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어에 대해서 !!

태국어에 대해서 !!

작성일 2004.07.12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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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어를 배우고 싶은데요 ^.^

베트남이 이제 전망이 좋고 해서 베트남어가 미래가 밝다매요 !

그런데 태국어도 앞으로의 전망이 밝나요 ?

중국이 지금 막뜨는것처럼 태국도 앞으로 밝나요 ?

알려주심 감사하겠습니다 ㅋ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네 우선 우리나라에서 태국어를 배울수 있는 곳이 다섯손가락안에
드니까 충분히 메리트는 있습니다.
실제 외대 태국어과 졸업한 사람들이 구사하는 태국어를 보면
지극히 딱딱하고 회화체에서 잘 안쓰이는 용어가 많아요..
다시말해서 태국어를 한국에서 배우더라도 결국 태국에와서
다시 학생 마음가짐으로 배워야 한다는거죠.

취업전망은 한마디로 말씀드리기에 뭐하지만 분명한 것은
태국내에 취업을 할때 한국에서 100%고용계약을 하고 태국에 와야지
절대 태국에 와서 찾지(구직)하지 말란겁니다.
그 이유는 제 경험인데요 우리나라에서 올때는 기본 월급+해외수당+주택 등등
기본 사항인데 여기서 직접 채용이 될 경우 분명 뭐 한가지는 빠질겁니다.
즉 똑같은 몸,능력,가치는 정해져있는데 어디서 면접보고 어떻게
계약되었느야에 따라 귀하의 값어치가 상이하게 됩니다.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그런 점을 악용해 일부 양아치같은 중소기업 들이
한국에서 구인 하지않고 현지에와서 구인광고를 내서(왜? 언급했듯이
돈 아낄려고) 한국과 똑같은 수준의 급여만 제공하고 부려먹기는
엄청부려 먹습니다. 태국에 매력을 느껴 태국어를 배우시더라도
이런 점들을 기억해 차후 귀하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외 다른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email protected] 으로 문의 하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베트남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유인선/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세계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캄보디아의 등불 앙코르와트..




우리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ꡐ킬링필드ꡑ로 악명이 높았던 나라, 캄보디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앙코르와트 유적이 남아 있어 연간 50만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한다.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은 앙코르와트를 보러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 관광 코스에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들어있다. 앙코르와트는 단순한 관광지 뿐만이 아니라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선조들이 누렸던 영화처럼 자신들도 언젠가는 잘 살 수 있다는 자긍심 을 불어넣어 주는 등대의 역할도 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캄보디아가 앙코르와트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는 여러군데서 읽을 수 있다. 캄보디아 화폐 리엘과 국기에는 앙코르와트가 선명히 새겨져 있고 30년 전 생산하기 시작한 맥주에도 ꡐ앙코르비어ꡑ란 이름을 붙인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앙코르와트(앙코르는 왕성을 의미하며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는 한때 동남아를 지배했던 크메르 제국의 앙코르 왕조가 12세기 초에 건립한 거대한 사원이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그들의 신과 같아진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에 따라 왕들은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다. 앙코르와트도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한 수리아바르만 2세가 브라만교 주신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 해 건립한 거대한 힌두교 사원이다.




앙코르와트가 이토록 유명세를 타게 된 까닭은 세부적인 조각의 아름다움도 높이 평가 받고 있지만 규모(동서로 약 1,500m, 남북으로 약 1,300m의 터에 높이 65m의 중앙탑을 중심으로 지어진 웅장한 석조건물)에 있어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 때문이다. 참배로에서 본 앙코르와트는 오랜 세월 자연과 인간에 의해 많은 곳이 훼손되었지만 험한 세월을 이겨낸 거인의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큰 돌을 깔아 놓은 참배로에 들어서면 중앙사원의 거대하고 장려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원은 웅대한 방추형의 중앙사원탑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어 있는 행랑, 그것을 둘러싼 삼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축구성은 입체적이며 중앙이 약간 높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이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을 돌을 쌓아 놓았으며, 높이가 59m에 이르는 중앙 사원탑의 끝에서 삼중으로 둘러싼 사각탑 끝을 선으로 연결해 보면 사각뿔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고 한다. 이 사원의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 등에서 앙코르 특유의 기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760m에 이르는 회랑벽의 부조, 제 2회랑 안의 돌로 조성한 우물, 제 3회랑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수랑과 탑 등은 주목할 만한 구조물이다. 조형물로는 하늘의 무희 ꡐ아프살라ꡑ, 여러 개의 머리를 부채처럼 치켜든 큰 뱀, 창문이나 기둥의 장 식과 조각 등이 돋보인다. 사원에는벽화, 조각 등 불교미술품이 가득차 있어 사원 전체가 불교미술의 보고였다. 특히 입면 구성의 교묘성은 크메르 예술의 압권이라

고 할 수 있다. 또한 제 2회랑 및 제 3회랑의 네 귀퉁이에 있는 포탄형의 탑은 중 앙사원의 탑과 함께 이등변삼각형의 입면을 구성하는데 이같은 기하학적 입면 구 성은 힌두교 사회의 계급제도와 인도 부다가야 오탑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 된다. 구조를 살펴보면 홍토를 쌓은 위에 사암을 두껍게 붙인 뒤 조각을 새겼으며 세부 장식에는 인도적인 것과 비인도적인 것이 교차하고 있다. 비인도적인 부분에 는 이웃 나라인 참파나 자바 유적의 양식과 유사한 경향이 발견되며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문양도 적지 않다.




