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감상문을 쓰는데 궁금한 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감상문을 쓰는데 궁금한 점

작성일 2005.02.26댓글 4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제가요 , 학교 숙제로 여러가지 독후감을 써 가야 하는데 ,

그 중의 하나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이거든요 ,,

저는 그냥 써가고 싶은데 ,, 학교에서 양식에 맞춰 써 오래요 -_-

그런데 그 양식에 "인물들의 성격이나 역사적배경 알아보기"와 "주제 생각해 보

기"가 있거든요 ,,

물론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책을 위해서 만든 양식이 아니라 , 이 책 말고도

다른 책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냥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 쓴 것이겠죠 ㅠ

하지만 수행평가에 들어간다하니 , 어쨌든 칸은 채워가야하잖아요 ㅠ ㅠ

그러면 그 두 칸에 무슨 내용을 써가는 것이 좋을까요 ?

인물들의 성격은 절대로 쓸 수 없으니 , 역사적배경을 써야하는데 ,

무슨 역사적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_ -

그냥 그 칸은 빈칸으로 낼까요 ?

어떡해야할지 고민이네요 , ㅠ ㅠ

만약 빈 칸으로 그냥 내게 된다면 그건 그렇다 치고 ,

주제는 써내야할 것 같은데 ,,

솔직히 이건 기행문인데 무슨 특별한 주제가 있겠어요 ,,

하지만 그래도 써가야하거든요,,

여러분들이 도와주세요ㅠ ㅠ 부탁드려요 ㅠ ㅠ

주제가 될만한 문장을 좀 만들어주세요 ,

어디 다른데에서 보셨던 것들도 괜찮고, 퍼온것들도 괜찮고,

직접 만들어주셔도 좋구요 ,

아무거라도 좋으니 좀 도와주세요 ~ ㅠ ㅠ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부족한 점이 많지만 간단히 간추려 봤어요. 전체적으로 간추린게 아니라 일부분만 올렸을 뿐인데...........ㅠㅠ..^그래도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네요..;;혹시 더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쪽지 주세요..^^: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1ㅡ남도 답사 일번지

책을 펴내면서

국토 박물관에 눈길이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198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움의 한 관계자가 내게 한국의 박물관 실태를 물어왔을 때 내 대답의 요지는 그것이었다. 서구의 미술관들은 경쟁적으로 그 규모의 방대함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로 한결같이 “이국문화의 포로수용소”일 뿐, 낱낱 유물의 생명력은 벌써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한 평론가는 “명작들의 공동묘지”라는 혹독한 자기비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역사의 연륜이 좁은 땅덩이에 쌓이고 보니 우리는 국토의 어디를 가더라도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영광의 왕도에서 심심산골 하늘 아래 끝동네까지 아직도 생명을 잃지 않고 거기에 의연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박물관 유리장에 진열된 유물들이란 어차피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실향유물들의 보호처일 뿐 전 국토가 박물관인 것이다.



미술사를 전공으로 삼은 이후 내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떻게 하면 미술에 대한 안목을 갖출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막연한 물음에 대하여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의 묘책은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는 것이었다. 예술을 비롯한 문화미가 아무런 노력 없이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비결은 따로 없을까? 이에 대하여 나는 조선시대 한 문인의 글 속에서 훌륭한 모범답안을 구해둔 것이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그러한 사랑의 감정으로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나는 감히 국토박물관의 길눈이 되어 나의 동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국토의 역사와 미학을 일상 속에 끌어안으며 살아가는 행복을 나누어 갖고 싶었다.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였다.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 해남(2)중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김영랑을 강진 사람들이 기리는 마음은 끔찍하다. 읍내로 들어가는 입구를 영랑로터리라고 이름붙이고 영랑동상도 세워놓았다. 그러나 강진땅이 ‘남도답사 일번’로 올라온 것은 다산(茶山) 정약용의 18년 유뱁지가 여기였고, 여기에서 학문이 결실을 맺게 되었고, 여기에서 그의 숱한 저술, 저 유명한 가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다산의 유배지를 답사하는 사람들은 곧잘 다산초당으로 직행하는데 사실 그분의 강진 유배처는 네 번 옮겨졌다.




