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탐구 레포트좀 도와주세요ㅜㅜ(중2)

과학자 탐구 레포트좀 도와주세요ㅜㅜ(중2)

작성일 2011.08.14댓글 4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과학자의 생애, 이론, 인성적인 부분, 본받을점, 비판,  느낀점  (과학적내용이나 업적 필수)

 A4  3장 이내,

 

 

라고 되어있는데 꼭좀도와주세요 꼭ㅜㅜㅜㅜㅜ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아래 내용 가운데 골라서 쓰고 친구들에게도 나눠주면 좋아하겠지???

 

갈릴레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

1564. 2. 15 피사~1642. 1. 8 피렌체 근처 아르체트리.

이탈리아의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


갈릴레오, J. Sustermans가 그린 유화(1637경), 피렌체에 있는 Uffizi ...
근대 과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중력과 운동에 관한 연구에 실험과 수리해석을 함께 사용하여 일반적으로 근대역학과 실험물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씌어진다'라는 주장으로 수학적 합리주의를 주창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대항했다.

어려서는 피렌체 근방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1581년 피사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했는데, 그해에 피사 대성당에서 등잔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유명한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때는 수학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고, 그뒤 토스카나 궁정의 수학자 오스틸리오 리치에게서 수학과 과학을 배웠다. 1585년 경제적인 이유로 피렌체로 돌아와서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했다. 1586년에는 정수(靜水)저울에 관한 논문으로 널리 알려졌고, 1589년에 고체의 무게중심에 관한 논문으로 피사대학의 수학강사로 임명되었다. 1592년 파도바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운동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고 1604년 낙하물체는 등가속도운동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증명했다. 또한 포물선낙하운동 법칙도 발견했는데, 옛날부터 전해 내려왔던 피사 사탑의 실험은 실제로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일찍부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체계를 믿고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렸다. 1609년 봄 베네치아에서 망원경 발명의 소식을 접하고 파도바로 돌아와서 3배율 망원경을 만들었으며, 그뒤 곧 32배율로 개량했다. 이 망원경은 새로 고안한 렌즈의 곡률점검법을 사용하여 천체관측에 처음으로 이용될 수 있었고, 곧 전유럽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1609년 후반에서 1610년 초반까지 이 망원경으로 그는 천문학에 있어 많은 발견을 했다. 달 표면은 평평하지 않으며, 은하수는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고, 목성에 위성이 있다는 사실과, 또 태양의 흑점, 금성의 위상, 토성의 띠 등도 관측했다. 이런 관측은 〈천계통보 The Starry Messenger〉(1610)로 출판되었으며, 이로 인해 파도바대학의 종신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보다 많은 연구를 위해 토스카나 대공의 과학자문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1611년 로마를 방문한 그는 많은 찬사를 듣고 유럽 최고의 과학자임을 인정받았다. 이에 자신을 얻은 그는 1613년 태양의 흑점이동을 바탕으로 코페르니쿠스가 옳고 프톨레마이오스가 틀렸음을 밝히는 3통의 편지를 출판했는데 뛰어난 설명과 단어 선택으로 그의 생각이 널리 알려져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

지동설에 대한 지지에 위협을 느낀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은 성경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도미니쿠스 수도회 신부들과 연합하여 그를 비난했으며 급기야 비밀리에 그는 불경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에 놀란 그는 교회가 과학적 사실의 진부에 대해서 관대한 입장을 견지해 줄 것을 탄원했고 많은 종교 지도자들도 그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교리 책임자였던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태도는 완강했다. 추기경의 주된 관심은 오로지 신교와 싸우기 위한 가톨릭 진영의 단결에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이탈도 용납될 수 없었다. 1616년 3월 5일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오류임이 공포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금서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 전에 추기경은 이 사실을 통보하면서 앞으로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지지하거나 변론해서도 안된다고 경고했다 .

1624년 그는 금지법령을 철회시키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으나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만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새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Ⅷ, Maffeo Barberini)는 두 우주체계를 공정하게 다룬다는 조건으로 허가해주었다. 교황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우주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식의 결론을 원했고 어떠한 다른 논의를 해서도 안된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한 다짐은 교회 검열관에 의해 서면으로 확인되었다.

피렌체로 돌아와서 대작 〈2개의 주된 우주체계―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대화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 copernicaon〉를 저술했다. 1632년 모든 검열을 거친 이 책은 문학과 철학 분야의 걸작으로 전유럽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교황은 이 책이 제목과는 달리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명백히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예수회에서는 이 책이 루터와 칼뱅의 설교를 합친 것보다 더 나쁘다고까지 주장했다. 화가 난 교황은 기소를 명령했으며, 이와 동시에 그가 1616년에 서약했던 문서가 발견되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위조문서였다고 하지만, 그는 이것 때문에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단행위로 기소된 그는 1633년 2월 노령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소환되었으나 특별대우로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다. 4월 12일의 심문에서 그는 1616년 문서를 부인했지만,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부정할 것을 선고받고는 순순히 과거의 잘못을 "맹세코 포기하며,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했다. 그뒤 투옥이 선고되었지만, 교황의 배려로 감형되어 죽을 때까지 피렌체의 집에 자택연금을 당했다.

그는 연금기간 동안에도 연구를 계속하여, 1634년에는 그동안 연구한 역학원리와 초기 실험결과를 〈두 새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논증 Discorsi e dimostrazioni math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 attenenti alla meccanica〉에 담아 출판했다. 그는 1637년 완전히 눈이 멀 때까지 천체관측을 계속했다. 과학자들과의 서신교환도 그치지 않았고, 1642년 사망할 때까지 제자 비비아니와 토리첼리를 지도했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크게 천문학과 역학으로 나눌 수 있다. 천문학에서의 공헌은 망원경 관측에 의해 많은 새로운 발견을 한 데 있다. 또 별의 연주시차를 발견했고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케플러 법칙을 무시하고 원운동을 고수한 점이나 중력을 마술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한 점 등은 그의 한계였다 .

역학을 과학의 한 분야로 성립시킨 것도 그의 업적이다. 특히 ' 힘'과 후에 뉴턴에 의해 공식화된 역학을 수학적으로 해석하여 힘과 운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했던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

 


퀴리부인

Marie Curie

결혼 전 이름은 Maria Sktodowska.
1867. 11. 7 폴란드 바르샤바~1934. 7. 4 프랑스 살랑슈 근처.