이 유적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로 저수지와 운하망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수량 조절과 관개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우주론에 입각한, 우주 중심부의 산을 둘러싸고 있는 대양의 상징이기도 했다. 우주론적 사고와 도시의 관계는 주민과 신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설정되었다. 중심부의 산, 즉 피라미드 사원은 ꡐ데바라자ꡑ라고 불리는 신격화된 왕이 관장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왕은 절대 적 신의 하나로 동일시되었고 이런 동일시는 왕이 죽었을 때 중심부 사원을 왕의 사원이나 무덤으로 삼음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앙코르에 있는 다른 많은 사원들 역 시 인도의 우주론과 신화적 주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앙코르 왕조의 종교적 역량을 과시한 것이 앙코르와트라면 국가적 역량을 과시한 것이 바로 앙코르톰이다. 앙코르는 왕도를 뜻하고 톰은 거대함을 나타내므로 이는 곧 큰 왕성을 의미한다. 앙코르톰은 앙코르 왕조에서 가장 융성했던 자야바르만 7세 때 세운 것이다. 앙코르톰은 한 변이 3Km의 정방형 도시로서 둘레는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중심에는 바이욘 묘가 있으며, 이 묘에서 동서와 남북으로 뻗은 두 개 의 도로가 도시를 넷으로 나눈다. 왕도의 문은 두 도로가 성벽과 교차되는 곳에 4개, 왕궁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은 대로상에 1개 등 모두 5개가 있다. 이 5개의 문 앞에는 돌로 만든 큰 뱀을 껴안고 있는 거인상들이 있으며, 문은 4면에 얼굴 모습 이 조각되어 있는 탑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60, 1970, 1980년대 초에 일어난 캄보디아의 정치적, 군사적 소요 기간에 앙코르의 사원들은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 고 빠르고 무성하게 자라는 식물과 침식을 유발하는 물, 기타 자연현상 등도 원인

으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캄보디아는 황폐해진 앙코르 유적지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 는다. 남녀선수 1천여명이 참가한 마라톤 대회를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개최하여 정 규마라톤 코스의 절반인 21Km를 달려 평화와 안전, 그리고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 하고 아름다운 관광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전세계에 보여주려는 행사를 진행하기 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원을 보전하고 가꾸는 가장 큰 원칙은 끝없는 관심 과 애정이 아닐 듯 싶다.







9세기 초, 크메르 왕국을 건설했던 야소바르만 왕이 앙코르로 도읍(都邑)을 옮기면 서 캄보디아의 앙코르 시대가 열리는데, 앙코르와트는 크메르족의 최대 번성기였던 1113년, 수리아바르만 2세에 의해 건축(建築)됐다. 이후 12세기말, 국가 종교가 대 승불교로 바뀌면서 기존 건축물에 불교 색채를 덧입히게 되었는데, 얼핏 듣기엔 이 도저도 아닌 난잡함 같지만 힌두교와 불교 모두 브라만교에 뿌리를 두고 잇으므로 가능했단 정설이다.




전체 4기 공사로 시작된 앙코르톰은 유난스런 건축, 미술광이었던 야소바르만(AD 850)에 의해 시작됐다. 그가 아니었으면 태어나지 못했을 앙코르 유적의 창시자. 불운한 예술가처럼 나병을 앓았으나 죽을 때까지 앙코르톰을 미화(美化)한 왕. 그 래선가 앙코르 안내서엔 그의 이름자가 굵다. 하지만 그를 이은 앙코르 왕들이 지 금껏 추앙 받는 데는 불가사의(不可思議)를 만들어낸 공로 이상의 것이 있다. 그들 은 사원의 돌을 고르기 전에 백성들 쌀독의 되질부터 살폈고, 사원의 기둥을 올리 기 전에 백성들을 위한 저수지 터부터 정했다. 앙코르와트 앞에 있는 사방 1천미터, 폭2백미터의 인조 호는 흘려 볼 것이 아니다. 물은 목줄이고 생명이다. 그 치수 (治水)를 다스림의 제일로 믿었고, 쌀과 물고기와 목재가 풍성한 앙코르를 도읍으 로 삼은 것 역시 백성을 위했음이다. 그것이 신기(神技)의 사원을 만들어낸 힘인지 모른다.. 사원 사이로 숲이 아늑하고, 그 틈에서 쌀 씨고 아이를 낳으며 살고 들 있다.




