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 있었던 주요 세계사 사건 좀 알려주세요.

18세기에 있었던 주요 세계사 사건 좀 알려주세요.

작성일 2009.08.10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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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있었던 주요 세계사 사건 좀 알려주세요.

 

(숙제 같은 것 때문에 묻는 것이 아니라 갠적으로 알고 싶어서 그런건데 특정 사건 같은 건 (중요하다 싶은 것) 자세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8세기에 있었던 일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8세기 세계사 주요 사건 서양사를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랑스혁명에 대해


 

1. 프랑스 혁명의 원인



1) 구제도의 모순



프랑스 대혁명은 대표적인 시민 혁명으로서 그 원인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즉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인 구제도의 모순에 있었다. 앙시앵이란 '오래된', '낡은'이라는 의미이며, 레짐은 '제도'또는 '체제'를 의미이다. 따라서 앙시앵 레짐은 근대 사회로 변모해 가는 당시 상황에서 이미 낡은 제도, 즉 봉건적 신분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3개의 신분이 존재하였다.


당시 소수의 특권층인 제1신분 성직자의 수는 총인구 2700만명 중에서 극소수인 10만명 정도였지만, 전국토의 1/10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영주로서 봉건지대를 받고 십일조를 징수하는 특권과 면세의 혜택을 누렸다. 제2신분인 귀족은 40만명 정도로서 전 국토 1/5 정도의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으로부터 지대를 받았고, 교회·군대·행정의 고위직에 앉아 연금을 받았으며, 지세인 타이유(taille)와 도로부역에서 면제되는 등의 실질적인 특권을 누렸다. 그리고 칼을 찬다든지 하는 형식적인 명예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귀족은 혈통귀족인 대검귀족과 법복귀족으로 나뉜다. 법복귀족은 부유한 부르주아지 출신으로 관직을 매입하여 귀족이 되었고 법관직이 많았으며 재산관리에 능하였다.


이들은 점차 혈통귀족과 거의 같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검귀족이 법복귀족을 경멸하였으나, 점차로 양자간의 차이는 사라졌다. 귀족은 막대한 토지 소유, 교회·군대·정부요직 차지·면세 특혜를 향유하였다.


특권신분인 제1신분과 제2신분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의 대다수는 제3신분에 속하였다. 그 수는 전 인구의 96%에 달하였으며, 거기에는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지로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계층이 포함되었다. 이 중에서 대다수는 농민으로서 총인구의 3/4을 차지하고 있었다. 18세기 프랑스 농민은 동유럽의 농민들과는 달리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어 있었다. 영국의 농민들이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업노동자로 전락했지만 프랑스의 많은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한 토지 규모는 살아가는 데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지주에게 소작을 얻는 등의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또한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지세인 타이유, 교회에 내는 1/10세, 인두세, 소득세 같은 직접세와 혁명 전 가장 증오의 대상이 된 염세 같은 간접세)으로 그 수입의 절반은 빼앗겼으며, 이들에게 도로부역 같은 노동력 징발도 큰 고통이었다. 정부는 7세 이상은 1년에 일정량 이상의 소금을 사도록 강요하였는데, 정부에서 파는 소금은 실제 시세의 10배였다.


염세 때문에 매년 30,000명 이상이 투옥되고 5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또한 염세를 정부 관리자가 징수하지 않고 개인이나 회사에 청부를 주어 징수하였으므로 청부업자들의 횡포가 심하였다. 제3신분 중 가장 중요한 계층은 시민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계급은 금융업자·상공업자·법률가·의사·문필가 등 자유업 종사자이다. 이들은 재력과 능력이 뛰어나 사회 발전에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평민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특권귀족의 하위에 있었고, 정권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으며, 경제면에서 봉건적 잔재 때문에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소시민층은 소상인과 수공업자를 포함하는데 이들은 자본주의 발달로 인해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할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신분은 불만을 가지고,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



2) 재정의 위기



국가 전반의 경제 사정도 계속 악화되었다. 1786년 영국과 맺은 자유 통상 조약(이든 조약)으로 영국의 값싼 상품이 유입되면서 프랑스 산업은 위기에 빠졌다. 프랑스는 영국에 원료와 식량을 수출했는데 오히려 생필품 값만 올라 사회 불안이 점점 심해졌다. 당시 파리 노동 인구 가운데 실업자가 50%나 되었다. 이러한 사회 전반의 경제적 위기와 함께 왕실 재정의 위기는 혁명 발발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루이 14세 이래 악화된 재정은 루이 15세 때 더욱 누적되었다.


이에 루이 16세는 1774년 중농주의 경제학자 튀르고를 등용하여 사태를 타개하려고 하였다. 튀르고는 면세특권 계급인 제1신분과 제2신분에게 면세 혜택을 박탈하고 모든 토지 소유자에게 일률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려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왕실 경비를 삭감하려다 왕비 및 귀족들의 반대로 1776년에 파면되었다. 이후 스위스 은행가 자크 네케르가 1776년에서 1781년까지 재무장관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계속 돈을 빌리면서 사태를 꾸려갔으나, 미국 독립 전쟁 원조 때문에 재정상의 위기가 닥쳐왔다. 프랑스는 미국 전쟁 참여로 약 20억 루블이라는 엄청난 전쟁 비용이 들어가면서, 1789년에는 45억 루블의 빚을 지게 되는데, 당시 연간 세입이 약5억 루블 정도였으니 빚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세출내역 중에서 약 50%가 국채 이자와 상환이었다. 법복 귀족들은 왕실의 재정 위기를 이용하여 과거에 상실했던 정치 권력을 회복하고 절대 왕권을 제약하여 귀족 정치를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1302년에 창설되고 1614년이래 소집되지 않고있던 삼부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3)  계몽 사상의 영향



1789년 프랑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고통 상태에 있었으나 다른 유럽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절실하게 불행하다고 느꼈고 사회 비판 의식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계몽사상의 영향이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비판과 분석의 정신을 발전시키고, 관습과 전통을 맹목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이를 비판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여기에 계몽 사상가의 주장을 소화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프랑스 인의 지적·문화적 수준이 더해졌다.