나는 가경 신유년(1801) 겨울에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 밖 주막집에 우거하였다. 을축년(1805) 겨울에는 보은산방에서 기식하였고, 병인년(1805) 가을에는 학래의 집에 이사가 있다가, 무진년(1808) 봄에야 다산에서 살았으니 통계하여 유배지에 있었던 것이 18년인데, 읍내에서 살았던 게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1년째였다. 처음 왔을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며 편안히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ㅡ중에서


유배 온 귀양객을 사람들이 마치 대독으로 여겨 파문괴장하고 달아날 때 그를 가련히 여겨 돌봐준 이는 술집이자 밥집인 오두막 노파였다고 한다. 다산은 이 오두막에서 무려 4년을 지냈고 그 집 당호를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라는 뜻으로 사의재라 했다고 한다. 그 집이 지금 어디인지 한번 가보고 싶은데 박석무의 에 의하면 샘물이 있어서 샘거리라고 하는 곳 어드메쯤 된다고 한다.

강진읍내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자동차로 불과 10여 분밖에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유배지로 가는 길을 실감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길이 포장되지 않았던 5년 전까지만 해도 다산초당을 찾아가는 맛이 참으로 별스러웠다.

강진읍을 나와 목포와 해남으로 갈라지는 길목에서 해남 쪽으로 뻗은 길을 타고 조심스럽게 가다가 왼쪽편으로 ‘부대’라는 군부대 입간판을 보는 순간 좌회전해야 했다. 하필이면 군대가 여기까지 따라붙을까? 아무튼 이정표는 그것뿐이었다. 나는 두 번인가 이 표지판을 놓여 되돌아왔으니 지금도 여기 갈 때면 습관적으로 두 눈이 긴장된다. 길을 꺾어들면 여기부터 비포장길, 그래도 오른쪽 만덕산 기슭의 군부대가 보일 때까지는 그런 대로 갈 만했다. 그러나 군부대를 지나면 아주 좁은 농로 외길로, 거기에 비라도 내리게 되면 차바퀴는 미끄럼타기 바빠 구르질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하루 두 번 다니는 시외버스를 마주치면 엄청난 낭패를 보며, 경운기만 만나도 그 뒷수습이 용이치 않던 흉악한 시골길이었다. 다행히 길 중간 백련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숨통이 있어서 그런 난국을 모두 수습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비록 차를 타고 갔을망정 그것이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다웠다.

그렇게 그렇게 털털거리며 30여분을 차속에서 시달릴 때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강진만 구강포의 넓은 바다와 키 큰 바다갈대들이 우리 버스의 바퀴까지 올라오는 포구의 정취는 도회인의 몸과 가슴속에 사무치는 스산한 정서를 유발하곤 했다. 그래서 다산초당 입구에서 하차하면 답사객들은 초당으로 올라가는 길로 들어설 생각보다도 내내 오도록 창밖으로 바라본 포구 쪽 갈대밭으로 먼저 눈길이 간다. 특히 정서와 감정이 풍부하다 못해 제어장치가 잘 돌아가지 않는 예술가, 그것도 이름 높은 예술가가 답사객 중에 있으면 영락없이 그쪽으로 달려간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답사일정은 다 망가진다.



귤동마을은 우리나라 어느 시골 동네와 마찬가지로 육중한 농협창고가 초입에 점잖게 자리잡고 있고 그 뒤쪽 언덕배기로 집집마다 이마를 맞대고 이어지는 동그만 마을이다. 그리고 넓고 큰 농협 담벽에는 어김없이 붉은 글씨의 반공표어가 붙어 있다. “때려잡자 공산당, 찢어죽이다 김일성” 이 0.1시력의 내 눈에도 선명히 보이게 씌어 있었다. 아직도 마찬가지인데 이 반공표어는 궁벽한 시골로 들어갈수록 된소리를 많이 구사한다.

삽화가 있는데 어떻게 못 올려드리겠네요. 삽화아래 요약된 내용이라도 올려드릴게요^^:

귤동마을의 어제/다산초당 아랫마을 귤동은 이처럼 조용한 시골이었다.

귤동마을의 오늘/귀양지가 별장터로 변하여 시골집은 사라지고 양옥에 돌담이 들어서버렸다.

그래도 귤동마을은 참으로 아담하고 정감어린 곳이었다. 반쯤 무너져 버린 토담, 그 옆집은 탱자울타리, 그 윗집은 개나리 담장, 그 뒷집은 대나무 밭 안쪽, 뒤뜰엔 감나무, 오동나무, 동백나무, 목백일홍 ....... . 돌 반, 흙 반의 비탈길에는 토종 누렁이가 뒤꽁무니로 돌아서며 짖어대고 모이 주는 아주머니 다라 병아리들이 모이던 그런 전형적인 시골 동네였다.

