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세계대전의 양상

제 2차 세계대전의 양상

작성일 2023.11.2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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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의 양상이 뭔가요
대량학살 인귄유린 등등을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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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남기는 것은 오로지 파괴와 슬픔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히틀러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망상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에서 수천만 명의 죄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 《전쟁의 역사》(버나드 로 몽고메리 저)의 작가 후기 중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사망자 수는 공식집계도 없고 학자들마다 추정치도 다르다. 현재 외국 학계에서는 직접적인 사상자를 대체로 5,000만 명~7,000만 명 사이로 잡으며 여기에 기아, 기근 등으로 인한 추가 피해 2,000만 명~2,800만 명을 더해 대략 7,000만 명에서 1억 명 정도를 가장 보편적으로 추정한다. 과거에는 5,000만~5,500만 명이 가장 보편적이었고 한국 교과서에도 대부분 5,000만 명대로 작성되어 있는데 최근 사료의 추가 발굴 등으로 독소전쟁과 중일전쟁의 사망자 수가 이전보다 늘어나고 기근, 전염병 등 간접적인 피해 또한 전쟁 피해자로 규정하게 되면서 2차 대전 사망자 수가 기존의 수치보다 소폭 증가하였다.

당시 기준으로 이보다 인구가 많았던 나라는 중화민국 국민정부, 영국령 인도 제국, 소련, 미국, 일본 제국, 나치 독일 정도였다. 대부분의 추정치로도 그 이전까지 최대 인명 피해였던 제1차 세계 대전 사망자 1,500만보다 압도적으로 크며 특히 2차 대전의 일개 전장이었던 독소전쟁은 1차 대전의 2배, 중일전은 1차 대전의 1.5배의 사망자를 낳았다.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나라는 소련으로 공식적으로는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약 1,800만 명이 사망했지만 공식 집계되지 않은 사망자를 포함하면 최대 2,600만에 달한다고 추정되며 이는 전전 소련 인구의 약 13~14%에 해당한다. 참고로 소련 정부는 붕괴 순간까지도 군 인명 피해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고 1993년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집권 당시 그리고리 크리보세예프(Grigoriy Krivosheev) 장군이 연구해 발표한 내용이 전부이기에 딱히 대체자료가 없다. 다만 전쟁 초기의 피해 기록이 이루어지지 않아 누락된 것이 많다.

또한 소련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를 배출한 중화민국 역시 공식 사망자는 약 131만 명으로 집계되었지만 실제로는 군민 포함해 최대 2,2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전전 중국 인구의 약 4~5%에 해당한다.

2차 대전 최초의 피해국인 폴란드의 경우 전체 인구의 1/6에 달하는 약 600만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300만 명은 유대인들이었다. 또한 동남아 일대에서도 일제의 가혹한 수탈로 인해 수백만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추축국의 경우에도 인명피해가 극심했다. 독일에서는 최대 740만 명, 일본에서는 최대 31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렇게 동유럽과 중국, 동남아 및 주요 추축국에서 극심한 인명피해가 나온 것과 달리 서부전선에서는 인명피해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구체적으로 미국 40만, 영국 45만, 프랑스 60만, 이탈리아 50만 등 절대적인 수치는 여전히 적지 않지만 동유럽과 극동에 비해 경미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7] 게다가 추축국에 의한 민간인 대량 살육이 곳곳에서 자행되었기에 민간인 사망자의 비중이 이전의 전쟁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고 추축국에 잡힌 포로에 대한 열악한 처우로 포로 생존율 또한 낮았다.

사상자를 제외해도 피해는 심각했다. 유럽에서만 총 2,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중국도 수 백만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일본에서는 전체 도시 인구의 30%가 자신의 집을 잃었다.

물적 손실

1. 전비

개전으로부터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를 갈라 먹었던 열강국들이 전후에 승전국, 패전국 할 것 없이 미국을 제외하고는 죄다 국고가 거덜날 정도로 전비 지출이 막대했다. 더욱이 해가 지지 않을 정도의 위세를 떨쳤던 대영 제국조차 그 거대한 식민지들을 경영하는 건 고사하고 본국조차 건사하기 힘들어질 만큼 피폐해져 결국 초강대국에서 지역 강국으로 내려앉아야 했고, 한때 대영 제국의 라이벌이던 프랑스도 영국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았다.