폴란드 태생 프랑스의 물리학자.


퀴리
방사능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H. 베크렐과 그녀의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1911년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는 등 노벨상을 2번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비범했던 그녀는 16세에 러시아 고등중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치면서 금메달을 받았다. 수학·물리학 교사였던 아버지가 투자를 잘못해 돈을 잃었기 때문에 그녀는 교사자리를 얻어 일을 해야 했으며 동시에 여성 노동자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치면서 민족주의자의 '자주강좌'에 비밀리에 참여했다. 18세에 가정교사직을 얻었는데 그곳에서 불행한 연애사건을 겪었다. 마리는 나중에 언니 브로냐가 그녀를 도와준다는 합의 아래 자신의 수입으로 파리에서 의학공부를 하는 언니를 도와 주었다. 1891년 마리는 파리로 가 소르본대학교에서 P. 아펠, G. 리프만, E. 부티의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J. 페랭, C. 모랭, A. 코통 등 이미 잘 알려진 물리학자들을 만났다. 그녀는 학생기숙사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했으며 실제로 빵과 버터와 차만 먹고 살았다. 1893년 1등으로 물리과학 학사자격을 얻었고 그후 리프만의 연구실에서 일하기 시작해 1894년 2등으로 수리과학 학사자격을 얻었다. 그해 봄 그녀는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그들의 결혼(1895. 7. 25)으로 인해 폴로늄(마리가 자신의 모국을 기념하여 그렇게 불렀음)과 라듐의 발견 등 세계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성취하게 될 협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학위 논문의 주제를 찾고 있던 마리 퀴리는 H. 베크렐이 발견한(1896) 새로운 현상(그녀는 후에 이 현상을 ' 방사능'이라고 불렀음)에 접하고 우라늄에서 발견되는 성질이 다른 물질에서도 발견되는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G. C. 슈미트와 같은 시기에 토륨의 경우에도 같은 성질이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광물질을 조사하면서 역청 우라늄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역청 우라늄광은 순수한 우라늄보다 방사능이 큰 광물질로 방사능이 매우 큰 소량의 알려지지 않은 물질의 광석에 존재한다는 것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가 착수했으며 새로운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으로 이어진 연구에 피에르 퀴리가 참여했다.

피에르 퀴리가 주로 새로운 복사(輻射)를 물리적으로 연구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동안 마리 퀴리는 금속상태에서 순수 라듐을 얻기 위해 애썼는데 피에르 퀴리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화학자 A. 데비에른의 도움으로 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연구 결과 그녀는 1903년 6월 과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피에르와 함께 왕립학회의 데이비 메달을 받았다. 또한 1903년 그들은 방사성을 발견한 공로로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두 딸 이렌(1897)과 이브(1904)의 출생도 그녀의 열성적인 과학 연구를 방해하지 못했다. 세브르에 있는 여자고등사범학교의 물리학강사로 임명되었으며(1900) 그곳에서 실험적 증명에 기반한 교수법을 도입했다. 1904년 12월 피에르 퀴리가 지도하는 연구실의 책임조교로 임명되었다. 피에르 퀴리의 갑작스러운 죽음(1906. 4. 19)은 마리에게 쓰라린 충격이었지만 그녀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그 이후로 그들 부부가 수행하던 과학 연구를 홀로 완성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았다. 1906년 5월 13일 남편이 죽은 후 공석으로 남아 있던 교수직에 임명되었는데, 이로써 소르본대학교의 첫번째 여교수가 되었다. 1908년 명예교수가 되었고 1910년에 방사능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출간했다. 1911년 순수 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으며, 1914년 파리대학교 라듐 연구소가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마리 퀴리는 딸 이렌의 도움으로 'X선 사진법'(X-radiography)의 이용법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1918년 이렌이 합류한 라듐 연구소는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핵물리학과 화학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이제 최고의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1922년부터 의학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어 방사성 물질의 화학적 성질과 이를 의학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1921년 두 딸과 함께 미국 여행을 했는데 W. G. 하딩 대통령은 그녀에게 미국 여성들이 모금하여 마련한 1g의 라듐을 선물했다. 그녀는 특히 벨기에·브라질·스페인·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강연을 했다. 국제연맹위원회는 그녀를 국제지적협력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밖에 파리에 퀴리 재단이 만들어지고 1932년 언니 브로냐가 소장인 바르샤바의 라듐 연구소가 개관되는 것을 만족해했다.

마리 퀴리의 뛰어난 업적 중 하나는 질병 치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핵물리학 연구를 풍부하게 지원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방사성원을 축적할 필요를 이해한 일이었다. 그결과 비축된 방사성원은 1930년 입자가속기가 출현할 때까지 비할 데 없는 도구였다. 수년에 걸쳐 라듐 D와 폴로늄이 축적된 1.5g의 라듐이 파리 라듐 연구소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은 1930년경 수행된 실험과 특히 이렌 퀴리가 1926년 결혼한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함께 수행한 실험이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연구로 J. 채드윅 경에 의해 중성자가 발견되고 결국 졸리오 퀴리에 의해 인공 방사능이 발견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뒤 몇 개월 후 마리 퀴리는 복사작용으로 생긴 백혈병으로 죽었다. 2회의 노벨상 수상으로 그 중요성이 드러난 그녀 자신의 연구뿐만 아니라 이후 세대의 핵물리학자와 화학자에게 미친 영향으로 보아 물리학에 대한 그녀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 3. 14 독일 뷔르템베르크 울름~1955. 4. 18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독일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20세기초의 창조성이 뛰어난 대표적 이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20세기초 15년 동안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를 단언하고 공간·시간·중력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안한 일련의 이론들을 내놓았다. 그의 상대성 원리와 중력에 관한 이론들은 뉴턴 물리학을 넘어서는 심오한 진전이었고 과학적 탐구와 철학적 탐구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사회 정의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열정적 감각'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명성 덕택으로 평화주의·자유주의·시오니즘과 같은 대의를 지지하는 데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이상주의적인 사람이 물질 입자가 엄청난 양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에너지-질량 방정식 가설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파괴적인 무기인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창조를 증명했다.