하지만 이런 마을이 재생된 건 불과 몇 년전이다. 크메르 왕국의 번성은 샴족 (SIAM:타이족)이 침입하던 13세기를 고비로 쇠락(衰落)하고 1431년 최후를 맞는데, 이듬해 잠시 철수했던 샴족이 돌아왔을 때 앙코르엔 아무도 없었다. 1백만을 넘던 백성이 행방 불명됨은. 무섭고 신비한 일이었다. 그 또한 불가시의겠으나 왕이 없고 신이 죽은 마을이 그들에겐 무슨 의미였겠느냐 짐작으로 앙코르는 인적(人跡)을 잃었다. 이후 4백년간 누구도 앙코르를 기억하지 못했다. 지도상 거대한 밀림으로 표시됐을 뿐.




왕과 신, 그것은 앙코르와트의 테마다. 크메르족의 믿음은 신왕일체설(神王一体説) 이었고, 힌두신중의 하나인 비슈누놔 합일하기 위한 수리아바르만 2의 필생의 사업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앙코르와트였다. 그들 말로는 '데바자라'인 신정(神政) 다스림인 것이다.




앙코르와트는 동서 1천5백미터, 남북 1천3백미터 땅에 탑을 중심으로 세워진, 말 그대로 대형 석조물이다. 중앙으로 걸어가는 돌길만도 5백40미터, 그 양편으론 '나가(NAGA, 六頭蛇) 상이 난간을 이루고 있는데 앙코르와트를 수호하는 젊은 나신 (裸神)들이다. 본원은 중앙신전탑과 제1,2,3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있다. 1층 회 랑만도 높이 3미터에 8백미터 길이니, 거대함이 짐작될까. 회랑은 안으로 들어갈수 록 한 단씩 높아지는 단형(段形)의 피라미드형인데, 가장 높은 첨탑이 함께 다섯 개 눈을 이뤄서 멀리서 보면 피라미드 모양처럼 보인다. 그 복도 빼곡이 라마야나 이야기와 크메르 역사, 아르사라스(APSARAS, 天女)상이 부조(浮彫)되어 있고, 1층엔 힌두 신화가, 2층 화랑엔 불상이 돋을 새김으로 되어있다.




그 벽을 더듬으며 걸어가다 보면 광기(狂気)처럼 깎아 놓은 부조에 기가 질린다. 돌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사실적이고 아름다우며 미간 하나, 손놀림 하나까지 정교 한 새김에 모두 말을 잃어 '감동'이란 한마디로 입을 다물지만, 직접 보지 않고는 감동이란 말도 어색할 정도로 경이(驚異)롭다. 천년전 것인 탓이 아니다. 왕을, 신 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럴 수 있을까 싶은 놀라움이고, 이승의 업적으로 내세(来世) 를 구원한다는, 크메르의 우주관까지 짐작된 까닭이다. 그들은 분명 영생(永生)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충분한 업(業)이었다.




앙코르와트는 3차원적 공간 구조라고 설명한다. 4개의 망루와 첨탑과 화랑이 대칭 구조를 이룬다는 뜻인데, 망루와 첨탑은 힌두의 상징인 메루 산(山)을 성벽은 히말라야를, 문밖의 해자(垓字)는 풍성한 대양(大洋)을 뜻한다고 전한다.




앙코르와트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쳐 달리면, 고끼나무 사이로 가물가물 바이욘 (BAYON) 사원이 나타난다. 제2의 유적 앙코르톰의 초입니다. 넌 출진 초록 나무사이로 검은 사암(砂巌)의 바이욘 배면(背面)이 나타나면 자막(字幕) 전의 스크린 처럼 눈이 커진다. 미로(迷路)같은 계단에, 문설주 밑동에까지 새겨둔 부조를 보며 앙코르에서 제일 복잡한 구조란 것도 실감한다. 문도 없는 계단을 오르면 아발로키데스바라(관세음보살)로 사면(四面)을 조각한 탑을 만난다. 건축초기엔 54개 였으나 내전(内戦)이후 49개만 남았다. 이 바이욘을 중심으로 앙코르돔이 펼쳐진다. 동북 방향으로 길을 내서, 그 도로를 중심으로 네 개의 도시가 등분된다. 왕이 국사를 처리하던 길. 죄인과 개는 들어가지 못하던 다섯 갈래길. '톤레샵(TONLESAP)' 호숫물이 줄줄이 흐르고 20만이 넘는 코끼리가 사육되던 왕국. 그 모습이 족족 새겨진 라테라이트 벽의 돋을 새김 또한 앙코르톰의 걸작이다.




