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지리와 역사, 산업이 궁금해요

제주도의 지리와 역사, 산업이 궁금해요

작성일 2021.10.2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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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지리와 역사 산업이 궁금해요.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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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본섬인 제주도의 면적은 1833.2km²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섬이다. 동아시아권으로 범위를 넓혀봐도 의외로 상당히 큰 섬에 속한다. 일본에서는 본토의 4개 섬[12]를 제외하고는 제주도보다 큰 섬이 없다. 19세기에 류큐 왕국을 침공해서 얻은 오키나와 섬도 1,201.03km²로 제주도보다 작다.[13] 쿠릴 열도의 이투루프 섬은 제주도보다 크긴 한데 일본에서는 영토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가 실효지배하고 있다.[14] 중국에서도 의외로 하이난 섬을 제외하면 제주도보다 큰 섬이 존재하지 않으며, 섬나라인 중화민국 역시 사실상 본토인 타이완 섬을 빼면 제주도보다 큰 섬은 없다. 나라나 그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 싱가포르+홍콩+마카오의 총합보다도 크다. 그리고 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폴리네시아, 카리브해의 소앤틸리스제도에 있는 국가 혹은 속령들 중 제주도보다 큰 나라는 사모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하와이[15],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한반도의 최남단 섬인 만큼 아열대기후에 가장 가까우며, 본토와 거리가 있는 섬이라 한반도 문화권 중에서 타 지역들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다. 덕분에 국내 관광 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여담으로 겨울은 당연히 춥다. 남부 지역이라고 가볍게 입고 오면 큰 코 다치니 주의. 바람, 돌, 여자가 많다고[16][17] 삼다도라고 불릴 정도로 바람이 쌩쌩 부는 지역이다.

또한, 타 지역에 비해 독특한 지형 및 기후 때문에 수능 한국지리에서 단골 출제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화산으로 발생한 섬이라 대한민국의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화산지형이 많이 분포하는 것이 특징이다. 주봉인 1947m한라산백록담의 분화구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소화산(기생화산)인 오름이 370여 개나 분포하는 것을 포함하여, 200~300m의 산방산과 타 오름(산)등 돌산, 각종 화산협곡과 주상절리 및 용암절벽들이 여러 곳에 산재하여 있다.

또한 해발 200m 근처만 가도 험한 산지가 나타나는 한반도와는 달리 해발 500m 이상의 높은 고도에서도 완만하고 평평한 고원 지형이 나타나 이국적인 느낌을 주며, 제주시에서 서귀포시까지 5.16 도로1100도로를 달리다 보면 바깥 풍경은 동네 야산이나 언덕배기마냥 완만한 지형인데도 실제 고도는 상당히 높아 기압차 때문에 귀가 먹먹한 현상이 나타나는 걸 느낄 수 있다. 대신 육지의 평야보다는 급하고 육지의 산보다는 완만한 경사가 섬 전체를 아우르는 긴 수평변위 상에서 나타나므로, 시가지에서도 경사진 도로가 많이 나타난다. 거기에 국지적인 기복까지 있어서, 이 때문에 제주시나 서귀포시 시가지는 서울, 부산과 달리 산지를 직접 낀 도시가 아님에도 경사가 쩔어준다(...). 특히 제주항으로 배를 타고 상륙했거나, 신서귀에 가봤다면 위엄쩌는 기울어진 시가지를 느낄 수 있다. 나름 고속화도로에 섬을 약간 비스듬하게 관통하는 평화로도 해발 400m는 찍고 간다.

제주도의 기반암은 한반도 본토의 그것과 유사한 선캄브리아기 편마암류 및 중생대 화강암류로 이루어져 있으나, 표층으로 올라갈수록 신생대 화산 활동으로 쌓인 현무암 지대가 나타난다. 제주의 지하에는 한라산 및 기생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해안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다양한 종류의 용암 동굴이 존재하며, 대표적인 예로 만장굴을 들 수 있다.

제주도는 화산지형이기 때문에 물이 고이지 않고 대부분 지하로 스며드는 특징이 있다. 그러다보니깐 제주도내 하천 대부분이 건천이고 산지천 등 일부 하천을 제외하고는 비가 오는 경우에만 물이 흐른다.[18] 농사도 밭농사가 주를 이루며 논농사의 비중은 극히 적다.