계몽 사상의 내용은 '인간 이성의 힘과 그것에 의한 인류 진보로의 믿음'에서 논리가 전개된다. 계몽사상가들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는 계몽을 통하여 무지와 미신을 타파하고, 이성에 어긋나는 구습과 낡고 모순된 제도를 과감히 시정하여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현존하는 질서를 타파하려는 개혁사상이었으며, 현실적으로는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계몽 사상의 대표적 인물로는 볼테르(1694??1778), 몽테스키외(1689??1755), 루소(1712??1778)등이 있다. 제3신분 중에서 시민계급은 계몽사상으로 무장하여 그들이 소유한 교육·재능·야망에 어울리는 사회적 대우를 요구하여 봉건적 요소와 전제 정치를 타파하려 하였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게 된 배경에는 구제도의 모순과 국가의 재정상의 위기, 계몽사상의 영향이 있었다. 또한 프랑스 혁명에 앞서 미국에서 발생한 독립 혁명의 성공은 프랑스 시민에게 자극과 용기를 주었다.



2. 프랑스 혁명의 전개



1) 삼부회의 소집



국가 재정상의 위기에 직면한 정부는 1781년 칼론느 개혁(모든 토지 소유자로부터 현물세를 징수하려고 왕실에 가까운 귀족과 성직자 대표자들로 명사회를 구성하여 협력을 얻으려함)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법복귀족의 아성인 고등 법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고등법원은 새로운 세금의 부과는 오직 삼부회만의 권한이라고 하여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의 이름 아래 삼부회의 소집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들의 속셈은 왕실 재정위기를 이용하여 과거에 상실했던 정치권력을 회복하고 절대왕권을 제약하여 귀족정치를 실시하려는 것이었다. 파산에 직면한 루이 16세는 1788년 여름, '사표를 던지는' 기분으로 1614년이래 소집되지않고 있던 삼부회를 다음 해 5월에 소집할 것을 선포하였다.


삼부회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은 벽촌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다. 삼부회의 제3신분대표의 선출에서는 선거 구민의 요구사항이 적힌 진정서가 작성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앙시앵 레짐의 모순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제3신분 대표에는 말주변이 좋은 법률가가 주로 선출되었고, 제2신분에는 귀족이지만 자유주의적인 대표들도 소수 선출되었다. 또한 제1신분에서는 하위성직자가 대표의 3분의 2를 차지했으므로 제3신분대표들은 귀족과 성직자대표 중에서 매우 많은 동조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관례에 따르면 각 신분은 각각 300명의 대표로 구성되며 신분별 투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제3신분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3신분은 그들이 국민 대다수의 대표자이므로 대표수를 배로 증가할 것과 신분별이 아닌 머리수 표결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제3신분 대표수를 600명으로 증가시킬 것에는 동의하였으나, 표결방식에 관해서는 미결정 상태였다.



2) 혁명의 시작



테니스코트 서약과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1789년 5월 베르사이유에 소집된 삼부회에서는 제3신분대표들이 신분별 회의를 지양하고 국민의회를 선포하였다. 귀족들은 거부하였으나 성직자대표들 중 하위 성직자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평민대표들은 그들의 회의 장소가 수리한다는 이유로 폐쇄되자 실내 테니스코트에 모여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는데, 이를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라고 한다. 국왕도 하는 수 없이 귀족과 성직자대표에게 국민의회에 참가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삼부회는 사라지고 국민의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 루이가 진심으로 새로운 프랑스 창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국왕은 베르사이유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는 파리 시민을 긴장시켰으며, 파리 시민들은 무력탄압으로부터 국민의회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장하기 위해서 무기와 탄약을 찾던 일부 민중은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민중의 눈에 압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함락은 혁명에 민중과 폭력이 개입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국민의회의 개혁



국민의회는 곧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고 8월 26일에는 앙시앵 레짐의 모순과 부조리의 타파를 염두에 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답변확정하였다. 이러한 인권선언은 앙시앵 레짐의 사망증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국왕 루이와 귀족 세력들은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사회는 혼란하고 흉작으로 식량이 부족하고 물가가 올랐으며 실업자도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초, 서민 여인들이 빵을 요구하며 베르사이유로 행진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와 더불어 파리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국왕은 파리시민의 감시 하에, 국민의회는 파리시민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려는 국민 의회는 교회 재산의 몰수하여 매각하고, 길드의 폐지하여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교회 개혁을 위하여 수도원을 해체하고 모든 성직자를 선출제로 하여 국가가 봉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행정과 사법제도의 정비 등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가운데에 1791년 6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외로 탈출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끊이지 않는 반혁명의 기운 속에서 혁명은 점차 과격해 졌다.



3) 혁명의 과격화와 공포정치



1791년 9월 국민 의회는 입헌 군주제를 규정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서 입법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새 헌법 아래에서 참정권은 세금 납부에 따른 일부 시민에게만 부여하였으므로, 새로운 정치 체제는 유산계급 지배체제였다.


이 즈음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나라로 혁명 전파될 것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의 간섭으로 혁명전쟁이 시작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의용군이 파리에 모여드는가 하면 8월에는 혁명에 고무된 파리 민중이 왕국을 습격하여 방화하였다. 이에 입법 의회는 왕권을 정지시키고 보통 선거에 의한 국민 공회 소집을 결의하였다.


