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사를 배우는 이유는 편향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게 해줘요.
본격적으로 말하기에 앞서서 서희의 담판부터 볼까요?
거란이 고려를 치면서 내세운 명분은 고구려의 역사였죠. 그리고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들어서 되려 강동6주를 얻어내고요. 그리고 사람들은 이 내용에 환호해요.
실상은 고구려의 역사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전쟁 배경은 실제론 송과의 전쟁에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고자한 것이었고 강동6주 또한 고려가 지키기 힘든 지역으로, 거란과 고려가 서로 함부로 적대적 행위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족쇄역할이었죠.
역사논쟁은 그저 보기좋게 포장한 것일 뿐이었죠. 서희가 역사에 맹목적이었다면, 거란이 역사에 맹목적이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협상이었어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역사라는 이름의 선동적인 문구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누가 더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누가 더 정당한가를 두고 늘 역사를 들먹이죠.
그 유명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말도, 실제로 누가 퍼뜨렸는지 그 누구도 몰라요. 그저 선동적인 문구였을 뿐이었죠. 이 강력한 선동에 휘말려 분노를 표하는 이들 중 그 누구도 그 다툼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피해를 입게될 존재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역사를 공부하면 저절로 아시게 되겠지만, 인류가 역사에서 얻는 유일한 사실은 인류는 역사의 내용에서 그 무엇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죠.
그러나 우리 개인은 무언갈 하나씩 꼭 챙기게 됩니다.
역사의 광기성 어린 폭력성에 위기감을 느끼고, 역사를 한발짜국 뒤에서 바라보게되죠. 모두가 정통성을 외칠 때 그 사람만큼은 그 결과로 인한 변화와 피해자들을 앞장서서 바라봐요. 모두가 광기에 사로잡힐 때, 유일하게 그것이 광기라는 것을 눈치채고 역사 속 사례를 통해 살아남을 방도를 궁리하게되죠.
특히 세계사는 더 중요해요. 개인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한국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도 그래요. 우리는 다른 것을 판단할 때 나 자신를 중심으로 판단해요. 그 결과, 상대를 잘못 이해하고 비난하기 바빠지죠. 이를 확증편향이라고도 해요.
예컨데 조선 시대에 무너져버린 해상무역으로인한 고립성을 이해할려면 그 무엇보다 세계사를 먼저 바라봐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저 '멍청한 선택을 했구나'로 그 현상을 이해할 수 밖에 없어지죠.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도 세계사를 모르고 바라보면 마찬가지로 그저 '멍청한 선택'으로 이해하는 것 밖에 안돼요.
단순하게 생각해서, 혼자 방구석에서 자신만을 이해하는 사람과 자신을 이해하면서도 외부에 나가서 다른사람을 이해하는 사람 중, 누가 더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위 예시에서 방구석에 있는 사람을 한국사로, 외부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세계사로 본다면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란 자명해져요. 역사란 욕구와도 같아요. 이 욕구를 눈치채지 못하면 욕구에 집어삼켜져 몸을 망치게되고, 이 욕구를 정확히 이해할려면 나 자신만을 느낄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나며 그 사람도 느껴야하는 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