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숙제 도와주세요 ㅡㅜ

삼국유사 숙제 도와주세요 ㅡㅜ

작성일 2005.08.22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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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삼국유사요 숙제 도와주세요 ㅡㅜ 삼국유사 읽고 독후감써야되는되 ㅡㅜ

 

 

 

급하니까 내공 100걸겠써요 ㅡㅜ

 

 

독후감 을 대신 써주실분구해요 ㅡㅜ

 

 

텍스트 올려주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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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를 계기로 삼국유사를 읽고나서 그 책의 교훈이 무엇인가를 고심해보고 그것을 글로 옮긴다.

우선 삼국유사는 '단군의역사'로 첫 글이 시작된다.

삼국유사에서는 주로 신비적이고 비과학적인 것들이 많이 표현 되있다.

그리고 왕들의 공통점은 평민들과는 달리 신비스럽게 태어나며, 그 왕들의 어머니는 놀라운 태몽을 꾸게 된다.

또 외국과의 많은 외교를 통한 문화수용의 활발함이 많이 들어 나있다.

단군의 역사에서는 환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마늘을 먹게 하고, 마늘을 견뎌낸 곰은 사람이되어, 환인과 혼인을 하여 '단군'을 낳게 된다.

또 단군은 성장해서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건국하는데, 이것이 반만년역사인 우리나라역사의 시초다.

점차 문화를 수용하고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전환되면서, 여러 나라가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부여 백제 신라 인데, 동부여는 해부루왕이 건국하고 늙도록 자식을 얻지 못해서 하늘에 제사를 드려 금와왕을 얻게 되고 금와왕은 고주몽을 낳게 된다. 고주몽은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고구려는 훗날 우리국가의 방파제 역할을 하기도 하며 한강유역으로 진출을 많이 하고 백제는 고주몽의 아들 온조가 건국한다.

신라는 외딴 지방속에서 여섯개의 연맹부족의 추천으로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가, 여섯개의 부족통치결과 신라를 건국한다.

이 나라들 중에서 가야는 강국들 사이에 위치하여 오랜 침략과 통치로 멸망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 신라가 처음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일등공신 '김유신'을 태종 무열왕으로 세운다.

하지만 1000년의 역사라 할지라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에 신라는 후백제와 후고구려 사이에서, 급격히 세력이 위축되어 결국 두번째로 삼국을 통일한 고려속의로 빨려 들어간다.