대략 전쟁에 동원된 모든 국가의 전비는 1조 달러로 추정되며 프랑스는 국민총소득의 3배에 해당하는 전쟁 비용이 발생했으며 벨기에와 네덜란드도 이와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에 의해 점령된 유럽 국가들은 농업 시설 및 농작물 파괴와 기계와 비료의 부족 그리고 인력 유출로 막대한 농업적 피해를 입었으며 전쟁으로 인해 주요 철도 체계를 포함한 내부 운송 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었다. 그래서 1945년까지 서유럽의 경제는 완전히 마비 상태에 놓여있었다.

2. 주요 시설물 파괴

2차 대전으로 인한 유럽 내 시설물의 피해는 막대했다. 영국은 영국 본토 항공전과 V 시리즈 로켓의 공격으로 인해 전체 주거지의 30%가 파괴되고 손상되었으며, 벨기에와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는 전투의 한복판에 있었기에 전체 주거지의 20%가 파괴되고 손상되었다. 독일은 미영 연합군의 전략폭격으로 인해 49개 대도시에서 주거지의 39%가 파괴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동유럽은 그 피해가 훨씬 심각했다. 폴란드는 학교, 과학기관, 공공행정시설의 60%, 농업 시설의 30~35%, 광산 및 전력산업의 32%가 파괴되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주거지의 20%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소련은 독일에 점령당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서부 러시아가 초토화되었고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 주요 도시들 역시 파괴를 면치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독소전쟁 참고.

아시아 내 시설물의 피해 또한 만만치 않았다. 중국의 열악한 운송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했고 몇 안되는 병원과 보건 기관은 대부분이 파괴되어서 의료 문제도 야기했다. 필리핀도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신세가 되어서 마닐라의 항구 시설과 시가지 대부분이 초토화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전략폭격으로 인해 66개 도시권의 40%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쟁범죄

1. 목록

간접 원인을 제외한 2차 대전의 전체 사상자 7,000만여 명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민간인들은 고의적인 인종 청소를 비롯해 기아, 오폭 등으로 사망했으며, 대부분의 전쟁범죄는 추축국에 의해 자행되었다.

특히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서 약 300만여 명의 비유대계 폴란드인들을, 홀로코스트로 600만여 명의 유대인들을, 그리고 소련과 동유럽 등지에서 1,500만여 명의 슬라브계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였으며, 이는 사회기간망의 파괴나 기아 등으로 죽어간 동수 혹은 그 이상의 희생자들을 제외한 수치라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단연 돋보인다.

일본 제국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추산하였을 때 중화민국에서 약 800만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하였고, 동남아 전역에서도 400만여 명의 피해자를 낳았다. 이 수치는 물론 기근과 전염병 등 부차적인 이유로 사망한 피해자를 제외한 조직적인 학살 기준이다.

특히 전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소련과 중화민국의 전시 민간인 사망자 수는 정확한 통계조차 불가능한 실정이나 각각 약 2,400~2,600만 명의 소련인과 약 2,000~2,200만 명의 중국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전과 전후 양국의 인구 통계를 통해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외에도 최대 추정치 기준 폴란드(600만 명), 인도네시아(400만 명), 인도(300만 명), 베트남(200만 명), 유고슬라비아(200만 명), 필리핀(100만 명) 등에서도 가공할만한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위에 열거된 나라들에 비하면 비교적 가볍지만 여전히 수십만 단위의 결코 적지않은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독일과 일본은 각종 반인륜적인 생체실험 및 성착취를 자행했고, 추축국 점령지 치하 주민들에 대한 강압적인 생활 통제와 강제 노역은 일상다반사로 발생하였다.

또한 파시스트 이탈리아, 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등 기타 추축국들 역시 적지 않은 전쟁범죄를 일삼았는데 이탈리아는 독일처럼 곳곳에 강제수용소를 설치하였고 헝가리는 나치의 학살에 적극 가담했으며 크로아티아는 우스타샤로 대표되는 세르비아계에 대한 조직적이고 가학적인 학살로 악명을 떨쳤다.

