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 생애 연표와 시대적 배경 알려주세요.

진시황제 생애 연표와 시대적 배경 알려주세요.

작성일 2023.04.2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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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생애를 나타낸 연표와 진시황제가 살았던 시대의 배경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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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편집]

1.1. 출생과 어린 시절[편집]

기원전 259년 정월(음력 1월 15일)에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영이인[1]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황제의 아버지 영이인은 진나라의 태자[2]가 된 안국군 영주(嬴柱)의 아들이었지만, 서자라서 보잘 것 없는 대접을 받고 장평대전 이전에 조나라의 인질로 끌려갔다.[3] 그러던 중 당시 사업차 한단에 와 있던 거상 여불위의 주목을 끌어 후원을 받으며 안국군의 정부인인 화양부인을 포섭해 안국군의 후계자가 되기로 약속을 받는다. 얼마 뒤 영이인은 여불위의 집에서 조희를 만나게 되었고, 여불위에게 부탁해 조희를 얻었다. 그리고 영이인과 조희 사이에서 자녀가 생기게 되었고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시황제인 '정'이었다.

기원전 257년, 정이 3살 때 증조할아버지이자 진나라의 명군인 소양왕 영직이 장군 왕의(王齮)를 보내 장평대전 때 함락시키지 못했던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조나라의 효성왕은 진나라의 인질인 영이인을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나, 여불위가 600금을 뇌물로 써가며 아버지 영이인만 간신히 구출했다. 정과 어머니 조희는 한단에서 탈출하지 못했지만, 조희가 조나라의 호족 집안 출신이라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한편 어린 시절 정은 연나라에서 볼모로 온 세자 연단과 친하게 지냈는데[4] 이때 친분을 계기로 연단은 정이 진왕이 된 후 진나라의 볼모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사이가 틀어져서 탈출하기에 이른다.

기원전 251년 정이 9살 때 증조부 소양왕이 죽고, 할아버지 안국군이 효문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 영자초[5]도 과거 약조대로 태자가 되었고, 조나라도 태자에 오른 영자초를 두려워해서 그의 가족인 조희와 정을 진나라로 보냈다. 그리고 효문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병사하고, 태자 영자초가 진나라의 장양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나라의 후계자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자초의 후원자였던 여불위는 승상이 되어서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1.1.1. 출생 문제[편집]

시황제의 어머니인 조씨[6]는 원래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던 여자인데, 이후 여불위가 진나라 승상까지 된 것을 보고 원래 시황제는 조씨가 임신했던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사실 사마천의 《사기》 <여불위 열전>에서 시황제는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는데 그 외에 정확한 근거가 발견되진 않았으므로, 현대에는 진나라의 멸망 이후, 진 왕조의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아 부정한다.

《사기》 <진시황 본기>에서는 시황제가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적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초의 부인은 문맥상 바로 앞에서 여불위의 집에 있었다가 자초의 부인이 된 그 여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녀가 조나라 호족 가문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 국가를 피해 도피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호족가라면 보통 힘있는 집안은 아니었을 것인데, 그런 집 딸이 무희[7]였다는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희가 조나라 호족 집안의 본처 소생인지, 근거 없는 첩의 소생인지 알 수 없으며, 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을 당시 조희 외에 또 다른 부인의 존재 가능성 역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1.2. 왕위에 오르다[편집]

영자초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당시 진나라 왕이자 시황제의 증조부였던 소양왕이 붕어하였다. 효문왕(=안국군)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사흘만에 붕어하고 말았고[8] 이를 이어 영자초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장양왕이었다. 그러나 장양왕도 3년 만에 붕어하는 바람에 정이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된다.

1.3. 실권을 갖다[편집]

아직 진왕 정의 나이가 어렸던 탓에 당시 장양왕의 후원자로서 막대한 권력을 누렸던 승상 여불위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상방(相邦)[9]의 직위에 올랐으며, 왕으로부터 아버지와 같다는 '상보'(尙父)[10]의 칭호까지 얻었다. 이토록 강력한 권세를 얻은 여불위는 아직 나이가 어린 시황제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이 되었다. 때문에 진나라의 실권은 사실상 여불위의 손 안에 들어갔다.