한 때 제주도는 한라산이라는 거대한 순상화산체 자체라는게 정설이었다. 이것이 제주도 사람들의 한라산에 대한 인식과 합쳐서 나온 말이 '제주도가 곧 한라산이며, 한라산이 곧 제주도이다'란 말이다. 그러나 현대에 연구 실적이 쌓이면서, 한라산은 단일한 화산체가 아닌 여러 단성 내지는 준단성화산체들 중에서 가장 중앙에 크게 쌓인 것에 불과하며, 사실 제주도가 하나의 커다란 화산지대였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 화산폭발이 한라산의 중심폭발이 아니었다.

역사

1. 조선시대 이전[편집]

독립소국 탐라국이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주호 세력이 존재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원래 한반도 본토의 나라들과는 매우 문화가 이질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탐라국, 원나라 등을 제외하면 한반도 왕조에 속해있었는데 백제의 부용국 → 통일신라의 속국 → 고려의 속국 → 고려에 합병 → 삼별초원나라에 합병 → 고려 → 조선대한제국을 거쳤다.

그리고 탐라국은 938년 평화적으로 왕조를 닫게되었지만, 나라의 지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105년 고려에 의하여 탐라군으로 격하되면서 나라의 지위가 없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자치권은 있었는데, 이것마저 금지된 게 1402년 조선초이다. 자세한 사항은 탐라국 문서 참조.

2. 조선시대[편집]

조선태종 때 탐라국 체제를 폐지하고 전라도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세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완전하게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는 행정구역으로 되었다. 제주목은 현재의 제주시와 유사하며, 대정현과 정의현간 경계는 현재 서귀포 신시가지를 가르는 것으로 보이며 결국 옛 대정현의 강정동과 옛 정의현의 법환동-서호동을 가르는 경계로 추측된다.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은 법적으로는 수평적인 위치와 권한을 가졌으나 실질적으로는 제주목의 수장인 제주목사가 제주도 전체를 관할하였다. 3개 고을 중 제주목이 가장 인구가 많고 본토와의 연결도 하는 등 제주도 전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제주 목사가 제주도 전체의 방위를 책임지는 군사권도 가지고 있엇다. 제주목 관아는 제주시 삼도2동 지역에, 정의현 관아는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 내 구역에, 대정현 관아는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초등학교 터에 있었다. 이중 제주목과 정의현의 관아는 현대에 복원, 보존하고 있으나 대정현 관아는 여전히 터만 남아 있다.

섬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악명높은 유배지로 이름이 난 지역이 됐다.[1] 사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원나라명나라가 황실 인사나 세력가들을 유배보내는데 이용했고 고려 조정의 경우에는 소수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잠시 머물다 오는 식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건국에 반대한 고려 신하들을 유배보내기 시작하여 문헌상으로는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두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조선 최초의 제주유배자였다고 한다. 이후 제주도는 왕족들이나 유력 정치인의 유배 단골 코스로 활용되었고 대표적으로 광해군, 소현세자의 아들들, 송시열, 김정희, 최익현이 있고 조선시대에 제주로 유배된 사람은 대략 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유배인들이 유람차 온 것으로 여겨 제주성내에서 모임을 갖거나 주변 경승지를 찾아 유람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과거 유배인들은 현지인들과 일시적인 관계만 유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학맥을 찾아 계승하는 양상도 보였다.

또한 전통시대 공물을 많이 바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이 있었으며 해산물 또한 주요 공물품이 되었다. 귤 같은 작물의 경우 제주도에서 나는 최고의 산물로 평가되어 왕족들을 위한 진상품으로 엄청 보내려 했다고 한다. 귤나무에 맺힌 열매 하나하나마다 기록해서 그 물건들을 다 바치라 했다 하는데 태풍이라도 맞으면 내야될 공물은 그대로인데 수확물은 토막토막난 상태이니... 정작 그래놓고 가는 길에 썩어서 왕에게 전달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하여튼 그 때문에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뜨거운 물을 부어 귤나무를 없애려 시도도 했다.