반면 연합국의 전쟁범죄 역시 추축국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 심각했다. 특히 소련은 서방 연합국보다 추축국에 가까운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보로 악명이 높았는데 대표적으로 폴란드 침공 직후 카틴 학살을 저질렀고 핀란드와 발트 3국을 침략했으며 점령지 주민들을 시베리아로 강제이주시켜 많은 아사자와 동사자들이 발생했다. 또한 전쟁 말기 소련군은 독일, 헝가리 등 추축국의 본토로 진입하면서 집단 강간 및 학살극을 벌였는데 약 200만여 명의 독일 민간인들과 수십만의 기타 추축국 민간인들이 소련군의 보복에 의해 사망하였고, 그에 준하는 수의 대민 피해(강간, 약탈 등)가 발생하였다. 게다가 소련은 동유럽 점령지에서 친나치 인사들은 물론, 반나치 반공주의자들도 대량 학살하여 동유럽에 꼭두각시 정권들을 수립해 주민들을 탄압했다. 소련군은 극동에서도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도 폭압적인 행보를 일삼았는데 일례로 소련군은 북한에 진입한 이후 조선인들을 상대로 대량강간을 저질렀고 반공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으며 수풍댐 등 각종 사회자본과 인프라를 약탈했다. 게다가 소련은 종전 10년이 지난 1950년대 중반까지 독일, 일본,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 추축군 포로들을 굴라크 등에 억류 수용하여 자국 재건에 이용했고 한때 동맹이었던 서방국들조차 이와 같은 소련의 행태를 비난했다.

서방 연합군의 경우 국제법을 철저히 준수했기에 추축군이나 소련군에 비해 훨씬 관대하고 인도적이었으나 라코니아 사건처럼 상호불신과 군사적인 논리로 인해 적잖은 불상사가 종종 발생하였으며, 개인 단위의 일탈과 보복심리로 인한 전쟁범죄 역시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미국은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로 대표되는 일본계 미국인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일삼았으며 프랑스에서는 나치로부터 해방된 직후 친나치 부역자들은 물론, 독일군과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들을 향한 집단 린치와 마녀사냥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세계 대전의 참혹함 속에서 군인들 역시 제네바 협약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살해·학대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나치 독일은 소련이 제네바 협약에 조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적국 포로에 대한 무차별 살상을 정당화하였으며 동부 전선의 소련 포로들의 생존율은 10%를 넘기지 못했다. 일본 제국의 경우 인명을 도외시하는 군국주의 세뇌로 인해 거짓 항복이나 자살돌격, 카미카제 등 전시 윤리에 비추어보아도 비상식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이는 태평양 전쟁이 인외마경이 되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전쟁의 결과 연합군에서는 약 1,000만여 명의 소련군과 300만여 명의 국부군이, 추축국에서는 500만여 명의 독일 국방군과 200만여 명의 일본군이 사망하였으며, 정확한 통계는 내기 어려우나 이들 중 상당수는 군사작전이 아닌 서로에 대한 증오와 보복의 폭력 속에 희생되었다.

한편 군사작전과 전쟁범죄 사이의 어딘가로 취급받는 전략 폭격의 경우 추축국과 연합국을 가리지 않고 빈번했다. 전쟁 초기에는 연합국의 핵심 국가인 대영제국과 중화민국이 수도인 런던과 충칭을 공습당하는 등 추축국에 유리한 형세가 이어졌지만, 이후 미국과 소련이 참전하여 연합군이 확고한 제공권을 장악한 이후부터는 도쿄 대공습, 드레스덴 폭격 등 추축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 실시되어 상황이 반전되었다. 결국 세계 대전의 대미를 장식한 사건 역시 전략폭격의 하이라이트인 원폭 투하였다.

한편 핵무기와는 달리 독가스와 같은 생화학무기의 경우 공식적으론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미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가스의 위력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열강들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1차 대전보다 생화학 무기의 위력 및 투발 수단이 더욱 발달한 2차 대전 시기에서 생화학무기를 사용할 경우 자칫하면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인식하였고, 결국 생화학무기의 선제 사용을 기피하게 된 것. 단,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추축국은 생화학무기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독소전쟁 당시 나치 독일군이 반독 빨치산을 토벌하거나 유대인을 학살할 때,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군을 상대로 교전할 때,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군을 공격할 때에 생화학무기를 적극 사용했다.