그런데 4,5년 된 것 같다. 서울에서 경제학인지 다산학인지를 연구하는 분들이 시골집 한 채를 사서 좋게 기와를 올리고 마루를 널찍이 내서 보기에도 시원스런 별장채를 짓고는 여름이면 가족과 와서 피서도 한다. 이것이 귤동마을이 파괴되는 전주곡이 되었다. 그리고 긑내는 이 고장 토박이 해남 윤씨 어느 집도 이국풍의 별장식 전원주택을 지어 귤동마을은 18년 유배객의 귀양처에서 팔자 좋고 팔자 핀 사람들의 별장터, 전원주택처로 되고 말았다. 내게 마침 귤동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할 사진이 있어 여기에 제시하노니, 이것을 보고 나면 여러분은 내가 왜 다산초당에 당도하기까지 이리도 서론이 장황했는가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제가 위에 올린 것..z.z 어떻게 올릴 수는 없지만 조그마한 설명)

재작년 여름 이곳에 왔을 때 나는 귤동마을의 이런 모습이 너무도 보기 싫어서 저 아래쪽 백련사로 올라가서 만덕산을 넘어 다산초당으로 갔는데, 거기에도 또 우리의 눈을 놀랍게 하는 ‘위대한 20세기’의 축조물이 하나 생겼다. 그래서 올 봄에 올 때 나는 할 수 없이 땅만 보면서 이 길을 올랐다.




다산초당의 허구와 진실



다산초당의 툇마루에 앉아보았자 남향집이건만 동백숲과 잡목이 우거져 한낮인데도 컴컴하고 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 단지 뜰 앞에 넓적한 돌이 하나 있고 왼쪽에 연못이 있는데 이것은 초당 오른쪽 바위에 새겨놓은 ‘정석(丁石)’과 함께 정약용 유배시절의 진짜 유적인 것이다.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난 지 3년 되는 1821년, 당시 육순 때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지은 장문의 자찬묘지명을 찬하였다. 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글에 의하면 다산초당의 모습은 이러했다.




무진년(1808) 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꽃나무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동서로 두 암을 마련하고 장서 천여 권을 쌓아두고 저서로서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만석사의 서쪽에 위치한 곳인데 처사 윤단의 산정이다. 석벽에 ‘정석’두 자를 새겼다.



지금 초당 연못의 석축과, 긴 대통으로 물을 끌어 오줌발보다 조금 굵은 폭포를 조작한 것이 그때의 모습인 것도 같다. 뜰 앞의 큰 넓적바위는 ‘다조(茶竈)’라고 해서 차를 그곳에서 달였던 곳이다. 그리고 정석 두 글자는 단정한 해서체로 크고 깊게 새겨져 있다.

삽화ㅡ요약

다산초당/주변의 나무숲이 울창하여 다산초당은 언제나 이처럼 어두침침하다.

정석/정다산이 여기에 머물던 시절 손수 쓰고 새긴 각자(刻字)로 그의 귀양살이를 말해주는 유일한 유물이다.

다산과 추사의 현판글씨ㅡ

다산동암의 그림 한 폭과 일기

사람들은 다산을 너무도 존경한 나머지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에 죽어라 하고 공부만 한 줄로 아는데 인간인 그가 그럴 수 있었겠는가? 유배시절 그의 명저로 손꼽히는 등 여러 글이 그의 유배생활 18년 중 마지막 5년간에 모여 있다는 사실도 그냥 흘러버릴 일이 아니다. 나는 그가 바로 이 동암에서 심심풀이로 쓰고 그린 두 폭의 서화를 소개한다. 그중 고려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은 정약용이 1813년 7월 14일 다산동암에서 그리고 썼다는 것으로 그림 아래쪽에는 그의 독특한 ‘북어국 백반체’로 4언율시가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네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

이제 여기 머물며 너의 집을 삼으렴

만발이 꽃인지라 그 열매도 많단다.




외로움을 달래고자 날아든 새에게조차 함께 살자고 조르는 정약용의 심사를 알 만도 한데 그 옆에 씌어 있는 이 그림과 글씨의 사연이 더욱 쓸쓸하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한 지 수년 됐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폭을 부쳐왔는데,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가셨기에 가위에 잘라서 네 첩(帖)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나머지로 이 족자를 만들어 딸아이에게 준다.