제주도의 방어시설은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요약 가능. 봉수는 먼 거리를 감시하는 데에 연대는 가까이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봉화대 같은 통신시설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바다가 인해 매우 험하여 제주목사로 발령받은 관리는 사임을 할 정도로 가기를 꺼려하는 오지이기도 하였다. 가다가 풍랑으로 죽는 경우도 있기도 했으니. 하지만 탐관오리들에게 인기인 지방이었는데 본토와 떨어져 있어[2] 중앙의 입김이 잘 미치지 않기 때문에 일단 백성들 쥐어짜서 부정축재하기에 좋고 경치가 좋으니 놀러다니기도 좋고 또 소 목장이 있어서 쇠고기 먹기도 좋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농본국가라 소 금살령이 자주 내려져서 벼슬아치들도 쇠고기 먹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물론 제주도 소는 정부 소유라 함부로 잡으면 안 되지만 자연사한 소라고 허위보고하고 몰래 잡아먹었다고 한다. 거기에 덧붙여 귀한 한약재였던 우황 역시 짭짤한 부수입 거리였다. 더군다나 주로 기르던 소는 제주 토종 흑우로 진상품이었다.

그래도 제주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간 목사도 엄연히 있었다. 이약동 제주목사는 당시 한라산 정상에서 지내던 제사로 인해 물건을 지고 한라산을 올라야 하는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의 아라동 일대에 제단을 만들어 거기서 제를 지내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산천단이다.

상당히 전투적인 곳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중국이나 전라도로 가는 왜구들이 자주 들렀을 테니... 말도 많아서 기병의 비율이 한반도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여성도 예청(제주어다. 한자로는 女丁이라고 쓴다)이라 하여 군역을 졌다. 그런데 막상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제주도는 건드리지도 않아서 조선 영토 중 유일하게 평화로운 지역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전쟁 명분이 중국으로 가는 육상 통행권이라서 일본이 제주도를 점령할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나름 조선과 협상할 때 유리한 주장이라도 하려던 정치적인 계산을 한 걸로 보인다. 물론 그전에 명나라가 개입해서 패전했지만, 그래서 임진왜란 내내 제주도는 본토에 대한 식량 등 물자 지원에 집중하였다. 당시 제주 목사인 이경록이 제주도 병력을 본토에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조정에 보냈으나, 조정에서는 뜻은 좋지만 제주도의 방어도 중요하다며 이를 반려시켰다. 또한 김만일이라는 사람은 조정에 제주마 500여 필을 헌납하여 헌마공신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출륙금지령도 큰 고통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가 소탕됨에 따라 제주도가 평화로워지면서 호적상 인구가 1만 명에서 6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하는 시기를 겪었고, 이에 따라 인구가 과밀해지자 조정에서 실업자는 삼남지방, 범죄자는 평안도와 함경도로 이주를 보낼 정도였지만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공납이 늘어나게 되면서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희귀한 특산품이 많은 제주도의 특성상 제주도가 그 피해를 직격으로 받았다. 늘어나는 공납부담에 제주도민들이 삼남지방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바람에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인구감소 문제가 심각해지자 결국 인조대에 제주도민은 아예 본토로 이주가 금지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출륙을 금지하는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본토로 이주가 이어지자 배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어선 대신 뗏목인 테우를 써야했고, 때문에 과부 숫자가 더더욱 늘어나게 되었고 멀쩡한 어선도 툭하면 안돌아오는데 뗏목타고 나가면 퍽이나 안전하겠다. 조선 중후기의 제주도는 사실상 감옥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정조 때 최초로 김만덕이 흉년에 재산을 내어 제주도 사람들을 구휼한 공로로 국가에서 육지여행을 허락한 바 있다. 출륙금지령이 풀리게 된 것은 순조 시절에 이르러서였다.

자세한 사항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진상품 고난 문서 참조.

따라서 제주도는 조선시대 내내 수탈과 유배의 역사로 현대사 못지 않은 고통의 역사를 겪은 슬픔과 눈물의 섬이었다.

3.1. 근대[편집]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러시아 함대가 이에 대항하여 제주도를 점령하려고 시도한 제주성 위협사건이 일어났다.

1896년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제주부(府)로 통합하였다가, 1년 만에 복구하면서 전라남도 관할하에 두었다.

