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에 대한 견해

실학에 대한 견해

작성일 2005.04.05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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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등장 배경과 특징에 대한 견해에 대해 가르쳐주세요.

등장 배경과 특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요없습니다

견해에 뭐 어떤걸 적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좀 구체적으로 부탁드립니다


#실학에 대한 평가 #실학에 대한 오해와 이해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실학의 배경과 그 성격
16세기 말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사림들은 당리당약적인 당쟁에만 몰두하고 부국강병을 외면하였다. 왜·호란 후에도 성리학만 최고의 가치로 내세워 華夷論적 입장을 고수하고 문화·사회의 폐단 시정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 국 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였다.
16세기 말(선조·광해군 때) 일부 동인 중에서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의 균형적 발전,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한 문화·정치를 혁신하려는 움직임(정여립·정인홍)이 대두하였다. 그들은 예언 사상을 신봉(도교·비결·정감록 등)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학문적 체계를 세우기도 전에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새로운 문화 운동으로서 학술·종교·철학·문학·예술 등 모든 문화 분야에서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학술 분야에서 나 타난 새로운 학풍을 실학이라고 한다. 실증적이고 실용적이며 과학적, 근대 지향적 성격으로 실학은 정권에서 소외된 농촌 선비 나 재야 학자들(남인·소론·노론 서자)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므로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2. 농업 중심의 개혁 사상 ( 중농 학파 )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제도의 개혁 (토지·조세·교육·관리 선발·군사 제도 등)을 추구하여, 지주 제의 철폐와 자영농의 육성을 주장하였다(경세치용 학파). 대부분 남인 출신이며,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
반계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저술하여 중농 학파 실학을 체계화했고 균전론에 의해 관리와 사·농·공·상에게 차등을 두어 토지를 재분배하여 자영농을 육성하자고 주장하였다. 또 자영농을 중심으로 하는 병농 일치의 군사 조직과 사농 일치의 교 육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문벌 숭상, 적서 차별, 과거제도, 노비 세습제 등을 비판했으나 가정 내에서의 적서 차별, 천민 차별, 문음·노비 제도 자체는 인정하여 유교적 한계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성호 이익은 성호 학파를 형성하여 안정복·한치윤·정약용·이긍익 등에게 영향을 주었고, 저서로서 백과 사전적인 성호 사설과 제도 개편론인 곽우록이 있다. 토지 제도에 있어서는 한전제에 의해 농가 매호에 영업전을 지정해 주고, 매매 할 수 없도록 하자고 주장하였고, 그 외의 토지는 매매를 허용하여 점진적인 토지 소유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국가 빈곤과 농촌 피폐의 원인으로 6가지 좀(노비제·과거제·문벌·사치나 미신등의 기교·승려·게으름)을 규정하였다. 고리대와 화폐의 폐 단을 비판(폐전론)하고, 환곡 대신 社倉 제도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중농 학파의 사상을 포함한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의 3부작과 탕론·전론·원 목 등의 논설이 대표적이다. 이 저서들은 500 여권의 여유당 전서에 포함되어 있다. 목민심서는 지방 행정 제도의 개 혁 방안으로, 지방관이 지켜야 할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경세유표는 중앙의 여러가지 제도 개혁방안을 제시했고, 흠흠신서는 형법 제도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정약용은 남인 출신으로 신유 박해(1801) 때 전남 강진에서 18 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의 토지 제도는 여(30호 단위의 부락) 단위로 토지를 공동 경작하고 , 노동량에 따라 소득을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로 閭田制를 구상하고 보다 실현 가능한 방안으로 국가가 장기적으로 토 지를 사들여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자영 농민을 육성하고, 아직 사들이지 못한 지주의 토지는 병작 농민에게 골고루 소작하게 하자는 내용의 井田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는 국방·정치·과학 분야에서의 개혁으로 향촌 단위의 방위 체제와 백 성의 이익과 의사가 반영되는 민본적 왕도 정치를 주장하고, 수원성의 설계와 거중기의 사용, 한강 주교 설계를 하였으며 종두법 을 주제로 한 마과회통을 편찬하였다.
기타 중농적 실학자로는 색경을 지은 박세당, 산림경제를 지은 홍만선,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 등이 있다.
중농적 실학사상은 한말의 애국계몽 사상가와 일제시대의 국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상공업 중심의 개혁 사상 ( 중상 학파 )
18세기 후반에 크게 발달한 상공업과 청·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북학파라 하며,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외국 여행의 경험이 많은 노론 집권층에서 다수 배출되었다.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 혁신 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利用 厚生 學派라고도 한다.
대표적 인물로 농암 유수원을 먼저 꼽을 수 있다. 그는 중상 학파의 선구자로 우서를 저술하였는데 중국과 조선의 문 물을 비교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했다. 유수원은 농업의 전문화·상업화와 농업 기술의 혁신을 통한 생산의 증대를 주장하였다. 또한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부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합자를 통한 경영 규모의 확대, 대상인의 지역 사회 개발 참여를 적극 주장하였다.
담헌 홍대용도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저서 담헌서에 지전설을 주장한 의산문답과 균전제를 주장한 임하경 륜을 남겼다. 또한 기술 문화의 혁신과 신분 제도의 철폐를 주장했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 강병의 근본이라고 믿었다.
세번째 인물로 연암 박지원을 들 수 있다. 저서로서 열하일기, 농업기술을 알린 과농소초, 한전론을 설명한 한민명전의가 있다. 그는 농업 부문의 개혁안으로 한전론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영농 방법 혁신, 상업적 농업 장려, 농기 구 개량, 관개시설 확충 등 농업 기술의 개선을 통한 생산력 증대에 큰 관심을 가졌다. 상공업 부문에서는 수레·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초정 박제가를 들 수 있다. 그는 저서로 청의 풍속·제도 소개, 사회·경제 개혁안을 제시한 북학의를 남 겼다. 그의 개혁 사상은 상공업의 발전을 강조하여 청과의 통상을 강화, 수레·선박의 이용 증대, 절검보다 소비를 권장하였는데 이는 소비가 생산의 촉진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학자들의 사상은 농업 중심의 유교적 이상 국가론에서 탈피하여 보다 적극적인 부국 강병책을 제시하였으며, 후 에 개화 사상가( 박규수·김옥균 )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익 (李瀷) 1681∼1763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1.생애와 저서
호는 성호(星湖)이다. 당쟁에 휩쓸려 몰락한 남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벼슬을 멀리하고 오직 학문에만 힘썼다.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받아 천문, 지리, 역사, 제도, 수학, 의학에 밝았고, 서양 학문에도 관심을 가져 실학 사상을 펴는데 이바지한 바가 컸다. 그는 모든 학문은 실제 사회에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직업에 귀천이
없으니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심을 끌었다. 죽은 뒤에 이조 판서의 벼슬이 내렸다. 저서로 등이 있다.