초기생애와 경력

그가 태어난 이듬해 그의 가족은 뮌헨으로 이사하여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숙부 야코프 아인슈타인은 조그마한 전기공장을 세우고 전기일을 시작했다. 뮌헨에서 엄격한 학교에 다녔는데, 19세기 독일 교육의 엄하고 현학적인 단체훈련 속에서 아인슈타인은 학생으로서의 능력을 거의 보이지 못하고 무섭고 지루함을 느꼈다. 어머니의 명령으로 음악도 공부하게 되었는데, 생애를 통해 기분전환으로만 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능숙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무렵 단지 숙부 야코프 체자르 코흐만이 아인슈타인의 수학과 과학에 대한 관심을 자극시켜주었다. 12세가 된 아인슈타인은 '거시 세계'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헌신하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3년 후 역사·지리·어학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졸업장도 못 받고 학교를 나와 가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로 갔는데,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서 밀라노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는데, 유명한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에서 4년간 물리학·수학 공부에 몰두했다.

1900년 봄, 학교를 졸업한 후에 스위스 시민이 되었고 2개월간 수학교사로 일한 후에 베른에 있는 스위스 특허 사무소 심사관으로 채용되었다. 새로이 안정을 찾게 되면서 1903년 대학시절의 애인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했다. 1905년초에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유명한 월간 학술지 〈물리학 연보 Annalen der Physik〉에 〈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 A New Determination of Molecular Dimensions〉이라는 논문을 냈는데, 이 논문으로 나중에 취리히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 해의 〈물리학 연보〉에 4개의 더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고 이는 인간의 우주에 대한 견해를 영구히 바꾸어버렸다.

이중에서 첫번째 논문인 〈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작은 입자들의 (열의 분자운동론에 의한) 운동에 대하여 ber die von der molekularkinetischen Theorie der Wrme geforderte Bewegung von in ruhenden Flssigkeiten suspendierten Teilchen〉는 브라운 운동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해주었다. 〈 빛의 발생과 변화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 ber einen die Erzeugung und Verwandlung des Lichtes betreffenden heuristischen Gesichtspunkt〉에서 빛은 파동적 작용에 더하여 입자에만 고유하게 나타나는 일정한 성질들을 보여주는 개별적 양자(量子:후에 광자로 불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했다. 그는 이 한 가지 가정으로 빛 이론에 혁명을 일으켰고 여러 현상들 가운데서 광전효과(光電效果)라고 하는, 빛을 비추었을 때 일어나는 몇몇 고체로부터의 전자(電子) 방출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 Zur Elektrodynamik bewegter Krper〉에 처음으로 실렸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모든 좌표계에서 빛의 속도가 일정하고 모든 자연 법칙이 똑같다면, 시간과 물체의 운동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의 수학적 표현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그의 4번째 논문 〈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의존하는가Ist die Trgheit eines Krpers von seinem Energieinhalt abhngig〉를 썼다. 이 논문에서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를 확립했는데, 이에 따르면 어떤 양의 물질이 갖는 에너지는 그 물질의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값, 즉 E=mc2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이 알려짐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유럽의 저명한 물리학자 대열에 서게 되었다. 그는 중력 현상을 새로 포함시키려고 이론을 계속 발전시켰다. 특허사무소를 떠나서 처음에는 스위스에서, 그리고 잠시 프라하의 독일대학교에서 정교수로 있었으며, 1912년 겨울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때를 결혼생활에 만족했고 어린 두 아들 한스·에트바르트와 즐거웠던 행복한 시절로 회상했다.

1914년 4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자리를 얻었는데, 아카데미 당국은 아인슈타인이 때때로 베를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연구를 계속하도록 허가해주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헤어짐으로 몇 해 뒤에 아인슈타인은 이혼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을 혐오했고 일반적으로 순종적인 학자사회에서 독일 군국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자가 되었으나,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하는 데 주로 열중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1916년 〈물리학 연보〉에 〈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Die Grundlagen der allgemeinen Relativittstheorie〉로 출판되었다. 이 가설의 핵심은 중력이, 뉴턴이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힘이 아니라 시공연속체 속의 질량의 존재에 의해 생긴 굽어진 장(場)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는 별빛이 태양 가까이를 지날 때 별빛의 휘어짐에 의해 증명되거나 반증될 수가 있는 것이었는데, 별빛은 개기 일식 동안에만 볼 수가 있다. 아인슈타인은 뉴턴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2배의 빛의 휘어짐을 예측했다.

그의 새로운 방정식들은 또한 수성의 근일점(近日點)의 당혹스러운 불규칙성(약간의 이동)을 최초로 설명해주었고, 강한 중력장 속의 별들이 약한 장의 별들이 내는 스펙트럼보다 적색에 더 가까운 스펙트럼을 내는 이유를 증명했다 . 아인슈타인은 전쟁이 끝나는 것과 일식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의 이론이 시험될 기회를 기다리면서, 점차 평화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국제적인 환호

1919년 아인슈타인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그해에 런던 왕립학회는 기니 만에 있는 프린시페 섬에서 있었던 과학탐사에서 그해 5월 29일의 일식을 사진 찍었고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의 예측을 검증시킨 계산값들을 내었다고 공표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상대성이론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기본 가설들은 대단히 혁명적이었으며 과학계는 이 물리학자가 지구에서 가장 위대한 천재로 환호받은 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반응에 깜짝 놀랐고 아주 기분이 상했는데, 왜냐하면 그결과 중단된 그의 연구 때문이었다. 이혼 후 1919년 그의 아버지의 작고한 사촌의 딸로 과부였던 엘자와 재혼했다.