후백제는 견훤과 신검등 부자지간의 싸움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이것은 거의 300장가까이 되기 때문에 60여장만 줄여서 가지고 왔습니다.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에 죽만랑(竹曼郞)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 혹은 득곡得谷) 급간(級干)이 있어서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려 놓고 날마다 나오고 있었는데, 한 번은 10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은 그의 어머니를 불러 그대의 아들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어머니는 말한다.  "당전(幢典) 모량부(牟梁部)의 익선아간(益宣阿干)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보냈으므로 빨리 가느라고 미처 그대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죽만랑이 말한다.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간 것이라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만 이제 공사(工事)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소."  이에 떡 한 그릇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左人; 우리말에 개질지皆叱知라는 것이니 이는 노복奴僕을 말한다)을 거느리고 찾아가니 낭(郎)의 무리 137명도 위의(威儀)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이 어디 있는가고 물으니 문지기는 대답한다.  "지금 익선(益宣)의 밭에서 예(例)에 따라 부역(賦役)을 하고 있습니다."  낭은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대접했다.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려 했으나 익선은 굳이 반대하고 허락하지 않는다.  이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능절(能節)의 조(租) 30석(石)을 거두어 싣고, 성안으로 가고 있었다.  죽만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미(風味)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고집불통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휴가를 주도록 함께 청했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번엔 진절(珍節) 사지(舍知)의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 말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 주려 하니, 익선은 도망하여 숨어 버렸다.  이에 그의 맏아들을 잡아갔다.  때는 중동(仲冬) 몹시 추운 날인데 성안에 있는 못[池]에서 목욕을 시키자 얼어붙어 죽었다.효소왕(孝昭王)이 그 말을 듣고 명령하여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벼슬에 오른 자는 모조리 쫓아내어 다시는 관청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승의(僧衣)를 입지 못하게 하고, 만일 중이 된 자라도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칙사(勅使)가 간진(侃珍)의 자손을 올려서 칭정호손(秤定戶孫)을 삼아 남달리 표창했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海東)의 고승(高僧)이었지만 모량리(牟梁里) 사람인 때문에 승직(僧職)을 주지 않았다.처음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임지(任地)로 가는데, 마침 삼한(三韓)에 병란(兵亂)이 있어 기병(騎兵) 3,000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했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에 이르니 한 거사(居士)가 그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公)이 이것을 보고 탄복하여 칭찬하니 거사도 공의 위세가 놀라운 것을 보고 좋게 여겨 서로 마음 속에 감동한 바가 있었다.  공이 고을의 임소(任所)에 부임한 지 한 달이 지나서 꿈에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공의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놀라고 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그곳 사람들이 "거사는 죽은 지 며칠 되었습니다" 한다.  사자(使者)가 돌아와 고하는데 그가 죽은 것은 꿈을 꾸던 것과 같은 날이었다.  이에 공이 말한다.  "필경 거사는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  공은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彌勒)을 하나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워 놓았다.  공의 아내는 그 꿈을 꾸던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했다.  이 죽지랑(竹旨郞)이 커서 벼슬을 하게 되어 유신공(庾信公)과 함께 부수(副師)가 되어 삼한을 통일했다.  진덕(眞德)·태종(太宗)·문무(文武)·신문(神文)의 4대에 걸쳐 재상으로서 이 나라를 안정시켰다.처음에 득오곡(得烏谷)이 죽만랑(竹曼郞)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으니 이러하다. 간 봄 그리워하니, 모든 것이 시름이로세.아담하신 얼굴, 주름살 지시려 하네.눈 돌릴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기회 지으리라.낭(郎)이여!  그리운 마음에, 가고 오는 길.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  성덕왕(聖德王)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신룡(神龍) 2년 병오(丙午; 706)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몹시 굶주렸다.  그 이듬해인 정미년(丁未年; 707)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는데, 한 식구에 하루 서 되(三升)씩으로 정했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 보니 도합 30만 500석이었다.왕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을 위해서 봉덕사(奉德寺)를 세우고 7일간 인왕도량(仁王道場)을 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이때 비로소 시중(侍中)이라는 직책을 두었다(다른 책에는 효성왕孝成王 때의 일이라고 했다).  수로부인(水路夫人) 성덕왕(聖德王)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 지금의 명주溟州)로 부임하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돌 봉우리가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 철쭉꽃이 만발하여 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이것을 보더니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꽃을 꺾어다가 내게 줄 사람은 없는가."  그러나 종자(從者)들은, "거기에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하고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이때 암소를 끌고 길을 지나가던 늙은이 하나가 있었는데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가사(歌詞)까지 지어서 바쳤다.  그러나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 편안하게 이틀을 가다가 또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더니 부인을 끌고 바닷 속으로 들어갔다.  공이 땅에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또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말한다.  "옛 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했으니 이제 바닷 속의 용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내(境內)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언덕을 치면 부인을 만나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도로 바쳤다.  공이 바닷속에 들어갔던 일을 부인에게 물으니 부인이 말한다.  "칠보궁전(七寶宮殿)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롭게 깨끗한 것이 인간의 연화(煙火)가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서 나는 이상한 향기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수로부인은 아름다운 용모가 세상에 뛰어나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차례 신물(神物)에게 붙들려 갔다.이때 여러 사람이 부르던 해가(海歌)의 가사는 이러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랴.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노인의 헌화가(獻花歌)는 이러했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  효성왕(孝成王)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722)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關門)을 쌓았는데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서 경주(慶州) 동남쪽 경계에 속한다.  이것은 곧 일본을 막는 요새(要塞)가 되기도 했다.  둘레는 6,792보(步) 5척(尺), 여기에 쓰인 인부(人夫)는 3만 9,262명이고 역사를 감독한 사람은 원진각간(元眞角干)이었다.