2. 자연과학
이익은 천문학 분야에서 우주의 시·공간적 무한성과 부단한 변화 발전을 인정하였으며, '지전설'을 주장함으로써 "천원지방선 (天圓地方設)" 에 타격을 주었다. 이익은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하고 지구의 직경이 3만 리이며 지구 둘레는 9만 리라고 하였다. 사람이 둥근 지구의 표면에서 사는 것은 "지심 (地心)"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익은 또 "지구가 돈다"는 가설도 제기하였다. 그는 이에 대하여, "하늘이 과연 운행하고 땅이 과연 고정되었다고 할 수 있겠느가? 어떻게 하늘이 고정되어 있고 땅이 돌지 않느다는 것을 알겠는가? 땅이 안에서 운행하면 삼광(해·달·별)이 선회하느데, 이는 마치 배를 탈 때 배가 돌면 언덕이 도는 것처럼 보이고 자기 몸이 도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
이익은 서양 자연 과학의 영향을 받아 '태양 중심설"을 다소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지적샜다.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음양의 조화는 태양에 중심을 두고 있다. 태미의 제좌(帝座)니, 공경(公卿) 같은 것이니 궁중의 왕실이 있고 그밖으로 행정부가 있는 것과 같다."
태양 중심설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지구 중심설에 대한 반론을 의미한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견해에서 시작하여 자연 현상에 대해서도 비교적 과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하였다. 계절에 따라 나타나는 온도의 차이는 "태양 궤도와 지구 사이의 거리"를 가지고 설명하였으며, 눈과 비는 "술을 고는 것과 같이 온기가 증발하여 위로 올라가면 구름으로 응결되고 그것이 차가워지거나 더워지는데 따라서 눈이나 비가되며", 우레와 번개는 "성질이 천혀 다른 음과 양이 충돌하여 일어나다"고 설명하였다.
이익의 자연 과학 사상은 아직 실험과 분석에 바탕을 두지 못하고 문헌적 고증 방법에 기초한 것이나. 그것은 조선의 자연 과학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는 전제를 마련하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3.실학사상
이익의 실학은 종래의 성리학적 사고를 유용성과 사실 위주의 각도로 타파·교청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박학의 입장에서 실용성과 실증위주의 시각으로 일련의 탈성리적 사고체계가 이익의 실학인 것이다.이익의 실학적 입장은 경제 개혁사상과 정치 개혁 사상 두 가지로 나뉘는 중농주의 사상에 그 기본을 둔다. 그래서 나라의 재부와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기 위해서는 농업의 생산을 늘리고 소비를 줄여야 하며, 농업생산을 늘리는데 결정적인 것은 토지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는 한편, 놀고 먹는 사람을 줄이고 농사 짓는 사람을 늘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세제도와 전제제도를 비롯한 경제개혁과 정치개혁 모두 이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우선 그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제를 개혁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주장하였는데, "부자는 끝없이 넓은 땅을 차지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송곳 꼿을 만한 땅도 없다" 고 하면서 이를 지적하였다. 이러한 원인은 토지가 모두가 국가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사유화하는 폐단이 가장 큰 문란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어서, 토지제도의 개혁이 시급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가장 이상적으로 본 제도는 중국 고대의 정전제(정田制) 이지만 시행할 수 없으므로, 실제로 주장한 전제 개혁안을 살펴보면 한전법(田限法)과 같은 균전제(均田制)였다. 균전법이란 한 농가에 필요한 토지의 기준을 정한 다음, 그것을 해당 농호의 영▲법으로 만들어 그 이상이 되는 토지는 매매의 자유를 허용하되, 영업전의 매매는 철저하게 금함으로써 균전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이는 빈민에게 최소 단위의 영업전을 팔지 못하도록 하면 파는 자가 드물어져 겸병이 덜해 질것이고, 빈민중 지력이 있는 자는 전토가 늘어 재산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전토가 많은 자는 자제들에게 나눠주어야 하며 그 중 못난 자는 영업전을 제외한 것을 팔아치우게 되므로 시간이 흐르면 국민의 전토소유가 균둥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영업전의 부여는 최소한의 민생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그의 의도가 드러난다. 하지만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전제제도의 모순을 해결해보려는 타협적이고 개량적인 방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봉건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봉건사회 안에서나마 생산력의 상대적인 발전을 도모했으므로 그 당시로서는 이러한 시도는 혁신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당시 농민을 빈곤과 유민으로 전락시키는 현상으로 몰아넣은 군포, 환자, 대동미 및 각종세금외 부담과 중간 착취 현상을 비판하였고, 전토에 기초한 부세(賦稅)는 문제가 없으나 포백(布帛)으로 내는 잡부(雜賦)와 양역(良役)의 공포(貢布)가 큰 문제임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봉건국가에서 이 모든 잡세까지 합쳐서 땅을 가진 사람에게 1/10로 단일화된 세를 받도록 해야 중간착취를 근절하고 국가의 재정을 늘리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소작농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안이었다. 또한 빈곤한 농민은 잡다한 부역을 짊어지게 되는 불공평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익이 추구하는 조세제도의 개혁 원칙은 관리의 침탈로 이하여 곤궁에 빠진 민생을 구제·보호함을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수립하는 기반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쓸데없는 관리는 도태시키고, 관리의 봉록을 올려주어서 남징(濫徵)과 희뢰(賄賂)의 폐풍을 막아야한다고 하였다. 이익은 사회·정치적 으로 타락한 봉건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을 적발하고 폭로하였는데, 여섯 가지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면서 나라를 빈곤하게 하고 농사의 발전을 방해하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하였다. 이에는 과거제도, 노비제도, 문벌제도, 무당이나 광대 따위의 잡술, 승려, 건달이 속하며 이 여섯 가지를 육두(六두)라고 하면서 이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노비제도는 상전이 남의 노력을 착취하여 호의 호식하게 만들며, 과거제도는 쓸데없는 문사에 힘을 낭비하게 할 뿐 아니라 과거에 급제한 관리들이 권세를 이용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게 만들고, 문벌제도는 양반이라는 명목아래 재능이 없어도 백성을 깔보기나 하고 노동을 싫어하며 농업을 천하게 여기게 한다는 것이다. 또 잡술은 쓸데없이 사치를 부추기고 요술과 미신으로 백성들을 꾀며 재산을 낭비하게 만들고, 승려는 노동과 병역을 기피하고 놀고먹으며, 건달은 남의 등을 쳐 먹고 사기와 절도를 일삼는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정치사상을 살펴보면 붕당현상을 당시의 가장 큰 폐단으로 보았는데 그 원인을 부귀를 욕망하는 개인을 부귀를 욕망하는 개인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벼슬길 나아감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며 과거를 국가에서 너무 자주 시행하여 관리를 지나치게 많이 뽑은 데다가 승진과 퇴직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과거를 간소하게 하여 잡진(雜進)을 막고 고과(考課)를 명확히 하여 불초(不肖) 노둔한 자를 도태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며, 높은 벼슬을 함부로 주지 말며, 승진을 신중하게 하여 경솔하게 뽑지 않을 것을 지적한다. 이어서 식년제를 폐하고 5개년에 걸친 축년으로 소정의 과목들을 응시하도록 하는 등 과거제의 일부를 개혁하는 동시에 과거만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폐단을 시정·개혁하였다. 이익은 왕을 위시한 봉건 관료들의 독단과 횡포를 비판하고 하급관리와 평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사상도 제기하였는데 노비제도나 양반제도자체의 부정보다는 그 내용의 폐단을 지적함으로써 왕도정치를 실현하여 양반위주의 관료 체제를 확립하고 농민을 나라의 기본생산자로 하는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진보적 계층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으로써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4.기불멸설
이익은 세계의 물질성을 인정하고, 하늘과 땅을 비록한 천지만물이 기(氣)로 이루어진 자연적 실재라고 이해하였으며, 사람도 기의 산물이라고 하며서, 사람을 정신적 기로 이루어진 육체적 기관의 미묘한 기능체라고 이해하였다.
"인간과 동물의 형체를 이루는 것은 기혈(氣血) 이고, 기혈의 영화(英華)를 정신이라고 한다. 정(精)은 혈에 속하며 신(神)은 기에 속한다. 혈이 아니면 기는 의거할 데가 없고, 기가 아니면 정은 발(發)할 바가 없다"
이익은 또한 기를 구체적인 사물을 이루는 소기(小氣)와 본래 우주 공간에 가득 차있는 대기(大氣)로 구분하고, 소기는 변화고 없어지지만 개기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기 가운데 있는 모든 생물은 각각 자기의 기가 있으니 사람은 사람의 기가 있고 동식물의 기가 있다. 이것들은 대기 가운데서 서로 통할지라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기는 체내에 가득 차서 처음은 배태하고 다음에는 성장하고 나중에는 소멸하여 형체와 그 생사를 같이 한다."
이상의 사실에서 이익이 말하는 물(物)이란 구체적 사물을 의미하며, 기는 사물을 이루는 물질적 시원임을 알수 있다. 그는 구체적 형체를 이룬 사물은 노쇠하면 없어 지지만 그를 이루었던 기는 다시 천지간의 본래 기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5. 영혼 물멸설
이익은 소기의 소멸과 대기의 불멸 원리를 불과 더운 기운의 관계로 비유하면서 그것을 백(魄)과 혼(魂)의 관계에 대비시켰다.
"이는 마치 방 안에 화롯불이 있는데 불이 소멸해도 더운 기가 아직 방안에 남아있는 것과같다. 그러나 그더운 기도 점차 소멸하다. 반드시 소멸하기는 하지만 혹모임이 견고한 것은 더디게 소멸하며 모임이 견고하지 못한 것은 빨리 소멸한다. 항국한 리(리)는 없는 것이다."
이는 그가 영혼의 불멸을 주장한 불교 관념론에 반대하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사상이라는 점에서는 긍적적인었으나, 여기에는 모순점이 있다. 사물의 형성과 소멸을 물질적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 설명하려고 했음에도, 귀신을 혼백 문제와 연관지어 설명함으로써 사실상 기에 귀신이니 혼백이니 하는 신비적 성격을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정신적 현상을 육체와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육체에 붙어 있다가 죽으면 육체에서 분리되어 독자로 활동하는 신비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귀신을 음양 두기로 설명하였다. 장재의 "귀신은 음과 양 두기 의 양능(良能)이다"라는 말을 인용한 뒤 "나는 이 기를 음양으로 본다. 귀는 음의 영(靈)이고 신은 양의 영으로서 자연히 그렇게 된다. 그러므로 양능이라고 하는 것이다. 귀신은 이름이요, 양능은 별호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귀신의 존재를 승인하였으며, "귀신은 육신이 없고 다만 기뿐이다.", "같은 기끼리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조상은 자손과 기가 같으므로 정신이 서로 통하고 신령이 서로 감응하게 마련이다."고 하여 영혼불멸의 사상마저 승인하게 되었다.