유산계급체제가 무너지고 수공업자와 소상점 주인 등의 소시민층 중심으로 한 혁명적 민중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국민 공회는 곧 공화정을 선포하고, 다음 해 1월 루이 16세를 처형시켰다. 이에 놀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이 제1차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공격을 가해오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소시민과 민중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자코뱅파와 부르주아지를 세력기반으로 하는 지롱드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전쟁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지방의 반란이 빈발하는 가운데 1973년 6월 자코뱅파는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공안 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 정부를 수립하였다.


자코뱅당은 모든 시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민주적인 헌법을 제정하였으나 국내외의 사정으로 그 실시는 보류되었다. 공안위원회는 혁명 정부의 사실상의 행정부로서, 혁명 재판소를 설치하여 반대파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한편 혁명정부는 공정 가격제 등의 통제 경제를 실시하고 봉건 공납의 폐지, 혁명력의 제정 등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강압적인 공포정치에 지쳐있던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1794년 7월 공포정치를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는 국민 공회 내의 반대파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이것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한다.



4) 총재정부



로베스피에르 타도 이후 혁명재판소가 해산되고 공안 위원회의 권한이 극도로 축소되었고, 통제 경제도 포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5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유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5명의 총재가 주도하는 행정부 즉 총재정부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대외전쟁으로 인한 경제난과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리면서 동요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총재 정부의 허약함에 실망하였고, 그들을 지켜 중 강력하고 유능한 군사적 지도자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폴레옹의 쿠테타로 총재정부는 쓰러지고 나폴레옹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5) 나폴레옹의 등장과 프랑스 혁명



1795년에 성립된 도독정부는 5인 도독의 합의제에 입각한 정부이므로 긴박한 상황에 대해서는 무능함을 드러내게 되어 이 무능함에 대해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에 부응하는 인물이 나폴레옹이었다.칼라일(CARLYLE)이 주창한 영웅 사관에 의하면 영웅이란 보통 사람이 가지지 못 하는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보통 사람이 이루기 어려운 일을 이룬 사람을 말하는데 나폴레옹도 칼라일이 말한 영웅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령 코르시카 출신으로 프랑스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있던 20 세 때 프랑스 혁명을 맞이한다. 그는 군사적인 천재였으며 타고난 노력가였고 폭력을 사랑했으며 명예욕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초기에는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지 못 하고 있다가 1793년에 툴롱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것을 진압하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 때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가 되었다가 테르미돌 반란 후에 투옥이 되기도 했는데 1795년에 재차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재 등용되어 1796-1797년에는 이탈리아 쪽에서 침공하는 오스트리아군에 대항하는 프랑스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군대는 셋으로 나누어 1군과 2군은 명망이 있는 장군들이 사령관을 맡았던 것에 비해 약관의 나이인 나폴레옹이 3군사령관을 맡게 되어 노장들의 불만도 있었으나 그는 1.2군사령관이 모두 패배한데 반해 그만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이탈리아를 점령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


나폴레옹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한 테르미도르 도독 정부는 나폴레옹의 세력을 국외로 돌리고 그의 힘을 이용하여 영국의 오리엔트 식민지를 점령하려는 두 가지 목적 하에 이집트 원정을 명령한다. 이 원정은 1798년 5월에서 1799년 1월까지 있었는데 원정군은 보 기병이 합해서 40000명 그리고, 학자가 200명 이 원정을 수행했으며 이들을 수송하기 위한 함대도 360척에 달하였다. 당시 영국의 바다의 제왕이라 불리던 넬슨은 지중해를 순회하며 프랑스 함대를 기다렸으나 우연히 나폴레옹은 넬슨의 예봉을 피하고 알렉산드리아에 무사히 상륙하였고, '피라밋 전쟁'을 통해 이집트를 굴복시키고 오리엔트를 프랑스의 세력 하에 두게 된다.


나폴레옹의 저지에 실패한 넬슨 제독은 대신에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프랑스 선박들을 격침시켜 나폴레옹은 육지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로 돌아갈 길이 막힌 채 이집트에 고립되게 된다. 그래서, 1799년 1월에 프랑스 정부는 비밀리에 선박을 보내 나폴레옹은 단신으로 프랑스에 돌아오게 된다.


프랑스에 돌아온 나폴레옹은 1799년11월에 부르조아층과 연합하여 Brumaire 쿠테타를 일으켜3명의 통령(Consule)으로 구성된 통령정부를 탄생시킨다. 이때의 3명의 통령은 나폴레옹과 탈레랑(Talleyrand) 그리고, Abee Sieyse 였다. 또한, 1804년에는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프랑스 제 1 제정이 시작되었다. 이 쿠테타는 나폴레옹의 군사력과 부유한 부르주아층의 금력이 결합한 사건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것에 대하여 과연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을 계승한 사람인가 아니면 프랑스 혁명의 중단자인가 하는 문제가 학자들 사이에서 대립되었다.



3. 프랑스 혁명의 결과



프랑스 혁명은 정치, 경제, 사회, 사상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우선 정치적인 면에서 혁명을 통해 전제적인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시민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귀족, 성직자 주역의 정치형태를 중산층을 옹호하고 육성하며 이들의 자유, 평등을 확립하는 정치 형태로 전환하였다.