1901년 가톨릭 신자들의 횡포에 맞서 봉기한 신축민란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제주목, 정의군, 대정군완도군 일부(추자면)를 제주군으로 통합하였으며, 다음 해인 1915년 5월 군제(郡制)를 폐지하고 도제(島制)를 실시하면서 제주군을 제주도(島)로 개칭하고, 군수(郡守)를 도사(島司)로 개칭하였다. 여기서의 도(島)는 행정구역 단위 명칭으로 쓰인 것. 같은 시기 울도군(울릉군)도 울릉도(島)로 개칭되었다.

원래 제주도의 행정구역은 제주목[4]·대정현[5]·정의현[6] 세 고을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고을은 다시 방위에 따라 각자 좌면·중면·우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후 제주목의 좌면과 우면이 너무 넓어 신(新)과 구(舊) 자를 붙여 제주목을 구우면·신우면·중면·신좌면·구좌면으로 나눴고, 역시 지나치게 넓은 정의군 중면 역시 동중면·서중면의 두개 면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1914년 일제가 이들 행정구역을 제주군으로 통합하면서 원래 군의 중심지였던 제주목 중면과 정의군 좌면, 대정군 우면을 제주면·정의면·대정면으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나머지 면 이름들은 그대로 두었고, 그 결과 제주도 안에 방위를 나타내는 이름의 면이 구좌·좌·신좌·동중·중·서중·구우·우·신우의 9개나 되는 헬게이트(...)가 열렸으며, 구좌면·신좌면은 동쪽에, 구우면·신우면은 서쪽에 있는데 좌면은 서쪽에, 우면은 동쪽에 있는 등 완전히 행정구역 방위와 이름이 뒤죽박죽된 상태였다. 결국 1935년 이들 면들은 구좌면을 제외하고는 (주로) 면소재지 이름을 따서 모두 개칭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과 매우 긴밀히 연결된 편이었다. 제주 섬 인구의 1/4 정도 되는 인구가 일본 오사카 쪽으로 일하러 갔다 왔을 정도다. 광복 시점의 제주 인구가 30만 명 정도인데 이 가운데 10만 명 가까이가 오사카 등 공장지역에서 일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향한 인원이라 한다. 하지만 3년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면... 물론 당시의 일본 행정당국이나 일본인 지주에 대한 감정이 좋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고, 제주도에서 소규모였지만 의병이 일어나고 3.1 운동이전의 법정사항일운동이나 3.1 운동의 일환인 조천만세운동, 일제의 경제수탈에 맞선 해녀항일운동 등 일본에 저항하는 일이 이어졌다.

지금도 재일교포 중 상당수가 그 근원을 살펴보면 조상이 제주도 사람인 경우가 많다. 재일교포 100만명 중에서 제주도가 본적이거나 고향인 사람이 20만에 달한다고 한다. 제주도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 정도라는 걸 생각한다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큐멘터리로도 소개된 모리오카 냉면 체인인 뿅뿅사의 창업자인 변용웅씨의 부모가 제주도 출신이었으며, 새끼돼지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 또한 제주도 출신 교포부부의 자녀로 총련 소속이었다가 북한에 들어간 후 김정일과 만났다고 한다. 일본 최대의 도시락 체인 혼께 가마도야사의 오너인 김홍주씨도 제주도가 고향. 혼께 가마도야사의 국내 협력사가 한솥도시락으로 일본에서의 운영방식을 한국에도 그대로 도입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재일 음악가 양방언 역시 아버지가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출신이다.

다만 인구대비 재일교포가 많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부터 이루어진 식자층의 유배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제주도에서의 유배는 다시는 육지(즉 한번도) 밟지 못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이때문에 제주도에서 아에 살림 차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유배의 특성상 식자층들이 많이 찾아왔다. 거기다 유교문화로 인해 배움을 중시하는 특성상 그 좁은 제주도 곳곳에 사당이 세워지고 식자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해방이후 초, 중등교육이 의무화 되기 전까지 문맹률이 가장낮은 지역또한 제주도였다. 이때문에 신식문물에 대한 반감이 덜하고 같은 한자권이다 보니 말도 어느정도 통해서(히라가나어는 몰라도 가타카나 어는 한자로 통한다.) 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 것.