6. 이익의 인식론
이익의 철학 사상 중에서 인식론은 중용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인간의 정신·사유능력을 그 어떤 초월적인 것의 산물로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육체, 물질적인 것의 산물로 인정하였다. 이는 바로 유물론적 관점이다.
이익은 " 감각은 뇌의 작용이며, 의식은 심의 작용"이라 하여 뇌수와 심을 중요한 인식기관으로 이해하였다.
뇌수에 기능에 있어 "뇌는 한 몸의 주인이고", "외물에 접촉할 때 생각 없이도 곧 움직이는 것은 뇌가 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뇌수의 기능을 사물에 접촉하였을 때 사고 과정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발동하는 것으로써 감각기관과 연결된 감각중추로 이해하였다. 이는 비록 조선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뇌수의 기능임을 알지 못하였기에 비 과학성을 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이익은 심의 기능과 역할을 밝히느 데 주력했다. 심은 우선 물질적인 것에 의존은 되어 있어도 감각할 수는 없는 무형의 특성성을 가지며, 다음은 단순한 소극적인 반영이 아니라 능동적 작용을 하는 특성을 가지며, 또한 사물에 대한 감각의 특성을 가지며 동시에 모든 사물에 없는 고유한 특성으로서의 신령한 특성 즉 사유하는 특성을 가진다. 이익은 이네 대하여 거울과 물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이와 같이 이익이 말하는 심은 단순히 감각, 또는 반영하는 작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 지각 작용과 구별되는 표상, 분석, 판다 등의 이성적 사유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익의 인식의 생리적 기초에 관한 이러한 견해는 매우 창발적인 견해이다. 자연 과학 수준이 아직도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었던 조건하에서 감각 인식들의 기능을 그 어떤 외부에서 주어진 신비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뇌, 심 등의 물질적인 기관에서 찾은 것은 당시로서는 훌륭한 유물론적 견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익은 인식론에 있어서도 주자학적인 관념론적 성격을 면할 수는 없었다. 심이 물질적인 기·혈의 특수한 조직과 연관되어 있으며 객관세계 사물 대상에 있어서 비로소 인식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면서도. 심은 동시에 천부적인 인식능력을 자체에 소유한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정하였다. 이익은 명백히 심을 일반사물에 대한 지각(인식)작용을 하느 것으로써 묘사하면서도 그에 선천적인 도덕 규범의 성(性)과 리(理)를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감각기관을 통하지 않는 초자연적 인식을 포함시키고 있다. 여기에 그의 인식론의 관념론적인 성격이 있는 것이다. 죽 이익은 인식론에서 유물론적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념론적 성격을 보임으로써 모순된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익은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제기 하였으나 결국의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에서 학파간의 견해를 절충하는 입장에 서있었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사단은 리가 발하고 기가 따르며 칠정은 기가 발하고 리가 탄다--의 이론에 대한 증명을 위하여 불을 리(理)에, 나무를 기(氣)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또한 이익은 인식론에서 중요한 범주로 되어있는 지행(知行)문제를 주자학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행관에서 특징적인 것은 종래 주자학의 지선행후(知先行後)설에 근거하면서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사상을 절충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우선 "배우는 것은 곧 지와 행이 겸해 있는 것을 말한다." 고 하여 배움을 '몸으로 배우느 것' 과 '마음오로 배우는 것'으로 구분하였다. 그리하여 전자에는 효, 제 등의 도덕이 포함되며 후자에느 독서, 궁리(窮理)--이치를 규명하는 것--가 포함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행에 대하여 그는 효, 제 등은 몸으로 배우는 것인 동시에 몸으로 행하는 것이고, 독서·궁리는 마음으로 행하느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는 배우는 과정에서는 지행이 합일된다는 견지에 서있었고, 그 배우느 총체는 지(知)이므로 지와 행의 관계에서는 지선행후라고 여겼다. 이익의 지행관에서 긍정할 부분은 다른 주자학자들과는 달리 실천(行)을 중시했다는 데 있다.
이익은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해서도 그것을 유교경전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 것으로 이해한 관념론자들과는 달리, 구체적 사물 현상에 접촉하여 이치를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지식으로 말하면 오늘 한 개 사물의 이치를 캐고 내일 한 개 사물의 이치를 캐야한다. ....이치를 캐는 것이 많으면 지식도 늘어난다." 고 하여 사물에 대한 연구에 의해서만 지식이 축적되고 발전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주자학의 격물치지에 대한 이해를 유물론적으로 변화시킨 합리적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익의 인식론은 주자학의 관념론에 벗어나지는 못샜으나, 다분히 유물론적이며 합리적인 요소들을 포함함으로써 그의 실학사상의 인식론적 기초가 되었다.

