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열의관한 수학자 3명알려주세요(급 내ㅑ공100)

수열의관한 수학자 3명알려주세요(급 내ㅑ공100)

작성일 2014.11.2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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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열의관한 수학자 3명알려주세요 역사적배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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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보나치


레오나르도 피보나치(1170-1250),


이탈리아 수학자로 이집트그리스시칠리아 등의 나라를 여행하며 아라비아에서 발전된 수학을 두루 섭렵하였습니다.

이 후 수학을 유럽 여러 나라에 소개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특히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보급 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 많은 업적 중 피보나치수열은 12세기말 이탈리아에서 처음 제안한 것으로 

한 쌍의 토끼가 계속 새끼를 낳으면 몇 마리로 불어 날까?”를 연구하다 새로운 수의 체계를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저서 [산반서에서는 피보나치수열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 해석 방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토끼의 새끼 수 이외에도 자연을 통해 발견된 기타 수열을 통하여 그 학설에 대한 입증을 증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연을 통한 수의 체계]   1) 꽃잎에 숨어 있는 피보나치 수열

                  2) 해바라기 씨앗에 숨어 있는 피보나치 수열

           3) 성장하는 나뭇가지의 수

           4) 앵무 조개 껍질에 숨어있는 피보나치 수열

           5) 솔방울의 나선

           6) 피아노의 건반에 나타나는 피보나치 수열








2. 발견을 통한 피보나치 수열의 개념 알아보기?

 

    1의 발견. 한 쌍의 토끼가 계속 새끼를 낳으면 몇 마리로 불어날까? ’

 ; 한 쌍의 토끼는 매달 암수 한 쌍의 새끼를 낳으며 새로 태어난 토끼도 태어난 지 두 달 후 부턴 매달 한 쌍씩의 

   암수 새끼를 낳는다고 한다.   그러면 농장 주는 1년이 지난 후 모두 몇 쌍의 토끼를 갖게 될까



 *이미지 출처 :    




 [ 1] 토끼의 피보나치 수열

  


[그림1] 에서 보여지는 규칙을 숫자로 나열하면

 1,1, 2, 3, 5, 8, 13, 21, 34, 55,89,,,,,,,,,,의 규칙과 수열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 숫자의 규칙을 보면 앞 두 숫자의 합이 다음 수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풀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제 2의 발견. 꽃잎에 숨어 있는 피보나치수열 




  

 

식물들의 꽃잎 수에서도 피보나치 수를 볼 수 있는데 식물의 종류별로 꽃잎의 수가 2, 3, 5, 8, 13, 21, 34, 55,89,,,,,, 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꽃잎은 서로 잎이 가리지 않도록 배열되며 줄기를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자라다,

다시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자라난 다고 합니다.

이는 모든 꽃잎들이 햇빛을 잘 받고가장 많은 수분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치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 3의 발견. ‘앵무조개 껍질에 숨어 있는 피보나치 수열’   



*이미지 출처 :  

 

 



 

  

1,1, 2, 3, 5, 8, 13,,,,,,,,,, 수를 정사각형을 만들어 나란히 붙여 모두가 접하는 새로운 직사각형을 만들어 봅니다.

그런 후 각 각의 정사각형 안에 사분원을 그려 넣으면 나선형을 그릴 수 있데이 사분선은 1.618 의 반지름을 유지한 채 무한대로 팽창합니다.

 

 

이렇듯 피보나치수열에 대한 규칙성은 자연에서 발견된 체계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수열은 황금비율과도 연관성이 있다고 합니다

 




3. 피보나치수열 과 황금비와의 연관성?

 


황금비는 그리스 수학자 애우독소스가 붙인 것으로 가로 와 세로의 비가 가장 

아름다운 선분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짧은 선분) : (긴 선분)=(긴 선분) : (긴 선분)+(짧은 선분)을 만족하는 선분의 분할로 긴 선분의 길이를 계산하면 1.618033989…로 소수점 아래 숫자가 끝없이 계속되는 소수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소수 셋째 자리까지 나타낸 1 : 1.618 을 황금비로 사용합니다.

 

 

 


가로세로의 비율이 황금비 (1:1.618) 를 이룰 때 가장 안정감 있고 균형 있는 아름다운 직사각형으로 사람들은 느낀다고 합니다.