매화가지에 앉은 새의 그림 또한 그 애절한 분위기가 여느 전문화가도 흉내 못 낼 솜씨로 되어 있다. 붓의 쓰임새가 단조롭고 먹빛과 채색의 변화도

삽화ㅡ정다산의 /아내가 보내준 치마를 오려 장첩을 만들어 딸을 위해 그림과 글씨를 쓴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구사되지 못했건만 화면 전체에 감도는 눈물겨운 애잔함이란 누구도 흉내 못 낼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예술은 감동과 감정에 근거할 때 제 빛을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깊고 오랜 것일수록 좋다고. 나는 미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이따금 실기실을 둘러보게 되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림을 좋아지는 학생이 간혹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경우 열 중 아홉은 실연당한 학생이었다.

정약용이 다산동암에서 쓴 또 다른 작품은 일기체로 된 소폭 서첩이다. 그중 다으멩 소개하는 글을 읽으면 그분의 서정어린 낭만이 너무도 고고하게 표현되어, 유배객의 심사처럼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9월12일 밤, 나는 다산의 동암에 있었다. 우러러보니 하늘은 적막하고 드넓으며, 조각달이 외롭고 맑았다. 떠 있는 별은 여덟 아홉에 지나지 않고 앞뜰엔 나무 그림자가 하늘하늘 춤을 주고 있었다. 옷을 주워입고 일어나 걸으며 동자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 하니 그 음향이 구름 끝까지 뚫고 나갔다. 이때 더러운 세상에서 찌든 창자를 말끔히 씻어버리니 이것은 인간세사의 광경이 아니었다.




천일각에서 구강포를 바라보며




다산초당을 찾은 답사객은 어둡고 습한 초당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너나 없이 동암 바로 옆에 있는 천일각으로 빠져나가 거기서 멀리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구강포를 바라보며 쾌재를 부른다. 그 풍광의 시원한 눈맛이란 가보지 않은 자에겐 설명할 길이 없다.

정약용 유배시에는 천일각 건물은 없었다. 다만 그분도 독서와 저술에 지치면 초당과 동암을 나와 이 자리 어느 그루터기나 바윗등에 앉아 속마음을 후련히 씻어주는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을 것 같다. 이젠ㄴ 세상의 편의가 있어 그 자리에 넓고 편한 정자가 세워졌으니 우리는 거기에 앉아 긴 난간에 기대어 그분을 위한 묵상에 잠겨볼 일이다.

삽화ㅡ천일각에서 바라본 구강포/이처럼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시원스런 전망이 있기에 다산초당은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다산 정약용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무던히 고심했다. 사실 나 또한 이 시대 대부분의 처럼 다산 정약용을 존경하고 사모한다. 만약 단군 갑자 이래 이땅의 가장 존경받을 인물을 꼽는 한국갤럽의 사회조사가 있다면 ‘학삐리’사회에서는 그분이 단연코 1등을 차지할 것이다. 그분을 알기 위한 몇 권의 필독서가 있다.~ 세상에는 “다산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다산을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이 지닌 인간적 총체성은 어디로 가고 자기 전공에 따라서 실학자도 되고, 사상가도 되고, 경륜가도 되고, 경학자도 되고, 심지어는 천주학 했던 사람도되고 또 의학자, 약학자, 음악가까지 되는가? 이런 판국에 내가 무슨 소리를 어떻게 들으려고 다산을 아는 척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내 전공대로 그분의 글씨와 그림만 얘기하고 지나갔던 것이다.

다만 일찍이 위당 정인보선생이 “다산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혼의 밝음과 기리움 내지 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이다”라고 설마한 것, 갑오농민전쟁 때 동학군이 선운사 마애불 배꼽에서 꺼냈던 비기는 곧 였다는 전설, 심지어는 월맹의 호지명이 부정과 비리의 척결을 위해서는 조선 정약용의 가 필독의 서라고 꼽은 사실, 이런 것으로 그분 위대함의 보론으로 삼고 싶다.

