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384년출생하였다.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
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 스타게이로스에서 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가 대립되었다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所與)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
3. 콜럼버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이름은 영어식 표기이며 실제 그의 이름이 이렇게 불렸을 가능성은 없다. 이탈리아명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생하였고 1477년에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의 행적은 명백하지 않지만 상당한 학식을 지녔으며,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다고 전해진다. 1479년 결혼하였는데,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해도제작(
海圖製作)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수학자 P.
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
地圖)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1484년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헌책(
獻策)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1486년
콜럼버스는
에스파냐로 건너가
후원자를 찾았다. 그는 에스파냐 카스티야 왕조의 이사벨 여왕을 만나 그의 대담한 항해계획을 설명하였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왕실에서 거절하여 그의 항해계획이 또 실패하였다. 그는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에 재차 후원을 요청하였다가 번번히 거절만 당하였다. 그의 집요한 노력으로 에스파냐의 후원을 받아내었다.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사벨 여왕이 마침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가 제시한
계약 조건을 승인하였는데 계약내용은 ‘콜럼버스는 발견한 토지의 부왕(
副王)으로 임명될 것이며, 이 직책과 특권(산물의 1/10)은 자손에게 전승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약을
산타페 협약이라고 부른다. 이사벨은 자금을 제공한 외에도 팔로스시(
市)로 하여금 선박 2척(핀타호와 니냐호)를 내주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
免罪)하여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하여 주었다.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부유하고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
諸島)의
와틀링섬(추정)을 발견하였다. 이어, 쿠바·
히스파니올라(
아이티)에 도달하여, 이 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히스파니올라에다 약 40명을 남겨 식민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에 핀손과
사이가 나빠져,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17척에다 1,500명의 대선단에 의한 제2회 항해(1493)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자는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에스파냐인(
人)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들에게는 공납(
貢納)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 ·살육하고,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에스파냐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1496) 문책당하였다.
4. 에라토스테네스 [Eratosthenes, BC 273?~BC 192?]
그리스 |
수학, 천문학, 지리학 |
그리스 큐레네 |
《지리학 Geographica》(3권) |
위에는 백과사전이고 아래는 제가 씁니다.
1. 에라토스테네스의 체(코스키콘)
소수 노가다해서 걸러내는 겁니다. 이건 뭐 나도 하겠다. ㅋㅋ
2. 에라토스테네스 지구둘레 측정
기원전 200년 경 에라토스테네스는 둥근 지구의 둘레를 측정했다.
알렉산드리아와 여기에서 남쪽으로 925㎞ 떨어진 아스완에 해시계를 두고 하짓날 정오에 해시계의 바늘이 만드는 그림자의 각도 차이(7°12′)를 쟀다. 그리고 '7.2도:925㎞〓360도:지구둘레'라는 공식을 통해 지구의 둘레가 약 4만㎞라는 것을 알아냈다.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기원전 약 273-192년경)는 대지가 우주의 중심에서 정지해 있으며 구형이라고 생각했고 다음의 3가지 가정에서 출발했다.
(1) 태양광선은 모든 지상에 평행하게 들어온다.
(2) 하나의 직선이 2가닥의 평행선과 만났을 때, 그 사이각(동위각)은 어느 평행선에서나 같다.
(3) 어떤 원이라도, 중심각이 같은 원호는 모두 그 원과 원호와의 비가 항상 같다.
그는 동일 경도상에 있다고 간주한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 결과 이 거리는 대략 925㎞였다. 그리고 하짓날 정오에 막대의 그림자 각도를 측정했다. 그 각도는 7°12′이었다. 따라서 7°12′ : 360° = 925km : 원주(χ)의 비례가 성립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지구의 둘레를 대략 46250km로 계산했는데, 오늘날의 실제값인 4만120km에 상당히 가깝다.
제가 책 오딧셈의 수학대모험에서 봤는데 시에네 우물에 태양이 담겨서 길이 비로 구한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두가지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5. 헬몬트
그는 금속이 산에 녹을 때, 예를 들어 은이 질산에 녹는 경우 은은 용액에 숨어들지만 나중에 복구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반 헬몬트는 4원소설이나 3원소설과 같은 물질의 본질에 대한 이전 사상들을 거부하였다.
그는 공기와 물이라는 두가지 원소가 존재하긴 하지만 공기는 다른 물질로 변화될 수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물이 다른 모든 물질들의 근본적인 성분이 되었으며 그는 이 결론을 계획적인 실험을 통해서 정당화하였다.
