 보면 국보 제...있잖아여 그것도 적어주시면 정말 정말...

석굴암에 대해서 자세히설명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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