 

이것이 피보나치 수열과 연관성을 가지는 이유는 수열의 앞,뒤 수를 나누면 황금비 1.618 값에 가까운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 발견된 규칙(피보나치수열)은 사람이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비율(황금비)과 인접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출처

[출처김현지, “생활 속에서 발견된 피보나치 수열에 대하여”,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석사 학위 논문

[출처오시봉,영양오 피보나치수열과 황금비에 관한 연구”, Journal of Science Education. Vol.16(1999)/ p.155

 


[참고 동영상피보나치 수열 : http://vimeo.com/9953368


 



4. [1우리가 피보나치 수열의 개념을 통해 얻어 낸 것?


1) 피보나치수열은 발명이 아닌 발견이며 자연계에서는 최적의 조건을 위한 발생이라고 여겨진다.

2) 우리의 창작물에 피보나치 수열을 대입하여 심미성과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3) 디자이너로서 황금비의 활용으로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도전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4) 피보나치수열이나 황금비는 자연에서 발견된 하나의 규칙일 뿐 꼭 디자인적으로 녹여야 하는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다.


2.가우스


가우스 (1777 - 1855) : 도이칠란트의 수학자

 

19세기 전반 최대의 수학자로서, 순수 수학에는 물론, 응용 수학에도 눈부신 업적을 남겨 '수학의 왕자'로 불리고 있다. 그의 업적은 현대수학과 이론 물리학 외에, 오늘날의 과학 기술 분야의 발전에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브란시마이크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불과 10세때 등차 급수의 합을 구하는 공식을 알아내어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한다. 나중에 브린시바이크 공의 도움으로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학생시절인 19세때 유클리드 이래 2000년간 삼각자와 컴퍼스만으로는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해 왔던 정 17각형을 그릴 수 있음을 증명해, 대수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 최소 제곱수를 발견하여 복소수평면을 발표하였으며, 1799년에는 이른바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증명함으로써 학위를 받았다. 그는 정 14각형 그리는 방법을 정수론에서 얻었는데, '수학은 모든 과학의 여왕이며,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정수론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1801년에는 <수론연구> 를 발표하여 정수론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업적을 쌓았다. 1801년 이후로는 괴팅겐 대학 교수로 평생을 보냈는데, 그는 정수론 이외에도 최소 제곱법을 비롯한 곡면론,허수론,방정식론등을 깊이 연구해 수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타원함수의 발견과 최초로 완전한 정의를 내린 복소수등은 그가 죽은 후, 그의 유고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의 증명은 이전의 뉴우튼, 오일러 시대의 수학과 그 이후의 수학을 수학 사상적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복소수란 말도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자기 유도의 단위인 '가우스'란 말도 그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출처:http://math.kongju.ac.kr/math/main/enter16.html

 

수학의 왕 가우스
아빠, 그 계산이 틀렸는데요."

세 살짜리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장부책에 써 넣은 계산이 정말로 잘못되었던 것이다. 가우스가 신동임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또 있다. 초등학교때 1부터 100까지 더하도록 시키자마자 바로 답을 구하였다고 한다. 다른 학생들이 1+2+3+…9를 계산하는 동안 가우스는 1+100, 2+99, 3+98, …, 50+51와 같은 식으로 하여 101*50=5050의 정답을 구했던 것이다. 나중에 가우스는 자기는 말보다 계산을 먼저 배웠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아르키메데스, 뉴턴과 더불어 3대 수학자로 꼽히는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7)는 고집세고 난폭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그가 수학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데는 이런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보호해주고 북돋아준 어머니의 힘이 컸다. 가우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어떤 위대한 것이 생겨나온다는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었다. 마치 에디슨의 어머니처럼. 또, 가우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외삼촌인 프리드리히가 있다. 그는 베짜는 일을 직업으로 했지만 아주 총명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는 누님의 아들에게서 자기와 닮은 성향을 발견해내고는 사물을 꿰뚫어 보는 방법을 가르치는 등 소년의 머리를 단련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였다고 한다.