하지만 반대급부로 1910~1920년대 후반 일본 들 사이에 퍼진 사회주의에 대한 낭만 혹은 과장된 면 또한 흡수하면서 해방이후 남로당 세력이 뿌리깊게 활동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비극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은 "결호작전"에 따라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고자 했고 전 일본영토에 요새화를 지시했는데, 제주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기 때문에 "결7호 작전"에 따라 요새화가 시작되었다. 섬 곳곳에 토치카와 지하땅굴이 파여졌으며 항공대가 주둔했다. 해안 절벽엔 가이텐이나 신요와같은 자살병기들이 배치되었고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고 강제공출로 주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져만 갔다. 일제의 흔적들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땅굴은 제주도에 수학여행가는 학교들이 많이 거쳐가는 곳이기도 하다. 168cm 정도 키인 사람도 정신줄 놓고 똑바로 서서 다니다가는 머리를 부딪치는 적이 있는 땅굴인데, 하여튼 위에 써놨듯 미친 짓.

이 시기 제주도의 요새화에 관해서는 결7호 작전 문서를 참고할 것.

산업

제주도의 산업은 농업, 어업, 축산업의 1차 산업과 관광, 서비스업 등의 3차 산업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제조업 등 2차 산업은 상당히 빈약한 편으로 제주시 화북동의 화북공업단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소규모 농수축산물 가공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세계 어느나라나 도서지역 지역민 소득이 본토에 비해 많이 낮은 편인데 반해[51] 2016년 기준 전국 1인당 개인 평균소득이 1785만 원인데 제주도가 1690만 원 정도. 제조업 등이 부실해서 그런지 지역 총생산은 좀 낮은 편. #

의외로 통계만 놓고 보면 제주도의 수출 품목 1위는 반도체다. 메모리반도체 팹리스 업체인 제주반도체 등이 제주도에서 본사를 두고 연구 및 설계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 기사 그리고 카카오(기업), 쏘카 같은 IT 회사와 네오플, 넥슨 등 게임 제작사가 제주도에 본사를 두고 있다.

9.1. 농업[편집]

제주도의 농업을 살펴보면 제주도의 토양은 대부분이 물빠짐이 지나치게 좋은 현무암 이라서 농사를 짓는 것이 자급 형태로는 대단히 힘들고 당연히 대단히 귀한 곳이다. 그런데 제주도 전체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그러한 것이고, 당연히 제주도에서도 선사시대부터 벼농사를 지어온 지역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서귀포 인근의 하논.[53] 논농사 짓거나 지었던 지역에는 어김없이 고인돌이 수십 개씩 있으나 농사짓는데 방해된다고 치워버리거나 조경업자에게 돈받고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돌이 크다보니 의외로 비싸게 쳐준단다. 논이 없다고 벼농사 못 짓는 건 아니다. 산디라고 부르는 제주 전통 밭벼 품종이 엄연히 존재한다. 많이 경작하는게 아니라 밭 한켠에 조금씩만 경작하다 보니 아예 없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부족한 쌀을 대체하기 위해 보리, , 기타 잡곡 농사를 많이 지었고 이 잡곡으로 을 만들어 쌀밥 대신 제삿상에 올리는 것이라고 하는데[54], 쌀밥 올릴 자리에는 쌀밥 올린다. 먹을 게 풍족하고 살만해진 지금은 떡, , 밥을 함께 올린다. 혹시라도 오해하는 일 없도록 하자. 밭에서 재배할 수 있는 품종이 개발되어 그쪽에서 공급되는 양도 꽤 된다. 제주도의 벼농사

1980년대 한때 쌀값이 비싸 벼농사를 많이 지은 적이 있지만 쌀값이 하락하자 논농사를 접은 경우가 많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제주지역에서 소모하는 쌀의 대부분은 타 지역 농협에서 직접 운송해서 제주도에 세운 직영공장에서 도정하여 판매하는 루트를 거친게 많다. 기존의 도정된 쌀을 들여와 판매하는 방식에 비하면 품질이 월등하다. 이게 은근 돈이 되는지 다른 지역농협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쌀을 가공하여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박정희 정부 시기부터 제주도 감귤산업이 육성되었다. 1964년 제주도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수익성이 높은 감귤 생산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1965년 정부는 감귤주산지 조성 5개년 계획을 확정했다. 정부 주도로 감귤 증식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며 제주도의 감귤산업은 초고속으로 성장했다. 수익성이 보장되면서 너도나도 감귤을 재배했다. 급기야 제주도에서는 감귤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불릴 정도였다. 감귤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대학교 학비를 충당할 수 있을만큼 수익이 났기 때문이다.

