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김씨왕조의 유래에 대해 궁금합니다.

신라 김씨왕조의 유래에 대해 궁금합니다.

작성일 2017.11.0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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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역사스페셜에서 신라 김씨왕조의 유래에 대해 다룬 적이 있었는데, 4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이들은 어디서 유래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들은 바로는 광개토대왕의 정벌때 이를 피해 남하한 평양일대의 낙랑군의 후예란 얘기도 있고, 사마천의 사기에서 언급한 진시황의 진나라 시절 만리장성 건축에 동원된 무리들 중 과도한 노역을 피해 한반도의 진한 지방으로 피해왔던 그 피난민의 후예란 얘기도 있던데 아시는 분 있으시면 상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녕하세요.

저에게 1:1 질문을 하신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제가 작성한 답변 글을 보셨거나.

제게 이런 질문을 하신 걸 보면 뭔가 기대하신 게 있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만 저 역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딱히 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저도 신이 아닌데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사실 이건 타임머신을 타고 직접 가 보지 않는 이상, 정답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만 인터넷상에는 신라가 북방 유목민들과 뭔가 관계 있다는 얘기가 제법 퍼져 있지요. 불과 얼마 전에도 TV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그런 내용을 방영하기도 했고요. 스키타이, 사르마트, 흉노 등이 거론되는데, 주로 흉노와 관련돼 있다는 설이 가장 많지요. 스키타이나 사르마트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시기상으로도 신라와는 안 맞으니까요.


근데 사실 이런 떡밥(?)들은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유목민이나 대제국에 대한 환상(!)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오오, 우리도 저 위대한 유목민들의 후예였어!'라는 쾌감(?) 때문에 끌린다는 점을 과연 부인할 수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떡밥이 더욱 자극적이게 되고,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죠.

TV 다큐 등에서 다루는 내용도 사실은 시청률 때문에 대중들이 보고 싶어하는 내용들만 자극적으로 편집해서 보여주는 것일 뿐, 진실을 말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거죠. 이런 다큐들은 의외로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시청자들을 선동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비판적으로 봐야 합니다.




이런 떡밥에서 주로 내세우는 근거들은 유물이나 무덤 양식의 유사성 같은 것들인데, 사실 이런 것만 가지고는 확실한 근거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문화는 얼마든지 전파될 수 있는 것이고, 유물 양식이야 우연의 일치로 비슷한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뭐, 북방 유목민들로부터 일부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그 일부를 확대 해석하여 신라의 기원 자체를 흉노라고 주장하거나 아예 그것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그냥 '가능성이 있다' 정도입니다.


그리고 황금을 숭상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드는데, 금을 중시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류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로서, 그런 것을 가지고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민망한 일입니다. 이건 그냥 "손가락, 발가락 전부 10개 씩 있고 눈, 코, 입 있으니 내 자식이다" 수준의 얘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사료상으로도 그런 북방 유목민들의 이동이 있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일단 정황상 전혀 말이 안 됩니다.

국가를 세우려면 최소 수천 ~ 수만 명 정도의 인구가 이동했을 텐데, 3 ~ 4세기의 한반도에 그런 '민족 대이동'이 있었다면 관찰자에 의한 문헌상의 기록이 있어야 정상이지만, 전혀 언급조차 없습니다.


기록에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주지하다시피 당시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이 존재했습니다(한국에는 이런 기본적인 당연한 사실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참 안타깝죠;;).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하고 한사군을 설치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러한 흉노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 세력의 동진(東進)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 낙랑군이 존재하는 한, 북방 유목민들이 한반도로 진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설령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한(韓)이나 예(濊, 穢), 맥(貊, 貃) 등이 조공하거나 귀부한 사실, 심지어 바다 건너 왜(倭)가 조공하러 온 것까지 기록에 남아 있는데, 그런 대이동이 기록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보통 낙랑군이 무늬만 군현이었지, 사실상 자치 지역이었고 제대로 된 군현이 아니었다, 군현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중국도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식의 얘기가 많이 퍼져 있습니다만,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도 꽤나 오래전에 나왔던 주장이고, 주로 예전에 한국사에서 낙랑군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낙랑군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던 시절에나 나온 얘기입니다. 지금은 초원 4년(BC 45) 낙랑군 현별 호구부 목간의 발견으로 인해 낙랑에서도 중국 내지(內地)와 다름없는 강력한 문서 행정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증명되면서, 이미 이러한 인식은 크게 후퇴하고 있습니다.