10세 때, 또 다시 수학 시간에 그의 재능을 발휘한 가우스에게 뷰트너라는 그의 선생은 자기 돈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학 교과서를 사다 주었다. 그러나 가우스는 한꺼번에 이 책을 읽어버렸다. 뷰트너 혼자로는 이 어린 천재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의 조수요한 마르틴 바르텔스는 수학에 정열을 가지고 있는 17세의 청년이었다. 바르텔스와 가우스 사이에 따뜻한 우정이 자라게 되었고, 이것은 바르텔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두 사람은 함께 공부했다. 어려운 문제는 바로 서로 도와가며 풀고, 수학책을 같이 보면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의 증명을 자꾸 해나갔다고 한다.

가우스가 14세가 되자 바르텔스는 가우스를 평생의 후견인인 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에게 소개시켜주었고, 가우스는 이 후 학비와 생활비 걱정없이 수학에 정진하게 되었다.

수학의 왕이라는 가우스는 이처럼 타고난 재능과 그의 재능을 아낀 주변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키워진 것이다.



3. 오일러


개요 


Leonhard EulerOiler [1], 1707.4.15~1783.9.18

스위스수학자, 그리고 해석학의 화신. 그리고 능숙한 위키니트인 당신은 '수학관련 위키가 이렇게 길다고?'라고 놀랄거다.

수학계의 전설. 흔히 말하는 3대 수학자에는 들어가있지 않지만, 그 3명의 수학자보다도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진정한 우리 모두의 스승. eπ 등을 사용하기 시작하거나, 막 사용하고 있던 것을 오일러가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이게 바로 오일러의 위력.

당신이 대학교, 아니 고등학교만 들어가도 오일러의 업적을 만나볼수 있다. 그게바로 e. 그리고 지수와 로그! 전까지만 해도 로그와 지수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였으며[2], 그렇기 때문에 로그의 역함수가 지수라는게 밝혀진후 많은 발전이 있었다.[3]
[edit]

2 그의 생애 

어린 시절 요한 베르누이[4] 에게 수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13세때 대학에 입학하면서 신학을 전공할지 수학을 전공할지 많은 갈등을 하다가 결국 수학을 전공하기로 하지만, 평생동안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남았다.[5]

그리고 20세인 1727년에 베르누이 형제의 추천으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로 건너갔다. 이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는 요한 베르누이의 아들 다니엘 베르누이가 있었는데 1733년에 다니엘이 러시아를 떠나면서 오일러가 다니엘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이때 고작 26살의 나이로 수학과장이 되었다.

1735년에는 집념이 강하고 연구에 온 힘을 다하는 자세를 가진 것은 좋았으나 적당히 해야하는 걸 잊어서인지 겨우 28살 때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1741년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 아카데미로 적을 옮겼다. 그럼에도 러시아 측에서 오일러에게 연금을 계속 보내줬다고 한다. 오일러도 감사의 뜻으로 자신의 논문의 일부는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쪽에 꾸준히 보냈다. 그런데 오일러의 성격이 투박했는지 프리드리히 대왕은 초청해서 불러온 오일러를 "사이클롭스"라고 놀려대서 25년간 베를린에 머물면서도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야갤러

이때 다시 러시아로 와달라는 예카테리나 2세의 요청을 수락해 1766년에 다시 러시아로 되돌아간다. 하루에 20시간 이상을 연구에 매달리니 몸이 버틸 수가 없었던 게 당연했는데 오른쪽 눈을 잃은 후에도 몸을 혹사시키는 버릇을 그다지 고치지 않다가 결국 이때 (백내장으로) 남은 눈마저 못 보게되어 나머지 삶을 맹인으로서 지내야 했다.[6]

맹인이 된 후 그가 연구한 문제 중에는 태양과 달, 지구의 위치를 계산하는 공식이 있는데 이 문제를 낸 것은 영국 해군이었다. 망망대해에서 배의 위치를 계산하려면 태양과 달과 지구의 위치를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력에 의해 서로 영향을 미치는 3개의 물체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이른바 '삼체문제'라 하여, 이후 앙리 푸앵카레[7]에 의해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이 증명된 것이었다. 여담으로 이로부터 시작된게 카오스 이론.