7. 이익의 윤리 도덕관
이익의 윤리 도덕관은 철저히 유교 관념론을 바탕으로 하고있었으며 그의 사상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부분이다. 이익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인간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준수해야할 도덕 규범이라 하면서, 이것이 잘 준수 되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라고 하엿다. 또한 삼강오륜과 함께 예(禮)도 강조하였다. 그는 예를 소홀히 하게 되면 필경 "임금을 업신여기고 아버지를 꾸짖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질서가 거꾸로 될 것이며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게 될 것이다."고 하여 예에 대한 위반은 도적이나 강도의 죄보다 더 크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윤리 도덕적 견해는 철저하게 유교 관념론의 입장에 서서 봉건 윤리를 수호하고 시행하려는 것처럼 보이나 그이 사회 정치적 견해는 실학사상과 관련되어 진보적 경향을 띠고 있다.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1. 생애와 저서
정약용(丁若鏞)은 1762년(영조 38) 8월5일 경기도 광주 초부면 마현리에서 양반 가문인 정재원(丁載遠)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약용(若鏞)이고, 호는 다산(茶山)이라 하였다. 세상에서는 보통 그를 정다산으로 불렀다.
아버지는 남인 당파로 일찍이 출사하여 지방 수령을 역임하였다. 어머니는 해남 윤씨(尹氏) 명문 대가이며, 남인 당파의 명사인 윤선도(尹善道)의 손녀였다. 정약용의 실학도 외가의 학풍을 이어받은 바 있었다고 하다.

15세에 무반으로 승지 벼슬을 한 홍화보(洪和輔)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哲身)·채제공(蔡濟恭)·이승훈(李承薰) 등과 어울였으며, 이덕문·백제가(朴濟家)등과도 교유하여 그들의 실학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22세에 진사에 합격한 후 희릉직장(禧陵直長)이 되었다. 이 해겨울 그는 한강에 가설할 배다리를 설계하였고, 예문관검열(藝文檢閱)이 되었다.
23세에 그는 친구인 이벽(李檗)·이승훈등에게서 서양의 근대적인 천문학·수학·지구도·자명종·망원경·서구 풍속기 등 많은 서적과 물건을 얻어 보기도 하였다.
31세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고, 수원성 축조 설계를 하면서 기중기·활차·고륜 등을 고안하였다. 하지만 당파의 시기와 박해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33세에 다시 등용되어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었는고, 승지참의(承旨參議)
34세에 충청도 홍주의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36세부터 2년간 곡산(谷山) 부사로 있게 되었다.
39세에 그는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1812년 이가환과 이승훈, 정약용 등 시파 남인계를 사교도(邪敎徒)로 몰아 박해를 가하였다. 이것이 '신유사옥(辛酉史獄)-1800년'이다. 그리고 이른바 '책용 사건'으로 발단한 서학에 연루되어 정약용 일파는 체포되고 사형되었다.
40세에 강진으로 귀양 가서 18년 동안이나 갖은 고통과 풍상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번도 좌절하지 않고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하여 자기의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사상을 다방면으로 발표함으로써 실학 사상의 집대성자로 추대되었다.
57세에 (1818년)귀양살이가 풀여 고향 마현리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학문적 수양과 저술에 전념하며 세계 정세와 서구 과학에 관한 서적들을 구해 연구하였고 저술을 남겼다.
75세에 1836(현종2) 2월22일 75세를 일기로 고결한 일생을 마쳤다.
그후, 그가 죽은지 74년 후인 1910년 조선 정부는 당시 사회 신진인사들의 여론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정약용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을 증직하고 시호를 내렸다.

정약용은 철학·지리·역사·법률·정치·문학·군사 등 광범한 영역에 걸쳐 5백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썼다. 그의 저술은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주요한 철학 저서로는 『대학강의 (大學講義)』,『중용강의보 (中庸講義補)』,『맹자요의 (孟子要義)』,『논어고금주 (論語古今註)』, 『주역사전 (周易四箋)』, 『역학서언 (易學緖言)』등이다. 정약용이 남긴 문집 『여유당전서』(일명「다산전서」)에는 2천여 편의시가가 들어 있다. 또한 정치·경제에 대한 개혁구상을 밝힌 이른바 이서일표 (二書一表 :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가 있다.

2. 다산(茶山)의 과학 사상
①. 다산(茶山)의 박학 정신(博學精神)
조선 후기 경시제민(經世濟民)을 행한 경학(經學)연구의 공통적 특색은 박학적 태도가 농후해졌다는 것이다. 즉 내노라 하는 조선 후기의 학자들이 하나같이 박학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산은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정신을 다포괄하는 학자이니만큼 당시의 성리학자들에게 우선 은자(隱者), 산림(山林)의 태도를 버리고, 경세인(經世人)으로서의 사(仕)의 본분에 충실하도록 주의를 환기한다. 동시에 그는 성리학의 학풍을 비판하였다. 이를 극복하기위해 다산 역시 원시유학(原始儒學) 정신에서 찾고자 했다. 이는 앞서 실학을 펼친분과 다른게 없지만, 그는 성리학의 형이상학성을 비난하기 위해 불교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다산에 의하면, 성리학의 경학연구는 학으로서의 고증에 소홀한 것이 그 단점이다. 그런데 이 학으로의 고증에 충실한 것이 한유의 훈고학적 방법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의단점은 훈고의방법으로 보강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학자에 따른 세가지정신( 박학, 원시유학정신의 회복, 훈고학)의 특색의 소유관계 대체를 살펴 보면..


②. 다산(茶山)의 기예론(技藝論)
다산이 『기예론 (技藝論)』을 쓴 것은 1799년으로 추산 - 일본이 서양의 물리화학을 배워야 하겠다는 것이 1866년의 후쿠자와 유기치로부터 67년 앞서 있는 것이다.
다산은 본격적인 기예론에 들어가면서 농업기술과 공업의 기술을 일괄하여 논의하고 있다.

③. 다산(茶山)의 고공기(考工記)
중국의 역경(易經), 고공기 (考工記), 여씨춘추(呂氏春秋) 등에는 기술에 관한 사상이 담겨져 있다. 의 개물성무(開物成務)의 사상 - 자연 그대로으 것을 인위적으로 가공하여 인문을 연다는 생각을 말함 - 이나 속에 들어있는 산업상의 시(時)의 사상이 그것이다. 다산은 천(天)의 시(時)가 있고, 지(地)에 기(氣)가 있고, 재(材)에 미(美)가 있고 공(工)에 교(巧)가 있어 이것을 합치면 양(良)이 된다는 것이 고공기의 요체다. 라 하였다.
다산은 정조의 특명으로 수원성을 설계해 정조에게 바쳤다. 그는 윤경의 『보약 (堡約)』과 유성룡의 『성설 (城設)』에서 좋은 제도만을 취하여 초루( 樓), 적대(敵臺), 현안(懸眼), 오성지(五星地) 등의 여러 법도를 나누어 정리하여고, 『기중가도설 (起重架圖設)』지어 활차(滑車)와 고륜(鼓輪)등 거중기(擧重機)를 정조에게 바쳤다.