나치 독일

독일의 전쟁범죄

아스크 학살

그래뉴 학살

라코니아 사건

뤼셀스하임 학살

르 파라디 학살

리디체 학살

말메디 학살

바르샤바 게토 학살

바르샤바 봉기 진압

바빈야르 학살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

아인자츠그루펜의 전쟁범죄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홀로코스트

T4 작전

일본 제국

일본의 전쟁범죄

731 부대

난징 대학살

마닐라 대학살

밀리환초 학살

바탄 죽음의 행진

베허호 사건

산다칸 죽음의 행진

신멸작전

아이카와 사건

일본군 '위안부' 강제 성(性) 징용

죽음의 철도

치치지마 식인 사건

파푸아뉴기니 학살

팔라완 학살

이탈리아 왕국

도메니콘 학살

포드험 학살

몬테네그로 봉기 당시 학살

Circular 3C(슬로베니아인 학살)

기타 추축국

헝가리 왕국

홀로코스트

노비 사드 학살

트레즈니아 학살 - 트란실바니아의 도시인 트레즈니아에서 헝가리군의 루마니아인 학살.

루마니아 왕국

홀로코스트

오데사 학살

크로아티아 독립국

세르비아인 학살 - 우스타샤 민병대의 세르비아인 학살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연합국

그 외 연합군의 전쟁범죄 목록

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

미국의 일본계 자국민 강제 수용

미군의 일본군 전사자 사체 훼손

소련

카틴 학살: 이 시점에서 소련은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영국, 프랑스의 동맹인 폴란드를 침략하여 이와 같은 학살을 저질렀다. 대전 후반기 소련군이 동유럽 점령지 내 친서방계 반독 레지스탕스를 숙청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행위를 저질렀다.

베를린 공방전, 부다페스트 공방전 등 추축국 본토 및 점령지 내 전투에서의 대량강간

발트3국, 폴란드, 체첸, 우크라이나 포로 강제이주 및 굴라그 수용

게겐마오 학살

네머스도르프 학살

프시조비체 학살

트뢰엔브리첸 학살

동유럽, 북한 등 점령지 내의 반공인사 숙청 및 강제 공산화

2. 추축국의 전쟁범죄 성격 차이

대표적인 양대 추축국인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 성격의 차이점을 서술한다.

2차 대전은 단순히 영토와 자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어느 집단이 살아남아 전 세계를 지배하고 어느 집단이 승리자에 의해 '열등'으로 낙인찍혀 영원히 소멸당할지를 놓고 싸운 전쟁이었다.

(중략)

1939년에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과 일본이 중국에서 1931년과 1937년에 벌인 전쟁, 그리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서 1935~36년 사이에 벌인 전쟁과도 다르다. 비록 당사자들에게, 특히 중국인들과 에티오피아인들에게는 매우 잔혹한 전쟁이었지만 이 전쟁들은 예전 전쟁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두 단계에 걸쳐 벌인 침략은 19세기 끝 무렵부터 벌어진 식민지 확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일본은 비록 중국을 희생양 삼아 영토와 자원을 늘리려 했으나 중국, 그리고 중국인의 완전한 소멸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과 정복 역시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벨기에, 독일인들이 벌이던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의 막바지에 이탈리아가 끼어든 결과일 뿐이다. 때문에 이 책은 동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전쟁이 아닌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하려 한다. 일련의 다른 전쟁들은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된 전쟁에 녹아들었지만 그 발단은 전혀 달랐으며 만약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계속 독립된 전쟁으로 남았을 것이다.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 2차 세계대전사 1, 길찾기, 일러두기 부분,

다만 그럼에도 일본 제국 역시 나치 독일에 조금 못 미치는, 거의 대등한 정도의 인명피해를 야기했다는 사실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2치 대전기 나치 독일에 의한 피해자 수 총합은 최대 4,000만 명에 달하며, 일본 제국의 피해자 수 총합 역시 최대 3,000만 명에 이른다. 이는 일본 제국이 나치 독일과 같이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음에도 전쟁범죄의 성격 자체가 유사한 파시스트 이탈리아보다 나치 독일과 더욱 묶이는 이유이다.