이 전통적으로 제주도의 특산품이긴 했지만 옛날에 임금님이 드셨던 공물이 지금의 귤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주도의 토종귤이었다. 현재 사람들이 주로 먹고 있는 귤은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도입된 품종. 그래서 제주도에서 통용되는 귤에 대한 호칭은 일본어 みかん을 우리식 한자 발음대로 읽은 밀감. 그냥 미깡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은 그냥 귤이라고 하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8.15 광복 이후 제주출신 재일교포들이 고향에 감귤 묘목을 많이 보내주었다고 한다. 감귤 덕분에 자식을 대학까지 보냈다고 대학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금도 대학 학비가 만만치 않지만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1960년대에 그럴 정도의 재력을 마련하게 해줄 정도의 고수익 작물이었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묘목을 보급하고 감귤농사를 장려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정부는 관광지로 조성하고 도로 많이 개설하는 등 제주도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제주도의 고질적 문제였던 수자원 부족이 상당히 해결된 시기가 1970년대 이다. 특히 어승생 수원지 개발 이후 점차 수도가 공급되기 시작했고 가뭄에 대비한 농업용수 확보가 가능해졌다. 여자들이 허벅을 지고 먼 거리를 걸어 물을 길어다가 쓰던 시절에서 시내에서는 웬만해서는 가정집마다 수도가 들어가고 시골에서도 최소한 공동수도를 쓰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또한 제주도민 수입원의 상당수는 재일교포들이 자신들 먹고살기도 힘든데 고향 생각해서 애쓴 결과물들이기도 하다.

어쨌든 귤이 가장 유명한 특산품이기에 인터넷상에서의 별명은 주로 '감귤국'. 아예 감귤을 화폐로 쓴다는 말까지 돈다. 실제로는 감귤을 선물로 주고받지 않는다. 그리고 제주도민이 외지에 나가서 돈 내고 감귤을 사먹는 일도 거의 드물다.

예전보다는 많이 죽었다는 말도 있지만, 현재도 감귤산업이 제주도 경제의 한 축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감귤 가격이 떨어지면 도 전체 경제가 휘청인다. 최근에는 단순 감귤재배를 넘어서 각종 감귤관련 상품업도 발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상품이 감귤 초콜릿. 제주도 관광지 어딜 가나 살 수 있으며 공항면세점에서도 한가득 판다. 이외에 녹차 초콜릿, 백년초 초콜릿, 파인애플 초콜릿 등이 있다. 감귤 초콜릿과 녹차 초콜릿을 같이 판매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 녹차 초콜릿의 기묘한 맛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난한 감귤 초콜릿만 쏙쏙 빼먹어서 녹차 초콜릿만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관광 기념품으로 파는 감귤 초콜릿은 양은 엄청 적은데 만 원 넘어가는 바가지 초콜릿이다. 최근에는 삼다수 감귤주스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금귤도 재배한다. 금귤 역시 일본어인 '낑깡'이라고 많이 부른다. 한라봉 역시 유명해졌다.

추가로 바나나도 재배하고 있다. 하지만, 아열대 지대라고 하더라도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의 영향으로 비닐온실 안에서 바나나 묘목을 재배하고 여름에는 지붕을 여는 방식으로 재배하는 농가가 많았으며, 당시 국내 바나나 공급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활성화 되었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가격은 덤.[55] 그러다가 농수산물 수입이 활성화 되면서 자연적으로 바나나가 자생하는 열대지방에서 저렴한 바나나가 수입되면서 타격을 입고 대부분의 농가들이 재배를 중단하고 사업을 접었으나 다시 재배하고 있는 중이다.