그러나 오일러는 "세 별의 위치를 굳이 정확하게 알아낼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항해하는 배가 자기 위치를 cm 단위까지 파악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 착안한 오일러는 반복연산방식(알고리즘)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첫번째 계산으로 대략적인 값을 알아낸 후 이 값을 계산식에 다시 넣어서 더 정확한 값을 얻어내고,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일러는 배의 위치를 km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고, 영국 해군은 오일러에게 상금을 지급함으로서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1771년에는 백내장 수술을 했다곤 하는데 며칠간 시력을 회복했다가 다시 잃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1766년부터 죽는 해 까지 약 17년을 맹인으로 지낸 셈이다.

그는 1783년 9월 18일 가족들과의 점심식사 후 학술회의 동료 Anders Johan Lexell와 새로 발견한 행성 우라노스(천왕성)와 그 궤도를 연구하는 도중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지게 되고 몇 시간 후 오일러는 일생동안 쉼 없이 지속했던 그의 위대한 계산을 영원히 안식케 한다.

그 후 오일러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Dekabristov Island에 있는 Smolensky Lutheran Cemetery에 묻혔고 1956년 오일러의 250주년 탄생을 기념하여 그의 묘비는 그가 남긴 유품들과 함께 Alexander Nevsky Monastery에 있는 18th-century necropolis로 이장된다.

일생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비록 시련이 그를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고 그 시련을 계기로 오히려 스스로를 더욱 영광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계속된 끊임없는 연구에 시력과 건강을 잃으며 결국에는 뇌출혈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그의 일생은 단순히 한 수학가의 일생이 아닌 인간이 어떻게 시련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가를 보여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로서의 귀감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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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의 업적 

오일러의 공식, 한붓그리기 규칙[8]등으로 유명하다. 여기까진 고등학생 수준이고, 사실 오일러가 했거나 오일러 이름이 들어간 수학 정리나 공식은 너무 많아서(...) 여기에 적기도 힘들 정도다.

주요 활동분야는 해석학(미적분, 복소해석, 수열, 미분방정식)과 정수론[9]이고, 기하학(특히 위상수학의 시초로 여겨지는 정다면체와 평면 그래프에 관한 연구. 한붓그리기는 이 연구들에서 빙산의 일각이다.)과 역학 분야에도 많은 연구를 했다.

한 세대 뒤의 또 다른 천재 수학자인 가우스보다, 오히려 오일러의 연구를 보다보면 정말 천재적인 직관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비유하면 일반인 수학자 기준으로 A에서 B를 발견 후, B에서 C를 발견하고 C에서 D를 발견해나갈때, 오일러의 경우는 B, C가 생략된채 A → D로 바로 정곡을 찌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B, C를 이미 머리 속에서 알고있던게 아니라 자신도 B, C를 모른채 그냥 A에서 바로 D가 튀어나오는 수준. 실례를 들면 복소수 i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고 이 i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무도 감을 못잡아 뉴턴같은 경우는 i가 등장하는 방정식은 오류라 하고 다른 수학자들도 헷갈려하고 있었는데 오일러는 i^i 등의 값을 정확히 연산해냈다.[10][11]

하지만 천재적인 직관력에 비해 엄밀성은 조금 떨어진듯 하다. 예를 들어 그의 논문에서는 √-5 √-3 = √15 같은 간단한 오류등이 종종 등장하고 대수학의 기본정리에 대해서도 결과는 정확히 예측을 했지만 증명에서는 오류가 존재하여, 당시 20대 초반의 젊은 가우스에게 공격을 받았다. 가우스의 이름이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진 계기가 바로 당시 최고의 수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오일러의 [대수학의 기본정리[(임의의 복소계수 다항방정식의 근은 한 개 이상의 근을 가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근을 알아낼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증명의 오류를 찾아내고 비판한데 기인한다. 하지만 가우스의 증명에서도 오류는 발견되었다. 뭐야 이 사람 자기나 잘하지

1911년부터 오일러가 생전에 낸 문헌들을 정리해서 "Opera Omnia"라는(라틴어로 "전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책으로 묶어내고있는데, 오페라 옴니아는 75권이 넘게 나와있고 여전히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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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그는 페르마가 남긴 자료를 뒤진 끝에, n=4일 경우의 증명을 찾아냈다. 페르마 자신이 증명해서 써놨는데, 오일러가 매의 눈을 부릅뜨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걸 찾지 못했던 것. 그는 이 증명을 바탕으로 n=3의 경우의 증명을 해냈지만, 일반적인 경우의 증명에 실패하였다.[12] 그러나 n이 소수(素數, prime number)여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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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감마함수[13], 제타함수[14] 

오일러의 천재적인 직관은 현재 수학에서 중요시 여기는 두 함수에서도 작동했었다.