이상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2 ㅡ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두 번째 책을 펴내면서

글쓰기와 책읽기의 행복한 만남



나는 어떤 문화적 사명감에서 답사기를 쓴 것이 아니었다.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나는 모든 유물의 역사는 그 자체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해석의 역사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유섭 선생은 이를 일러 “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에 응분하여 울려지나니.....”라고 하였다. 그런 생각에서 부당한 천대 속에 외면당하고 있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나의 느낌들을 정직하게 기록하면서 은근히 ‘국토박물관에 대한 사랑의 지지자’가 생겨나길 기대했을 뿐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나의 글 속에서 내가 의도한 것 이상의 것들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 나보다 더 큰 가슴으로 국토와 문화유산을 끌어안고 사는 지지자 이상의 존재로 되었다. 글쓰기와 책읽기는 언제나 동일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씌어진 글이 내 몫이라면 거기서 읽어 낸 내용은 당연히 독자의 몫이고 역량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가치란 유물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독자의 반응까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토함산 석불사(상)

천장덮개돌이 세 동강 난 사연

모든 신비로운 유물은 저마다 조그마한 흠집과 함께 미완성의 전설을 갖고 있다. 석불사의 석굴은 마지막 마무리단계에서 천장덮개돌이 세 동강 나고 마는 사격과 함께 그 미완성의 전설을 지니고 있다. 에서는 천장덮개돌이 세 동강 난 것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대선이 장차 석불을 조각코자 큰 돌 하나를 다듬어 덮개돌을 만들다가 갑자기 세 토막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통분하여 잠도 채 들지 않고 어렴풋이 좋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서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대성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남쪽 고개에 올라 향나무를 태워 천신께 공양하였다. 이로써 그곳을 향령이라고 한다.




석불사 남쪽의 봉우리를 항령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지금 주차장자리가 거기라고 한다.

천장덮개돌의 안치는 곧 석굴의 마지막 마무리를 의미한다. 덮개돌을 눌러줌으로써 천장의 낱낱돌이 힘의 평형을 이룬다. 천장덮개돌은 지름 2.5m, 높이 1m 되는 홈통을 끼우는 꼴로 되어 있다. 간단히 마무리하자면 둥근 원기둥을 아래쪽은 크기를 구멍에 맞추고 위쪽은 좀더 크게 만들어 끼우면 빠뜨릴 일도, 떨어뜨릴 일도 없을 것이다.

삽화ㅡ 깨진 천장덮개돌/세 동강이 난 천장덮개돌에는 석굴 완공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미완의 전설이 서려 있다.

그러나 과욕이라고 할까 아니면 완벽주의의 소산이라고 할까? 김대성은 그것을 아름다운 연꽃이 두 겹으로 피어나는 모습으로 디자인하였다. 그래서 석굴에서 찬장을 올려다보면 구멍을 막은 것이 아니라 피어나는 연꽃이 본존불의 머리 위에서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이다. 측량기사 요네다(米田)는 이것을 태양으로 생각했고 고유섭 선생은 광배의 이동으로 보았다.

김대성이 설계한 천장덮개돌은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손잡이 없는 찻잔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으로 연하문 지름이 2.5m, 높이 1m, 바깥쪽 지름이 3m 되는 크기로 무게가 자그마치 20톤짜리였다. 이것을 떨어뜨려 세 동강 내고 만 것이다.

김대성은 얼마나 낙심했을까? 일연 스님은 “분하고 억울했다”고 표현했다. 어찌하면 좋을까. 그 고민중에 김대성은 잠이 든 것이다. 그리고 잠든 사이에 천신이 와서 설치하고 갔다는 것이 설화의 내용이다.






잊혀져가는 석불사

김대성이 세운 석불사의 석굴사원이 그 자체로서 어떤 역사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우리는 아무런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고려시대에 와서 일연의 에서 그 창건의 산화와 천장덮개돌이 깨진 전설만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석불사는 아무런 증언 없이 세월이 흐르다가 일연 스님의 증언 이후 400여 년이 지난, 창건 뒤 근 1000년이 되는 조선왕조 숙종 때 한 답사객의 기행문 속에 나온다. 그 기행문은 민영규 선생이 발굴한 우담 정시한의 이다. 는 조선시대의 드문 고사순례 기행일기로 나는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그분이 밟았던 그 길을 그대로 답사해보고픈 희망을 갖고 있다. 그중 1688년 5월 15일자로 나오는 석불사 답사기는 석굴의 원형을 잘 설명해주므로 전물을 인용해본다.