감귤 외에는 감자, 보리 등 밭작물 재배 위주. 2010년 기준 경지면적 1천 헥타르 이상인 작물이 맥주보리, , 감자, 기장, 무, 양배추, 당근, 마늘, 참깨 등이다. 기후 특성상 무나 당근, 겨울감자 등은 겨울에도 재배가 가능해 육지권에 비해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무, 당근, 양배추는 전국 시도 중 생산량 1위이다. 중산간지역은 강원도와 비슷한 농산물들이 많이 난다. 이것도 기후 특성 때문이다. 그리고 커피 원두도 재배한다고 한다. 망고도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역시 보성군, 하동군과 함께 손꼽히는 생산지이다.

최근에는 애플수박이나 초당옥수수, 용과(드래곤푸르트), 체리, 샤인머스켓, 백향과(패션푸르트) 등의 여러 작물들을 재배하여 감귤위주의 농업에서 새로운 소득원을 발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경사진 지형이 좀 있다 보니, 과수원 등지에서 쓰기 위해 4WD 트럭을 꽤 이용하는 편이다. 고상형 농업용 트럭의 대명사였던 세레스가 제주도에 유달리 많이 보이는 게 그 이유.

제주 농업의 문제점으로는 우선 농업인의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고, 두번째로는 과잉생산으로 산지에서 폐기되는 농작물이 많고 여기서도 곡류를 제외한 저장기간이 짧은 다른작물은 유통기간에서 다량 폐기되기 때문에 생산과 유통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56]

9.2. 축산업[편집]

제주의 목축업은 아일랜드인 임피제 신부(본명 패트릭 J. 맥그린치)로 인해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피제 신부는 가톨릭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1954년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당시 젊은 청년 사제였던 임피제 신부는 한국전쟁4.3 사건 등으로 인해 궁핍한 삶을 살던 제주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목축업이 발달한 자신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경험을 되살려 새끼를 밴 어미 돼지 1마리를 인천에서 구입해서 제주 한림까지 가져 왔다. 이후 어미가 낳은 새끼 돼지들을 아이들에게 1마리씩 나눠주면서 분양한 돼지가 커 나중에 새끼를 낳으면 그중 1마리를 반환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성 이시돌 목장의 시초가 되었고, 임 신부에게 '돼지 신부'라는 애칭이 붙게 된 것도 그래서다.

이후 임피제 신부는 성 이시돌 목장에 돼지를 비롯해 양과 소, 말까지 사육하면서 한국 최대의 목장으로 키우는 등 제주 근대 목축업의 기반을 마련했고, 목장에서 생산된 양털을 이용해서 옷을 짜는 한림수직을 설립해 1,300여 명의 젊은 여성들을 고용하는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제주에서 처음으로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였고, 그밖에 병원, 양로원, 요양원, 유치원 등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해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을 돌봐왔다.

현재 제주 축산업에서는 제주 흑돼지가 유명하다. 진짜 제주 전통 흑돼지는 천연기념물 제550호로 지정되어 보호 중. 제주도 식당에서 파는 흑돼지고기는 99.9%가 영국 버크셔종과 제주 흑돼지의 교잡종이다. 조랑말 역시 제주도를 대표하는 가축이다. 고기로도 먹지만 주로 승마장에서 관광자원으로 이용된다. 렛츠런파크 제주경마장에서는 제주도 토종 조랑말 및 조랑말과 서양 말의 교잡종들의 경마시합이 펼쳐진다.

한편 제주도에는 전국 유일의 목축공동체인 마을공동목장이 있어왔다. 마을공동목장은 1276년 고려말기 탐라목장을 시작으로 조선시대의 국마장과 산마장, 1930년대인 일제강점기에 100여 개의 마을공동목장으로 재정비되어 2020년에 50여 개로 남아있으며 그중에 10여 곳은 소 방목을 하여 축산인의 생계유지에 기여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제주도는 마을공동목장을 국가중요농업유산[57]으로 지정받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제주도를 관광지로 집중 개발하기 시작했다. 1962년 3월 24일 제주시와 서귀포 간에 종단도로 공사가 시작되었고, 1966년 10월 공사가 완료되었다.[58] 그리고 제주도 전역에 감귤산업을 집중육성하였고, 포장도로를 닦았으며, 지하수 개발 및 저수지 축조, 제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관광정책의 산물이 어승생악 수원지, 평화로(구 서부산업도로), 번영로(구 동부산업도로), 신제주 도심과 중문관광단지 등이다.