당시 독일의 악화되어가는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국가주의를 공격했고 평화주의 사상을 장려했다. 베를린에서 반유대주의 물결이 거세어지자,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서의 볼셰비키주의자' 범주로 구분되었고, 그가 시오니즘 운동을 대중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하자 우익집단들의 그에 대한 격노가 거세졌다.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에서 적대를 받았으나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그에게 요청한 것 때문에 상대성이론을 강의하러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널리 다녔는데, 보통 3등열차를 타고다녔고 늘 바이올린을 지니고 있었다. 이후 3년 동안에도 유럽의 수도들뿐만 아니라 동양·중동·남아메리카 등지도 다녔다. 여기에는 실론 섬, 일본, 팔레스타인 등도 포함된다. 1921년 상하이[上海]에서 "당신의 광전법칙과 이론물리학 분야에서의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국제전보를 받게 되었는데, 상대성이론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1920년대의 시끄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연구, 즉 전자기와 중력 사이의 수학적 관계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가 느끼기에 이것은 전자로부터 행성까지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작용을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발견하는 첫 단계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단일한 방정식이나 공식으로 물질과 에너지의 보편적 속성들을 연관시키려고 했는데 이는 나중에 통일장이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나머지 삶을 차지한 성과 없는 질문으로 판명되었다. 아인슈타인의 동료들은 일반적으로 그의 탐구가 실패할 운명을 갖고 있다는 데에 일찍부터 동의했는데, 왜냐하면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양자이론은 입자의 운동에 대한 모든 측정에서의 불확정성원리를 밝혀냈기 때문이다. 단일한 입자의 운동은 그 입자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측정할 때의 근본적 불확정성 때문에 단순하게 예측될 수가 없었는데, 이는 사실상 원자구성입자 수준의 어떤 물리계의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탁월성을 충분히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이 절대적이고 미래의 발견에 대한 더욱 만족스러운 기초로서 일반상대론에 맞설 수 있다는 관념을 거부했다. 그는 정확하게 만들어진 우주에 대한 믿음, 즉 "신은 교묘하지만 심술궂지는 않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대부분의 이론물리학자들과 의견이 상이했다. 외롭게 그의 길을 고집했고 결과적으로 낭비되어버린 노력이었다고 이야기되는 그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다.

1931년 교환교수로 옥스퍼드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과학을 논의하는 것만큼의 많은 시간을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데 보냈다. 그는 1932년 제네바에서 일정이 잡혀 있었던 세계비무장회의에 대중적 압력을 가하려고 아인슈타인 반전기금을 설립했다. 이 회담이 실패하자 그는 세계 평화와 인간의 이해를 지지해왔던 여러 해의 노력이 아무런 소득이 없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적 진리가 인간성과 독립해 있는 타당한 진리로 개념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것에 대해 옳음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나의 종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신론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존재하는 것의 조화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스피노자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했다. 그는 네덜란드 레이덴대학교의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와 헨드리크 A.로렌츠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패서디나에 있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을 몇 차례에 걸쳐 방문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집권자가 된 후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을 떠났다. 뒤에 그는 프린스턴대학교 고등연구소 수학과정 기초임원이라는 정식자리를 받아들였다. 그결과 나치주의자들은 그가 애용하는 베를린 근처에 있는 여름 별장을 수색하고 그의 배를 압수했다. 그는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유럽 자유세계가 방위력을 보충하고 무장하도록 촉구했다.

미국에서의 말년

프린스턴에서 아인슈타인은 20년 이상을 거의 변화가 없는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소박한 2층 목조가옥에서 아내와 살았고, 아침마다 산책을 하거나 연구소까지 걸어다녔다. 연구소에서 통일장이론을 연구했고 동료들과 토론했다. 마침내 그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자신을 항상 유럽인으로 생각했다. 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나치 과학자들이 '원자탄'을 최초로 만들 것이라는 공포감으로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경계를 해야 하며 만일 필요하다면 빠른 조치를 취하라"는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했던 그러한 권고는 맨해튼 계획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는 뉴멕시코 로스알라모스에서의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1945년 히로시마[廣島]가 괴멸될 때까지 핵분열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으나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원자시대의 등장과 강하게 연결되었다. 그는 미래의 원자탄 사용을 막을 방법을 찾고 있었던 과학자들과 즉시 합류했고, 그의 긴급한 탄원은 미국·영국·러시아가 기초한 규정 밑에 있는 세계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세계를 괴롭힌 핵공포에 자극받아 아인슈타인은 "우리는 단지 의도만 해서는 안 되고, 세계 안전에 필요한 속박된 권위에 우리 자신을 복속시키려는 적극적인 열성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정치인과 정치꾼에 의하여 좌절했지만 가장 주요하게 매달렸던 것은 여전히 물리학이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다. 1955년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병원에서 잠을 자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의 책상에는 이스라엘 독립일에 대해 씌어진 미완성의 언명들이 적혀 있었는데 부분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내가 성취하고자 추구했던 것은 단지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진리와 아무도 즐겁게 하지 못하는 위험에 대한 정의에 봉사하고자 한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대한 그의 기여는 비길 데 없으며, 그는 언제나 과학의 거인이었다. 넓게 말해서 인간사에 대한 그의 개혁운동은 지속적인 영향을 갖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인슈타인이 "정치는 순간을 위한 것이다. 방정식은 영원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마도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예견했던 것 같다.

 

 


뉴턴

Sir lsaac Newton

1642. 12. 25(신력 1643. 1. 4) 링컨셔 울스토르프~1727. 3. 20(신력 3. 31) 런던.

영국 출신의 물리학자·수학자.


뉴턴
17세기 과학혁명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광학·역학·수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1687년에 출판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는 근대과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뉴턴은 1642년 소지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생후 2년 만에 재가해서 그의 곁을 떠났고 할머니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그는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고, 이것은 그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에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보인 심리적 불안감이나 비판에 대한 지나친 반응 등은 모두 어렸을 때의 모성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랜트햄에서 기초교육을 마친 후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당시는 과학혁명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대학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도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으나, 곧 데카르트를 접하게 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운동과 물질로 설명하려는 기계적 철학에 매료되었다. 1664년경부터 쓰기 시작한 〈몇 가지 철학적 문제들 Quaestiones Quaedam Philosophicae〉이라는 기록은 과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신호였다. 그는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첨가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의 친구다. 하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진리다."

그가 다룬 '문제들'을 보면 그가 과학혁명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생각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의 저작들뿐만 아니라 피에르 가생디가 부활시킨 원자론도 공부했는데 그는 여기에 더욱 끌렸다. 로버트 보일의 책에서는 화학에 관한 지식을, 케임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였던 헨리 모어를 통해서는 허미티시즘 전통(Hermetic tradition:자연현상을 연금술과 마술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설명하는 전통)을 접했다. 자연철학의 중요한 두 전통인 기계적 철학과 허미티시즘 전통은 지속적으로 그의 학문에 영향을 미쳤다 .