둘째, 경제적인 면에서 봉건제적 잔재를 제거함으로서 자유로운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영주의 토지소유 특권과 길드적 독점권을 없애고 교회 및 망명귀족의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농민은 무상으로 봉건적 부담으로써 해방되었다. 그리고 토지를 유상으로 매각해 도시주변에 대토지 소유가 등장하게 되고, 농촌에서는 중산 농민층이 토지 소유를 확대해 농민층의 분화가 촉진되어 농업의 자본주의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셋째, 사회적인 면에서 앙시앵 레짐 하에서 신분제적이고 법적인 불평등과 특권적인 신분제도를 포함한 악습을 제거하고 귀족계급에 대하여 시민계급이 승리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주체가 되는 근대사회의 길을 열었다.


넷째, 사상적인 면에서는 고착된 종교적 이념을 배제하고 종교적이고 구습에 젖은 낡은 사고방식에 대한 계몽사상의 전면적인 승리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자유주의 이념이 제창되었다.




4. 프랑스 혁명의 의의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시민계급이 정치 권력을 장악한 프랑스 혁명은 가장 전형적인 시민 혁명으로 평가된다. 이 혁명으로 프랑스 봉건제도는 막을 내렸으며,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회의 성립이 가능해졌다. 또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전근대 사회의 낡은 사고 방식이 이성에 의거한 계몽 사상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혁명의 구호로 내걸었던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이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인식되었으며,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각국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즉 프랑스 혁명은 모든 구별이나 차이를 넘어선 모든 사람의 자유를 뜻하는 자유, 법적인 평등에서 나아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평등을 포함하는 평등, 나아가 세계 평화의 이념인 박애의 이념을 내걸고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봉건적이고 귀족적인 구제도와 절대 왕정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겠다.




5. 프랑스 혁명의 한계



프랑스 혁명을 시민계급이 일으킨 혁명이지만, 이 때의 시민은 부르주아지로서 민중과는 구별되는 개념이었다. 민중의 대부분인 농민과 노동자는 혁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은 1차적으로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셈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지가 경제·정치를 장악하게 되었고, 선거는 제한 선거로서 유산자만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에 앞장선 농민과 노동자들에게는 아직 참정권이 없었다.












영국의 산업혁명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유럽 제국(諸國), 미국 ·러시아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라틴아메리카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산업혁명을 광의로 해석하여 농업중심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이행이라고 보는 한 산업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광의의 산업혁명은 흔히 공업화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이를 간단히 정의하기는 곤란하지만 물질적 재화의 생산에 무생물적 자원을 광범하게 이용하는 조직적 경제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공업화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산업혁명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고, 산업혁명의 원인과 결과를 통해 산업혁명의 과정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자세한 설명



1. 산업혁명의 정의



-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상의 혁신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사회 ·경제 구조상의 변혁.


- 산업 혁명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는 1760년대 이래 자본과 기계의 힘에 의하여 종래의 수공업과 공장제 양식이 혼합된 방식인 Manufacture 단계의 생산 양식을 대규모 공장제 생산양식(Factory system)으로 전환시켜 상품을 대량생산하여 산업뿐만 아니라 인류의 사회생활 전반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산업상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2. 산업혁명의 용어



- 산업 혁명이란 용어는 문영사가인 Arnold Joseph Toynbee의 백부인 Arnold Toynbee가 옥스포드 대학의 Bariol Colleage에서 행한 산업 혁명 강의를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 그의 이 강의는 [Lectures of Industrial Revolution]란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강의에서 그는 산업 혁명이 노동자들의 생활을 악화시켰다고 하여 이것을 비관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산업 혁명이란 용어는 토인비 이전인 1860년대에 칼 마르크스가 그의 저서 [자본론]에서 이미 이 용어를 이미 사용하였으며 최근의 연구는 이 용어가 1820년대에 프랑스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 산업 혁명은 정치적으로 부르조아 혁명을 이룬 세력이 경제적으로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정치적인 프랑스 혁명 보다 후대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되어진다. 그러나, 이 '혁명'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이 시기에 일어난 그렇게 혁명이라 부를 만큼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느냐는 논의가 계속되어 혁명을 인정하지 않는 층은 '근대화(Moderniz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이 용어에 대한 비판과 검토가 가해지고 있다. 그리고, 시기문제에 있어서도 대략 1760년에서 1840년까지로 보고 있으나 학자에 따라서는 이견을 보여 시작 연대에 대해서는 1770년, 1780년 설이 있으며 끝난 시기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들이 있다. 하지만, 어쨌든 시기적으로 80년에 걸쳐서 일어난 일을 혁명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제기된다고 할 수 있다.



3. 산업혁명의 시기



- 시기 문제에 대해서는 그 시작 연대로 먼저, 1760년대를 잡는 경우는 이 시기에 많은 작업 기계들이 발명 된 것을 산업 혁명의 원인으로 보고 이때를 시작기로 잡는 것이다. 다음으로 1770년대를 시작 시기로 보는 경우에는 1774년에 '기계 수출 금지령'이 내린 것을 사회 내에서 기계의 적용이 이루어진 반증으로 보고 시작기로 보는 주장과 1776년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저술되어 이것으로 새 시대가 시작한 것으로 보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1780년대에는 많은 기계들이 특허를 얻은 시기로서 이 시기를 시작 년대로 보는 주장도 있다. 이


- 산업 혁명의 종결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1840년대로 보고 있는데'기계 수출 금지령'을 산업 혁명의 시작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1843년에 기계 수출 자유화 조치가 시행된 것을 정확한 산업 혁명의 종결기로 보고 있다. 즉, 이것은 자신들이 기계로써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다는 반증이므로 산업 혁명의 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산업 혁명의 완성으로 상품과 원료의 수송을 위한 철도 시대가 열렸으며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 여자 등의 작업 환경의 개선을 위해 '공장법'이 제정되었다.



