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신분제도를 바탕으로 양반 중심의 사회를 유지했던 조선 시대에 천민은 백성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하지만 개중에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천출이란 주홍글씨를 벗어던지고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또렷하게 새겨놓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세종 시대의 과학자 장영실이다.
선왕 태종의 혈흔이 낭자한 정치 안정의 기반 위에서 즉위한 세종은 초기부터 전제와 세제의 개혁이라는 화급한 과제와 마주쳤다. 토지의 분배와 공평무사한 세금 징수야말로 안정적인 국가 경영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경지 당 농업생산성을 대폭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세종은 근대적 농법을 보급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을 제작함으로써 시기에 맞는 파종과 추수를 가능하게 했다. 농업이 국가의 중심 산업이었던 그 시기에 국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치력명시(治曆明時)’, 곧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최적의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종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농업 발전을 위한 과학기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막연히 하늘의 뜻에 기대어 농사지을 것이 아니라 과학의 힘을 빌려 자연의 변화를 계수화 함으로써 기회는 최대화하고 위기는 최소화하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조선 최고의 발명가로 거듭난 장영실의 이름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동래현의 관노, 대궐의 장인이 되다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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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항주 출신의 귀화인이다. 장영실이 살던 시기는 중원에서 원나라가 축출되고 명나라가 기세를 올리던 때이다. 중국에서 왕조가 흥망하면 수많은 망명객들이 조선으로 몰려오곤 했다.
장영실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틈에 끼어 조선에 들어왔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양반은 아니더라도 양인 정도의 신분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식인 장영실이 어찌하여 천민이 되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어머니가 동래현의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영실은 어머니가 관기(官妓)였으므로 관청에 소속된 관노가 된다.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에 따르면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천민이라면 자식은 무조건 천민이 된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 조건은 완급을 되풀이했지만 어머니가 천민이면 자식은 천민의 신분을 갖는 천자수모(賤者隨母)의 법칙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무수한 홍길동들이 많았다. 이런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도 장영실이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자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장영실을 선조로 모시는 《아산장씨세보》에는 그가 항주 출신인 장서(蔣壻)의 9세손이고, 부친은 장성휘(蔣成暉)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실록과 족보의 기록상 다른 부분은 쉽게 사실 여부를 가릴 수 없지만 세종 시대에 그가 관노 신분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기술자로서 장영실의 이름은 태종대부터 한양까지 알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 그가 틈틈이 동래현의 병기 창고에 들어가 낡고 못쓰게 된 병장기를 손질하면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장영실은 관상감 출신의 남양 부사 윤사웅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와 궁중에서 일하게 된다.
천민의 너울을 벗어던지다
1421년(세종 3년), 장영실은 윤사웅과 함께 북경에 가서 관성대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관성대는 13세기 원나라의 곽수경이 만든 동양 최대의 천문대로 각종 천문기기를 통해 천문을 살피는 장소였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장영실은 세종 시대에 완성된 각종 천문기기를 제작했던 것이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세종은 “우리나라는 멀리 해외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하나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시행하는데, 유독 천문을 관찰하는 기계만 빠졌다.”라면서 정인지와 정초에게 천문기상기기의 내력 및 출전을 연구하게 하고, 이천과 장영실에게 천문기상기기의 제작을 맡겼다.
당시 세종은 양각혼의성상도감을 설치하고 기기 제작을 맡은 장영실에게 책임에 걸맞은 벼슬을 내려주려 했지만 중신들의 완강한 반대로 포기해야 했다. 천출이라는 신분의 제약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영실은 낙심하지 않고 1424년(세종 6년)에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更點器)를 개선함으로써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자 세종은 그에게 상의원 별좌 벼슬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때 허조는 “기생의 자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오히려 상의원에 적합하다.”며 찬성했다. 이에 세종이 다른 대신들을 불러 재차 묻자, 그 중에 유정현이 나서서 “장영실이라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며 찬성했다. 그렇게 세종은 여러 대신들의 공론을 거친 다음에야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 벼슬을 내렸다. 장영실을 면천시켜 양반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행여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상의원(尙衣院)은 임금의 의복을 만들고 궐내의 재물과 보물을 관리하던 관청이었고,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으로 월급은 없는 무록관(無祿官)이었다. 하지만 장영실이 천민의 너울을 벗어던지는 데는 충분한 자리였다.
이런 영광이 그를 자만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듬해인 1425년(세종 년) 5월, 장영실은 이간이란 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대사성 황현, 양주 부사 이승직 등과 함께 태형 20대의 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장영실은 세종의 배려로 궁궐에서 자신의 직무에 종사했고, 수시로 사신을 따라 명나라를 오가며 우수한 과학기술을 입수했다.
조선의 눈으로 하늘을 보다
세종은 1432년(세종 14년)부터 세종은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과학기술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다. 천문 관측기구를 제작하는 의표창제(儀表創製)를 시작하면서 예문관 제학 정인지에게 총 지휘를 맡기고 천문관측 관청인 서운관을 확장하는 한편, 대형 천문대인 대간의대(大簡儀臺)를 경복궁 안에, 소형 천문대인 소간의대(小簡儀臺)를 북부 광화방 인근에 지었다. 대간의대는 높이가 9.5미터에 이르는 왕립천문대로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이때 장영실은 이천과 함께 간의대에 필요한 각종 기구 제작에 나섰다. 여기에는 과거 명나라의 관성대에서 입수한 정보가 커다란 밑천이 되었음은 두 말 할 필요조차 없다. 두 사람은 우선 간의(簡儀)를 만들어 한성의 위도를 새로 측정하는 한편, 그 결과를 기준으로 각종 기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간의는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천문 의기로 혼천의(渾天儀)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혼천의는 천체의 위치와 시각과 함께 태양과 달의 운동을 측정할 수 있지만, 간의는 천체의 위치만 측정하는 기기였다.
세종은 그 과정에서 장영실에게 정5품 무관직인 ‘행사직(行司直)’을 제수함으로써 업무 의욕을 고취시켰다. 그러자 장영실은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불과 1년 만에 혼천의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기형(璣衡)’이라고도 하는데, 천구의(天球儀)인 혼상(渾象, 하늘의 별을 둥근 구형에 표시한 의기)과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이용하여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에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혼천시계(渾天時計)라고도 부른다. 《조선왕조실록》 1437년(세종 19년) 4월 15일자 기록에는 이 혼천의에 대한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