감마함수의 극한형태를 만들어내서 감마함수를 미분한다던가 로그를 씌운다던가의 조작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서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같던' γ[15]와의 연관점을 찾아냈다. 다만 감마함수의 경우 오일러가 정의역을 자연수에서 더 큰 범위로 확장시킨 방법은 무한곱으로 나타낸 방법인데 반해 요즘에 감마함수를 정의하는 방법은 르장드르가 해놓은 방법이다. 물론 둘이 동치인 것은 증명 가능하다. 이외에 바이어슈트라스가 감마함수를 정의한 방법도 유명하다.

제타함수에서는 오일러 곱(Euler product)라고 불리는 것을 증명해내서 완전한 수론의 주제로 여겨졌던 소수를 해석학쪽으로 이끌어 내는 것을 성공해낸다.[16] 이것을 살짝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릴수도 있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이 소수의 규칙성을 분석해내는데 '미분'[17]같은 강력한 무기를 쓸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도 만약 오일러가 없었다면 리만 가설같은 무서운 가설같은건 안나왔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 오일러 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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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오일러곱 

오일러 곱은 제타함수와 소수와의 관계를 기술하는 것이 주 목적인데 증명만 생략하고 간단히 결론만 쓰자면


좌변: Σ n=1~∞는 해당 수열의 무한합을 의미한다
우변: Π는 해당 수열의 무한곱을 의미하며 p prime은 p가 소수이며 n번째 항의 p에는 n번째 소수가 들어감을 의미한다

오일러가 증명에 사용한 방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설명하자면 '리만가설(승산)'의 저자 존 더비셔는 이 증명을 독자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증명을 찾아놓고, 적어났는데 오일러가 증명한 원 방법을 살펴보자마자 적어논 쪽지들을 그냥 버렸다고한다. 그 증명에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18]와 비슷한 방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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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기호의 고안 

수학이론 외에도 오늘날 많은 영향을 미치는 훌륭한 업적이 있는데 바로 몇몇 수학 기호를 통일시킨 것이다. 그중 유명한 것 몇개를 서술하면...

  • 1734~1735년, x의 함수를 f(x)로 표기함
  • 1736년, 약 반세기 전에 이미 발견된 수였으나 표기법이 제각기 따로놀던 자연로그의 밑에 e라는 기호를 씀
  • 1737년, 원주율의 기호로 π를 답변확정함
  • 1777년, 허수 단위의 기호로 i를 씀[19]
  • 합을 나타내는 기호로 Σ를 도입함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표기법은 이 정도이고 몇몇 짜잘한 것도 있다.

  • 삼각형의 내접원의 반지름을 r로 표기함
  • 삼각형의 외접원의 반지름을 R로 표기함
  • 삼각형의 변을 a,b,c로 표기한뒤 그에 대응되는 각을 A,B,C로 표기함
  • 삼각형 둘레의 반을 s로 표기함
  • 자연로그를 lx로 표기함 이건 버려졌다
이 표기법들이 널리 사용된 이유는 오일러가 시대를 초월한 천재이기 때문이기도, 그리고 편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교과서를 저술했던 학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학사가이자 오일러 빠돌이인 윌리엄 던햄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 확실히 현대의 독자가 오일러의 저작을 보면 마치 최근에 쓰여진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런 느낌을 받는 이유는 오일러가 현대적인 표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영향력이 너무도 커서 후대의 수학자들이 그의 방식(style)과 표기법, 그리고 형식을 답변확정했기 때문이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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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약방의 감초 

연구분야가 굉장히 광범위하고 남긴게 많은 만큼 오래되고 유명한 미해결 문제에선 꼭 한번씩 언급된다. 골드바흐의 추측은 골드바흐가 오일러에게 쓴 편지로부터, 리만 가설의 제타 함수의 유래는 오일러의 연구[21]에서 시작되었으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도 역시 도전하였다.