Ⅱ- 1.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발전



(1) 공장제 수공업 방식의 도입



중세 말, 도시와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부터 싹트기 시작한 자본주의는, 16세기 이후 절대 왕정의 성립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신항로의 개척과 중상주의로 시장이 넓어지고 상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중세적인 길드 생산으로는 이를 충족할 수가 없게 되었다. 상인 자본가는 점차 길드에 속하지 않은 도시 수공업자를 이용하거나, 길드의 제약이 없는 농촌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수공업자나 농민에게 원료와 도구 등을 제공하고 생산된 상품을 거둬들여 세계 시장에 판매하는, 이른바 선대제를 이용하여 자본을 축적하였다. 한편, 농촌의 일부 수공업자는 수공업 노동자를 한 장소에 모아 분업에 기초한 협업으로 생산을 수행하는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방식을 답변확정하였다.



(2) 새로운 농업기술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농업에서도 나타났다. 장원의 해체와 농노 해방으로 자영 농민층이 형성된 데 이어, 농업 노동자와 이들을 고용한 농업 자본가가 나타났다.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인구는 곡물 가격의 상승을 초래하여 윤작법 등 새로운 농업 생산 방법을 자극함으로써 농업 자본주의는 더욱 활발해졌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인구의 증가와 시장의 확대로 상품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자, 점차 수공업적인 생산 방법으로는 수요를 따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풍부한 자본과 시장,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생산 방법으로 기계의 발명과 기술 혁신이 나타나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



2. 산업 혁명의 원인



(1) 자본의 축적



영국은 세계에서 최초로 산업화가 자생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원인 중에 내적 원인으로는 먼저, 자본이 축적되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즉, 다른 국가보다 먼저 봉건제가 해체되고 독립 자영농(Yeomenry)과 중소 지주계급(Gentry)등이 등장하여 이들이 자수성가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함에 따라 자본이 축적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서 중상주의에 성공하여 산업 자본이 형성된 것도 자본 축적의 원인으로 들 수 있는데 해외 진출에 대해서는 당시 영국의 상속법상 장자만이 모든 유산을 상속받음에 따라 차자 이하는 독립 생활을 해야 했고 그럼에 따라 그들은 자연히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2) 저렴한 노동력


자본의 축적과 함께 또 들 수 있는 원인으로는 저렴한 노동력이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영국은 18세기 전반부터 급격한 자연적인 인구의 증가가 있었으며 '농업 혁명(Enclosure Movement)'이 발생하여 자본주의적인 농업이 성행함에 따라 많은 농민들이 농토로부터 추방되어 도시의 산업 예비군화 한 것이 저렴한 노동력 존재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영국에는 철과 석탄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했다는 주장과 베이컨의 경험 철학 이래로 실용적인 학문 연구의 경향이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3) 수출공업의 발달


영국 산업 혁명의 외적 원인으로는 영국은 식량을 자급하기 어려우므로 자신들의 산물을 수출하고 외국에서 식량을 수입함에 따라 일찍부터 양모와 백포(염색하지 않은 모직물) 등의 수출 공업이 발달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산업 혁명 직전에는 모직물 대신 면제품이 수출의 주요 품목으로 성장하였는데 이 수출 과정에서 면제품의 원료인 목화는 아열대 식물이므로 면제품을 위한 원료는 다른 나라(이집트, 미국, 인도)에서 수입하여 이것을 가공하여 수출하거나 가공전의 인도 백포(Calico)를 수입하여 이것을 다시 가공하여 수출하였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수출의 수요를 충당하지 못 하므로 원료 구입 대가로 과거에 모직물을 지급하던 것을 노예를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게 된다. 하지만, 노예 무역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원면을 수입하여 면제품이 수출의 주종이 되었고 원면 생산국인 인도는 파산하게 된다.


이처럼 모직물 위주의 수출에서 면제품 위주의 수출로 전화되는 과정에서 섬유 공업에서 먼저, 산업 혁명이 일어난다. 그리고, 영국은 외국에 상품 시장과 원료의 공급지 구실을 하는 식민지가 많았던 것을 산업 혁명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즉, 원면을 받아 면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면서 영국의 산업 혁명은 시작된다.



(4) 교통·통신의 발달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발명의 하나로 산업 혁명을 위한 동력으로써 나타났던 증기 기관의 발명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1769년에 J.Watt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는 스코트랜드 출신으로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수학 교재를 만드는 기술자였는데 광산에서 물을 퍼내기 위해 동력을 이용하는 것을 연구하다가 증기 기관을 발명하게 된다. 그리고, 1781년에는 이것을 더욱 개선하여 최초 발명에서 상하 운동하는 피스톤을 회전하도록 만든다. 이로써 값싼 석탄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석탄의 운송을 위해 많은 운하를 파는데 1790년대는 운하의 붐 시대를 맞게 되고 이러한 문제는 철도가 나타나면서 완전히 해결된다. 철도의 등장은 철공업, 증기 기관의 등장과 함께 운수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1776년에는 최초로 레일이 사용되었고 1806년에는 증기 기관차가 최초로 발명되었으며 최초의 철도는 1830년에 공장지대인 맨체스터와 항구인 리버풀을 잇는 노선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철도는 속도가 무척 느려 기관차와 말이 경주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해상 운송의 부문에서도 1814년에 최초의 증기선이 등장하였다.


그래서, 1840년대에는 산업 혁명이 일단 완성되는데 증기 기관이라는 동력을 이용하여 동력 직기, 수력 방적기라는 작업 기계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지고 기계에 의한 기계의 제작도 이루어지게 된다. 이로써, 빅토리아 여왕 정성기의 영국은 'Workshop of The World'라 불리게 된다.