개원(開元) 21년 계유(癸酉; 733)에 당(唐)나라 사람들이 북적(北狄)을 치려 하여 신라에 군대를 청해 왔다.  이때 사신 604명이 신라에 왔다가 돌아갔다.  경덕왕(景德王)·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表訓大德) 당(唐)나라에서 덕경(德經) 등을 보내 오자 대왕(大王)이 예를 갖추어 이를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신(三山神)들이 때때로 나타나서 대궐 뜰에서 왕을 모셨다.  3월 3일 왕이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일렀다.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중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  이때 마침 위의 있고 깨끗한 고승(高僧) 한 사람이 길에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이 중을 왕에게로 데리고 오니, 왕이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중이 아니다"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중 한 사람이 있는데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이 보고 기뻐하여 누각 위로 영접했다.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소승(小僧)은 충담(忠談)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는 차를 달여서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드리는데, 지금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그 차를 한 잔 나누어 주겠는가요."  중이 이내 차를 달여 드리니 차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긴다.  왕이 다시 물었다."내가 일찍이 들으니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미(讚美)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무척 고상(高尙)하다고 하니 그 말이 과연 옳은가요."  "그렇습니다.""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시오."  충담은 이내 왕의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은 아름답게 여기고 그를 왕사(王師)로 봉했으나 충담은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는 이러하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스런 어머니시라.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라 여기시니,백성이 그 은혜를 알리.꾸물거리면서 사는 물생(物生)들에게, 이를 먹여 다스리네.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 後句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나라는 태평하리이다.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노래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가는 것 아닌가.새파란 시내에, 기파랑의 모습 잠겼어라.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郎)이 지니신 마음 좇으려 하네.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서리 모를 그 씩씩한 모습이여! 경덕왕(景德王)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왕비(王妃)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했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諡號)는 경수태후(景垂太后)이니 의충(依忠) 각간(角干)의 딸이었다.  어느날 왕은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오."  표훈은 명령을 받아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다시 말한다.  "원컨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자 천제는 말한다.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하자 천제는 또 불러 말한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지금 대사(大師)는 마치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제부터는 아예 다니지 말도록 하라."  표훈은 돌아와서 천제의 말대로 왕께 알아듣도록 말했건만 왕은 다시 말한다.  "나라는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면 만족하겠소."  이리하여 만월왕후(滿月王后)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무척 기뻐했다.  8세 때에 왕이 죽어서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나이가 매우 어린 때문에 태후(太后)가 임조(臨朝)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루 막을 수가 없다.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에게 죽음을 당했다.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초년에 강주(康州) 관청의 대당(大堂) 동쪽에서 땅이 점점 꺼져서 못이 되었는데(다른 책에는 대사大寺 동쪽의 조그만 못이라 했다) 세로가 13척, 가로가 7척이었다.  갑자기 잉어 5, 6마리가 나타나더니 계속해서 점점 커지고 여기에 따라 못도 커졌다.2년 정미(丁未; 667)에는 또 천구성(天狗星)이 동루(東樓) 남쪽에 떨어졌는데 머리는 항아리만하고 꼬리는 3척 가량이나 되며, 빛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고, 이 때문에 하늘과 땅도 또한 진동했다.또 이 해에 금포현(今浦縣)의 오경(頃) 가량의 논 속에서 쌀이 모두 이삭으로 매달렸다.  7울에는 북궁(北宮) 뜰 안에 먼저 두 별이 떨어지고 또 한 별이 떨어지니 세 별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이보다 먼저 대궐 북쪽 뒷간 속에서 두 줄기 연(蓮)이 나고 또 봉성사(奉聖寺) 밭 속에서도 연이 생겨났으며 범이 궁성 안으로 들어온 것을 쫓아가 잡으려다가 놓쳤으며, 각간(角干) 대공(大恭)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무수히 모여들었다.   하권(下卷)에 의하면, 이런 일이 있으면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이에 임금은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몸을 닦고, 반성했다.7월 3일에 각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과 오도(五道)의 주군(州郡) 도합 96명의 각간(角干)들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  각간 대공의 집이 망하자 그 집의 재산과 보물과 비단 등을 모두 왕궁(王宮)으로 옮겼는데,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타자 사량(沙梁)·모량(牟梁) 등 마을에 있던 역적들의 보물과 곡식을 또한 왕궁으로 운반해 들였다.  난리가 3개월만에 멎으니 상(賞)을 받은 사람도 제법 많았으나 죽음을 당한 자도 수없이 많았으니, 표훈이 "나라가 위태롭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원성대왕(元聖大王)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이 맨처음에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角干)으로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는데, 꿈이 복두(복頭)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복두(복頭)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이때 아찬(阿飡) 여삼(餘三; 어떤 책에는 여산餘山이라 함)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아찬이 다시 청하여 한 번 뵙기를 원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니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일을 자세히 말하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하고 말한다.  "이는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고 아찬에게 해몽(解夢)하기를 청하니 아찬은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이 말한다.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아찬이 "비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하니 이에 따랐다.얼마 안 되어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이 북천(北川)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따라 새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길몽(吉夢)이 맞은 것이었다.  주원은 명주(溟洲)에 물러가 살았다.  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 때 여산(餘山)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헌평태자(憲平太子)·예영잡간(禮英잡干)·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대왕(大王)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노래는 없어져서 자세치 못하다)를 지을 수가 있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던 것이다.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 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 를 보면 제55대 왕 문덕文德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인 듯하다.  