크게 볼 때, 앙코르톰과 앙코르와트로 나뉘는 이곳이 앙코르로 명명되는 유적군을 찬찬히 돌아보면 더 우주 같은 사원이 많다. 유적군 초입에 앙코르와트가 들어서 있고, 그 맞은편으로 프놈바켄이란 언덕사원이 있다. 이어서 곧장 뻗은 길에 앙코 르톰이 자리하는데, 거기서 시계방향으로 돌면 미만(弥満)한 사원들을 만나게 된다. 그 가운데 '타프롬'은 시계방향 끝, 마을 가까이에 있는 사원이다. 이곳 '조각상의 가슴을 치고 돌아서면 내 가슴이 울린다.'는말이 참말처럼 느껴졌던 경험은 무결한 여정(旅情)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선물은 많다. '프레럽'은 서책을 보관하던 사리탑 사원으로, 입구를 지키는 열 살 손녀 라따따가 사는 곳이다. 율무 열매 같은 것으로 살팔찌를 만들어 불쑥 채워준다. 낙타처럼 마른 체구에 검붉은 얼굴이지만, 샐샐 웃는 눈매가 시원(始原)처럼 맑

다. 큰 사원 큰 마을에 밀려 관광객이 드문 사원, 옛날 지폐를 팔며 가계를 돕는 라따따와 친구들은 , 그저 반가운 외지인(外地人)을 어쩔 줄 몰라한다. 어눌하고 쓸쓸한 역사가, 불행히도 아이들 몸에 젖어있다. 라따따의 팔찌를 굴리며 돌아앉으니, 왼편으로 코뚜레 한 소들이 아치장거린다. 오랜만의 농가다. 그 옛날 백만(百万)이 거주하던 밥 짓는 마을. 그게 반갑지만 금세 어둑해져 서둘러 일어난다. 프놈바켄으로 가는 길. 앙코르와트에서 태어난 소년이 말해줬다. '그 언덕에 가야 앙코르와 트 일몰(日没)이 아름답다'고...




앙코르 성벽이 그렇듯이 프놈바켄 역시 사족(四足)을 더듬으며 올라가야 할 가파 른 언덕이다. '신은 정말 얄궂다'는 생각으로 오르면, 다시 90도 경사의 층계가 이 어진다. 앙코르와트의 감동은 하나같이 값을 치른다. 열병 같은 땀이 흐르고 무릎이 벗겨지고 끝없이 목이 말라 치매 해지기까지 하는 유감(有感). 프놈바켄을 앞에 두고 봤을 때, 왼편에 있는 탑에 자릴 잡았다.




두 번째 파고다에 앉으면, 숲 사이로 한 뼘만큼의 틈이 벌어져 잇고 그예 앙코르와트가 눈에 들어오는데, 카메라를 대면 앵글 안에도 못 찰 만큼 작다. 일출에 보고, 어제보고, 밥먹고 또 보던 거대 뭉치가 아닌 듯싶다. 멀고 먼 숲속에서 해가 넘어 갈 때마다 얼굴을 붉힌다. 왜소하고 꺼칠한 얼굴. 해가 물러가는 저녁의 앙코르와트는 계면조(界面調)를 읊는 노래 같다. 4백년동안 혼자 견디고, 혼자 맞았을 노을. 이제 겨우 찾아오는 사람들도 가등(街灯)하나 없다며 총총히 사라지니, 저녁의 외 로움을 못 견딜 듯 싶다.




앙코르 유적 중 앙코르와트만이 동쪽이 아닌 서쪽을 향한 까닭은 무엇일까? 설마 지금 같은 일몰을 위한 것은 아니겠지 하며 괜한 생각을 하는 것은 '말못하게 고운' 해몰이가 벅차서이다. 힌두교에서 진리(真理)는 모든 표현(表現)속에 있다' 고 한다. 인간에게 육화(肉化)되고 땅에 침식(寝食)되고 신(神)에 닿았음은 앙코르와트 천년의 믿음이고, 표현의 성공이다. 프놈바켄 언덕에서의 해몰이엔 누구도 힌두교도가 될 수 있겠다. 세기초(世紀初)를 열었던 신앙심이 세기말(世紀末)의 왈자 무신론자까지 거둬들인다.




베트남 호치민에서 비행기호 40분이면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다시 30분이면 앙 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SIEM REAP)에 닿는다. 하루 안에 갈 수 있을 만큼 손쉽다. 95년부터 우리측 여행규제 특정 국가 해제로 더욱 가까워진 나라, 말하기 좋은 사람들의 구전(口伝)으론 20년 내전(内戦) 후유증이 어떻느니 하지만, 한때 동남아 를 장악했던 위력이 살아나는 모습은 씩씩하다. 잠깐 들어섰던 유엔과도 행정기구 (UNTAC)도 물러나고, 9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앙코르와트를 믿어, 앙코르 와트가 새겨진 국기와 앙코르와트가 그려진 화폐를 들고 외지인을 맞는다. 그러다 가끔씩 눈물을 훔치며 말한다. '오래 숨겨왔다 뺏기고 싶지 않은 피붙이었다'고 4백년 동안 묻혔던 사원은 그렇듯 사생아(私生児)처럼 살아 있었다.