중국 왕조의 혼란기에 잠시 지배에서 이탈한 적은 있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후한 말에도 요동의 군벌 공손씨가 할거하면서 후한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낙랑군 자체가 사라지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요. 공손씨가 낙랑군을 접수한 뒤에는 대방군을 분할 설치하면서 오히려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낙랑군과 대방군의 역할 중 하나가 바로 한반도 남부 국가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마의의 요동 토벌(238)로 위나라가 낙랑·대방을 탈환한 이후에도 이런 역할은 그대로 인수인계되었고요.

따라서 한반도 남부에서 그러한 변화가 있었다면 중국 군현들에 의해 파악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기록에 남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진(西晉) 시대(265 ~ 316)에 와서는 한반도에 대한 장악력이 약화되었으리라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사실 삼국통일(280) 이후에도 서진의 낙랑·대방에 대한 지배력은 의외로 꽤 탄탄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황족들의 유배지로 이용될 정도였습니다.

2대 혜제(惠帝) 때인 291년 3월에는 황족인 동안왕(東安王) 요(繇)와 동평왕(東平王) 무(楙)를 대방군으로 유배 보냈을 정도로 한반도 서북부에 대한 기본적인 지배권은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92년 9월에는 대방 7현에서 벌레가 벼를 전부 갉아먹는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면(<송서(宋書)>에는 292년, <진서(晉書)>에는 293년으로 나오는데, <송서>의 기록이 맞을 듯합니다.), 3세기 말까지만 해도 낙랑·대방에 대한 서진 왕조의 지배 체제는 의외로 확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 중앙 정부에까지 보고되었다는 뜻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3세기경에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세력이 한반도로 남하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4세기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한 뒤에도 고구려가 그 지역을 접수했으므로, 이후에 그런 대이동이 있었다면 고구려 측 기록에라도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혀 없지요.

사실 애초에 그런 사건이 발생할 수도 없는 것이, 이미 흉노 제국은 완전히 붕괴된 뒤였기 때문입니다. 흉노는 이미 전한 말기에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했고(이들이 훈족이 되었다는 가설이 있지요) 남흉노는 후한과 위에 신속(臣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진 말기에는 아예 중국 내부로 들어가 점령하고 그곳에 나라를 세웠고, 이것이 5호 16국의 신호탄이 되지요.

즉, 애초에 동쪽으로 이동하고 말고 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전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너무 다릅니다.

흉노는 보통 튀르크계로 분류하는데,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종족은 만주족 등의 퉁구스계이지, 튀르크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실은 몽골계와도 차이가 꽤 큽니다. 몽골족보다는 차라리 북중국(화북)의 한족과 더 가깝습니다.


언어적으로도, 과거에 알타이어족 떡밥이 돌아다녔을 적에는 한국어를 그쪽 언어들과 연관 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만, 튀르크어군(語群)은 알타이제어(諸語) 중에서도 한국어와 가장 유사 어휘가 적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아예 '알타이어족'이란 개념 자체가 사실상 폐기되었습니다. 현재 한국어는 계통상 주변의 어떤 언어와도 친연성을 보이지 않는 '고립어(孤立語)'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19세기의 언어학계에서는 될 수 있으면 방대한 어족(語族)을 설정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습니다. 인도-유럽어족의 발견으로 크게 고무된 서양 언어학자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규모가 큰 어족들을 설정하려 했던 것이죠.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수많은 언어들을 포괄하는 '우랄-알타이어족' 가설도 바로 이러한 풍조 아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설은 비판을 받아 우랄어족과 알타이어족으로 쪼개졌고, 지금은 알타이어족마저도 사실상 폐기되었습니다.


즉, 유전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흉노와 신라를 연관 지을 근거가 부족합니다. 솔직히 문화나 유물 같은 것보다야 이런 게 훨씬 중요하죠.




사실 이 떡밥은 예전에 선거 때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던 프레임이었습니다. 보수 진영에서 전라도를 '홍어'나 '빨갱이'라고 비하하는 것처럼, "경상도는 흉노족 오랑캐 놈들이라 저렇다"는 식으로 비하했던 것입니다. "경상도는 흉노의 후예다, 다른 한국인들과는 유전자가 다르다"는 식의, 지금으로 말하자면 다분히 정치적 의도를 가진 일종의 '지역 드립'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드립'에 불과했던 것이 어느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심지어 TV 다큐에서까지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씁쓸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광개토왕의 정벌 관련 얘기에 대해서...