여불위가 상방의 지위를 얻은 이후부터 과거에 자신의 첩이었던 정(시황제)의 어머니 조 태후와 간통을 하였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워했으나 조 태후가 여불위를 사랑하여 늘 불러 정을 나누려 했으므로 결국 가짜 환관 노애(嫪毐)를 조 태후 옆에 붙여 시중들게 하였다. 노애는 정력이 출중해서 조 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로 조 태후는 과연 여불위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간통이 길어지면서 조 태후는 노애의 아이를 두 명이나 낳고 말았는데 여기에 더하여 노애와 조 태후는 아이들을 감추어놓고 키우면서 정을 몰아내고 그들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모략을 꾸몄다.

그러나 정이 성인이 되었을 쯤에 이들의 행각은 곧 발각되었다. 당시 노애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던 덕택에 그의 성격은 점점 더 거만해졌다. 하루는 연회에서 술주정을 하다가 어느 신하가 그의 거만한 태도를 꾸짖자 도리어 "내가 왕의 계부인데 두려울 게 뭐냐?"는 말까지 듣고 말았다. 모욕을 당한 그 신하가 속을 터트리며 나가는 것을 본 정이 그의 분개한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야기를 들은 정은 노애를 몰래 조사하여 모든 진상을 파악하고 말았다.

노애는 조 태후와의 불륜이 드러나자 최후의 발악을 하여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를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정이 곧 창문군창평군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반격에 나서게 되니, 수도 내에서 교전까지 벌인 끝에 노애는 패하여 달아났다. 승리한 정은 조 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은 아이들, 즉 이부 동생들을 자루에 넣고 때려서 죽였으며, 달아난 노애를 붙잡아서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한 뒤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후 자신의 어머니인 조 태후를 싫어하게 되어 그녀를 유폐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의 간청으로 조 태후를 다시 함양의 왕궁으로 불러와 모셨다.[11]

한편 정은 실권자인 여불위도 노애와 조 태후의 스캔들을 들어 처벌하려 하였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신하들과 식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벼슬을 빼앗고 낙양으로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그리하여 한때 왕과 견줄 만한 세력을 지녔던 여불위의 권세는 무참히 꺾여버렸고 실의에 빠진 여불위는 곧 자살하였다. 결국 정은 노애와 조 태후 그리고 여불위까지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짓눌러 나이 22세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비로소 친정 체제를 굳히게 된다.

1.4. 천하 통일을 이루다[편집]

정은 상방 여불위마저 제거하면서 마침내 진나라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잠시나마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평생토록 보좌할 이사를 만났고, 그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소양왕이 쌓은 기반으로 나머지 6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정은 모사인 울료의 주장대로 6국의 대신들을 미리 매수하고, 6국 사이를 이간질했는데, 이는 실제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조나라의 간신 곽개 등이 명장 이목의 활동을 저지하여 진군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울 수 있었고, 6국이 서로를 믿지 않아서 도우려 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대대적인 원정을 벌일 수 있도록 군비를 꾸준히 증강하여 함양 일대에 정국거(鄭國渠)라는 운하를 파고, 촉 지방에는 도강언을 건설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 그래도 부강한 진나라는 6국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과 병력을 갖게 되었다.

이후 정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여서 진나라와 인접했던 국가들, 즉 삼진(한•위•조)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를 장군 이 멸망시켰고, 그 다음에는 삼진 중에 가장 강했기에 동방 진출을 위해 반드시 무너뜨려야 했던 조나라를 기원전 228년 장군 왕전이 수도 한단을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기원전 225년에는 왕전의 아들 왕분위나라를 수공으로 쳐서 대량을 함락시키고 멸망시켰다.