그 밖에 문경文慶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王의 태자太子라고 했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리고 금(金)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청하므로 왕이 사자에게 일렀다.  "나는 들으니 상대(上代)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000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하였다.  왕은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은(銀) 3,000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보내 온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수해 두었다.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唐)나라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갔는데,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廷)에 나와서 아뢴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 청지靑池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 샘은 동해東海의 용龍이 왕래하면서 불법佛法을 듣던 곳이요 절은 진평왕眞平王이 지은 것으로서 오백五百 성중聖衆과 오층탑五層塔과 전민田民까지 함께 헌납했다고 했다)에 있는 두 용(龍)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龍)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 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각각 물 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하면서 가 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明哲)함에 감복했다.어느날 왕이 황룡사(皇龍寺; 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라 했고, 또 금강사金剛寺라고도 했으니 이것은 아마 절 이름과 불경佛經 이름을 혼동한 것인 듯싶다)의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華嚴經)을 50일 동안 외게 했다.  사미(沙彌) 묘정(妙正)이 매양 김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가 이 이름을 지었다) 가에서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떴다가는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할 무렵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그런 지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묘정에게 주려는 것같이 하므로 묘정은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大王)은 묘정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 때 잡간(잡干)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도 묘정을 사랑해서 같이 가기를 청하자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들이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의 황제(皇帝)도 역시 묘정을 보자 매우 사랑하게 되고 승상(丞相)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관상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니 하나도 길(吉)한 상(相)이 없는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틀림없이 이상한 물건을 가졌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몸을 뒤져 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매달려 있다.  황제는 말한다.  "나에게 여의주(如意珠) 네 개가 있던 것을 지난 해에 한 개를 잃었는데 이제 이 구슬을 보니 내가 잃은 그 구슬이다."  황제가 묘정에게 그 구슬을 가진 연유를 물으니 묘정은 그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황제가 생각하니 구슬을 잃었던 날짜가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과 똑같다.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아 두고 묘정을 돌려보냈더니 그 뒤로는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왕의 능(陵)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崇德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고, 조부(祖父) 훈입잡간(訓入잡干)을 추봉(追封)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曾祖) 의관잡간(議官잡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 하고, 고조(高祖)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잡간(摩叱次잡干)이다.  조설(早雪)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말년 무자(戊子; 808)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제41대 헌덕왕(憲德王) 때인 원화(元和) 13년 무술(戊戌; 818) 3월 14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어떤 책에는 병인丙寅이라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원화元和는 15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인丙寅은 없다).제46대 문성왕(文聖王) 기미(己未; 839) 5월 19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  8월 1일에는 천지가 어두웠다.  흥덕왕(興德王)과 앵무새 제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은 보력(寶曆) 2년 병오(丙午; 826)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당(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자 홀로 남은 수놈은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는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 놓게 했더니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는 제 짝을 얻은 줄 알고 그 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앵무새를 두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가사(歌辭)는 알 수 없다.  신무대왕(神武大王)과 염장(閻長)과 궁파(弓巴) 제45대 신무대왕(神武大王)이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에 협사(俠士) 궁파(弓巴)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이 세상을 같이 살아나갈 수 없는 원수가 있다.  네가 만일 나를 위해서 이를 없애 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네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다."  궁파가 이를 허락하니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가서 그 일을 성취하였다.  그 뒤에 이미 왕위를 빼앗고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매 여러 신하들이 힘써 간한다.  "궁파는 아주 미천한 사람이오니 왕께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왕은 그 말을 따랐다.  그 때 궁파는 청해진(淸海鎭)에서 진(鎭)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기는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왕께 아뢰었다.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못한 일을 하려 하오니 소신이 가서 이를 제거하겠습니다."  왕은 기뻐하여 이를 허락했다.  염장은 왕의 뜻을 받아 청해진으로 가서 길을 안내하는 자를 통해서 말했다.  "나는 왕에게 조그만 원망이 있어서 그대에게 의탁하여 몸과 목숨을 보전하려 하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했다.  "너희들이 왕에게 간(諫)해서 내 딸을 폐(廢)하고 어찌 나를 보려 하느냐?"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서 말했다.  "그것은 여러 신하들이 간한 것이고 나는 그 일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그대는 나를 혐의치 마십시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청사(廳舍)로 그를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  "왕의 뜻을 거슬린 일이 있기에 그대의 막하(幕下)에 의탁해서 해(害)를 면할까 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오."하고 궁파는 술자리를 마련하여 무척 기뻐했다.  이에 염장은 궁파의 긴 칼을 빼어 궁파를 베어 죽이자 휘하(麾下)에 있던 군사들은 놀라서 모두 땅에 엎드린다.  이에 염장은 이들을 이끌고 서울로 와서 왕에게 복명(復命)했다.  "이미 궁파를 베어 죽였습니다."  왕은 기뻐해서 그에게 상을 내리고 아간(阿干) 벼슬을 주었다.  제48대 경문대왕(景文大王) 왕의 이름은 응렴(膺廉)이니 나이 18세에 국선(國仙)이 되었다.  약관(弱冠)에 이르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은 그를 불러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과 물었다.  "낭(郎)은 국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놀았으니 무슨 이상한 일을 본 것이 있는가."  "신(臣)은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 자 셋을 보았습니다."  "그 말을 나에게 들려 주게."  "남의 웃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 있고 부자이면서도 옷차림을 검소하게 한 사람이 그 둘이요, 본래부터 귀(貴)하고 세력이 있으면서도 그 위력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그 셋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낭이 어질다는 것을 알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말했다.  "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낭의 시중을 들게 하리라."  낭이 자리를 피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물러가 부모에게 고했다.  부모는 놀라고 기뻐하여 그 자제(子弟)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기를, "왕의 맏공주(公主)는 모양이 몹시 초라하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답다 하니 그를 아내로 삼으면 다행이겠다"하였다.  낭의 무리들 중에 우두머리로 있는 범교사(範敎師)가 이 말을 듣고 낭의 집에 가서 낭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공주를 공의 아내로 주고자 한다니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어느 공주에게 장가들려는가?"  "부모께서 둘째 공주가 좋겠다고 하십니다."  범교사는 말한다."낭이 만일 둘째 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나는 반드시 낭의 면전에서 죽을 것이고, 맏공주에게 장가간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경계해서 하도록 하라."  "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 뒤에 왕이 날을 가려서 낭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했다.  "두 딸 중에서 공의 뜻대로 결정하도록 하라."  사자가 돌아와서 낭의 의사를 왕에게 보고했다.  "맏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그런 지 3개월이 지나서 왕은 병이 위독했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말한다.  "내게는 사내자식이 없으니 죽은 뒤의 일은 마땅히 맏딸의 남편 응렴(膺廉)이 이어야 할 것이다."  이튿날 왕이 죽으니 낭이 유언을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  이에 범교사는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제가 아뢴 세 가지 아름다운 일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맏공주에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그 하나요, 예전에 흠모하시던 둘째 공주에게 이제 쉽게 장가드실 수 있게 되신 것이 그 둘이요, 맏공주에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왕과 부인이 매우 기뻐하신 것이 그 셋입니다."왕은 그 말을 듣고 고맙게 여겨서 대덕(大德)이란 벼슬을 주고 금(金) 130냥을 하사했다.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경문(景文)이라고 했다.일찍이 왕의 침전(寢殿)에는 날마다 저녁만 되면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다.  궁인(宮人)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이를 쫓아내려 했지만 왕은 말했다.  "내게 만일 뱀이 없으면 편하게 잘 수가 없으니 쫓지 말라."  왕이 잘 때에는 언제나 뱀이 혀를 내밀어 온 가슴을 덮고 있었다.왕위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처럼 되었는데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장(복頭匠) 한 사람만은 이 일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죽을 때에 도림사(道林寺)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를 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  그런 후로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  왕은 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대를 베어 버리고 그 대신 산수유(山茱萸) 나무를 심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거기에서는 다만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고 하는 소리가 났다(도림사道林寺는 예전에 서울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숲 가에 있었다).국선 요원랑(邀元郞)·예흔랑(譽昕郞)·계원(桂元)·숙종랑(叔宗郞) 등이 금란(金蘭)을 유람하는데 은근히 임금을 위해서 나라를 다스리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노래 세 수(首)를 짓고, 다시 심필(心弼) 사지(舍知)를 시켜서 공책을 주어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노래 세 수를 짓게 하니 첫째는 현금포곡(玄琴抱曲)이요, 둘째는 대도곡(大道曲)이요, 셋째는 문군곡(問群曲)이었다.  대궐에 들어가 왕께 아뢰니 왕은 기뻐하여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노래는 알 수가 없다.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날 대왕(大王)이 개운포(開雲浦; 학성鶴城 서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 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東海) 용(龍)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동해의 용은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이라는 관직(官職)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라 했다.  또는 이 절을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왕이 또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南山)의 신(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사람에겐 그 신이 보이지 않고 왕만이 혼자서 보았다.  사람이 나타나 앞에서 춤을 추니 왕 자신도 춤을 추면서 형상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도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해서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신이 먼저 나와서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인(工人)에게 명해서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상심(象審)이라고 했다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서 이름지은 것이다.왕이 또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검(玉刀劍)이라 했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 했다.에 말하기를, "그때 산신(山神)이 춤을 추고 노래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 했는데 '도파(都波)'라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했다.  즉 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을 알기 때문에 춤을 추어 이를 경계한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 하여 술과 여색(女色)을 더욱 즐기다가 나라가 마침 내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타知)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乳母)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잡간(魏弘잡干) 등 3, 4명의 총신(寵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나라 사람들이 근심하여 이에 다라니(타羅尼)의 은어(隱語)를 지어 써서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세를 잡은 신하들은 이것을 얻어 보고 말했다.  "이 글은 왕거인(王居仁)이 아니고는 지을 사람이 있겠느냐."  이리하여 거인을 옥에 가두자 거인은 시(詩)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이에 하늘이 그 옥에 벼락을 쳐서 거인을 살아나게 했는데 그 시는 이러했다. 연단(燕丹)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추연(鄒衍)의 품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 내리네.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거니,황천(皇天)은 어이해서 아무런 상서로움도 없는가. 또 다라니(타羅尼)의 은어(隱語)는 이러했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해설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찰니나제(刹尼那帝)란 여왕(女王)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는 두 소판(蘇判)을 말한 것이다.  소판은 관작(官爵)의 이름이요,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은 3, 4명의 총신(寵臣)을 말한 것이요, 부이(鳧伊)는 부호(鳧好)를 말한 것이다."