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지게 된 배경은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정철의 건저 사건이 주요 배경 원인입니다.
당시 동인이었던 정여립이 반란을 시도하려다 발칵되어 처형되자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의 공격으로 기축옥사가 발생해 정여립과 관련깊은 동인들과 사람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요.
이후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하자 선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게 되는데, 이때 기축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동인 강경파들이 정철의 사형을 주장하는 북인으로, 별 피해를 입지 않은 동인 온건파들이 유배형을 주장하는 남인으로 동인이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된 배경은 갑술환국으로 인한 남인의 처분과 송시열과 윤증의 회니시비 사건과 그로 인한 병신처분이 주요 배경 원인입니다.
송시열의 제자였던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무덤 묘비명을 스승이었던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이때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당시 비참하게 살아남은데다가 학문 차이로 틀어진 윤휴를 옹호하는 등의 행보에 불만을 가져 묘비명을 대충 써주었고 결국 이를 계기로 송시열과 윤증의 관계는 절교하면서 파탄을 맞이하게 됩니다.(회니시비)
이후 윤증과 유계가 함께 만든 <가례원류> 란 책의 출판을 놓고 유계의 아들 유상기와 윤증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였고, 윤증이 사망한 뒤에도 노론측은 윤증은 스승을 배신한 패륜아라며 비판하였고, 반대로 소론측은 윤선거를 비판한 송시열의 태도를 지적하며 서로 팽팽하게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는데요.
이로 인해 정치적 갈등이 끝이지 않자 마침내 조선의 국왕이었던 숙종은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바로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낸 신유의서에는 송시열을 비판한 글이 많지만, 윤선거의 묘지명엔 송시열이 윤선거를 욕한 내용이 없다며 사실상 노론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병신처분)
이 일과 더불어 갑술환국으로 남인에 대한 처결을 놓고 서인들은 강경파 노론들과, 온건파 소론으로 나눠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