그는 2백 파운드의 마른 흙을 담은 화분에 5파운드짜리 버드나무를 심었다. 5년 동안 빗물이나 증류수만을 주어서 나무를 키운 후 그 나무가 169파운드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모든 흙을 다시 말린 후, 흙이 처음 시작할 때보다 단지 2파운드만이 줄어들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그는 무게의 증가가 물 때문이며, 물이 나무의 목재로 전환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반 헬몬트는 식물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실험을 하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는 이상한 모순이 존재하는데
기체라는 용어를 만들고 기체가 새로운 종류의 물질이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이 바로 반 헬몬트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62파운드의 숯을 가열하면 단지 1파운드의 재만이 남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61파운드의 '이산화탄소'기체가 탈출하였다고 추론하였다. 질산이 암모늄염과 접촉하는 것과 같이 기체가 봉해진 용기안에서 발생하면 가끔 방출된 기체가 용기를 깨뜨렸다. 반 헬몬트는 그런 물질에 대하여 '야생정령(wild spirit)' 또는 '야생 기체(untamable ga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기체'라는 용어를 그리스어 '카오스'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그는 분명 이런 야생 물질을 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성질들을 가지는 서로 다른 기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했다.
반 헬몬트가 언급한 다른 기체는 질산을 은과 작용시킬 때 생성되는 붉은 기체(산화질소)와 유기물질을 건류할 때 생기는 '가연성 기체'였다. 가연성 기체의 주 성분은 수소, 메탄, 그리고 일상화탄소였다.
반 헬몬트는 많은 병들의 치료법으로 무기물 치료제를 추천하는 점에서는 파라셀수스를 추종하였다. 파라셀수스처럼 그도 소화와 같은 신체의 과정을 화학을 이용하여 설명하려고 하였으며 파라셀수스의 아르케설을 계승하고 변형시켰다. 도 반 헬몬트는 요석을 분석하고 신체에서 요석이 생기는 원인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6. 베게너
1915년 출간한 《대륙과 대양의 기원 Die Entstehung der Kontinente und Ozeane》에서 지구상의 대륙이 과거에 하나로 붙어있었다는 대륙이동설(大陸移動說, continental drift theory)을 발표하였다. 베게너가 1912년 강의중 처음 제시하였던 이 학설은 가상의 큰 원시대륙인 판게아(Pangaea)가 분리, 이동하여 현재와 같은 대륙의 분포를 이루게 되었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하는데, 고자기학(古磁氣學)의 발전 등과도 관련하여 새롭게 재인식되고 있다.
베게너에 따르면, 대륙은 밀도가 작은 규소와 알루미늄(Sial)으로 되어 있고, 대륙 지각 하부나 해양 지각은 밀도가 큰 규소나 마그네슘(Sima)로 되어 있어서 대륙 지각이 해양 지각 위에 떠 있다고 하였다. 또, 고생대 말까지 판게아(그리스 어로 '모든 땅')라고 하는 거대한 하나의 초대륙이 판탈랏사라는 커다란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초대륙은 지구에 작용하는 달의 인력과 지구 자전에 의한 원심력에 의하여 중생대 초부터 분리되어 이동하였고, 이 때문에 해양지각과 부딪친 대륙 연변부에서 조산 운동과 조륙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베게너가 제시한 대륙이동설의 증거는 다음과 같다. ①아프리카 서해안과 남아메리카 동해안의 해안선 모양이 유사하다. ②오스트레일리아, 남아메리카, 남아프리카, 남극 대륙 등 서로 멀리 떨어진 대륙에서 글로소프테리스, 리스트로사우르스 등 고생물 화석이 많이 발견된다. ③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은 현재 열대나 온대 지역이지만 고생대 말에 존재하였던 빙하의 흔적이 있다. ④남극 대륙에서 열대 대우림 지대의 지층에서 생성된 석탄층이 발견된다. ⑤대서양을 사이에 둔 양쪽 대륙에서 나타나는 지질 구조가 연속적이다.
모든 대륙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생각은 17세기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제기한 바 있었지만, 지질학적인 증거를 수집하여 과학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베게너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과학자들은 대륙과 해양이 지구 표면에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베게너의 주장을 맹렬히 반대하였다.
7. 옴
물리학자 옴
1789년 독일 에를랑겐에서 태어났다.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에를랑겐대학에 입학했으나 생활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했다가 교사 생활을 하면서 1811년 학위를 받았다. 1826년 베를린에서 실험에 전념하여 ‘옴의 법칙’을 풀이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한동안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를 통하여 알려진다. 1841년 왕립학회로부터 코프리상을 수상하여 독일 학회에서도 인정받았다
저 정말 힘들었어요 ㅠㅠ
답변 답변확정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