(불국사에서) 불존을 담당하고 있는 국행(國行)이라는 스님과 이야기하며 저녁을 먹고 나니 또 꿀물과 엿 그리고 곶감을 먹으라고 가져오므로 얼마 동안 더 앉아 있다가 안내하는 스님을 따라 석굴암(승방을말함)으로 향했다.

뒤쪽 봉우리로 오르니 자못 험하고 가팔랐다. 힘써 십여 리를 가서 고개를 넘고 1리 정도 내려가니 석굴암에 다다랐다. 암자의 스님 명해가 맞이하므로 잠시 앉아 있다가 석굴에 올라가니 모두 사람이 공력을 들여 만든 것이었다. 석문 밖 양변엔 큰 돌이 각각 4,5,명의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교묘함이 마치 하늘을 이룬 것 같았다. 석문은 돌을 다듬어 무지개 모양을 했다. 그 안에 큰 석불상이 있는데 엄연히 살아 있는 듯하다. 좌대는 반듯하고 아주 정교하다. 굴 위에 덮개 돌과 여러 돌들은 둥글고 반듯하게 서 있어 하나도 기울어지거나 어긋난 것이 없다. 줄지어 서 있는 불상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한데 그 신기하고 괴이함을 말로 다할 수 없다. 이러한 기이한 모습은 보기 드문 일이다. 두루 완상하다 얼마뒤 내려와 암자에서 잤다.




이 당시 모습을 그려보면 지금처럼 목조건축의 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금강역사상 양옆으로 팔부중상이 늘어서 있는데 그중 하나는 깨져버렸고 사천왕이 늘어선 비도 앞에 무지개 형상의 돌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시한은 그 다음날 봇짐을 진 한 거사를 만났는데 그는 아내를 데리고 전주에서 불국사. 석굴을 다니러 오는 길이라고 했다 하니 당시에도 여전히 탐승객, 참배객이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로 들어서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사들이 새로운 중창의 시기를 맞이하듯이 석불사도 중수를 맞게 된다. 1740년에 발간된 를 보면 “1703년에 종열이 석굴암(승방)을 다시 짓고 또 석굴 앞에 돌계단을 쌓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석굴에 어떤 이상이 있었다는 말은 없다. 그후 손영기라는 사람이 쓴 에 의하면 1891년에 석굴은 조씨 성을 가진 순상(병마사)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고 하였는데 그 중수의 내용과 규모는 확실치 않고 다만 “불국지석굴”이라고 한 것을 보아 이미 불국사의 말사로 되었음만은 확인할 수 있다.

이 정도의 기록만이 전해진다는 것은 이 유물의 위대함에 비할 때 너무도 가난하다. 어쩌다 조선시대 문인의 탐승 시구에 서너 번 오른 적이 있다 하나 그것으로 석굴에 예의를 다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빈약한 기록은 결코 오욕의 상처나 쓰라림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일제시대로 들어서면서 그 아픔의 역사를 더듬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삽화ㅡ1907년경 발견 당시의 석굴/석굴은 전실의 목조건축이 없는 개방공간으로 궁륭 앞부분의 일부가 허물어져 있다. 바로 그 부분은 광창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까지 줄거리 퍼온것입니다..
아래는 독후감입니다^^