이 왕 때의 아찬(阿飡)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후백제(後百濟)의 해적(海賊)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우리말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양패공(良貝公)은 이것을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치솟는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양패공에게 말한다.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남겨 두면 순풍(順風)을 얻을 것이오."  양패공이 깨어 그 일을 좌우에게 물었다.  "누구를 남겨 두는 것이 좋겠소."  여러 사람이 말한다.  "나무 조각 50개에 저희들의 이름을 각각 써서 물에 가라앉게 해서 제비를 뽑으시면 될 것입니다."  공은 이 말을 좇았다.이때 군사 중에 거타지(居타知)의 이름이 물에 잠겼으므로 그 사람을 남겨 두니 문득 순풍이 불어서 배는 거침없이 잘 나갔다.  거타지는 조심스럽게 섬 위에 서 있는데 갑자기 노인 하나가 못 속에서 나오더니 말한다.  "나는 서해약(西海若)이오.  중 하나가 해가 뜰 때면 늘 하늘로부터 내려와 다라니(타羅尼)의 주문(呪文)을 외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肝)을 빼어 먹는 것이오.  그래서 이제는 오직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또 반드시 올 것이니 그대는 활로 쏘아 주시오."  거타는 말했다."활 쏘는 일이라면 나의 장기(長技)이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들어가고 거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오더니 전과 같이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먹으려 했다.  이때 거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를 한다.  "공의 은덕으로 내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거타가 말한다.  "따님을 나에게 주시고 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의 품 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를 모시고 사신(使臣)의 배를 따라 그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당나라 사람은 신라의 배를 용 두 마리가 호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皇帝)에게 말했다.  이에 황제는 말한다.  "신라의 사신은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게다."  이에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거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  효공왕(孝恭王) 제52대 효공왕(孝恭王) 때인 광화(光化) 15년 임신(壬申; 912.  사실은 주朱(후後)양梁의 건화乾化 2년이다)에 봉성사(奉聖寺) 외문(外門) 동서쪽 21간(間)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또 신덕왕(神德王) 즉위 4년 을해(乙亥; 915.  고본古本에는 천우天祐 12년이라고 했으나 마땅히 정명貞明 원년元年이라 해야 한다)에 영묘사(靈廟寺) 안 행랑(行廊)에 까치집이 34개나 되고, 까마귀 집이 40개나 되었다.또 3월에는 서리가 두 번이나 내렸고 6월에는 참포(斬浦)의 물과 바닷물의 물결이 사흘 동안이나 서로 싸웠다.  경명왕(景明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인 정명(貞明) 5년 무인(戊寅; 918)에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壁畵) 속의 개가 울었다.  이 때문에 3일 동안 불경을 외어 이를 물리쳤으나 반일(半日)이 지나자 그 개가 또 울었다.7년 경진(庚辰; 920) 2월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 그림자가 금모사지(今毛舍知)의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서서 비쳐 보였다.또 10월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가 뜰로 달려나왔다가 다시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경애왕(景哀王)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한 동광(同光) 2년 갑신(甲申; 924) 2월 19일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百座)를 열어 불경(佛經)을 풀이했다.  겸해서 선승(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대왕(大王)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佛供)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百座)를 설립한 선교(禪敎)의 시작이었다.  김부대왕(金傅大王) 재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의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高蔚府)에 이르니, 경애왕(景哀王)은 우리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게 했으나 구원병(救援兵)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그 해 11월에 신라 서울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빈(妃嬪) 종척(宗戚)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妃)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宗戚)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貴賤)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奴婢)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公私間)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王宮)에 들어가서 거처했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婢妾)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중(軍中)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自決)해 죽게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嬪妾)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셈이 되었다.  왕위(王位)에 오르자 전왕(前王)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이 때 우리 태조(太祖)는 사신(使臣)을 보내서 조상했다.이듬해 무자(戊子; 928)년 봄 3월에 태조(太祖)는 50여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에 이르니 왕은 백관(百官)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서로 대하여 정리와 예의를 다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이 얼근하자 왕은 말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화란(禍亂)을 불러일으켰고, 견훤으로 하여금 불의(不義)한 짓을 마음껏 행하게 해서 우리 나라를 망쳐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좌우 사람들도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여기에서 수십일을 머무르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은 엄숙하고 정제해서 조금도 침범하지 않으니 서울의 사녀(士女)들이 서로 경하(慶賀)해 말했다.  "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8월에 태조는 사자를 보내서 왕에게 금삼(錦衫)과 안장 없는 말을 주고 또 여러 관료(官僚)와 장사(將士)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주었다.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10월에 사방 땅이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우니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國土)를 들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분분하여 끝나지 않는지라 왕태자(王太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忠臣)·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民心)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1,000년의 사직(社稷)을 경솔하게 남에게 내주겠습니까?"  왕은 말한다.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케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서 국서(國書)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서 항복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세상을 마쳤다.  그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중이 되어 승명(僧名)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 한다.태조는 신라의 국서를 받자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서 맞게 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로 돌아가니, 향거보마(香車寶馬)가 30여 리에 뻗치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주고,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의 아내로 삼았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 해서 이를 난조(鸞鳥)에 비유하여 공주의 칭호를 신란공주(神鸞公主)라고 고쳤으며, 시호(諡號)를 효목(孝穆)이라 했다.  