제주만의 법제화에 관광객 유치를 위해, 한국사증 면제 프로그램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 국민일지라도 제주특별자치도에는 30일간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다. 관광특구로서의 육성이라는 의도 이외에도 한국본토와 통하는 루트가 한정된 섬이므로 통제가 용이하다는 점, 1차인 농업과 3차인 서비스업 외에 중규모 이상의 공장이 거의 없어 불법체류자의 기반이 될 여지가 적은 점 등도 이런 정책이 가능했던 원인으로 보인다. 홍콩마카오를 비롯, 입국심사가 매우 간편한 일부 국가나 지역을 벤치마킹했다고 볼 수 있을 듯. 단, 이란 등 일부 테러지원국이나 미승인국 국적자는 비자가 필요하다. 2016년 기준 북한, 이란, 시리아 등을 비롯한 16개국 여권소지자의 경우 여전히 비자를 요구한다. 그러한 사증 면제 제도로 인해 제주국제공항에는 국내선에도 내국인과 외국인이 탑승장에 입장하는 루트가 구분되어 있으며 대체로 내국인은 줄이 짧은 데 비해 외국인은 줄이 매우 긴 것을 볼 수 있다. 공항 쪽은 워낙 이용객이 많아서 그냥 주민등록증과 비행기표를 보여주면 바로바로 통과시켜주지만, 제주항 등 항만의 경우 내국인 줄에 서서 검사를 받는다면 높은 확률로 한국어를 시켜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체크를 한다.

이 사증 면제 프로그램 때문에 중국에서 엄청나게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다. 왜냐하면 제주도가 좋은 관광지인 것도 있지만, 중국인들이 편하게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59] 중국인들은 서울이나 부산 등 한국 본토에 오려면 관광비자 받느라 은행잔고를 증명하고 면접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데 제주도만 그런 게 없다. 또 21세기 들어 중국의 경제 규모가 세계 2위까지 성장했고 중국에 부자가 많아졌다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여전히 돈이 넉넉하지 않다보니 거리상 가까운 제주도를 관광상 선호하는 측면도 있다.

다만 이 사증 면제 프로그램과 연관해 한국 입국 자격이 없는 외국인을 제주도에 들이게 되면, 그로 인해 이들 외국인이 국내 교통편을 통해 한반도 본토에 들어갈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단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잠입을 막기 위해 국내선 선박이나 비행기에 탑승하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강도 높은 심사를 벌이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일부 외국인들은 제주도를 통한 부정입국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으며, 단속이 심해질수록 이들의 밀항 스킬도 더 기상천외해지고 있다는 문제점은 지적되고 있다. 애초 인천에서 중국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대놓고 밀항도 하는 마당에 제주도에서 한반도 본토야 맘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긴 하다.[60]

물론 그렇다고 합법적으로 관광오는 이들까지 죄다 낙인찍어서 제노포비아를 조장하는 것도 좋게 보이진 않는다만. 또 아예 사증 면제 프로그램을 폐지하자니 관광산업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 지역민들 반발도 있고 여러모로 서로 만족하는 현명한 대책을 강구해야 될 부분이긴 하다.

최근 제주 성당 묻지마 살인 사건과 같은 외국인에 의한 강력범죄가 일어나고 2018 제주 난민 사태로 인해 반난민감정이 커지면서 7월 6일에는 제주 무비자 폐지 법안이 발의된 상태인데, 폐지되면 일단 중국인 관광객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 제주 관광업계에 타격이 예상된다. 일단 20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해당 법안은 폐기되었다. 또한 제주 여성 피살 사건이나 제주 게스트하우스 살인사건 같이 국내인에 의한 강력범죄 역시 증가하는 상황이라 제주도의 치안력을 높이는 방안이 필요하다.

한편 제주지역이 관광지가 되면서 벌어들이는 관광수익이 제주도와 제주도민들에게 가지 않고 투자를 한 롯데나 신라와 같은 대기업 면세점, 외국자본이 수익금을 독식한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관광객 증가로 인한 부동산 가격 폭등, 물가상승, 교통난 등도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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