신라를 낙랑군과 연관 짓는 기록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광개토왕의 남정(南征, 400) 당시는 이미 고구려에 합병된 지 80년 이상 지난 시점이고, 광개토왕비문에도 나와 있듯이 평양 지역 주민들은 이미 고구려의 민호(民戶)로 완벽하게 편제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이탈하여 신라로 남하했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그 이전에도 이미 신라의 김씨 왕조는 존재하였으며, 애초에 광개토왕이 평양 지방을 정벌한 것도 아니고 한반도 남부의 가야를 정벌했는데, 갑자기 평양 주민들이 이동할 이유가 없지요. 혹시 광개토왕이 아니라 낙랑군을 점령한 미천왕을 잘못 말씀하신 것이 아닌지...?





신라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들이 있는데, 대체로 3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1)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과 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었다.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1(卷第一) 「신라본기(新羅本紀)」 제1(第一)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원년(BC 57)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조선'은 당연히 고조선입니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주로 이 구절을 강조하길 좋아하지요. 뭐, 아무래도 우리 입장에서 기분 좋은 소리인 건 분명하니까요. 인간은 누구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역사 해석에 있어서는 조금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을 죽이고 냉정하게 바라보자면, 사실 이 기록은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기록이 있다고 해서 전부 사실인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책이죠.

사실 <삼국사기>는 워낙 후대에 나온 사료라서 후대인들에 의해 조작된 내용들이 의외로 꽤 많습니다. 저 기록은 후기 신라인들이나 고려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근거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선 고조선이 생기기 이전부터도 한반도 남부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 구석기시대인데, 그 전에 아무도 안 살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겠죠.

고조선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이들과 섞였을 가능성이야 물론 있고, 이것은 위만조선 때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2천여 호(戶)를 이끌고 진국(辰國)으로 망명했다는 <위략(魏略)>의 기록을 통해 실제로 확인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주민들이 섞인 것과 저런 식으로 구체적인 계승 의식을 가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일단 신라의 건국 신화 등에 고조선과 관련되었다는 전승이 전혀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도 삼국통일 이전에 신라가 고조선에 대하여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고조선에 대한 계승 의식을 가졌거나 고조선을 우리 역사로 인식했다는 증거는 아무리 빨라야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북방의 고구려라면 모를까,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가 고조선을 시조로 인식했다고 볼 만한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2)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그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를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곳에는 성책(城柵)이 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서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고, ‘도적[賊]’을 “구(寇)”라 하며,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도(徒)”라 하여 진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연(燕)나라·제(齊)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樂浪)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을 본래 그들 중에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도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진한은] 처음에는 6국(國)이던 것이 차츰 12국으로 나뉘었다.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삼국지(三國志)』 권30(卷三十) 「위서(魏書)」 제30(第三十)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한(韓)



이 기록이 바로 질문자 님께서 말씀하신 그 진나라 피난민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보시다시피 여기에서는 마치 진한의 주민 구성이 중국계 이주민들이 주축이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언어도 중국과 비슷하고, 나라 이름도 '진한(秦韓)'에서 유래했다는 식으로 말이죠.


신라의 모태(母胎)가 된 진한의 주민들이 중국계라는 이 기록의 해석을 두고 그간 많은 논란들이 있어 왔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라거나, <삼국지>의 찬자가 중국과의 관련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라거나, "진(辰) = 진(秦)"의 발음의 유사성에 기인하여 억지로 갖다 붙인 거라는 주장까지...