왕을 봉(封)해서 정승(正承)을 삼으니 자리는 태자(太子)의 위이며 녹봉(祿俸) 1,000석을 주었다.  시종(侍從)과 관원(官員)·장수들도 모두 채용해서 쓰도록 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여 이를 경순왕(敬順王)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해 오자 태조는 무척 기뻐하여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말했다.  "이제 왕이 내게 나라를 주시니 주시는 것이 매우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宗室)과 혼인을 해서 구생(舅甥)의 좋은 의(誼)를 길이 하고 싶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우리 백부(伯父) 억렴(億廉; 왕王의 아버지 효종각간孝宗角干은 추봉追封된 신흥대왕神興大王의 아우이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德行)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정(內政)을 다스릴 사람이 없습니다."  태조가 그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金氏)이다(우리 왕조王朝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에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신성왕후神成王后 이씨李氏는 본래 경주慶州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수俠州守로 있을 때 태조太祖가  그 고을에 갔다가 그를 왕비王妃로 맞았다.  그런 때문에 그를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한다 했다.  그의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이며, 3월 25일이 기일忌日로, 정릉貞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안종安宗이다."  이 밖에 25 비주妃主 가운에 김씨金氏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의론을 봐도 역시 안종安宗을 신라의 외손外孫이라 했다.  그러니 마땅히 사전史傳을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景宗) 주(주)는 정승공(政承公)의 딸을 맞아 왕비를 삼으니, 이가 헌승황후(憲承皇后)이다.  이에 정승공(政承公)을 봉해서 상부(尙父)를 삼았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 무인(戊寅; 978)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했다.  상부(尙父)로 책봉하는 고명(誥命)에서 이렇게 말했다."조칙(詔勅)을 내리노니 희주(姬周)가 나라를 처음 세울 때는 먼저 여상(呂尙)을 봉했고 유한(劉漢)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먼저 소하(蕭何)를 봉했다.  이로부터 온 천하가 평정되었고 널리 기업(基業)이 열렸다.  용도(龍圖) 30대를 세우고 섭린(섭麟)은 400년을 이으니 해와 달이 거듭 밝고 천지가 서로 조화되었다.  비록 무위(無爲)의 군주(君主)로서 시작되었으나 역시 보좌(輔佐)하는 신하로 해서 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정승 식읍팔천호 김부(觀光順化 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政承 食邑八千戶 金傅)는 대대로 계림(鷄林)에 살고 있어서 벼슬은 왕의 작위(爵位)를 받았고,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을 업신여길 만하고 문장(文章)은 땅을 진동할 만한 재주가 있었다.  부(富)는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귀(貴)는 모토(茅土)에 거(居)했으며 육도삼략(六韜三略)은 가슴 속에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縱五申)을 손바닥으로 잡아 쥐었다.  우리 태조는 비로소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友好)를 닦으시니 일찍부터 내려오는 풍도를 알아서 이내 부마(駙馬)의 인의(姻誼)를 맺어 안으로 큰 절의(節義)에 보답했다.  이미 나라가 통일되고 군신(君臣)이 완전히 삼한(三韓)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올바른 규범(規範)은 빛나고 높았다.  상부도성령(尙父都省令)의 칭호를 더해 주고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 崇德守節功臣)의 호(號)를 주니 훈봉(勳封)은 전과 같고 식읍(食邑)은 전후를 합쳐서 1만 호(戶)가 되었다.  유사(有司)는 날을 가려서 예(禮)를 갖추어 책명(冊命)하는 것이니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開寶) 8년(975) 10월 일.""대광내의령 겸 총한림 신 핵선(大匡內議令 兼 摠翰林 臣 핵宣)은 받들어 행하여 위와 같이 칙령(勅令)을 받들고 직첩(職牒)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奉行)하라.  개보(開寶) 8년 10월  일.""시중(侍中) 서명(署名), 내봉령(內奉令) 서명(署名), 군부령(軍部令) 서명(署名), 군부령(軍部令) 무서(無署), 병부령(兵部令) 무서(無署), 병부령(兵部令) 서명(署名), 광평시랑(廣坪(評)侍郞) 서명(署名), 광평시랑(廣坪(評)侍郞) 무서(無署), 내봉시랑(內奉侍郞) 무서(無署), 내봉시랑(內奉侍郞) 서명(署名), 군부경(軍部卿) 무서(無署), 군부경(軍部卿) 서명(署名), 병부경(兵部卿) 무서(無署), 병부경(兵部卿) 서명(署名),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 상부도성령 상주국 낙랑군왕 식읍일만호 김부(推忠愼義 崇德守節功臣 尙父都省令 上柱國 樂浪郡王 食邑一萬戶 金傅)에게 고(告)하노니 위와 같이 칙령(勅令)을 받들고 부신(符信)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奉行)하라.주사(主事) 무명(無名), 낭중(郎中) 무명(無名), 서령사(書令史) 무명(無名), 공목(孔目) 무명(無名).  개보(開寶) 8년 10월  일에 내림.”(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신라(新羅)의 박씨(朴氏)와 석(昔氏)는 모두 알에서 나왔다.  김씨는 황금(黃金) 궤 속에 들어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혹은 황금으로 된 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더욱 황당해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고 한다.  이제 다만 그 시초를 살펴보건대 위에 있는 이는 그 몸을 위해서는 검소했고 남을 위해서는 너그러웠다.  그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간략히 했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은 간소하게 했다.  성심껏 중국(中國)을 섬겨서 조빙(朝聘)하는 사신이 제항(梯航)으로 연락불절하여 항상 자제(子弟)들을 중국에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국학(國學)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했다.  이리하여 성현(聖賢)의 풍화를 이어받고 오랑캐의 풍속을 개혁시켜서 예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중국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불법(佛法)을 숭상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마을마다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워 백성들은 모두 중이 되어 군대(軍隊)니 농민(農民)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나라가 날로 쇠퇴해 가니 어찌 어지러워지지 않을 것이며 또 망하지 않겠는가.  이 때에 경애왕(景哀王)은 더욱 음란하고 놀기에만 바빠 궁녀(宮女)들과 좌우 근신(近臣)들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겨 견훤(甄萱)이 오는 것도 몰랐으니, 저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나 누각(樓閣) 위의 장려와(張麗華)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경순왕(敬順王)이 태조(太祖)에게 귀순(歸順)한 것은 비록 할 수 없이 한 일이기는 하나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만일 힘껏 싸우고 죽기로 지켜서 고려 군사에게 반항했더라면 힘은 꺾이고 기세는 다해서 반드시 그 가족을 멸망시키고 죄없는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고명(告命)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의 이름을 기록하여 귀순했으니 조정에 대해서는 공로가 있고 백성들에 대해서는 덕이 있는 것이 매우 크다 하겠다.  옛날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宋)나라에 바친 일을 소자첨(蘇子瞻)은 충신(忠臣)이라고 했으니, 이제 신라의 공덕(功德)은 그보다 훨씬 크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는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들도 또한 번성했다.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外孫)으로서 왕위(王位)에 올랐으며, 그 뒤에 왕통(王統)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다.  이것이 어찌 그 음덕(陰德)이 아니겠는가."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阿干) 신회(神會)는 외직(外職)을 내놓고 돌아왔는데 도성(都城)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이에 노래를 지었으나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 수가 없다.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와 북부여(北扶餘; 北扶餘는 이미 위에 나와 있다)