수원성의 축성배경과 축성계획
§ 규모 및 시설
축 성 기 간 : 조선 정조 18 ~ 20년(1794. 3. 29 ~ 1796. 10. 10 양력 기준)
성 곽 규 모 : 성 길이 5520m, 성내 면적 : 1.3km2
시 설 물 : 장안문, 팔달문, 화서문, 창룡문 외 37개소(축성 당시 48개소)
시설물 복원 : 1975년 ~ 1978년(장안문 등 30개소)
보 수 : 1975년 ~ 1978년 (팔달문 등 11개소)
성 곽 복 원 : 1975년 ~ 1978년 (5520m 중 5099m)

수원성의 축성 계획은 조선후기에 대두된 성곽의 방어 능력 향상을 위한 노력과 실학파 학자들의 실용성을 추구한 학문적 관심 그리고 이 모든 생각들을 집대성할 수 있었던 조선후기의 대학자 정약용이 참여함으로써 비로서 이루어 질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조선은 왜적의 침입에 무력하게 무너진 조선의 방어 체제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 특히 성곽의 방어 능력을 향상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재상을 맡아 백성들의 처절한 고통을 체험한 유성룡(1542 ∼ 1607)은 난이 끝난 후 [징비록]이란 책을 서술하여 전란 중에 느꼈던 개선점을 적었는데 그 가운데 많은 것이 성곽에 관한 것이었다.
치성이란 성벽의 일부를 돌출 시켜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며, 옹성은 성문 앞에 둥글게 또는 네모지게 한 겹 더 성벽을 쌓아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한 시설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고대 중국에서부터 고안되어 활용되어 온 것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곳 외에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었다. 그밖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성가퀴도 충분한 크기로 만들고 포루를 설치할 것도 제안
그리고 중국과 일본 성제의 장점을 연구하여 조선의 성을 보다 견고히 할 것을 제안한 사람으로 조중봉, 강항, 유형원 등을 들 수 있다. 강항은 오랫동안 일본에 체류한 경험을 살려서 일분의 성제가 전투시 효과적임을 강조하였으며,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인 반계 유형원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바람직한 성의 형태를 다음과 같이 제안 하였다.
성은 주민이 거주하기에 충분히 커야 하며 전쟁이 나면 살던 곳을 떠나서 주변의 산성으로 떠나서 피난하던 종래의 방법을 버리고 평시의 거주하는 읍성에서 방어를 할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읍성의 포루 등을 많이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일 것 등을 주장 하였다. 그는 특히 성내에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도록하고 상공업을 장려하면 시장이 번성하고 주민이 부유해져서 성은 자연히 견실해진다고 생각하여 상공업의 활성화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여러 사람들의 제안도 있었고, 조정에서도 성곽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결과 18세기경에는 몇몇 지방에 방어 시설을 갖춘 읍성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전주성은 1734년(영조1년)에 개축하면서 치성, 옹성, 포루를 설치 하였고 황주성, 청주성 등도 18세기에 개축하면서 옹성과 치성 등을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17세기 후반에는 남한산성을 개축하였고, 장화의 성곽을 보수 하면서 이전에 없었던 돈대를 설치하였다. 돈대란 일종의 망루인데 강화에는 섬 주위 51개소에 돈대를 새로 설치하였다. 조선 후기의 이러한 일련의 성곽 보완 노력은 나중에 수원성을 축조할 때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학문 활동 중 가장 주목되는 실학은 실사구시 곧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실학파의 학자들은 조선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분야의 문제들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서민들의 주택 문제를 포함한 건축 구조의 개선책도 들어 있다.
실학파 학자들은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고통받고 있는 서민들의 주택을 보다 낮게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건축물의 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관한 저술을 남긴 사람들은 이른바 북학파이다.
실학파 학자들이 주장한 조선 건축 구조 개선책은 한마디로 요약하여 벽돌의 적극적인 활용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건축물들이 대부분 벽돌을 이용하여 견고하고도 오래 견디며 집을 짓는 데도 편리하다는 점을 체험을 통하여 확인하고 이를 조선에서 적극 활용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박제가의 ‘북학의’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은 이러한 주장을 펼친 대표적인 저술들이다. 박지원은‘열하일기’에서 나무와 흙벽으로 된 조선 주택의 단점을 열거하고 있다. 화재에 약하고, 쉬이 무너지며, 집을 짓는데도 어려움이 많으므로 이를 벽돌조로 고침으로써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온돌 구조에서 이를 벽돌로 쌓게 되면 고래의 크기가 일정하게 되고 방바닥이 평평해지고 시공도 용이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밖에도 실학자들은 지붕의 기와 구조나 벽체 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개선 방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실학자들의 이러한 제안들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관료들에게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다만 벽돌로 성벽을 축조하는 방안만은 성곽 축조가 강화에서 실험적으로 시행되었다. 당시 강화 유수로 있던 김시혁은 자신이 중국 수도인 북경에 다녀온 체험을 살려 1774년 강화의 외성을 벽돌로 축조한 것이다. 그 후 수원성을 쌓으면서 벽돌을 대대적으로 활용하였다.
이와 같이 수원성은 조선 후기 이래로 고조된 성곽에 대한 관심과 실학파 학자들의 여러 가지 제안 등의 영향을 받아 18세기도 거의 저물어 갈 무렵인 1792년에,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평가되는 다산 정약용이 계획하게 되었다.
당시 다산은 규장각에 근무하고 있었다. 규장각은 정조가 창설한 일종의 왕실 도서관으로 왕은 이곳에 실학파 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젊은 학자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연구하게 하였다. 다산은 이 곳에 있으면서 중국에서 중국에서 들여온 많은 책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는 서양의 과학 기술을 소개한 책자들도 있었다.
다산은 수원성의 축성을 위하여 모두 7편의 글을 작성하여 왕에게 바쳤다. 곧 ‘성설’,’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 ’기중도설’, ’총설’ 등이다.
이 글들은 수원성의 기본적인 형태와 규모, 각종 방어 시설, 그리고 축성 공사와 관련된 공사 방법 등을 적은 것이다. 그 중에는 재래의 축성술을 계승한 것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이제까지 조선의 성곽에서 설치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시설들이 많이 있었고, 공사 시공을 위한 새로운 기구들이 여러 가지 고안되었다.
이것은 모두 다산이 오랜 기간 조선의 종래 성체를 검토하고 중국의 관련 서적들을 면밀히 연구 검토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그 중에 특히 기구의 고안은 서양의 과학 기술에 관한 지식을 활용한 것이었다.
다산이 계획한 수원성의 기본적인 형태와 새로운 방어시설 그리고 자재를 운반하는 기구는 다음과 같다. 우선 수원성의 기본 형태와 규모를 살펴 보자. “ 성의 둘레를 약 3,600보( 보: 1보는 주척으로 6척. 약 1.18미터)로 하고 성벽의 높이는 약 2장 5척으로 함. 성을 쌓는 재료는 돌로 함. 성벽의 주변에는 호를 팜(호의 깊이는 약 1장 5척, 넓이는 7장, 바닥은 3장)”
이것이 이상적인 성의 모습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성에 필요한 방어시설로는 옹성, 포루, 현안, 누조를 들었다. 우선 옹성에 대하여 과거에는 우리나라 성곽에 옹성을 별로 설치하지 않아 서울의 동대문에만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중국의 병서에 나오는 옹성등을 참고하여 새로 마련하는 성의 성문에는 반드시 옹성을 설치함은 물론 옹성에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공격용 시설을 적었다. 포루에 대하여도 중국의 병서에 나와 있는 예와 전에 유성룡이 제안했던 방안 등을 검토하여 수원성에 필요한 만큼의 포루를 고안하였다.
다산은 수원성에 포루 7, 적루 4. 적대 9, 포루 2, 노대 1, 각성 7개소가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현안은 적을 감시하고 공격도 할 수 있는 시설이며 성벽에 설치하는 개구부이다. 이것을 성벽이나 치성, 성가퀴에 다수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성문 위에는 적의 방화에 대비하여 물을 저장하는 누조를 만들 것도 계획에 넣었다.
다산은 이러한 성의 규모나 방어 시설 외에 특별히 운반용 기구의 활용을 건의했다. 성곽 공사에는 많은 석재를 운반해야 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큰 괴로움을 주게 되고 공사 비용이나 기간이 많이 드는 점을 고려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석재를 운반할 수 있는 운반용 기구를 활용할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직접 이러한 기구를 고안해 내었다.
그 대표적인 기구가 거중기이다. 거중기는 여러 개의 활차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들어 올리도록 고안한 장치이다. 다산은 독일인이 지은 ‘기기도설’이라는 책에 실린 서양의 기구를 고안한 것이다.
이처럼 다산의 수원(水原)성 계획은 기존 조선 성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서, 당시의 중국이나 서양의 앞선 문물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특히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 주고 공사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거중기 등을 고안한 점은 당시 실학파 학자들의 위민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수원성은 이와 같이 조선 후기의 축성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함께 그에 따른 지방 읍성 방어 시설의 구축에서 얻은 일련의 체험 그리고 벽돌이 사용 등이 큰 역할을 하였다. 또 이와 함께 중국을 다녀온 실학파 학자들의 여러 가지 제안 그리고 강화 외성의 실험적인 벽돌 성벽 축조 기술 등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18세기 말 정조의 강력한 축성 의지와 함께 실학파 학자의 중용으로 이제까지의 성곽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면모를 갖춘 성곽으로 계획되기에 이른 것이다.