이 시기부터 수학에 관한 연구도 시작했다. 그는 데카르트의 〈기하학 La Gometrie〉에서 대수적인 기법을 기하학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고 고전기하학도 깊게 공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항정리를 발견했고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1669년까지는 그동안의 성과를 종합하여 〈무한급수에 의한 해석학에 관하여 De Analysi per Aequationes Numeri Terminorum Infinitas〉를 펴낼 정도로 발전했다. 그후 2년 동안 보완해서 〈급수와 유율(流率)의 방법에 관하여 De methodis serierum et fluxionum〉를 수고(手稿) 형태로 세상에 내놓았다.

1665년 4월 학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과 수학의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해 흑사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게 되자 고향집에 돌아와 2년 동안 그가 배운 것들에 대해 여유를 갖고 명상했다. 이 기간 동안 미적분학의 기초가 다져지고, 〈색깔에 관하여 Of Colours〉에 정리될 중요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또 원운동의 요소들을 분석했고 이것을 달과 다른 행성들에 적용해서 역제곱법칙(inverse square law:힘의 크기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 발견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667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2년 후에는 아이작 배로우의 후임으로 루카스 석좌(碩座) 수학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광학에 대한 강의로 교수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색깔에 관하여〉로 발전되고 후에 〈광학 Opticks〉의 제1권이 되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빛이 기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는 달리 빛을 원자와 같은 작은 입자들이 공간을 이동하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았다. 그가 광학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무엇보다도 색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빛은 원래 흰색의 단색광이고 변형에 의해서 여러 가지 색깔로 나타난다는 고대로부터의 색깔이론을 부정했다. 1665~66년에 수행한 일련의 실험을 통해 빛이 단색광이 아니라 혼합광이라는 것을 밝혔고, 색깔은 이질적인 혼합광이 개개의 요소로 분해되면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또 각각의 광선이 일정한 각도로 굴절되는 성질 때문에 무지개와 같은 현상이 생긴다고 밝혔다. 이후부터 빛의 이질성은 물리광학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렌즈의 색수차(色收差)를 제거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반사망원경을 최초로 발명했다.

그의 색에 관한 이론은 런던의 왕립학회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1671년 반사망원경의 발명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졌고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1672년 빛과 색깔에 관한 논문을 학회에 제출했다. 이 논문은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학회 지도자였던 로버트 훅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훅의 신랄한 비판은 그를 격노하게 만들어 결국 한동안 모든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고립생활에 들어가게 했다.

1675년 런던을 방문한 뉴턴은 훅이 자신의 색깔이론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자신을 얻어 얇은 막에서의 색깔현상을 다룬 2번째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빛이 반사를 통해서도 분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 고체의 색현상을 설명했고, 뉴턴의 원무늬(Newton's rings) 발견도 싣고 있다. 이것은 후에 〈광학〉 제2권의 내용이 된다. 훅과의 관계는 이 논문의 발표로 더욱 악화되는데, 훅은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또 영국의 한 예수교 분파도 이 논문의 내용을 공격했다. 1678년까지 계속된 이 싸움은 뉴턴의 신경쇠약을 동반한 발작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 그후 6년 동안 그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었다. 이 격리기간 동안 허미티시즘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전부터 흥미를 갖고 있던 연금술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자연관도 큰 변화를 겪어서 기계적 철학에서 벗어났다. 1679년 빛의 현상을 설명하려고 도입했던 에테르(ether)와 그에 수반된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를 포기하고, 대신 인력(引力 attraction)과 척력(斥力 repulsion)을 도입했다. 인력과 척력은 원래 화학적 친화력, 화학반응으로 생기는 열, 액체의 표면장력, 모세관현상 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했는데, 허미티시즘의 동감(sympathy)과 반감(antipathy)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이 개념을 기계적 철학의 한 변형으로 보았다. 사실 인력은 정량적으로 규정될 수 있었고 17세기 과학의 두 주요 조류인 기계적 전통과 피타고라스적 전통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

처음에는 인력과 척력을 지상의 현상에만 적용했다. 그러나 1679년말부터 훅의 편지에서 암시를 받아 행성의 운동에도 이 개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뉴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훅은 인력에 의해서 직선운동이 지속적으로 방향을 바꾸어나간다는 점과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감소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직관에 의한 추측일 뿐 구심력이나 케플러의 제3법칙에서 수학적으로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뉴턴은 이미 10년 전에 이러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 자신은 후에 훅의 편지에서 타원 궤도가 한 초점을 중심으로 역제곱의 인력관계를 수반한다는 암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또 인력이 지속적으로 작용해서 행성의 궤도이탈을 방지한다는 훅의 생각은 힘을 천체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했지만 아직 중력(gravitation)이라는 개념에는 못미쳤다.

1684년 8월 궤도역학의 문제로 곤란을 겪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가 뉴턴을 방문했다. 3개월 후 핼리는 뉴턴으로부터 〈운동에 관하여 De Motu〉라는 짧은 논문을 받았는데, 이것이 2년 반 후에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라고도 부름)로 확장된다. 〈프린키피아〉에서는 기계적 철학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에 관한 설명이 없다. 다만 눈에 보이는 물체의 운동을 엄밀한 계량적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새로운 역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운동법칙에 근거한다. 첫째,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현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둘째, 운동량의 변화는 주어진 힘에 비례한다. 셋째,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있다. 이 운동법칙으로 구심력을 계량적으로 유도해낼 수 있었고, 케플러의 제3법칙을 대치할 수 있었다. 그결과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운동뿐 아니라 지구나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의 운동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태양계의 모든 천체운동을 지배하는 단일한 힘을 상정하고 그것을 중력(gravitas:라틴어로 '무거움'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이 중력(또는 만유인력)은 혜성의 운동이나 조석현상의 설명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질입자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프린키피아〉의 출판으로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대륙의 과학자들은 원거리(遠距離)작용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뉴턴의 이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기술적인 완벽함에는 찬사를 보냈다. 영국에서는 젊은 과학자들이 곧 뉴턴의 뒤를 따랐고 그의 후원하에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그래샴 칼리지와 같은 주요대학의 교수직을 이어나갔다.