영국의 해밀턴[22]이라는 수학자는 어렸을때 보인 천재성으로 인해[23] 매우 주목받던 수학자였고, 뉴튼-라이프니쯔의 미적분관련 논쟁으로 인해 대륙 수학자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그 이후 대륙의 오일러와 가우스 수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웃풋이 떨어지던 영국민들에게 있어 해밀턴은 다시 한 번 뉴튼의 영광을 재현할 국민적 희망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해밀턴이 연구하던 분야가 바로 복소평면에서 축을 하나 더 확장한 3차원 공간 시스템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10여년의 연구끝에 결국 실패하고 4차원 공간에서 방법을 찾아내는데 이것이 바로 사원수군(Quarternion)이다. 그리고 이 발견으로 해밀턴은 일약 영국의 국민스타로 떠오르고 영국민은 희열에 들뜨는데...문제는 한참 옛날에 오일러가 골드바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와 동일한게 이미 발견되었다. 게다가 오일러는 이것을 발견해놓고도 대수롭지 않은 발견인양 쳐박아두었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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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일러와 관련된 명언 

오일러의 업적은 너무나도 대단해서 나중에 수학자들은 그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몇 마디를 남겼는데 유명한 것을 적자면.

'오일러를 읽고 또 읽어라. 그는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 - 피에르 라플라스

'비유할 필요도, 과장할 필요도 없이 오일러는 해석학의 화신이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또 독수리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그는 아무 힘을 들이지 않고 계산을 해냈다' - 프랑수아 아라고[24]

'오일러는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거장이다.' - 존 폰 노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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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외 

오일러가 수학 논문을 냈던 잡지중에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에서 새로 창간한 "Commentarii Academiae Scientiarum Imperialis Petropolitanae"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오일러가 논문을 워낙 많이 써낸 덕분에 편집자는 실을만한 내용이 없어서 잡지가 휑해질 걱정 없이 편하게 일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이 냈는지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은 오일러가 죽고나서 그의 논문을 무려 50년동안 우려먹었다. 오일러의 저술량을 평균내면 1년에 약 800페이지 분량을 저술한 꼴이라고 한다.

수학사가 칼 보이어는 "오일러의 1748년 저작 '무한소 해석 입문'이 해석학에서 갖는 위상은 기하학에서 '원론'이 갖는 위상과 같다."고 평했다.

마치 오일러의 일화인 것처럼 잘못 알려진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오일러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앞에서 당시 유명한 철학자이자 무신론자였던 드니 디드로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수식을 제시하며 "(a+bn)/n=x 이므로 신은 존재합니다. 대답해 주시오!"라고 말하자 수학적 지식이 부족하여 반박할 수단을 찾지 못한 디드로는 그대로 꿀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라는 것.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마저 저서인 만들어진 신에 잘못 인용했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박부성 교수(경남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의 조사[25]에 의하면 이 일화는 티볼트(Tiebault)라는 사람의 책 <베를린에 머문 20년의 추억>에 나오는 이야기가 원전인데, 원래 이야기에서는 오일러가 아니라 '러시아의 한 철학자'이며 수식도 (a+b^n)/n=x가 아니라 (a+b^n)/z=x라고 한다. 또한 디드로가 등장하긴 하지만, 수학 지식의 부재로 답을 하지 못한것이 아니라 낚시 수준이 워낙 한심해서 씹은 것이라고 한다. 디드로는 기하학과 확률 분야에 대한 논문을 쓸 정도로 수학에 조예가 있었다. 따라서 이 정도 수식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실제로 와전된 이야기들에서는 대부분 디드로가 수학에 무지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리고 성품이 온화했던 오일러가 저렇게 과격하고 비논리적인 공격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렇게 잘못된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이 티볼트의 책에 실린 일화를 소개하면서 위와 같은 변형을 가하고 디드로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드 모르간의 저서에 실린 것이라 딱히 원전을 확인하지도 않고 이를 인용하는 바람에 진짜인 것처럼 널리 퍼져버린 것. 참고로 박부성 교수는 드모르간이 착각했다고 여기는 듯 하다. 실제로 오일러가 당시 러시아에서 주로 활동했던 것이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점 등등 착각할 만한 요소들이 있었다고 한다.

2013년 4월 15일 구글 메인 화면의 로고는 오일러의 탄생일을 기념하여 그의 대표적인 발견들인 오일러의 공식과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건너기 문제, 복소평면, 도형 꼭지점의 오일러 정리 등으로 디자인되었다.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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