3. 정약용의 철학 사상
①. 자연관
정약용은 세계의 시원을 '태극(太極)'으로 설명하였다. 그에게 있어 태극은 주자학에서 태극을 리로 인정하는 견해와 달랐다. 그는 '태극'을 시원적인 물질적 실체로, 천지가 갈라지기 전의 혼돈한 상태로 보았다. 그는 '태극이란 것은 천지가 나누어지기 전의 혼돈한 것으로서 형체 있는 것의 시초이며 음양의 배태이며 만물의 시초이다.'( 2집,47권,1페이지)라고 하였다. 그는 '태극'이 무형의 정신적인 리가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며 그것이 배태된 시원적인 물질이며 그것의 성질 즉 맑고 탁하고 가볍고 무거운 차이에 의하여 하늘과 땅이 갈라져나왔다고 인정하였다. 이런 견해는 결국 물질적인 천지의 시원은 역시 물질적인 것이며 정신적인 것은 아니라는 유물론적 이해이다.
② 변증법
그는 "천지 사이의 모든 것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천체에서 지상의 모든 사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변화에의 법칙에 따라 발생,발전한다고 보았다. 그는 "해와 달과 별, 초목과 짐승 등 형체있는 식물 및 동물에 이르기까지 무릇 천지 사이의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곧 '역(易)'이 변화를 주관하는 까닭이다"고 하였다. 그는 만물의 발생변화를 동질적 또는 이질적인 두 개 사물의 호상작용에 의하여 설명하였으나 대립물의 투쟁이 아니라 조화, 통일을 호상작용이라고 인정함으로써 조화론적인 입장에 서게된다.
③ 인식론
정약용은 심(心)을 인식기관으로서의 형체있는 심과 사유 또는 인식능력으로서의 형체없는 심으로 구분하였다. 그는 '감각의 기관'은 몸에 속하되, 감각을 통한 '지각의 기능'은 마음에 속한다고 보았다. 인식 대상 사물들은 꼴(形)을 지녔으므로 그 대상과 관계맺고 그 성질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식 주관의 편에서도 꼴을 갖춘 그릇(器)이라든지 통로(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상세계와 그에 대한 마음의 지각 작용을 이어주는 매개로서의 감각이 총체적 인식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뚜렷리 밝혔다는 점에서 정약용의 감각관은 철학사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최한기(1803~1877)에 이르기 전까지의 실학자들 가운데, "인식은 감각과 사유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이익(1681~1763)의 관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감각 경험이 대상 세계에 대한 인간 지식 구성의 최초조건임을 인식론적 맥락에서 가장 명확히 주장한 사람이 바로 정약용이라 할 것이다.
④ 지와 행의 문제
정약용은 지행 문제에서 '知先行後'나 '行先知後'는 모두 한 측면만을 말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명백하지 못한 것은 모르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실천하지 않으며,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명백하지 못하다", 2집, 3권, 10페이지)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지와 행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를 가지며,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먼저 알아야 실천할 수 있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더욱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그는 지와 행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그는 배움과 사고의 문제에 대하여 서로 두 가지 편향을 경계하는 입장에 서있었다. 즉 배우기만 하고 사고하지 않는 것이나 사고만 하고 배우지 않는 것은 다같이 해롭다고 인정하였다.
⑤ 윤리도덕적 견해
정약용의 人性論은 그의 도덕이론의 출발점이다. 그는 인간은 짐승과 달리 윤리도덕질서에 의하여 사회생활을 유지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성은 '도의'와 '기질' 두 개가 합쳐서 하나의 성으로 된 것이며 짐승의 성은 순수한 기질지성뿐이다"⑥ 종교, 미신에 대한 견해
정약용은 우선 당시 가장 광범하게 믿어진 풍수설에 대하여 예리한 비판을 하였다. 그는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있어 현세의 인간과 연계되어 있다는 관점을 부인하며, 지리적 조건 즉 '명당'과 인간이 화를 입거나 복을 받는 것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하였다.(,1집,11권,30페이지) 또한 그는 관상법에 대하여도 그 허위성을 비판하였다. 그는 '관상론(觀想論)'에서 부귀빈천을 사람의 '상'에 의하여 규정하는 숙명론을 반대하고 사람의 '상'은 직업에 따라 변화한다는 유물론적 이론을 제기하였다.
이는 사람은 상에 의하여 부귀빈천이 숙명적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조건을 지어주고 교양만 한다면 누구나 다 부귀할 수 있으며 '상'은 그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이론으로서 여기에는 초보적이나마 인간은 본질상 같다는 관점이 놓여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잡다한 미신과 잡술에 반대하면서도, 권력있는 제왕이나 홀로 거처하는 학자들의 행동을 경계하기 위하여 상제나 귀신같은 존재를 허용했다. 이와 같이 그가 상제나 신을 설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을 통하여 통치자들의 전횡을 억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4. 정약용의 실학사상
정약용은 주로 사회개혁과 경제 개혁 그리고 국방 개혁에 관한 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첫째, 정약용이 사회개혁 사상은 그의 사회, 역사관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고대 사회를 이상화함으로써 군주제를 반대하고 민주 정치를 부르짖었다. 그는 이상적인 고대 사회가 이후 왕도(王道)와 예치(禮治)의 사회를 거쳐 패도(覇道)와 법제(法制)의 사회로 변했다고 파악하였다. 이렇게 이상적인 정치가 무너지자 원래 백성을 위해 만들어졌던 국가와 법이 통치자가 백성을 수탈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고대 사회를 모범으로 들어 봉건적 전제 통치를 부정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그의 민주, 민권적 정치개혁 사상은 '원목(原牧)'(통치론)과 '탕론(蕩論)(역성혁명론)두편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원목(原牧)'에서 그는 전제 제도를 부정하고 민(民) 협의회로 대체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이전 실학자들에게는 없었던 독창적인 견해로서 뒷날 조선의 정치 사상이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우선 수령(收) 의 변천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관권신성(官權神聖)이니 관주민노(官主民奴)니 하는 봉건적 사상들을 부정하였다.
정약용은 백성이 생활하면서 필요하여 스스로 선택하고 약속해서 통치자가 나왔다는 설명을 근거로 왕권신수설에 반대하는 한편 민주제도의 원칙을 확인하였다. 그는 사회의 법도 백성의 자유 의지와 직접적인 이익을 바탕으로 밑에서 위로 제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약용은 '탕론'에서 중국 봉건 사회의 역성혁명을 예로 들며 민권 사상이 정당성을 논증하였다. 그가 보기에는 도덕규범은 정치와 국가 제도에 따라 변하는 것이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아울러 그는 군주제를 민 협의회로 대체하자고 주장하였다.
둘째, 정약용은 정치적 균권(均權)사상은 경제 개혁론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지주가 토지세를 부담하고 군포법이나 환곡제를 폐지하며 공전과 균세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의 빈곤을 해결할 수도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전의 전제 개혁론을 계승하여 여전제(閭田制), 즉 토지 공유와 '농자수전農者受田'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집단 농자제를 주장하였다. 정약용의 여전제는 왕권 국가의 소유제를 바탕으로 하여 그것을 개량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토지를 요구한 온 농민들의 바람을 잘 반영한 것이다.
셋째, 정약용의 실학 사상 중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국방 사상이다. 그는 '군포제'를 개혁함으로써 백성을 중간 수탈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여 병역부담의 폐해를 시정하고, 또 환자법도 개혁하여 국가의 전시 식량축적을 도모 하고자 하였다. 백성 스스로가 생명과 재산을 수호할 것이라는 '자기보위(民堡謂)'사상을 제기하였다. 또 그것을 상술한 '여전제'실시와 결합시켜 '병민 일치','병농 일치'를 실현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도라고 보았다. 그리고 국사 장비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 무기를 만드는 상공인의 대한 대우 개선과 '이용감'을 통하여 새로운 무기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국내에서 만들어 내자고 제안도 하였다.