한편, 통신 분야도 발달하여 미국의 모스가 1844년에 유선전신을 발명하였다. 1866년에는 대서양에 해저 전신을 부설하였으며, 1876년에는 벨이 전화를 발명하였다. 이와 같은 교통·통신 기관의 혁신은 세계를 하나로연결하여 시장을 크게 확대시키는 등 세계 교역과 문화 교류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3. 영국의 산업 혁명이 면직물 공업에서 시작된 이유



영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산업 혁명은 면직물 공업에서 일어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면제품은 모직물에 비해 세탁이 수월하였기 때문에 아프리카와 서인도 등 더운 지방에서 인기를 끌었다. 영국은 인도산 면직물을 대량으로 이  역에 수출하였으며, 18세기 후반에는 동인도 회사가 인도로부터 다량의 면직물을 들여와 영국의 모직물 공업을 위협하였다.


이에 영국에서도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면직물 공업이 일기 시작하였다. 맨체스터는 원면의 대부분을 서인도 제도에 노예제 생산에 의존하였으나, 원면의 가격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인도산 면과의 경쟁에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방적과 직포의 공정에서 노동을 절약하는 기계화가 요청되었다. 게다가 면직물은 모직물에 비해 기계화가 훨씬 수월하였다. 그 결과, 면직물 공업은 종래의 수력에 의한 가내 공업에서 증기력을 이용한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 변모하였으며, 저렴하고 정교하게 제조된 면제품이 유럽과 식민지로 수출되어 세계 시장을 독점하였다.



Ⅲ-1. 산업 혁명의 결과와 지역적 확장



(1) 산업 혁명의 결과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가내 수공업은 급속히 몰락하고, 공장제 기계 공업이 발달하여 근대 자본주의가 완성되었다.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유럽은 농업적인 사회에서 벗어나 산업 사회로 발전하였으며, 산업 자본가들이 사회와 경제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와 함께 인구 증가율이 높아지고 인구의 도시 집중 현상이 나타나 주택, 위생, 상·하수도 등의 여러 가지 도시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많은 임금 노동자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부녀자와 미성년자가 취업하는 등 노동 문제가 큰 사회 문제로 등장하였다.


노동자는 처음에는 기계를 파괴하기도 하였으나(러다이트 운동), 점차 노동 조합이나 노동 정당 등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산업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는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급을 이루었으며,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2) 산업 혁명의 지역적 확장


산업 혁명을 최초로 치른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게 되자, 각국은 경쟁적으로 영국으로부터 기계와 기술을 습득하며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19세기 전반에는 프랑스, 미국 등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났고, 독일에서는 약간 늦은 19세기 중엽에 산업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프랑스에서는 산업 혁명이 느리게 진행되었으나, 미국과 독일에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특히 독일은 19세기 말에는 유럽최대의 공업국으로 발돋움하여 영국에 맞섰다. 이 무렵 러시아와 일본에서도 산업 혁명이 진행되었다.



2. 산업 혁명의 빛과 그늘



-프랑스의 석학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산업 혁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맨체스터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이 도시의 노동자 거주 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공장 폐수로 오염된 시커먼 강물을 보면서 맨체스터와 산업 혁명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더러운 하수구로부터 전세계를 비옥하게 만드는 인간의 땀의 강물이 흘러나오며 순수한 황금도 흘러나온다. 인간이 가장 애써 이룩한 이 문명이 그 기적을 이루는 바로 이곳에서 인간은 야만인으로 되어 버렸다."


-확실히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생산력은 인류에게 빈곤과 야만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을 가져다주었다. 인간 생활이 더 편리하고, 더 안전하며 풍요롭게 될 가능성이 활짝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었을 뿐이었다. 현실은 어떠했는가?



(1)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태


여성과 아동 또한 훨씬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 조작법을 배울 수 있는 기계의 보급이 가속화됨에 따라 전통적인 수공업 기술을 사용하던 남성 숙련 노동자들은 설자리를 잃게 되었고 산업 자본가들은 인건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다루기 쉬운 노동력을 대량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최저 12시간에서 16시간 심지어 20 시간에 이르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이 부인과 아동들을 포함한 노동자 전체를 괴롭혔고 극도의 저임금으로 노동자 가정은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2) 노자 대립의 격화


산업 혁명 초기에 노동자들은 아무런 제도적 보호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노동조합 또한 존재하치 않았기에 자본가들의 무제한적인 이윤 동기에 의해 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자각이 싹터감에 따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극한 대립이 온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3) 식민지 수탈의 강화


산업 혁명이 초래한 또 다른 중요한 영향은 식민지의 고통이다. 이전에는 군사력을 앞세운 단순한 약탈과 무차별한 원주민 학살이 식민지 지배의 내용이었던 반면,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식민지의 경제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본국의 공업 생산물의 수출 시장이자 원료의 공급 기지로서 식민지는 더욱 체계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서유럽 국가들 사이에 본격화됨으로써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식민지 민족들의 고통스런 역사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면직물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인도의 가내 수공업적인 직포업은 궤멸 당했고 영국 면공업에 값싼 원료를 공급하기 위해 북아메리카의 흑인 노예 수입은 산업 혁명과 함께 더욱 확대되었다.