나는 다른 책과 똑같이 여행지의 음식점이나 지리에 대한 설명을 해놓은 책이겠지 하고 보지 않다가, 몇 일 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까마득히 이 책을 잊고 있다가, 좋은 기회를 만나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내가 이미 가본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있었고, 가보지 못한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있었고, 가본 여행지이지만 무심코 지나간 곳에 대한 정보와, 그에 얽힌 전설이나, 그것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의 글까지 실려있었다. 여행지에서 피곤하다고 짜증만 부리며, 여행지를 재대로 답사하지 못한 내가 정말 부끄러웠다. 정말 이 정도 책이면 역사에 관심을 갖거나 우리 문화에 대한 쉬운 설명을 보기 원하는 친구들에게 권해 주고 싶은 책이다.
'우리 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로 시작하는 이 글이 찾아가는 곳을 보면, 남도답사 일번지(강진, 해남, 월출산), 예산 수덕사와 가야산 주변, 경주, 양양 낙산사, 관동지방의 폐사지, 문경 봉암사, 담양의 정자와 원림, 고창 선운사이며 답사 일정표와 안내지도, 작자가 직접 찍은 사진까지도 같이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답사지 중에서 역시 나의 눈에 가장 잘 들어온 것은 경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항상 모든 책에서 '찬란한 문화'로 손꼽히는 곳은 바로 경주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학교의 수학여행지로 손꼽히는 것이고, 우리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경주에 기차를 타고 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모두들 지쳐있어서, 답사는커녕, 모든 사람들이 짜증만 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불국사, 첨성대, 석굴암 등등을 다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다. 아마도 그때에 짜증만 내면서,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문화 유산들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지금 까지 그런 나의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의 행동이 매우 아쉬웠다. 이 책에 담긴 여행지의 전설과 과학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갔더라면, 더 좋은 수학여행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우리를 실은 고속버스가 황룡사 앞에 서고, 내가 버스에서 내렸을 때, 공허한 절터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이 절터를 보고 '여기에 왜 온 거지? 무엇을 보러 온 거지?' 하고 내 자신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보고 나니, 그 절터에 흘린 수많은 석공들의 땀과 혼이 베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려 2세기 동안 설계하고, 절을 세우고, 또 보수하고. 나는 아직 '답사'라는 것을 하기에는 너무나 모자라는 것일까?
이 책에서 작자도 지적하고 있지만, 70년대 이후 우리 국토 곳곳에서 행해지는 문화유산에 대한 덧칠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행위는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이다. 조상들의 슬기가 베어 있는 문화유산에 그 원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자행되는 돈만으로 문화재를 보존한답시고,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 유산에서 느껴지는 당혹감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물론, 이런 책을 통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을 갖게되는 것은 좋은 일일 테지만, 사람들이 문화유산을 보는 관점이 너무 획일화되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작가가 느낀 감정들, 받은 감흥들이 독자들에게 너무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책에서 소개한 여행지에 가서, 문화유산들을 보고, 작자가 받은 느낌만을 되새겨 본 채 돌아설 수 있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에 있는 글을 읽고 나면, 그 답사지에 갖다온 것 같은 느낌이 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가 무심히 보아 넘긴 탑, 기와, 불사, 다른 문화 유산에 대해 하나하나 다른 점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직도 이런 독자들의 다른 문화 유산과 답사지에 대한 호기심을 말끔히 씻어줄 책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문화 유산과 답사지에 대한 정보를 그에 얽힌 전설과 과학적인 원리까지 상세하고도 재미있게 말해줄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상 독후감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아!
저도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독후감으로 쓰고있어요;
저도 학교숙제라서요 ^^;
음 우선 저는 쓸때 ; 경주라는 한부분을 가지고 쓰려고 하거든요;ㅋㅋ
질문자분도 한번쯤 경주에 수학여행이거나.여행으로 가셨을꺼 같으니;
여행을 토대로 ~ 책의 내용과 함께쓰면;아마 쓰실수 있을꺼에요 ㅠ
경주가 아니더라도 ; 한번쯤가본 곳이 있으면; 잘쓰실수있을꺼에요 ^^
화이팅 !ㅋㅋ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도 요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때문에 걱정입니다.ㅋㅋ
제가 어제 봤던 사이트 복사해서 올려봅니다. 참고만하세요..^^
수행닷컴 이라고.. 거기 정말 자료는 무지 많네요..
무료충전소에서 공짜로 다운 됩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숙제는 자기손으로 직접..^^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독후감입니다
유홍준씨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1권을읽고 나름대로의 감상을 정리하였습니다.(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사회 독후감)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내용에 대한 느낀점 위주로 썼으며, 중1,중2 수준입니다. 주제는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나서, 구성은 위와 같으며, 피아골에 관하여 썼습니다. 과목은 사회. 중학교 2학년 입니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
우리나라 명산에 대해서, 그리도 대천에 대해서 썼다고 생각 할지 몰라도... 아주 소박한 한국의 자연을 풀어쓴 책이다. 소박한 한국의 멋이 자연에 대한 애착을 더 감명있게 가져온다.(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쓴건데요 저의 느낌 위주입니다,,가끔 책에서 나온 풍경의 설명도 잇고요 책내용에서 본것을 약간 쓰기도했습니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 2
나의문화유산답사기2권입니다. 부석사에대한내용입니다 사진은 없습니다. 줄거리가 대부분이고 다섯줄 정도의 느낀점이 있습니다.(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독후감입니다.고1 수준이예요, 한장 반 쯤되구요, 학교 수행 평가로 쓴거예요. 많이들 도움됬으면 좋겟습니다. 사진이 그런것은 없고, 글만 있습니다.(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3 요약정리 (요약정리)
이 자료는 `나의문화유산답사기3-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유홍준 지음.창비 출판.)를 읽고나서 요약정리를 한 자료입니다. 총 12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책에는 10가지 소제목이 있는데 9번과 10번의 내용이 비슷하므로 묶어서 요약했습니다.그리고 요약정리이기 때문에 느낀점은 전혀 안들어가있고요.중1이 작성했어요.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 유흥준 선생님께
유흥준 선생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라는 책을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수준은 중학생에서 고1정도이고, 편지 형식의 글입니다.(한글97)
에밀레종의 신비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에밀레종의 신비를 읽고 쓴 일반 독후감입니다. 글씨 포인트는 10포인트구여, 분량은 대략 2장 정도의 분량입니다.(한글97)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내용은 감상위주로 쓸려고 노력했습니다. 수준은 중3 ~ 고2 쯤 될것 같네요.. (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님이 쓰신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수준은 중3이상이며 많은 이용바라며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의 양양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줄거리가 조금 길고 끝네 느낀점있습니다. 사진이 없습니다.(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교수님께서 쓰신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를 읽고 쓴독후감입니다.(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 더보기>>