5. 문학 사상
정약용은 18세기말 19세기초의 뛰어난 자연 과학자이자 진보적 유물론자이며, 실학 사상의 집대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시인기도 하였다. 정약용의 유산 중 가장 빛나는 것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도 가장 훌륭한 것이 바로 선진적인 문학 이론이다. 그는 문학이 조국과 인민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지 않고 썩어 빠진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진실을 찬미하지 않고 거짓을 비웃지 않으며 착한 것을 권고하지 않고 나쁜 것을 다그치지 않은 것은 시가 아니다. "
정약용은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의 문학 창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모방주의와 형식주의를 배격하였으며, 문학은 항상 민족의 실생활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나는 조선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조선 사람들의 생활을 시로 짓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그의 외침은 실로 자주적이고 선진적이며 사대주의를 증오하는 기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문학적 견해를 바탕으로 정약용은 2천 4백여 수에 달하는 시를 창작하였고, 다양한 형식의 산문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사실주의적 그림처럼 그 시대를 진실하게 보여 주어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이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약용의 시들은 우선 당시 농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직시하여 불합리한 봉건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시「굶주리는 백성의 노래」에서도 굶주린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에 시인의 동정 어린 마음을 보낸다. 이 작품의 1장에서 시인은 굶주린 인민들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멀건 죽이지만 엿처럼 달게 먹는 모습과, 앞날이 캄캄하고 어디 갈데도 없는 비참한 처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들이 도탄에서 신음하게 된 것은 통치자들의 가혹한 수탈 때문이라고 규탄하였다. 이 시 2장에서는 "여위어 뼈만 남고 병들어 목숨만 붙어 있는 메마른 산송장"인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하는 수 없이 유랑 길에 나서는 기막힌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어제는 농사꾼이었던 굶주린 백성들은 빌어먹기 위하여 가나한 집에도 부잣집에도 들르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가난한 살림살이에 대한 하소연을 듣고, 부잣집에서는 모르는 척 돌아앉는 비인간적 대우를 겪게 된다. 그들은 너무도 기막힌 처지여서 식구가 많은 탓도 해보고, 혼자 지내는 홀어머니나 홀아버지를 걱정하며, 벌레나마 배불리 먹는 새나 물이나마 실껏 마시는 고기마저 부러워하기도 한다. 유랑민들의 이렇듯 눈물겹고 절박한 처지와 쓰라린 심정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원망스럽고 악랄한 사회인가를 보여 준다.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은 3장에서 더욱 깊이 있게 드러난다. 여기서 시인은 굶주린 인민과 달리 봉건 통치자들이 부와 사치로 나날을 보내면서 백성 생활에는 아랑곳없이 비인간적 해위를 자행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아직 봉건 유교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앙 관리들을 백성의 '부모', 지방 관리들을 백성의 '형'에 비유하면서 부모나 형과 같은 통치자들이 백성을 구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걱정하는 데 머물며 통치자들이 경제만 잘 다스리면 백성의 곤란한 생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한계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시적 일반화의 폭과 깊이, 강한 비판 정신 등으로 이 시는 사실주의 시가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정약용은 「다북쑥」「벼모 뽑기」「메밀」「보리죽」「승냥이와 이리」「버린 나이」등 여섯 편의 시로 묶은 「농촌의 이모저모」에서도 당시 무고한 농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보여 주면서, "가죽마저 벗겨가고 뼈마저 갉아 내는" 봉건 통치자들의 죄행을 폭로하고 있다.
그의 시들 가운데는 조세 제도의 가혹성과 통치자들의 악독한 수탈 행위에 비판을 가한 작품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한 대목은 "봄에는 좀먹는 쌀 한말을 맡기고 가을에는 옥백미 두말을 팔아도 모자란다네"라고 한탄하였다.
정약용의 작품은 현실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보려는 정신이 힘있게 반영된 점이 특징이다. 시 「여름날에」에서 시인은 당시 토지 제도·군포 제도·환자 제도·관리 등용 제도의 불합리함과 그것들이 빚어내는 폐해를 신랄하게 폭로하고, 이러한 어질지 못한 법이 어떻게 고쳐져야 할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약용은 자기 작품들에서 봉건 사회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구상한 이상적인 정치는 유교적인 '왕도 정치'였다. 따라서 이와 어긋나게 행동하는 악질 관료나 중간 착취자들은 비판받지만, 봉건 제도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 그의 시들은 이와 같은 제한성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부패한 봉건 사회의 현실을 여러모로 폭로하고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구제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봉건 시대 말기의 사실주의 문학이 발전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목민심서』
정약용은 500여권의 책을 서술한가운데 1/3이 행정의 문제를 다루었다. 목민심서는 근본적으로 지역주민과 지방정부가 평등하다는 민관을 가지고 목민 평등사상으로 봉공과 애민을 강조하였다.
1. 목민심서의 정신
목민의 개효순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공· 맹시대에 이르러 구체화되었던 것을 정약용이 이를 목자라는 개념으로 확충하여 발전 시켰다. 정약용은 목자를 민이 선출한 존재로 이해하여 민의 존재를 새롭게 정치적 주체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맹자의 '왕도사상'을 근대적으로 발전시켰다. 목민심서는 목자와 민이 대등하다는 견해에 입각하여 애민· 위민 사상을 도출하였으며 목자의 민에 대한 사랑을 목민혜로서 정의하였다. 목자는 手技(수기)하여야만 奉公(봉공)할 수 있을 것이요 수기에는 청념이 근간이 된다. 애민정신은 목자가 솔선 수범하는 敎化(교화)로 이루어진다. 당시의 제도였던 이호예병형공의 모든 기틀은 위민적 운용으로 이루어져야하며 목자는 부단히 제도의 모순을 개선하고 현실을 개혁해야한다. 목자는 이러한 徑輪(경륜)의식을 기초로 하여 백성을 돌봄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치자가 되도록 하여야한다. 이러한 목민 정신은 시대와 상황은 다르더라도 치인의 윤리로서 발전되어야한다.
2. 목민심서는 12강 6목으로 이루어져있다.
부임육조,율기육조,봉공육조,애민육조,이전육조,호전육조,예전육조,병전육조,형전육조,공정육조,진황육조,해관육조인 12강으로 나누어져 있다.








