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기스칸 좀 알려주세요 ㅠㅜ 급해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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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6.1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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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기즈칸의 업정으로 인해 몽골제국에 끼친 영향과 몽골 제국에 남김 문화유산 좀 알려주세요 ㅠㅜ
급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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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칭기즈칸의 '6가지' 업적

역사의 하늘에 웅장한 사가(史歌)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 역사의 노래는 서쪽으로 원정을 떠나는 강력한 군대의 장렬함, 흥미진진한 소식과 에피소드, 그리고 위대한 몽골의 왕 칭기즈칸의 덕행에 대한 찬양을 다루고 있다.

칭기즈칸은 원나라의 태조로, 이름은 테무친이며 몽골제국의 건국자이다. 칭기즈칸은 금나라를 정벌하고, 서하를 굴복시키고, 서요를 멸망시킴으로써 오백여 년 만에 혼란했던 중원을 하나로 통일했다. 칭기즈칸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며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깨버리고, 중국과 서양의 경제와 문화교류를 촉진했다. 또한, 중국 역사상 가장 영토가 광대했던 왕조를 세웠다.

세계 최대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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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테무친은 이십여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으며 중원 전체를 통일했다. 13세기, 칭기즈칸은 그의 자손들을 데리고 연이어 대규모의 정복 전쟁을 펼쳤다. 쇠 발굽이 향하는 곳마다 파죽지세로 휩쓸며 전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했다. 결국, 40여 국가와 700여 민족이 차례로 몽골제국을 따르게 되었다.

유라시아 대륙에 킵차크한국(汗国), 차카타이한국, 우구데이한국, 일한국의 사대한국(四大汗国)이 차례로 형성되었고, 이로써 몽골제국의 영토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광대해졌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당시 몽골제국의 영토는 3000만㎢에 달했으며, 이것은 현재 중국 영토의 3배나 된다.

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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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은 66년간 한 번도 말 위를 벗어난 적이 없으며, 한 번도 전장을 떠난 적이 없다. 몽골 군대는 황하와 장강, 주강 일대를 정복하고, 아무다리야강과 인더스강 일대를 집어삼켰으며, 최후에는 다뉴브강까지 그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세 번에 걸친 만 리 원정 동안 러시아와 폴란드, 헝가리,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

전 세계에 미친 가장 거대한 영향

JOHANNES EISELE/Getty Images

칭기즈칸은 세계 군사 역사상 단연코 걸출한 천재다. 칭기즈칸은 질 좋은 선진무기와 훌륭한 능력을 갖춘 군대를 만들었는데, 이 군대는 세계에서 전투력이 가장 강하고 무예가 가장 뛰어났다. 전 세계 저명한 군사학자들과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경탄할 수밖에 없는 칭기즈칸의 성공은, 역사상 수많은 지휘관의 성취가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라고 했다.

칭기즈칸은 '백전백승의 군사 전문가'이다. 칭기즈칸은 일생 60여 번의 전투를 치르며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반드시 싸워야 할 때마다 반드시 이기는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갖추었다.

칭기즈칸은 서쪽으로 원정을 떠날 때, 동방의 군대만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동방의 문화까지 함께 가져갔다. 화약, 인쇄술, 나침반 등 중원의 문명 역시 그를 따라 서방으로 전해졌다.

몽골 대군이 처음으로 원정을 떠날 때 서역 모린강에 도착하여 불과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에 백 척 이상의 배를 만들어 안전하게 모린강을 건널 수 있었다. 중국 고대의 선박 건조 기술은 조타, 수밀격창(水密隔舱) 구조, 용골 등 세 가지 특별한 장치가 있었다. 서쪽으로 원정을 떠난 대군은 중국의 선박 건조 기술을 유럽에 전달하여 15세기 유럽에 대항해 시대가 도래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나침반 역시 이후에 발전한 항해사업의 초석이 되어 대항해 시대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각 국가는 해외 무역을 시작했고 점차 국제화 정보 채널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몽골군이 정복함으로써 장벽이 무너진 대륙 간 통로에서 문화와 종교, 기술 및 상품 무역이 안전하게 융합되고 유통되었다. 몽골제국이 만든 자유무역 구역과 자유롭고 평화로운 무역 보장 역시 오늘날 글로벌 무역의 모태라 할 수 있다.

1995년 12월 31일,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천 년의 인물(Man of the Millennium)'의 주인공으로 칭기즈칸을 최종 선택했다. 칭기즈칸은 '글로벌화'의 관점을 통해 단지 유라시아 대륙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자유 무역권을 설정했다. 인터넷이 없었던 700여 년 전에 칭기즈칸은 이미 전 세계 정보교환의 채널을 열어젖힌 것이다. 칭기즈칸은 세계 각국을 끌어들이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미국 학자 위저 폴더의 연구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몇 가지 중요한 틀을 구축했다. 국제 법규와 글로벌 무역, 전쟁의 전문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원나라 시대는 사실상 무역의 자유, 지식의 공유, 종교의 관용, 외교의 면책특권, 국제법, 그리고 국제 우편행정 관계 등 근대적 체계의 기초를 다졌다.