열렬한 개신교도였던 그는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정책에 반기를 들었고 명예혁명 후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대표하여 혁명회의에 참석했다. 이 기회를 통해 폭넓은 교제를 하게 되고 철학자 존 로크와도 친교를 맺었다. 런던 생활을 즐기게 된 그는 친구인 수학자 파티오와 찰스 몬티규(후에 핼리팩스 경이 됨)의 도움으로 1696년 조폐국 이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에는 국장으로 승진해 매년 2,000파운드의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그는 화폐의 재주조가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동안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임무를 완성한 후에는 화폐의 위조를 방지하는 데 힘썼다. 그당시 런던의 위조범들에게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많은 위조범들을 교수대로 보냈다.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뉴턴은 영국 과학의 대부 역할을 했다. 1703년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705년 과학자로서는 최초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그는 왕립학회를 독단적으로 운영했다.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 대장이자 왕실천문가였던 존 플램스티드는 〈프린키피아〉를 집필하는 데 필요한 많은 관측자료들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부당한 대우와 모욕을 받았다.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불화는 잘 알려져 있다. 현재는 뉴턴이 라이프니츠보다 훨씬 먼저 미적분학을 개발했고 라이프니츠도 독립적으로 미적분학에 도달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문제는 뉴턴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일찍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1694년에 나온 라이프니츠의 논문이 세상에 먼저 알려졌다는 점이다. 처음에 추종자들의 부추김에 못이겨서 시작한 우선권 논쟁은 뉴턴이 이성을 잃어버릴 만큼 화를 내면서부터 추잡한 싸움으로 변했고, 라이프니츠 사후에도 계속되었으나 뉴턴의 죽음으로 하여 싸움은 끝을 맺었다. 그는 말년을 〈프린키피아〉와 〈광학〉을 수정·보완·번역하는 데 바쳤다. 최후까지 왕립학회를 주관했는데, 회의 도중 조는 때가 많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벤자민 플랭클린(Benja,in Franklin 1706~1790)

1. 독서클럽 조직 - 부족한 학력 보충
2. 교육.문화 활동 - 필라델피아 대학 설립, 회원제 종합도서관 건립, 미국철학협회 창립
3. 자연과학 분야 - 새로운 스토브 개발, 피뢰침 개발 (번개의 성질 연구)
4. 공공 사업 분야 - 가로등 설치, 시의 야경 방법 개선, 소방 조합 창설
5. 정치, 외교 분야 - 영국으로부터의 자주과세권
혁명기의 한 사람으로 활약
미국의 독깁 선언문을 기초 (토머스 제퍼슨과 더불어)
펜실베니아 주지사(80세)
많은 사람들이 프랭크린을 미국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가이자,정치가 애국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저명한 과학자이기도 했다.그는 전기에 관한 여러 개의 중요한 실험을 피뢰침을 발명했다. 그는 또한 스토브도 발명했다.'양전하'와 '음전하'라는 전기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도 바로 프랭클린이었다.프랭클린은 번개가 정전기와 같은 에너지 형태라는 것을 밝혀냈다.플랭클린은 천둥과 번개가 치는 빗 속에 연을 띄우는 실험을 통하여 사실을 증명하였다.이 실험은 유명한 실험이 되었다.실험에 몸을 아끼지 않았던 프랭클린은 금속 연줄에 달린 열쇠에 자기 손을 갖다 댔다. 이 실험으로 손과 열쇠 사이에 스파크가 일어났다고 한다.

 

일화

한 신사가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이라는 그의 저서를 사려고 왔을 때 가격을 물어보니 얼마라고 대답하자 너무 비싸다고 좀 깎아달라고 했더니 오히려 더 비싸게 불렀죠..
그 신사가 화가나서 깎아달라는데 왜 더 비싸게 부르냐고 하자 시간은 귀중한건데 그런식으로 낭비를 했으니 시간에 대한 가격이 붙은겁니다. 라고 대답하였다는 거죠 ^^;;

 

생애

미국의 작가, 과학자, 외교관, 정치가. 1706년 1월 17일에 보스턴에서 비누?양초를 만드는 집안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난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10살 때 집안 형편으로 인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형의 인쇄소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열정적인 노력 덕분에 능숙한 인쇄기술을 습득하게 되었고, 또한 글쓰는 솜씨를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1723년, 그의 나이 17세 때에 프랭클린은 가출하여 필라델피아로 떠나게 되었다. 그 곳에서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빠른 시간에 인쇄업자로서 성공하였고 1730년에는 24살의 나이로 인쇄소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1732년 프랭클린은 '가난한 리차드의 연감(Poor Richards Almanac)'이라는 책을 발간함으로써 대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1731년에는 펜실베니아 대학에 도서관을 설립하여 도서관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736년에 펜실베니아의 하원의원으로 임명되어서 1751년부터 1764년까지 국회의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펜실베니아 시 체신장관 대리로 일하였으며(1737~53), 그 결과로 전 식민지의 체신장관 대리로써, 우편 업무에 관한 사항을 많이 개선시켰다.(1753~74)

1748년 그의 사업이 많이 번창함에 따라서, 프랭클린은 과학에 뜻을 두어 사업을 대리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봉급을 받으면서 과학을 탐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740년대 초기에 그가 발명한 난로(프랭클린 스토브)는 아직도 생산되고 있으며, 그 이후에도 아주 많은 실험을 행하였다. 그는 열역학, 해양학, 기상학, 그리고 무엇보다 특히 전기분야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프랭클린이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을 때는 전기에 대하여 그리 많이 알려진 상태가 아니었으며, 아마도 프랭클린은 그조차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덴(Leyden) 병을 가지고 한 실험은 유럽의 대중 심리를 자극시켰고, 프랭클린은 즉각 그 기구를 구입하였다. 1752년에 그의 유명한 실험인 '연 실험'을 행하였고, 번개가 전기를 방전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번개를 구름에서 끌어내기 위해 금속으로 만든 뽀족탑을 세우자고 제안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과로, 또 프랭클린의 실용적인 면의 재현으로, 그의 피뢰침이 발명되었다. 후에 복초점 렌즈가 발명되는데 이것도 프랭클린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1753년 영국의 로열 소사이어티(Royal Society) 회원으로 선정 되었고, 코플리상을 받았다. 그해 전(全)식민지 체신장관 대리 가 되어 우편제도를 개선하였고 54년 올버니회의에 펜실베니아 대표로 참석, 최초의 식민지 연합안을 제안하였다. 57년 펜실베니아의 이익을 위하여 교섭을 벌일 목적으로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에 자주과세권을 획득하고 귀국하였다. 64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의 철폐를 성공시켰다. 75년 귀국하여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니아대표로 뽑혔고 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83년 파리조약에는 미국대표의 일원이 되었다. 바로 이 때에 그가 미국을 위한 한 중요한 결정을 한 것이었다.