그 뒤 이신의 주장대로 20만의 군사로 초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초나라의 명장 항연에게 격파당하자, 노장 왕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진나라의 총전력인 60만 대군으로 다시 공격해 기원전 223년에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궁지에 몰린 항연은 결국 자결로서 생을 마감했다. 《사기》에 의하면 당시 초나라의 군사도 4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로 보인다. 다만 진나라만큼의 중앙 집권력이 없었고, 각 귀족들의 사병이라는 성격이 강했기에 진나라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정의 조나라 볼모 시절 친구였고, 진나라의 볼모였다가 탈출한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나라의 이런 정복 활동을 우려해서 형가를 보내어 정의 암살을 시도했다 실패하고, 격노한 정은 이를 빌미로 연나라를 맹공했다. 동북 변경인 요동까지 도망간 연나라 왕 연희는 아들 연단의 목을 잘라서 바치면서까지 용서를 빌었으나, 정은 거부하고 집요하게 추격해서 왕분이 연나라 왕을 사로잡아 서주 창건때부터 이어져 온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쳐서 왕분이 제나라 왕 전건의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재위 27년인 39살에, 정복을 시작한지 약 10년 만에 정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다만 시황제는 모든 영토를 완전히 병합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전국시대가 끝난 후에도 엄연히 위(衛)나라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12], 스스로 위(衛)를 야왕(野王)으로 옮겨놓고도 끝까지 멸망시키지 않았고, 2대 황제인 호해가 위의 마지막 군주 각을 서민으로 만들면서 완전히 멸망시켜 버린다. 다만, 이 시기 위(衛)는 작은 고을 하나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진시황의 통일이 완전한 통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는 없다.

1.5. 제국의 통치[편집]

천하통일 이후 정은 기존의 전국 시절 군주의 호칭인 진왕(秦王)을 대체할 호칭을 찾았다. 이에 신하들은 '태황'이라는 호칭을 주장했으나 시황제는 그 주장을 물리고, 태황에서 '황'만을 남기고 신을 뜻하던 상고의 호칭 '제'를 붙여 황제란 칭호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진나라의 첫 황제, 즉 진 시황제가 되었다.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의 명령을 '교'(敎)가 아니라 조(詔)라고 바꾸고[13], 천자의 자칭을 종전의 '고'(孤)나 '과인'(寡人) 대신 짐(朕)으로 바꾸었다. 이전까지 '짐'은 고대 중국어의 1인칭 대명사 중 하나였는데[14] 시황제가 '짐'을 천자의 전유물로 바꾼 것이다. 이때 시황제가 확립한 '조'와 '짐'의 용법은 후대 왕조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또 시황제는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했다. 시황제가 천자의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한 이유는 시호라는 게 군주가 사망한 후에 후대 왕이나 신하들이 생전의 공과 과를 평가하여 정하는 것이라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릴 경우 감히 아들(새로 즉위한 군주)이 아버지(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고, 감히 (살아 있는)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시황제는 이것이 굉장히 무엄하다고 생각해서 폐지했던 것이다.[15] 그래서 진나라의 황제는 다른 왕조와 달리 시황제(첫 번째 황제), 2세 황제(제2대 황제) 이런 식으로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관습은 시황제의 아들 이후 두 번째 통일 왕조인 한나라때에 바로 부활했다.

1.5.1. 업적[편집]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시황제는 본격적인 제국 통치 사업에 몰두하면서 갖가지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전체적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던 정체성과 체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우선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했는데, 이전에 주 왕조가 중국 대륙을 통치했을 때 사용한 봉건 제도와는 그 근본이 달랐다. 기존에 실시되던 봉건제도는 국가의 수장인 왕이 중앙을 통치하되, 그 외의 부분은 쪼개어서 동성인 희성 왕족이나 이성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형식으로써 중앙 권력에 비해 지방 정권이 더욱 비대해 질 수 있는 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시황제는 이러한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나라를 군과 현의 행정 지역으로 나누어 쪼갠 후에 중앙 정부 소속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 군현제는 진나라의 멸망과 초한전쟁을 거치며 사라졌지만 전한고제 시기에 군국제로 반쯤 부활하고, 개국 공신인 숙청(고제), 외척 여씨의 난 진압(5대 한문제), 근친인 유씨 황족들이 일으킨 오초7국의 난 진압(6대 한경제) 등을 거쳐 7대 한무제 시기에 마침내 다시 정식으로 부활한다. 하지만 이후에는 좀 더 세분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는지 주-군-현 3단체계로 개편되고, 원나라 이전까지 그러니까 남송 시기까지 약 1,300년 가까이 중국의 행정제도가 되었다.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해서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던 법가 사상을 중국 전역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사상 개혁도 시도하였다. 이때에 서적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여 진나라의 역사책과 법령집 외에 농사, 천문, 점술, 의학 등 실용 지식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서들을 없앨 것을 명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분서갱유와 같은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6][17] 게다가, 이러한 사상 개혁은 부작용이 컸는데, 법가의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이 중국 전역의 통치에 쓰이게 되자 혹법에다가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은 법률과 형벌에 익숙하지 못했던 6국의 백성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는 진나라에 대한 증오로 이어져 진시황 사후 각지에서 반진 반란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옛 6국의 정체성을 지우고 통일된 중국을 만들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다. 옛 6국이 각자 만들었던 장성과 요새를 부수라고 명령했으며, 하천의 제방을 터서 험준한 지형들을 평평하게 만들어 만에 하나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방어하기 어렵게 했다. 전국시대를 거치며 쌓여있던 무기를 녹여 없애게 했고 수도 함양으로 전국의 부호와 유력자를 이주시키는 등 지방 약화를 추구했다.