위저 폴더의 눈에는 칭기즈칸은 제국의 형식을 빌려 평화로운 세기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게다가 유라시아 대륙의 근대문명은 사실상 몽골이 정복하면서 발전했다. 그는 "과학 기술, 전쟁, 의복, 상업, 음식, 예술, 문학, 그리고 음악과 같은 유럽인들의 생활은 모든 방면에서 몽골인의 영향을 받고 르네상스 시기에 변화한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학자는 '글로벌화는 칭기즈칸의 대통일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칭기즈칸은 글로벌 세계를 창조한 첫 번째 인물이다. '대통일'의 환경은 당시 세계의 구조와 발전방향을 바꾸어 놓았으며, '오늘날의 세계'를 탄생시켰다.

민주정치를 가장 빨리 시작한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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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년 칭기즈칸에 의해서 공포된 "칭기즈칸법전", 즉 "대찰살(大扎撒)"은 응용 범위가 가장 방대한 세계 최초의 성문법전이며, 동시에 세계 최초의 헌법성 문서이다.

1206년 12월 15일, 전 몽골의 각 촌장과 족장, 제왕과 군신은 오논강(斡难河) 근처에서 쿠틸라이(민주적 선거대회)를 성대하게 거행했다. 대회에서는 만장일치로 44세의 테무친을 전(全) 몽골의 '칭기즈칸'으로 추대했다.

칭기즈칸은 즉위 후, 민주적으로 선출된 칸의 시초가 되었다. 칭기즈칸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해야 할 때면, 항상 쿠틸라이를 열어 결정했다. 쿠틸라이는 본래 부락 연맹의 수장이 참여하는 일종의 회의 제도이며, 동시에 부락의 의사회이다. 칭기즈칸은 몽골대제국을 건국한 후, 정권을 공고히하기 위해 천호제(千戶制)를 확립하고 겁설군(怯薛軍)을 증원했다. 또한 '치정형(治政刑)'의 '단사관(断事官)'을 설치하고 몽골 최초의 성문법인 "대찰살(大札撒)"을 공포했다.

"대찰살"은 몽골제국을 민주제로 이끌었다. 비록 제국 내의 관직은 세습되었지만, 법전 규제하의 제국의 민주적인 분위기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행해졌던 민주정치의 황금기인 페리클레스(Pericles, 기원전 495 ~ 기원전 429) 시대의 민주제도를 뛰어넘는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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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정복한 토지와 부를 계산해본다면 칭기즈칸은 '세계 최고 부자'라고 불릴 것이다. 당시 몽골인들은 약 3000만㎢의 토지를 정복했으며,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이 모두 몽골제국의 영토에 복속되었다. 그리하여 몽골제국은 세계 최대의 제국이 되었다. 칭기즈칸이 서거했을 때, 몽골제국의 신민과 재산은 분배되어 칭기즈칸의 어머니와 동생, 아들 등 황실의 구성원에게 보내졌다.

칭기즈칸은 일생 동안 수십 번의 대전투와 수백 번의 작은 전투를 벌였으며, 멸망시킨 국가가 40개에 달했으니 축적한 재산이 분명 상당했을 것이다. 일본 전문가의 추산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갑부였으며, 칭기즈칸의 묘혈에 있는 부장품들은 현대 몽골인이 300년 동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가장 많이 추모하는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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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을 추모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춘계대전, 하제와 추제, 동제, 월제와 평일의 봉제로 구분할 수 있다. 춘계대전은 '차깐수루커제(查干苏鲁克祭, 선유제)'로, 계절별 제사 중에서 가장 성대한 제사이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사방팔방에서 모여들어 조상의 묘를 찾아뵙고 예를 올리면서 존경심을 표현한다.

여름의 '나오얼대제(淖尔大祭)' 날에는 81필의 차깐추더(查干楚德, 전신이 하얀 털로 뒤덮인 어미 말)의 젖을 구중천을 향해 뿌린다. 성스러운 젖을 뿌리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가을의 대제는 책력 8월 12일에 거행되며 '밍진나이제(鸣禁奶祭)'라고 불린다. 겨울의 '피탸오제(皮条祭)'는 책력 10월 초삼일에 거행된다. 칭기즈칸이 태어났을 때, 탯줄을 자르는 것부터 탯줄을 말려 떨어뜨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가죽끈(皮条)을 이용해서 허리를 감싸야했기 때문에 피탸오제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거행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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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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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초 테무친이 여러 부족으로 흩어져 있던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어 몽골 제국을 세웠다(1206). 칭기즈 칸이 죽은 뒤에도 몽골의 기병대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금과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러시아와 동유럽 일부를 정복하여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요가 멸망하고 금과 송이 대립히고 있을 무렵, 몽골 고원 초원 지대에는 몽골족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13세기 초에 테무친은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어 몽골 제국을 세웠습다(1206). 칭기즈 칸은 뛰어난 기마병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와 서하 등을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칭기즈 칸이 죽은 후에도 정복 사업은 계속되었다. 몽골은 남송과 연합하여 금을 멸망시킨 후, 러시아와 동유럽 일부까지 차례로 점령하고, 서아시아의 아바스 왕조도 멸망시켰다. 그 결과 몽골은 동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이 죽은 후 몽골의 관습에 따라 정복한 지역의 땅을 자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따라 차가타이한국, 킵차크한국,일한국, 오고타이한국 등 4한국으로 나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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