정치가로서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자치에 대해 영국의 관리들과 토론을 벌일 때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활약했고,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으며,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의 경제적·군사적원조를 얻어냈다. 또한 영국과 협상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표로 참석하여 13개 식민지를 하나의 주권 국가로 승인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2세기 동안 미국의 기본법이 된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들었다. 특히 제퍼슨과 함께 기초한 ‘미국 독립 선언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장영실
본관 아산. 기생 소생으로 동래현의 관노 출신. 과학적 재능이 있어 제련 ·축성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나서 1423년(세종 5) 왕의 특명으로 발탁, 상의원 별좌가 되면서 노예의 신분을 벗었다. 그 후 행사직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 호군에 오르고 혼천의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고 이듬해 동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를 지휘감독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었다.1437년부터 6년 동안 천체관측용 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고정된 정남일구, 앙부일구, 주야 겸용의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 완성하고 경상도 채방별감이 되어 구리[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하였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으나 이듬해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의금부에 잡혀가 장형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루드빅 볼쯔만  Boltzmann (1844-1906)

 

:onErrorLoadingImage(this) src="http://cfile14.uf.daum.net/image/0356BA014886885C30C3FD" border=0>


- 통계역학의 기초를 다진 이론물리학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로 통계역학의 발전과 열역학의 제2법칙에 대한 통계역학적 설명등

 

물리학의 많은 분야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 볼쯔만은 1844년 비엔나에서 출생했다.

 

비엔나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1866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비엔나, 그라츠, 뮌헨, 라이프치히 등에서

 

수학, 실험물리학 및 이론물리학 교수를 지냈지만 그의 주된 연구분야는 이론물리학이었다.

 

그는 당시까지 고려되지 못했던 열역학의 제2법칙에 대한 원자론적 설명을 시도하였다.

 

1870년대에 발표된 논문들을 통해서 그는 원자운동에 적용시킨 역학법칙들과 확률론으로

 

제2법칙이 이해될 수 있음을 보였다. 이를 통해서 제2법칙이 사실은 통계적인 법칙이며,

 

열역학적 평형상태는 가능도가 압도적으로 큰 상태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 과정에서 볼쯔만은 일정 온도하의 평형상태의 계가 갖는 에너지분포, 등분배정리, 충돌에 의한

 

원자분포의 변화에 대한 미적분식을 유도하고, 후일 깁스에 의해 세워진 통계역학의 구조 대부분에

 

대한 주춧돌을 세웠다.


통계역학에 대한 연구와 함께 볼쯔만은 기체운동론에 대한 방대한 계산을 하였다.

 

그는 또 일찍이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의 중요성을 간파한 몇 안되는 유럽인중의 하나였다.

 

그는 또, 흑체복사에 대한 슈테판의 법칙을 열역학 이론으로 유도한 장본인이었으며,

 

로렌츠는 이를 "이론물리학의 진정한 진주"라고 불렀다. 그러나 볼쯔만의 통계역학에 대한 연구는

 

오스트왈드 등의 에너지론자들에 의해 심하게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원자를 믿지 않았으며,

 

모든 물리현상을 에너지와 관련지어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또 비가역성에 대한 그의 통계역학적인 생각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로부터도 고통을 받았는데, 이 모든 반대는 20세기초 발견된 원자물리와

 

브라운운동과 같은 요동현상에 의해 말끔히 씻을 수 있었다.
 
1877년 볼츠만은 본질상 통계적인 엔트로피의 증거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볼츠만원리로 알려져 있다.

 

 볼츠만상수 kB 를 쓰면, S 계의 엔트로피는 확률 W 와 S = kBlogW 의 관계에 있다.

 

이 유명한 방정식은 특정 기체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평형상태로 접근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것은 엔트로피 법칙의 가장 중요하고 간단 명료한 표현이 되었다.

 

말년 병들고 심약해진 볼쯔만은 자신의 일생동안의 연구가 쓸모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190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관계를 찾았고 다시 막스 플랑크에 의해서

 

비례상수(볼쯔만상수)가 찾아진 유명한 확률과 엔트로피사이의 관계식 S = kBlogW 가 새겨져 있다.

 

 

루이지 갈바니 (1737∼1798)

:onErrorLoadingImage(this) src="http://cfile145.uf.daum.net/image/0346DF0148868877044CBA" border=0>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바니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기연구에 바쳤다.

 

갈바니는 죽은 개구리의 다리를 놋쇠 갈고리를 써서 철판에 붙이면 다리가

 

오그라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갈바니는 개구리의 근육에 전기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동물 전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한 사람의 과학자인 볼타 (1745-1827)는 갈바니의 생각에 반대했다.

 

그는 두 가지 금속이 서로 반작용을 일으켜서 전기를 생기게 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두 이론 가운데 어느 것도 완벽하게 옳은 것은 아니었다.

 

갈바니는 또한 전하에 관한 실험을 했다.

 

그를 추모하여 전류를 측정하는 기구 가운데 하나를 ' 갈바노 미터'라고 부른다

 

모호로비치치

 

1857. 1. 23 오스트리아령 크로아티아

 

 볼로스코~1936. 12. 18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


크로아티아 태생의 기상학자·지구물리학자.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이라 불리는 지각과 맨틀 사이의 경계면을 발견했다.

 

그는 조선소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신동이었다.

 

15세에 이미 크로아티아어뿐 아니라 영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구사했으며,

 

후에는 라틴어·그리스어·체크어·독일어도 했다.

 

그는 프라하대학교에서 물리학자 겸 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 교수의 지도로

 

수학 및 물리학을 전공했고 1875년에 졸업했다.

 

7년 동안 중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후에

 

리예카 근처 베이커에 있는 왕립해양학교에 임용되어 기상학과 해양학을 강의했으며,

 

1887년 그곳에 기상관측소를 설립했다.