중국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각지의 나라마다 화폐와 서체가 달라 서로 간에 교류하는 데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천하의 화폐반량전으로, 서체소전체로 통일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로 물건의 치수나 길이를 재는 도량형과 수레바퀴의 폭 등도 하나로 통일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가 통일된 광대한 중국 전역의 통치를 원활히 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특히 서체의 통일은 단순히 교류의 목적이 아니라 문서 기반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의 핵심이었다. 모든 보고를 오직 문서로만 하도록 하고, 황제의 명령이 관료제의 피라미드를 따라 전국에 전달되도록 하는데 공문서의 서체 통일은 필수적이었다.

또한 진시황은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수차례 벌이기도 하였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아방궁[18]여산릉을 건설하여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운하를 파서 수로를 통한 교역과 물품의 운송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황제의 명령을 지방 곳곳에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특히 언제나 중국에 위협이 되어온 흉노의 침략을 방어하고자 기존 7국의 성벽들을 보수해서 길다란 성벽을 건설했고, 진나라 멸망 이후에도 여러 나라들이 이 성벽을 보수, 증축, 신축하여 만리장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인하여 민심이 거칠어졌다.

1.6. 말년[편집]

이런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또 폭압적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부작용이 심했고 진나라 이외에 옛 6국 출신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우선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었던 법가 사상의 가혹하고 무거운 통치는 원래 진나라였던 지역 외에 나머지 정복당한 6국의 백성들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었고, 이러한 까다로운 법률과 가혹한 형벌 때문에 민심은 피폐해져만 갔다. 당시 진나라의 신분제는 이십등작이었는데, 전장에서는 수급 하나마다 한 계급씩을 올려줬고, 죄인은 계급에 따라 감형이나 형벌을 계급 강등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진나라의 백성들이야 지난 정복 전쟁에서 획득하였던 군공과 계급이 있었지만, 정복당한 6국의 백성들은 진나라를 위해서는 공을 세운 바가 없었기에 당연히 작위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6국의 백성들은 안 그래도 가혹한 제도와 형벌에 피지배민으로 그대로 노출되면서 차별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진시황릉 건설, 흉노 정벌, 만리장성 건설 등등에 수십만명의 인력을 동원해 국력을 낭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잦은 인력 동원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진승, 오광이나 유방의 경우처럼 민중의 엄청난 반발을 샀고, 이러한 점들이 진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는 농민 반란의 씨앗이 되었다. 이 때문에 황태자인 장남 부소마저 보다 못해 과도한 사업들을 중단하고 민생을 돌보라는 간언을 하였지만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부소에게 화를 내며 부소를 몽염이 있는 만리장성 건설 현장으로 추방해버리는 등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후대에 패업을 이룬 군주들 가운데 명군이라 불린 이들이 전란 직후 민심을 수습하고자 조세와 부역을 경감하고, 무리한 사업을 줄여 국고를 절약하는 등 조치를 취한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출처:나무위키 시황제/생얘

진시황제 연표

제발 진시황제 일대기…? 일생…? 생애…? 연표알려주세요 년도랑 그때 한 일좀 적어주세요 재발ㅠㅠ 내공 90 https://m.blog....

진시황제 생애알려주세요

인물 조사를 하고 있는데 진시황제 생애에 대해 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https://namu.wiki/w/%EC%8B%9C%ED%99%A9%EC%A0%9C?from=%EC%A7%84%EC%8B%9C%ED%99%A9#s-2.1

진시황제 시대적배경알려주세요

... 다음주에 시험보는데 길게하면 배낄거같으니까 요약좀해주세요 1. 사회혼란 당시 춘추전국시대로 주나라 밑의 제후국가들끼리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진시황제 법치주의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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