1431년 이후 층층시하 밀림에 갇혔던 앙코르와트는 1858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앙 리무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5일 밤낮을 미친 듯 헤매며 무오가 앙코르와트를 세상에 알렸을 때, 그의 눈빛과 흥분은 열대 여행의 후유증으로만 취급됐다. 아무도 밉지 않았다. 40년만에 인정받은 그의 기록으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 오늘 에 이르렀지만 앙리 무오 는 이름 모를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앙코르와트를 발견한 벌(罰)이 아니면 축복(祝福)이었으리라.




캄보디언 앞날엔 축복일 앙코르와트의 4백년동안 엉겨붙은 열대림을 떼어내고 파괴된 사암(砂巌)을 건사하느라 유네스코 지원 국들은 JTPCJR을 하고 철근으로 대고 있다. 왕도(王都)라기 본단 괭이와 올망으로 고기 잡는 아이들 놀이터에 닭이 홰를 쳐대는 풍경이지만, 되려 앙코르와트의 견고함을 느끼게 한다. 신이 아닌 사람에게 나 있는 길 탁본 종이를 내다 파는 생계(生計)지만, 살아갈 날에 대한 의지가 역력한 얼굴 천년 조상의 보살핌일까




후대를 보듬은 크메르 조상은 지금도 살아있다. 그들이 지목한 앙코르엔 3천 평방 킬로미터나 되는 톤레삽 호수가 흐르고 있다. 바다와 견줄 톤레삽 호수가 홍수기에들면 3만 인구가 수상 가옥을 짓고, 고기잡이에 들어간다. 한편 건기(乾期)가 돼서 물줄기가 메콩강으로 역류하면, 다시 육지로 돌아온다. 세계 최대라는 민물어장, 그 호수에서 사철 풍성한 물고기와 밥상에 올리는 노란 꽃스노플라워(SNOW FLOWER)얻으며 방금 잡아 올린 물고기에 굵은 소금을 쳐댄다. 새벽이면 몰래 일어나는 짐승처럼 말없는 탁발승 몇 명이 사원의 복도를 걸어나온다. 소름끼치게 세밀한 부조는 조악한 장난감에 정신을잃은 앙코르산(産) 아이들의 민연(憫憐)할 만큼 천진하다. 그 앞에서 머쓱하게 돌아가는 자동 카메라 필름.

천년의 사원에서 총총히 우러나오는 길은 의외로 시원했다. 륙색엔 물 한 병 고작 이고, 피나는 무릎도 아물어 간다. 수련한 기분 같았다. 힌두 경정은 두 가지로 나 뉜다고 한다. 들리는 것을 뜻하는 '스루티(SRUTI)'와 기억되는 것을 뜻하는 '스므리티(SMRITI)'. 기억될만한 것은 가져오지 못했다. 한바탕 세월처럼 좋았던 것을 가져오지 못했다. 한바탕 세월처럼 좋았던 것을 다 놓고 왔다. 그리고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내가 사는 곳엔 어울리지 않을 감동, 열병에 죽을 망정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참지 못했던 무오의 의지처럼, 천년을 더듬는 앙코르와트에서의 며칠은 추억이 상의 힘이다. 힘을 믿는다. 사람 솜씨 같지 않았던 부조의 빼어남도 반세기 뒤에 살아난 캄보디아의 미래도, 한층 복도를 돌아보는데 시간 반이 걸리는 흡입력도 앙코르의 힘이었을 것이다.




힘을 저장하면 가는 길도 좁다. 호치민으로 연결되는 비행기를 이용, 프놈펜 행으로 갈아타면 오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공항 입구에서 즉석 발급하는 캄보디아 비 자에는 사진 한 장이 필요하다. 투박한 사진을 붙이며, 현상 수배범을 생각했다. 수제(手製)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주는 앙코르 입장권은 절차가 구차해서 도둑같이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한번은 도둑이 되어도 좋겠다. 그 옛날 프랑스, 태국처럼 몰래몰래 훔쳐가던 도둑 말고 박물관인 양 우아하게 침투하는 도둑, 그러나 그 꿈은 평생 이루지 못할 것이다.







민봄내 (방송 작가)



































































































































































근 4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베트남(또는 월남)은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왔습니다. 따라서 좋은 의미든 아니 든 초등학생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해 알려는 사람은 지금까지도 별로 없습니다. 얼마 전 서울의 저명한 문필가이자 대학교수이 신 어느 분이 베트남을 다녀간 후 쓴 글에서, 제갈량이 맹획을 [칠종칠금]하던 땅이 베트남이었다고 쉽게 단언한 것이 그 좋은 예가 아닌가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맹획을 칠종칠금 했다는 곳은 중국 운남성의 서쪽지방으로 미얀마의 동북변경에 근접한 지역입니다.)