삼국유사 숙제 도와주세요 ㅡㅜ

저기요 삼국유사숙제 도와주세요 ㅡㅜ 삼국유사 읽고 독후감써야되는되 ㅡㅜ 급하니까 내공 100걸겠써요 ㅡㅜ 독후감 을 대신 써주실분구해요 ㅡㅜ 텍스트 올려주세요...

삼국유사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학원에서 숙제가 있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대해서 알아오라네요.. 좀 도와주세요,, ㅠㅠ 빨리 부탁드립니다..6시까지요.. 제발.. 사진까지 첨부하면 더 좋아요.....

삼국유사의내용을 알려주세요

제가요삼국유사의 내용대해 알아 오라는 숙제가 있는데요 1~5권까지 도와주세요~빨리요~ -왕력 제 1 : 연표로서 낫을 다섯으로 갈라 위에 중국의 연대롤 표시, 아래로 신라...

역사 숙제 도와주세요ㅠㅠ

1.기이한 출생,삼국유사 편 2.범상치 않았던 유년기,삼국사기 편 3.어떻게 후백제를... 아무거나 3개 알려주세요ㅠ 내일까지인데….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해 보시오

삼국유사원본 단군신화

삼국유사에 있는 단군신화 원본을 써주세요 !! 그니깐 한자로 써주시고 (음/뜻) 그밑에... 하나봐라ㅡㅜ 한자는요 아마 이정도 숙제는 고등학생 정도 되야 내줄거 같은데 님도 꽤...

삼국유사와 서동요에 대해서 자세히...

제가 중2 학생인데요 저희가 다음주 화요일에 국어 공개수업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조별 숙제삼국유사와 서동요 조사하기를 내주셨는데 저 좀 도와주세요~ 중2수준에 맞게...

동화로읽는삼국유사읽고 이 질문에...

제목 : 동화로읽는 삼국유사 출판사 : 늘푸른아이들 1.... 용에게 끌려간 수로 부인과 순정공을 도와 주려고... --------------------------------------- 근데 보니까, 숙제인것 같은데요....

중3 역사 숙제 도와주세요...

... 남북극시대의 역사 사료 남북극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경쟁하고 교류하던 시기로,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역사...

삼국유사에 나오는 인물 조사하기

... 숙제인데요 책읽기엔 시간이 없어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누구 누구 잇는지 알켜주세요 최대한 많은정보바랍니다 인물조사해주셔도 감사합니다~! [ 도검 ] 도와...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차이점

역사숙제ㅠㅠ((중2))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차이점 그냥좀간단히써주세요오^(5~6가지) 빨랑 도와주세요ㅜ.ㅜ 삼국유사는 일연이 백성들을 더 행복하게하고, 좋게하려(?)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