 

1891년 자그레브에 있는 메인기술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이곳에서도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1892년 그곳의 기상대장으로 선임되었고,

 

1897년에는 자그레브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골먼의 생애와 업적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심리학자, 다니엘 골먼은 1946년 3월7일 캘리포니아 Stock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학, 전문적인 그룹, 사업가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또한 과학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으며 뉴욕타임즈에 두뇌 및 행동과학에 대해 수년간 보고했다.

 

그의 1995년 저서인 『Emotional Intelligence』는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일년 반 동안 올랐고 30개국 언어로 5백만부 이상 전세계의 많은 나라에 베스트셀러로 판매되었다. 그의 최근 저서 『Social Intelligence : 인관관계의 새로운 과학』은 2006년 9월 26일에 출판되었다. 감성지능의 개인적인 부분은 신경과학에서 최근 발견된 점을 통하여 이해 될 수 있다. 골먼의 저서는 새로운 과학의 연루, 애타주의, 양육, 사랑, 건강, 학습 및 지도력(리더쉽)을 묘사하고 있다. 골먼의 1998년 저서인 『Working With Emotional Intelligence』는 감성 지능에 기반을 둔 직업 능력은 특별한 일을 할 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회사 차원에서 이러한 역량을 장려함으로써 이익을 볼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저서 『Primal Leadership – Learning to Lead with Emotional Intelligence』(Richard Boyatzis, McKee 공저)에서는 리더십에서 감성 지능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서 탐구한다. 또한 『Destructive Emotions』에서는 달라이 라마와 심리학자, 신경과학자, 철학자 그룹의 과학적인 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Mind & Life’ 협회의 임원 위원회의 일원으로 진행 중인 그러한 좋은 대화 시리즈의 제안자이며, 그와 관련된 조사를 촉진한다. 골먼은 미국 심리학 협회에서 받은 ‘Career Achievement award’를

모호로비치치는 1908년에 자그레브 관측소에 새롭고

 

발전된 지진기록장치를 갖추는 데 성공해 이 관측소를 유럽에서

 

가장 진보된 곳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 지진기록장치는 이듬해 10월 8일에 쿨파 계곡에서 발생한 파괴적인 지진을 기록했다.

 

이곳의 지진기록자료와 다른 관측소의 기록자료로부터 그는 일부 지진파는

 

예상보다 빨리 관측소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관측했다.

 

그리고 지진은 그때부터 지각이라 불리는 지구의 외부층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며,

 

 빠른 지진파는 지구의 내부층(맨틀)을 통과해 진행한다는 사실을 추론했다.

 

지각과 맨틀 사이에는 후에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이라 명명된 면이 있다.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 더 정밀한 기구에 의한 관측으로 불연속면이 확인되었다.

 

간단히 '모호면'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지각과 맨틀 사이의 경계면은 대륙지각에서는

 

약 35㎞ 깊이에, 해양지각에서는 약 7㎞ 깊이에 위치한다.

 

신형 측정장치는 이 경계면에서 지진파의 속도가 8㎞/s 이상으로 급속히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모호로비치치는 이후 진앙(震央)의 위치를 알아내는 기술을 개발하고

 

지진파의 진행시간을 계산했다.

 

또한 그는 일찍이 내진 건물의 필요성을 역설한 사람이었다

 
1929년 10월 8일 발칸 반도에서 발생한 지진을 조사하다가 지각 아래에 맨틀이 있음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그는 지구의 가장 바깥층인 지각의 아래에는 그 보다 굳은 층이 있어

 

지진파가 빨리 전파되며, 또 두 층의 경계면은 분명하여 지진파가 급격히

 

변화함을 밝혔다.

 

이러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지각과 맨틀의 경계면을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이라고 부른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2학년 몇반? 위에 글 정용이 구나 ㅋㅋ 답 배끼러 왔지?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군자중학교에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군자중에 2학년 몇반 몇번이야 당장불어

과학자 탐구 레포트좀 도와주세요ㅜㅜ(중2)

과학자의 생애, 이론, 인성적인 부분, 본받을점, 비판... 꼭좀도와주세요ㅜㅜㅜㅜㅜㅜ 아래 내용 가운데... 과학적 탐구와 철학적 탐구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1921년 노벨...

중2인데요과학자탐구어떤주제가좋을...

과학방학숙제로 자유탐구보고서가 있는데 주제를 못정하겠어요..ㅠ 도와주세요.. 안녕 ㅋㅋ 중3 형이다 ㅋㅋㅋ... 주제들인데....... 많아 그래도 봐봐 이중엔 맘에드는게...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도와주세요ㅜㅜ

진로관련 실생활 탐구보고서를 적어야 하는데 모르겟어요 참고로 고2/ 사회복지사가 꿈이예여 도와주세요 주제좀 추천해주세요ㅜㅜ 보고서들은 올레포트에 자료가 있어요...

에대한 레포트작성좀 도와주세요ㅜㅜ

대학교 신입생인데 벌써부터 이런 어려운 레포트를 해야합니다ㅜㅜ -현상학적으로 탐구하기 내의식에나타나는 나는 누구인가? 종적이해(역사적이해) : 과거-현재-미래...

ㅜㅜ중2도와주세요

... 과학자탐구라고해야되나요? 저희가 그거를 수행평가로해야하는데... 양식이어케되죠 ㅜㅜ 4.느낀점 사진 이런거찍어야하나요 ㅜㅜ 조언좀요 ㅜㅜ 쉽게 생각 하면 아주...

도와주세요 ㅜㅜ

밑에 사진 알려주세요 ㅜㅜ 과학의 중요한 본성 중의... " ㅡ 는 주장은 과학의 본성을 탐구함에 있어서, 고도의... 그러나 케켈레, 멘델레예프, 무어 등의 과학자들이 실험적...

고1 운동,스포츠,체육 관련 과학탐구보고서

고1인데 운동, 스포츠, 체육 관련 과학탐구보고서 써야햐는데 주제 찾는것좀 도와주세요ㅜㅜ 과학탐구보고서들은 올레포트에 자료가 있어요 네이버에서 올레포트 검색해...

중2 인물탐구 수행평가 도와주세요~~

... 전 중2 물금동아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인데요... 도덕... 중학교 수준입니다.(한글97) 과학자 저는 과학자에 대해서... 그래서 쓴거구요,, 이순신은 길고, 쑨원은 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