 


산업혁명은 1760년대 이래 자본과 기계의 힘에 의하여 종래의 수공업과 공장제 양식이 혼합된 방식인 Manufacture 단계의 생산 양식을 대규모 공장제 생산양식(Factory system)으로 전환시켜 상품을 대량생산하여 산업뿐만 아니라 인류의 사회생활 전반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산업상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유럽은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농업적인 사회에서 벗어나 산업 사회로 발전하게 하였다. 이러한 산업혁명의 결과는 인간에게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편리와 풍요 뒤에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극도의 저임금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또한 본국의 공업 생산물의 수출 시장이자 원료의 공급 기지로서 식민지는 더욱 체계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서유럽 국가들 사이에 본격화됨으로써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식민지 민족들의 고통스런 역사라는 그늘을 낳았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 대하여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마지막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은 뒤 스페인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이다. 1701-14년에 프랑스·에스파냐와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사이에 발생했다. 1700년 에스파냐왕 카를로스 2세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 앙주공(公)이 펠리페 5세로 즉위하였다. 이에 해상무역 특히 신대륙무역 확보라는 전략에서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제휴에 반대하는 영국·네덜란드 및 에스파냐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는 오스트리아 3국은 동맹을 맺고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개전 당초에는 프랑스가 우세하였으나, 오스트리아의 오이겐공(公)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704년에는 오이겐공과 영국의 말버러공이 브제남의 싸움에서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을 격파하여 전국을 전환시켰다.


이베리아반도에 상륙한 오스트리아의 카를대공(大公) 군대도 1706년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


또한 오이겐공과 말버러공은 같은해 각각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서 승리를 거둔 뒤 1708년에는 우데나르도의 싸움에서 프랑스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해상에서도 영국과 네덜란드 함대는 포르투갈 연해에서 프랑스와 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하고, 1704년 지브롤터를 점령하였다. 이와 같은 동맹군의 우세를 보고 루이 14세도 강화를 맺기로 결의했으나, 그 조건에 관하여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어 전쟁은 속행되었다. 그 뒤에도 프랑스는 한때 전세를 회복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영국에서 휘그당 내각을 대신하여 토리당 내각이 성립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요제프 1세가 죽고 카를 6세가 즉위하는 등 동맹 제국의 국내정세 변화에 따라 전쟁 종결론의 기운이 감돌아, 11년 영국과 프랑스의 교섭을 계기로 13년 위트레흐트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뒤에도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계속했지만, 이것도 다음해의 라스타드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한편, 이 전쟁과 병행하여 신대륙에서는 앤여왕전쟁이 있었다.



블렌하임 전투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때 영국의 말버러 공작과 오스트리아의 장군 오이겐 휘하의 군대가 프랑스군에게 승리한 가장 유명한 전투(1704. 8. 13). 이 전투는 프랑스군이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겪은 대패였으며, 그결과 빈이 프랑스-바이에른 군의 위협에서 벗어났고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는 그들의 반(反)프랑스 동맹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바이에른은 전쟁에서 물러났다. 전투는 지금의 독일 영토인 도나우뵈르트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도나우 강가 블렌하임(지금의 블린트하임)에서 말버러와 오이겐이 이끄는 5만 2,000명의 영국·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의 탈라르 백작 카미유 원수가 지휘하는 6만 명의 프랑스·바이에른군 사이에 벌어졌다. 오이겐과 말버러는 그해 8월 12일 병력을 합류한 후, 당황하여 미처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프랑스군을 다음날 곧바로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네벨바흐 하천 너머 2갈래로 물러났으며 중앙부는 거의 엄호받지 못하는 기병대가 허술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동맹군의 선제공격으로 탈라르는 그의 예비부대를 2진영으로 나누어야 했으며 그때문에 중앙부는 더욱더 약해졌다. 말버러는 그때 주력부대를 네벨바흐와 주변 습지로 침투시켜 공격을 가해 반격을 노리고 있던 프랑스군의 시도를 무산시켰으며 결국 탈라르의 중앙부대를 분쇄했고, 탈라르는 사로잡혔다. 바이에른 선제후 에마누엘 막시밀리안 2세는 가까스로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프랑스군 오른쪽 진영 블렌하임 주위에 있던 보병들은 모두 투항했다. 동맹군은 1만 2,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바이에른군은 1만 3,00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약 1만 8,000명 이상이 죽고 부상당하거나 도나우 강에 빠져 죽었다.



라미예 전투



스페인의 왕위계승전쟁 때 말버러 공작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동맹군이 프랑스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이 승리로 동맹군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북부와 동부 전역을 점령했다.


이 전투는 나뮈르(지금의 벨기에 영토)에서 북쪽으로 21㎞ 정도 떨어진 라미예 마을에서 말버러가 지휘하는 6만 2,000명의 동맹군과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이 이끄는 6만 명의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졌다. 루이 14세의 명령을 받은 프랑스군은 동맹군보다 먼저 라미예 평원에 도착했으나 현명하지 못하게 라미예 마을과 오퓌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전체 6.5㎞의 산등성이를 따라 군사를 배치했다. 동맹군이 프랑스군의 좌측에 맹공을 가하자 빌레루아는 중앙부대를 좌측으로 돌려야 했다. 그러나 동맹군의 말버러는, 공격지역이 늪지대여서 기병대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기 때문에 좌측 공격을 취소하고 병력의 절반을 마지막 집중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군 몰래 중앙으로 행군시켰다.


이 공격으로 동맹군은 병력을 너무 길게 배치했던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프랑스군은 1만 7,000명이 죽거나 부상 또는 포로가 되었으며 나머지 군사는 다음날 아침 뿔뿔이 흩어졌다. 동맹군의 사상자는 5,000명 정도였다. 그뒤 몇 주 안에 동맹군은 여러 도시를 함락했으나 루이 14세의 군대와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의 전략을 일치시키지 못했다.


이때문에 동맹군은 라미예에서 외관상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평화협정을 이끌지는 못했다.