영향

1. 인권 존중과 현대 윤리의 대두

민간인과 군인 사망자를 모두 합하여 약 5,000만~7,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 전쟁의 여파로 서구권에서는 그동안 사회 주류였던 집단주의 사상이 쇠퇴하고 개인주의 사상이 대두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2차 대전 이후 전쟁 기간 중 벌어졌던 끔찍한 대량학살과 전쟁 범죄 등에 대한 전 인류적 반성이 행해지면서 인권 경시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전 세계에서 본격적으로 인지되기 시작하며 인권 의식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개개인의 존엄성과 자유 의지 등을 존중하는 정책들이 적극적으로 대두하였고, 그와 동시에 개인 심리학 또한 크게 발전했다. 이 덕분에 인류는 냉전이 시작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데탕트를 맞이했고 3차 대전의 위기에서 항상 벗어났다.

2차 대전은 참정권이 개선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자치령 또는 식민지들은 본국에 대한 희생의 대가로 자치권의 확대를 요구했으며, 이를 계기로 자치령에 본국과 동등한 입법활동이 보장되거나 많은 식민지가 독립하는 등 변화가 생겼다(후술할 국민국가 탄생 문단 참조). 대부분 국가의 여성 참정권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크게 향상되었는데, 총력전의 여파로 여군 병과가 연구되었고, 특히 남성이 징병되면서 산업 공백을 충당하기 위해 여성 노동자가 증가하였으며 여성이 경제활동을 담당하면서 여론을 형성하고 권리 확대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전후 페미니즘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유색인종의 참정권 또한 비슷한 시기에 크게 확대되어, 미국에서는 1965년 연방 투표권법이 가결되어 유색인종의 참정권이 완전히 보장되었다.

2. 반전 의식의 강화와 민주적 전쟁 억제

총력전을 겪고 난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이 군인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모두 겪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는 과거의 위상을 잃고 몰락했다. 또한 세계 대전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인식을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했다.

2차 대전은 히로시마-나가사키로 대표되는 신무기 실험장의 각축전이었으며 이것들은 민간인이라고 전혀 피해가지 않았다. 현대무기를 동원한 초토화작전이나 핵폭탄의 공포까지 목격한 국민들과 각국 정부는 이제는 확실하게 이긴다 해도 대충 배상금으로 뭉개버릴 수 없을 만큼 전쟁은 치를 대가가 큰 아주 비싼 수단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한 대립 구도가 전면전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했다. 물론 강대국들 간의 무력대결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고, 약소국 사이의 대리전으로 대체되었다.

3. 현대 국제정세의 확립

모호하게 전쟁이 종결되어 불안정한 질서가 유지되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전간기와는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은 비교적 선악 구도가 명확했고,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승패가 갈렸기 때문에[72] 전후의 역사와 세계 질서가 완전히 결정되었다.

특히 2차 대전으로 인한 가장 중요한 국제적 영향은 세계 패권의 중심이 기존의 서유럽에서 새롭게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 무렵까지 세계의 중심이었던 대영제국은 바로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이는 전쟁 중 유럽 대륙 전역이 히틀러의 수하에 떨어지며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하자, 영국의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식민지 관리에도 어려움을 겪은 것이 한 원인이었다. 1941년 미국이 참전한 이후 전장의 주도권마저 미군에 넘겨주었다.

특히 1941년 미국의 대추축국 선전 포고 전까지는 영국이 단독으로 대독일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경제적 타격이 컸다. 특히 1940년에는 수도 런던이 대공습을 당하거나 영국의 생명줄인 해상 보급로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지는 등 인도라는 거대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생존조차 힘들었을 정도로 휘청였으며, 미국이 참전하면서 숨을 돌렸으나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전쟁을 이끌면서 영국은 미국의 보조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끔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을 때 영국에 상당히 무리가 있는 요구를 했었음에도 처칠은 이를 수용했다. 루즈벨트 재선 후, 영국의 지원 요청에 대해 미국이 했던 제안(미국측의 영국 정부 회계 감사, 금괴 요구, 영국 국영기업 소유권을 헐값에 미국으로 이전)만 봐도 2차 대전 당시의 영국과 미국의 관계와 영국의 처참한 입장을 한눈에 보여준다. 결국 2차 대전을 끝으로 대영제국의 패권은 무너졌으며, 서유럽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가 본격화되었다.