◈七縦七擒(칠종칠금)◈

七:일곱 칠, 縦:길이 종, 일곱 칠, 擒:사로잡을 금.[출전] 삼국지

일곱번 놓아주고 일곱번 사로잡음. 곧 마음대로 잡고 놓아 주는 비상한 재주

유비(劉備)는 병세가 악화되자 제갈량(諸葛亮)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철천지 원수 위(魏)를 쳐서 中原(중원)을 회복할 것과 아들 유선(劉禅)을 잘 보필(輔弼)해 달라는 것이었다.

劉備가 죽자 諸葛亮은 劉禅을 극진히 보필했다.그 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가장 큰 골치거리는 서남방方의 오랑캐였다.諸葛亮은 내란부터 수습해야 했다.그는 이간책을 사용해 맹획(孟獲)이라는 장수를 사로 잡았다.하지만 그를 죽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유명한 마속(馬謖)의 건의가 있었던 것이다.여기서 [三国志]의 일부를 잠깐 인용해 보자.

「무릇 용병(用兵)의 도리는 최상이 민심을 공략하는 것이며 그 다음이 성을 함락시키는 것입니다. 곧 심리전이 최상이요,군사전은 하책일 따름입니다.원컨대 승상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정복하십시오.」

諸葛亮은 孟獲을 풀어 주었다.하지만 고향에 돌아온 孟獲은 전열을 재정비해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물론 諸葛亮은 자신의 지략을 이용해 孟獲을 사로잡았지만 그때마다 풀어 주었다.이렇게 사로 잡았다 풀어 주기를 일곱번(七縦七擒),마침내 孟獲은 諸葛亮에게 심복(心服․마음속으로 복종함)해 부하가 되기를 자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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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베트남역사를 가르친 지 20년이 좀 더 되었습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첫 강의시간에 똑같은 질문을 하나 합니 다. 즉 우리는 베트남(또는 월남)을 월남(또는 베트남)이라고도 하는데 왜 그렇게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정확한 답변을 하는 학생은 2,3년에 한명 정도 됩니다. 이곳 베트남에 사시는 여러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베트남은 [越南]이란 한자의 베트남 발음이고 월남은 우리의 한자 발음입니다.







월남이란 국명이 처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Nguyen, 阮) 왕조가 1802년에 세워지면서부터입니다. 그 전에 베트남 사람은 나라이름을 [大越]이라고 하였습니다. 10세기 베트남이 중국의 정치적 지배를 벗어난 다음 얼마 안되어 大越이라고 한 후 왕조가 몇 번 바뀌었어도 이 국명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은 베트남을 [安南]이라고 불렀습니다. 안남이란 중국의 당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하면서 안남도호부라는 관청을 두었었던 데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베트남을 안남이라고 불렀습니다. 지난날 베트남과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고 중국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베 트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연세가 50을 넘은 분들은 6․25전쟁 때 알랑미(안남미)를 드신 기억이 있 으시리라 믿습니다. 1950년대까지도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들 에게 베트남은 알랑미 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사이공정 부를 돕기 위해 파병을 제안했었을 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고, 때문에 그런 사실 자체를 아는 분들이 거의 없는 것을 보아도 분명합니다. 사실 당시 [월남]은 지금의 베트남

을 지칭하기보다는 오히려 북한에서 38선을 넘어 피난 온 것을 뜻했습니다.







첫머리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베트남이 우리의 관심거리가 된 것은 1960년 초반 전쟁이 격화되면서 1964년 태권도교관 과 비둘기부대가 보내지고, 그 다음 해 전투병력이 투입되는 때부터일 것입니다. 당시 각 일간신문의 일면은 연일 베트남 전황이 어떻고 우리 군대의 전과가 어떻다는 기사로 장식되

곤 하였습니다. 곧 이어 우리의 회사들이 진출하면서 이른 바 [월남특수]가 시작되었고 우리 경제도약의 발판이 만들어졌

습니다. 그러나 1973년 파리평화조약이 맺어지면서 우리 군은 철수했고 그 뒤 얼마 안되어 베트남은 [공산화]되어 월남특수도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군인들을 통 해 베트콩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1980년 전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학생들에게 베트남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고 물으면 거의가 베트콩에 관한 것들이