THANK YOU MB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도 요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때문에 걱정입니다.ㅋㅋ
제가 어제 봤던 사이트 복사해서 올려봅니다. 참고만하세요..^^
수행닷컴 이라고.. 거기 정말 자료는 무지 많네요..
무료충전소에서 공짜로 다운 됩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숙제는 자기손으로 직접..^^

나의문화유산답사기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의 양양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줄거리가 조금 길고 끝네 느낀점있습니다. 사진이 없습니다.(한글97)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 유흥준 선생님께
유흥준 선생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라는 책을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수준은 중학생에서 고1정도이고, 편지 형식의 글입니다.(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쓴건데요 저의 느낌 위주입니다,,가끔 책에서 나온 풍경의 설명도 잇고요 책내용에서 본것을 약간 쓰기도했습니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교수님께서 쓰신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를 읽고 쓴독후감입니다.(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
우리나라 명산에 대해서, 그리도 대천에 대해서 썼다고 생각 할지 몰라도... 아주 소박한 한국의 자연을 풀어쓴 책이다. 소박한 한국의 멋이 자연에 대한 애착을 더 감명있게 가져온다.(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님이 쓰신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수준은 중3이상이며 많은 이용바라며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한글97)
에밀레종의 신비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에밀레종의 신비를 읽고 쓴 일반 독후감입니다. 글씨 포인트는 10포인트구여, 분량은 대략 2장 정도의 분량입니다.(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사회 독후감)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내용에 대한 느낀점 위주로 썼으며, 중1,중2 수준입니다. 주제는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나서, 구성은 위와 같으며, 피아골에 관하여 썼습니다. 과목은 사회. 중학교 2학년 입니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 2
나의문화유산답사기2권입니다. 부석사에대한내용입니다 사진은 없습니다. 줄거리가 대부분이고 다섯줄 정도의 느낀점이 있습니다.(한글97)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독후감입니다
유홍준씨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1권을읽고 나름대로의 감상을 정리하였습니다.(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독후감입니다.고1 수준이예요, 한장 반 쯤되구요, 학교 수행 평가로 쓴거예요. 많이들 도움됬으면 좋겟습니다. 사진이 그런것은 없고, 글만 있습니다.(한글97)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내용은 감상위주로 쓸려고 노력했습니다. 수준은 중3 ~ 고2 쯤 될것 같네요.. (한글97)
나의문화유산답사기3 요약정리 (요약정리)
이 자료는 `나의문화유산답사기3-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유홍준 지음.창비 출판.)를 읽고나서 요약정리를 한 자료입니다. 총 12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책에는 10가지 소제목이 있는데 9번과 10번의 내용이 비슷하므로 묶어서 요약했습니다.그리고 요약정리이기 때문에 느낀점은 전혀 안들어가있고요.중1이 작성했어요.


나의문화유산답사기 더보기>>

THANK YOU HM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감상문을 쓰는데...

... 하나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이거든요 ,, 저는 그냥... 물론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책을 위해서 만든 양식이 아니라...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간추리기> 나의 문화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