미국과 소련 이 두 나라는 2차 대전을 주도한 양대 세력이었다. 소련은 독소전쟁 때문에 자국 국민 40%가 동원되어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14%의 인구가 희생되는 처참한 사투를 벌였다. 이로 인해 훗날 베를린 공방전의 주인공으로 떠올랐으며 서방 세계에 대해 자신들의 지분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고 미국 역시 태평양 전쟁에서 홀로 일본 제국을 상대하며 제국을 패망시켰고 유럽의 서부전선에서도 노르망디 작전을 성공시키고 프랑스를 해방시키며 전쟁에서 거대한 지분을 가지게 된다. 다만 미국은 자신만이 핵무기를 가지고 압도적 초강대국이 될 거라 생각하고 소련을 만만히 봤지만, 소련은 얼마 안 가 핵무기를 개발해냄으로서 양대 초강대국으로 미국에게 뒤떨어지지 않음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냉전 체제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진영에, 소련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에 각각 여러 국가들을 가담시키며 쌍방 간 세력 경쟁을 본격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 소련은 지구를 넘어 우주에서까지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고 극초강대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패권 다툼을 벌였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다른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도 막대한 전쟁 피해와 두 초강대국의 압박으로 인해 식민지를 청산하고 물러섰으며[73] 이에 따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과거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였던 수많은 독립 국가들이 새로 탄생하였다. 한국의 경우에도 카이로 선언에서 명시된 대로 광복을 맞이했다. 즉, 이미 1차 대전 이후 쇠퇴하던 제국주의 풍조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완전히 막을 내렸다.

간혹 대리전의 형태로 전쟁이 발생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각국은 과거 국제연맹의 문제점과 과오를 되새겨 이와 같은 참혹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세계적 통합과 협력 및 평화를 위해 유엔이라는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설하였고 이는 지금도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

4. 현대 국가의 탄생

제국주의 식민지 확장을 주도하던 유럽의 각 열강들이 1차대전때 받은 큰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기도 전에 다시 더 큰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면서, 도저히 유지가 불가능한 가지고 있었던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되면서 현재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민국가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들어낸 전쟁이기도 했다. 예컨대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8.15 광복 또한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치는 않아서 식민지를 평화적인 방식으로 독립시킨 국가들이[74] 있는가 하면, 자기들의 황폐해진 경제 재건을 식민지 빨대 꽂아서 할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포기 못해 2차 대전이 끝나고도 또다시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하나의 식민지로 묶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민족, 종교, 이념 등에 따른 갈등이 일어나 독립 후에도 인위적으로 그은 국경선과 민족갈등 등 내부 갈등을 수습하지 못해 다시 많은 혼란이 생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제국주의가 채 마감되기도 전에 실질적으로 시작한 미소 냉전 구도로 인해 전세계가 다시 미국편이나 소련편이냐 제3 세계냐를 가지고 선택의 길을 가느라 전후 혼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나라들도 숱하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수많은 국가의 정치 체제나 정책이 바뀌었고 국가나 정권이 멸망하거나 재탄생하기도 했다. 독일 제3제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은 전쟁에 패배하고 나라가 연합국에 점령당해 멸망한 뒤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독일은 나라가 둘로 분단되어 자유 진영의 서독과 공산 진영의 동독으로 나뉘었으며, 일본은 GHQ를 통해 민주주의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이탈리아는 공화정으로 변모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서양 열강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되었다. 다만 동유럽은 승전국의 하나로서 지역구 정리에 들어간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거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중국도 중일전쟁을 통해 국민정부가 혈투를 벌이는 동안 해방구를 건설하며 세력을 키운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국민정부는 뒤이어 이어진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며 중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지 겨우 4년 후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 공산화된다. 한국의 독립과 남북분단도 제2차 세계 대전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한다.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서서히 분단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종전 5년 후 6.25 전쟁이 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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