었습니다. 그 다음 베트남에 대한 인식은 소위 [보트피풀]로 이어집니다. 중국과의 분쟁, 캄보디아에의 파병, 경제정책의 미 숙 등으로 인한 극심한 곤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조그 만 배에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케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정치적 망명객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우리가 다시 베트남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1986년 베트남이 [도이 머이]라는 개방정책을 취하면서입니다. 두 나 라 사이에 국교가 들은 그 이전부터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베트남에 대한 총 투자액은 약 33억 달러로 이 나라에 대한 외국의 투자액 순정상화된 것은 1992년 말이지만 사업하시는 분위로 보면 네 번째가 됩니다. 혹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많든 적든 이와 관련이 있으실 것입니 다. 기후와 음식은 물론 언어 풍습 등 모든 생활여건이 다른 지역에서 경제적 이윤을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겪는 어려 움은 저의 상상을 초월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현실은 현실이니 어쩌겠습니까. 이를 조금이라도 극복 하려면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또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리를 이해하도록 설득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구촌시대에 살고 있다고들 합니다. 이는 인종과 피부색깔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사는것을 의미합니다. 편협한 인종주의나 민족주의는 상호간에 갈등만을 조장시킴은 [유고사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빛깔들이 모여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 듯이 우리 는 우리의 고유 색깔을 가져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고유한빛깔을 존중할 줄도 알아야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의 고유성을 존중해 주려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 때 상호간의 불신은 해소되고 신뢰가 쌓이면서 아름다운 인간관계가 형성될 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 이곳에 얼마를 머물던 제각기 머무는 동안의 생활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글: 유인선/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바위산 삼천 봉우리, 바다로 가서 섬위 되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대우 승용차 시에로를 타고 3시간을 북동쪽 으로 달려가 하롱베이에 닿았다. 중국의 절경 구이린을 1만배 정도 뻥 튀기 하면 얼추 비슷해진다는 다도해였다. 시에로는 프랑스 식민시대 에 세운 하롱1호텔에서 멎었다. 나는 영화 ꡐ인도차이나ꡑ를 찍으며 프랑스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가 머물렀던 208호실에 짐을 풀었다. 1960년대엔 호치민이 찾았던 방이다. 베란다 너머 바다에 3000개가 넘 는 석회암 바위섬들이 수평선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서둘러 선창가로 가서 배에 오른다. 중국계 청년 선장 쭨이 반긴다. 1994년 유네스코가 세계의 자연유산으로 지정한 하롱베이였다. 배는 복잡한 선창을 요리 조리 빠져나가더니 둥실 녹색 수면을 거침없이 달린다.







ꡒ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떠나고 싶어. 행복으로부터 떠나고 싶어.ꡓ 영화 ꡐ인도차이나ꡑ에서 연인을 찾아 프랑스에서 하롱베이까지 날아온 여주인공 카미유는 그렇게 말했다. 카미유는 양어머니인 엘리안느(카트린느 드뇌브)의 연인을 몰래 사랑하던 여인이었다. 카미유는 베트남 으로 전근 간 사랑을 찾아왔고, 엘리안느는 카미유를 찾아왔다. 카미유는 사랑을 만났지만 감독은 그녀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아버렸다.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제껏 살아온 인생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하롱베이에 찾아감이 마땅하다. 마땅히 등산객을 맞아야 할 산들이 용비늘 처럼 바다 위에 솟아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형 ꡐ산ꡑ과 가장 낮은 지형 ꡐ바다ꡑ의 만남. 별세계 속에서 나는 인생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선장 쭨의 콧노래를 들으며 나는 ꡒ왜 나는 이곳에 혼자왔던고ꡓ 하고 탄식했다. 배는 가장 가까운 섬, 천궁동에 닻을 내렸다.







1993년 원숭이를 쫓던 어부가 발견한 종유동굴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어두운 입구를 들어가니―.







내 한국땅의 좋다는 종유굴은 다 가봤지만 이리 ꡐ천국ꡑ같은 동굴은 처음 보았다. 용왕의 아들과 베트남족 공주가 혼인을 한 곳이라 했다. 사자, 이무기, 표범 같은 맹수나 말 같은 짐승들이 모두 와서 혼례를 지켜봤다지. 원색적인 조명들은 굴속을 온통 전설 속 존재들로 채워놓 았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석회수를 할머니들이 받아 피부에 바른다. 그래, 회춘이다. 격동의 현대사를 견뎌낸 베트남 여인들의 회춘이다. 그 럴싸하게 급조된 전설 앞에 나는 잠깐 얼이 빠졌다가 밖으로 나왔다.







천궁동을 돌아 남동쪽으로 나아가자 작은 만이 하나 나왔다. 점심시간 이다. 이미 많은 배들이 그곳에 정박해 식사를 하고 있다. 소녀 하나가 배를 몰고 와 새우와 게가 가득한 비닐봉지를 내민다. 억세게 재수 없 는 놈들이다. 유네스코 보고서에 따르면 이 하롱베이에 사는 어류는 1000종이 넘고, 맹금류와 식물도 다양하다. 소녀는 1달러를 쥐고 멀어져 갔다. 물빛은 녹색이요, 섬은 잿빛 절벽에 진녹색 숲을 뒤집어썼다. 그 3000여 섬 가운데 1000여개에 이름이 붙어있다. 싸움닭섬, 코끼리 섬, 개섬, 기타 등등. 이름이 없다 하여 자연이 어디 가는가. 도라 이름하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도가도비상도―로자). 수직으로 서서 아열 대 꽃향기를 풍기고 있는 거대한 존재들이 바다에 떠 있다는, 그 멍멍한 비현실감만으로도 하롱베이 뱃놀이는 가치롭다. 배는 섬에서 섬으 로, 그 뒤편 그림자로 서 있던 또 다른 섬에서 다른 섬으로 유유히 떠갔다. ꡒ왜 혼자 왔던고!ꡓ 선장 쭨은 반복되는 탄식을 알아듣지 못했 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모른다. 배는ꡐ숨은 동굴ꡑ섬에 닿았다. 또 다른 종유굴이다. 들어갈수록 절경이 숨어있다고 하는 곳이다. 다시 한번 나 는 넋이 나가서 정신없이 굴속을 헤맸다.