조선 후기 실학파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은 다음과 같다. ① 제1기:한백겸(韓百謙:1551∼1615) ·류몽인(柳夢寅:1559~1623) ·이수광(李磎光:1563~1628) ·허균(許筠:1568~1618). ② 제2기:유형원(柳馨遠:1622~73) ·박세당(朴世堂:1629~1703) ·김만중(金萬重:1637~92) ·정제두(鄭齊斗:1649~1736) ·이이명(李燎命:1658~1722) ·정상기(鄭尙驥:1678~1752) ·이익(李瀷:1681~1763) ·이중환(李重煥:1690~1760) ·유수원(柳壽垣:1694~1755) ·정항령(鄭恒齡:1700~?) ·신후담(愼後聃:1702~61) ·안정복(安鼎福:1712~91) ·신경준(申景濬:1712~81) ·위백규(魏伯珪:1712~98) ·홍대용(洪大容:1731~91) ·이긍익(李肯翊:1736~1806) ·이만운(李萬運:1736~?) ·박지원(朴趾源:1737~1805) ·이덕무(李德懋:1741~93) ·우하영(禹夏永:1741~1812) ·유득공(柳得恭:1749~?) ·박제가(朴齊家:1750~?) ·성해응(成海應:1760~1839) ·정약용(丁若鏞:1762~1836) ·한치윤(韓致奫:1765~1814) ·유희(柳僖:1773~1837) ·③ 제3기:김정희(金正喜:1786~1856) ·이규경(李圭景:1788~?) ·김정호(金正浩:?~1864) ·최한기(崔漢綺:1803~1879) ·이제마(李濟馬:1836~1900) 등이 흔히 손꼽혀 왔으며 시기별로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이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 그 주장의 내용과 시대를 아울러 고려하여 ① 이익을 대종(大宗)으로 하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학파, ②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 기구 일반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는 학파, ③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루게 된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경서 및 금석(金石) ·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학파로, 정약용을 이 3개 유파의 집대성자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실학의 개념형성과정




본래 실학이라는 용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학의 본령에 충실한 학풍(學風)’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대에 따라 수기와 치인의 중점이 달랐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 제유(諸儒)도 그들 자신의 학문을 실학으로 자처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의 원의(原義)가 그러하더라도 그것을 ‘이학(理學) 편중에서 탈피한 개신유학’ 혹은 ‘민족의식과 근대지향의식에 충실한 개신유학’이라는 뜻으로 전용하여 그것이 일반에 통용되는 한 괴이한 것은 아니며, 이와 같은 전의(轉義)는 이미 1930년대 이래 수십 년 간 대체로 순조롭게 일반에게 받아들여져 왔다. 조선 후기 실학이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의 두 척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개념의 형성과정에서 입증된다.

1870년대는 조선 후기 실학의 최종단계에 해당하며, 이때에 이미 실학파 제유는 서양 근대문명을 배경으로 한 외세의 충격을 실감하고 있었다. 1880년대와 1900년대에는 외세의 충격에 직면하여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의 복합으로서의 사상적인 대응이 요구되었다. 개화(開化) ·자강(自强) 사상이 그 대표적인 것이며, 그들의 상당수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인적(人的) 및 사상적 맥락을 가졌었고, 또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 등 실학파가 즐겨 표방하던 것을 이어받았다.

또 뒤에는 실용의 학문으로서의 실학이 민중 가운데에 고취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는 외세의 충격에 대처하는 현실적 방안으로서라기보다도 사상사적(思想史的) 대상으로서 조선 후기 실학이 주목되었다. 민족의식과 거기서 연유한 근대지향의식은 일본의 지배하에서 더욱 당연한 현실의 요구였으나, 조선 후기 실학은 현실타개의 방안으로는 벌써 뒤늦은 것이었고, 다만 민족적 주체성에 입각한 역사적 근거로서 그것이 재평가되어야 할 단계였던 것이다. 1930년에는 실학이라는 말의 새 개념, 즉 오늘날 통용되는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조선학(朝鮮學)이라는 개념의 모색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면서 동시대에 이루어졌으며, 한편으로 그 실학을 서양근대사상과 대비하여 이것을 근대사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전개되었다

실학에 대한 견해

실학의 등장 배경과 특징에 대한 견해에 대해 가르쳐주세요. 등장 배경과 특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요없습니다 견해에 뭐 어떤걸 적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좀 구체적으로...

실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

견해를 써야하는데 어떤게 좋을까요? 실학의 단점 같은건없나요? (정약용의 실학에 대한겁니다. 편지써야해서.) 그 당시 실학은 장점밖에 없다고 할...

6-11실학에대한이야기

... 이 견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주자 내지는 주자학에 대한 조선 후기 실학자의 태도를 검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실학자들이 남긴 주자나 주자학에...

실학의모든것

숙제로 실학에 대한것을 조사해야 하는데 찾기가 어렵내요. 가르켜주세요... 실학의... 홍대용의 자연 과학 사상과 그에 기초한 기 일원론적 견해 그리고 진보적인 사회 정치...

조선시대 실학에대한 것좀;;..

조선시대 실학에대한 것좀 해주시길바랍니다. 조선시대 실학에대한 역사신문을... 살펴보는 견해가 두드러진다. 또 민족의식 면에서의 특징으로는 첫째로 중국 중심의 화(華)...

실학조사 최대한빨리

... 이는 여말선초 기록에 보이는 ‘실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 관점대로라면 실학은 조선후기 실학이 아닌 통시대적인 명사로 이해해야 하는...

실학사상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 관심분야와 실학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고 實學의 견해들을 종합한 본의 입장을 전개 하였다. 결론적으로 실학은 (조선 후기에 당면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실학에 대해서

실학에 대한 것 때문인대요 1. 실학의 등장배경 2. 중농 중상학파의 주장 3. 국학연구... 대표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 그 주장의 내용과 시대를 아울러 고려하여 ① 이익을...

실학실학실학

... 오늘까지 실학에 대해 알려주세요~ 실학이란 실학에 대한 대표학자 3명 이상과... 살펴보는 견해가 두드러진다. 또 민족의식 면에서의 특징으로는 첫째로 중국 중심의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