대체로 국내 역사학계나 언어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무시하는 편입니다만, 최근 언어학 연구 결과를 보면 의외로 꽤 흥미로운 점들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진한인들이 낙랑인을 "아잔(阿殘)"이라 불렀다는 구절을 앞서 (1)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과 연계시켜, 신라인(진한인)들이 낙랑인(조선인)들과 동류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니냐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앞뒤 문맥을 잘 따져 보면 이것은 진한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진한의 중국계 이주민들이 낙랑군에 있는 중국인들에 대하여 동류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 올바른 해석입니다. 실제로 <위략>에 기록된 염사치(廉斯鑡) 설화를 보면 기원전후 무렵에 이미 낙랑군에 다수의 한족들이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신라국(新羅國)은 고려(高麗)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漢)나라 때의 낙랑(樂浪) 땅으로서 사라(斯羅)라고도 한다.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려를 토벌하여 격파하자, [고려인들은] 옥저(沃沮)로 쫓겨 갔다. [그들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따라 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 나라 사람들은 중국·고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불내(不耐)·한(韓)·예(獩)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新羅國, 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之地, 或稱斯羅. 魏將毌丘儉討高麗, 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爲新羅焉. 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獩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수서(隋書)』 권81(卷八十一) 「열전(列傳)」 제46(第四十六) 동이(東夷) 신라(新羅)



여기에서 말하는 '고려'는 물론 고구려입니다.

앞의 두 기록과는 달리 이 기록은 상당히 흥미로운 정보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기원을 고구려로부터 찾고 있는데, 물론 사실일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이미 <삼국지> 동이전 한(韓) 조에 진한의 소국들 가운데 신라의 전신(前身)인 '사로국(斯盧國)'의 이름이 보이는데, 위나라와의 전쟁(244 ~ 246) 이전에 신라가 없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신라가 낙랑군의 옛 땅이라거나, 신라왕이 백제인이라는 등, 기본적인 사실 관계에서 틀린 부분들이 눈에 띕니다. 왜 이런 기록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록 과정에서 뭔가 상당한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질문자 님께서 말씀하신 광개토왕 정벌 관련 얘기는 아마도 이것을 착각하신 것이 아닐까 싶군요.



이 외에 신라가 변한(弁韓)의 후예라는 <구·신당서>의 기록도 있습니다만, 오류인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굳이 넣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2)의 기록과 관련하여,


최신 언어학 연구 결과를 보면 의외로 사실일 가능성이 꽤 높아지고 있습니다. 뭐, 최신이라고 해도 이미 10 ~ 20년 이상은 된 얘기들입니다만,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요.


우리말에는 의외로 중국어에서 온 차용어(借用語)들이 꽤 많습니다. 한자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순우리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말입니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 상고 중국어(대략 2세기 이전)에서 유래한 단어들입니다. 대체로 한나라 때의 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붓(筆), 먹(墨) 등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붓'은 筆의 상고음 *[pljət]이 어원이며, '먹'은 墨의 상고음 *[mək]이 어원입니다. 뭐, 이런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죠.


근데 이런 것들 말고도, 의외로 "읭? 이런 것까지 중국어에서 온 말이었어???" 싶은 것들이 꽤 많습니다.

인칭대명사 '나', '너' 같은 단어들도 중국어가 어원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1인칭 대명사 '나'는 我의 상고음 *[ŋa]가 어원이며, 일본어의 'wa·わ(我)'도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습니다.

2인칭 대명사 '너'는 汝의 상고음 *[nja]가 어원이며, 일본어의 'na·な(汝)'도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처럼 중국어 차용어들은 한국어와 일본어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것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들만 몇 개 뽑아 보자면,



나 아(我) - 상고음 *[ŋa] - 일본어 wa·わ(我)도 같은 어원

너 여(汝) - 상고음 *[nja] - 일본어 na·な(汝)도 같은 어원

붓 필(筆) - 상고음 *[pljət] - 일본어 hude·ふで(筆) ※고대음 [pɯde]

먹 묵(墨) - 상고음 *[mək]

말 마(馬) - 상고음 *[ma] - 일본어 uma·うま(馬)

곰 웅(熊) - 상고음 *[gum] - 일본어 kuma·くま(熊)

잎 엽(葉) - 상고음 *[jap]

바람 풍(風) - 상고음 *[plam]



상당히 충격적인 것들이 꽤 많지요...;;

그래서 의외로 <삼국지> 한 조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으며, 고대 한국어에 저런 상고 중국어가 일종의 저층(底層)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을 낳고 있습니다. 저런 기초 어휘들까지 상고 중국어에서 유래한 단어들을 차용했다는 것은 뭔가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뭐, 상식적으로 봤을 때, 주민들 간의 대규모 이동이나 접촉이 있지 않고서야 저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틀림없으니까요.




뭐, 엄청 뜬구름 잡는 얘기들만 한 것 같긴 한데, 아무튼 결론은, 신라의 김씨 왕조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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