동굴에서 나오자 해가 저문다. 1960년대 이 곳을 찾은 소련 우주비행사 티톱을 기념한 티톱섬 꼭대기에 오르자 하롱베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섯시간 동안 돌아다닌 게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섬 뒤에 섬이 있고, 그 섬들 사이에 또 섬이 있고, 섬들 사이에 수상마을이 떠 있다. 배가 떠가고 매들이 날다가 수면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비 하나가 하늘하늘 날아가는 하늘 위로 해가 기울었다. 어느덧 천지는 농담 달리한 거대한 수묵화로 변하고 있다. 선장 쭨이 돌아가자고 한다. 선선한 바람에 취해, 용들이 만든 대장엄에 취해 선착장으로 돌아왔고, 정신없이 방으로 기어들어와 잠에 빠졌다.










★ 개발몸살 앓는 ꡐ세계자연유산ꡑ




ꡒ통킹 만에 위치한 하롱베이는 크고 작은 섬 1600여개가 석회석 기둥처럼 솟아올라 장관을 이룬다. 그 깎아지른 듯한 절벽 탓에 대부분의

섬들은 무인도이며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았다. 아주 빼어난 미적 가치는 물론 생물학적인 관심도 집중되고 있다.ꡓ




유네스코는 1994년 위와 같은 이유로 15만㏊에 이르는 하롱베이 일대를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했다. 높이가 작게는 5m , 크게는 200m에 이르는 섬들 1600여개는 대부분 석회석 지질이다. 그 섬들 가운데 많 은 수가 종유굴을 가지고 있고, 베트남 정부는 주로 중국 자본을 들여 와 종유굴을 속속 개발 중이다. 바다와 해풍에 침식을 거듭해 섬들은 모두 날카로운 수직 절벽 형태를 하고 있다. 어류 1000여종과 야생조류, 그리고 다양한 식물들이 살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하롱베이의 경제적 가치를 인식해 1990년대부터 집중적으로 하노이~하롱베이 교통로를 개발해왔다. 가이드 호아씨에 따르면 이 고속화도로는 ꡒ베트남에서 가장 좋은 도로ꡓ라 한다. 몇 년 전만해도 5~6시간이 걸렸던 거리가 지금은 불과 2시간30분으로 단축됐다. 그 개발의 여파는 환경파괴로 연결된다. 하롱베이로 접근하면 도로 주위에 우뚝우뚝 서 있는 동일한 석회암 산들이 시멘트 원료를 제공하는 광산으로 변해 모조리 파헤쳐지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태국어에 대해서...

태국어에는 욕설이 많지 않죠? 태국어에도 욕설 많이 있습니다. 외국인이기에 욕설은 굳이 배울필요도 없고 알아도 사용하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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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방학숙제로 태국어 배우는걸 할려고 합니다 아주... 그냥 여기에 적어주세요^^ 태국어 발음으로 ex)1.... 춥다 나우 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하셨는데 발음나는대로 적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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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외대 태국어과를 지원하는 사람들중 거의 대부분에 사람들이 태국어에 대해서 1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태국어 회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한국외대 입시를...

태국어에 대해서 !!

태국어를 배우고 싶은데요 ^.^ 베트남이 이제 전망이 좋고 해서 베트남어가 미래가 밝다매요 ! 그런데 태국어도 앞으로의 전망이 밝나요 ? 중국이 지금 막뜨는것처럼 태국도...

태국어로 번역좀해주세요

... 젤 위처럼 써서 주시면 되고 발음 하시는데 도움 되시라고 성조 다 써드렸습니다. 태국어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시면 메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태국어 해석해주세요

... 가급적이면 태국어에 능통한 분이나 통역 번역 경험이 있는 분이 답변해주심... JH>TY 성격에 대해서는 태용이형은 저랑 반대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저랑 형은 전부터...

태국어로 마오가 뭔가요?!

... 유의어 เมาเหล้า 0 2 마오 라오 술취한 술 우리말로 하면 술취한 술마신 얼큰한(?) 정도 되는 말입니다 태국어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시면 메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