오우데나르데 전투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때 말버러 공작과 사보이 공 외젠의 연합군대가 프랑스군에게 승리한 전투이다. 이 승리는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 동맹군이 7월 4-5일에 프랑스군이 점령했던 헨트와 브루게를 탈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투는 오우데나르데 시 북쪽에서 말버러와 외젠이 지휘하는 8만 명의 동맹군과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원수와 부르고뉴 공작 루이가 이끄는 8만 5,000명의 프랑스 군대 사이에서 벌어졌다. 프랑스 군대는 오우데나르데를 포위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경계가 소홀한 상태에서 불시에 습격을 받았다.


65시간에 80㎞를 행군해온 동맹군은 7월 11일에 스헬데 강을 건넜고, 프랑스군이 진영을 가다듬기도 전에 곧바로 공격에 나섰던 것이다. 프랑스군 사령부는 처음에는 의견이 둘로 갈라졌다. 부르고뉴 공작은 후퇴하기를 원했으나 방돔 공작이 그대로 버티고 싸울 것을 요청하자 마지막 순간에 그 의견에 따랐다. 오후 내내 접전과 혼전이 계속되었다. 프랑스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말버러 공작은 네덜란드군을 서쪽으로 멀리 우회시켰다. 이 군대가 프랑스군의 오른쪽을 공략하는 동안 외젠의 군대는 프랑스 군대를 왼쪽에서 조여 들어갔다. 어두어져 싸움이 멈추었을 때, 프랑스군은 6,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9,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동맹군 쪽에는 4,000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다음날 방돔은 패한 군대를 모아 헨트에서 동맹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말버러는 1709년 1월에 헨트와 브루게를 탈환했으며, 프랑스 군대는 프랑스 국경으로 물러났다.



말플라크 전투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4) 때 말버러 공작이 치른 마지막 대규모 전투(1709. 9. 11). 이 전투는 몽스에서 남쪽으로 약 16㎞ 떨어진 말플라크 마을 근처(지금의 프랑스-벨기에 국경의 프랑스 쪽 지역)에서 벌어졌다.


말버러 공작과 사보이의 오이겐 공(公)이 지휘하는 10만 명의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빌라르 공작인 클로드 루이 엑토르 원수와 부플레르 공작인 루이 프랑수아 원수가 이끄는 9만 명의 프랑스군과 싸웠다.


연합군은 9월 4일 몽스 요새의 포위작전을 시작했고, 프랑스군은 말플라크 부근에 군대를 집결시켜 참호전을 함으로써 이 포위를 분쇄하려 했다. 연합군은 포위작전을 위협하는 프랑스군을 제거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 말버러와 오이겐은 프랑스군의 중심부를 약화시키기 위해 보병대가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한 뒤 이어서 3만 명의 연합군 기병대가 돌격해들어간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 작전은 성공했으나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보병들의 필사적인 전투, 프랑스 포병대의 엄청난 위력, 프랑스 기병들의 계속되는 반격 등으로, 프랑스군은 1만 2,000명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해 연합군은 2만 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했고, 연합군은 몽스를 계속 포위해 10월 26일 점령했다.




결과



위트레흐트 조약



1713년 4월 11일부터 1714년 9월 7일까지 프랑스와 유럽 열강들 사이에, 그리고 1713년 7월 13일부터 1714년 6월 26일까지 스페인과 여타 열강들 사이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4)을 마무리 지으면서 체결된 일련의 조약.


프랑스는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프로이센, 포르투갈, 사보이 등과 위트레흐트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4월 11일 영국과 맺은 조약으로 프랑스는 앤 여왕을 영국의 군주로 인정했으며 축출당한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에드워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 프랑스는 또 뉴펀들랜드와 노바스코샤, 허드슨 만(灣) 지역과 세인트키츠 섬을 영국에 양보했으며 덩케르크의 요새들을 해체하기로 약속했다. 덩케르크의 요새들은 영국과 네덜란드 선박들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 역할을 해오던 곳이었다.


네덜란드와의 조약에서 프랑스는 네덜란드가 헬데를란트 영토의 일부분을 합병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 지역의 특정 방벽요새들을 보유한다는 데 합의해주었다. 프로이센과의 조약에서 프랑스는 프리드리히 1세라는 왕의 칭호(1701년 주장했음)를 인정해주었으며 또한 프로이센에 뇌샤텔(지금의 스위스)과 헬데를란트 남동부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했다.


반면 프랑스는 프로이센으로부터 오라녜 공국을 얻어냈다. 사보이와의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사보이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승인하고 시칠리아와 니스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다. 포르투갈에는 아마존 강 양안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정해주었다. 반면 남아메리카에 있는 프랑스의 기아나 식민지는 그 규모가 제한되어졌다.


한편 스페인이 관련된 평화조약은 프랑스의 경우에 비해 입장조정에 좀더 오랜 시일이 걸렸다. 스페인은 7월 13일 영국과 조약을 맺으면서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양도했다. 이 조약에 앞서 강화(asiento)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로써 스페인은 영국에 향후 30년간 스페인 식민지에 아프리카 노예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1713년 8월 13일 스페인과 사보이 사이에 조약이 맺어졌으며 이로써 이전의 스페인령 시칠리아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게 전쟁에 가담한 몫으로 양도되었다. 반면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스페인 왕권주장을 포기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의 평화조약 체결은 1714년 6월 26일까지 지연되었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강화는 1715년 2월 마드리드 조약으로 매듭 지어졌다.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는 프랑스와 라슈타트 조약(1714. 3. 6) 및 바덴 조약(1714. 9. 7)을 체결함으로써 평화를 이루었는데 이 조약으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마감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카를 6세와 스페인과의 평화는 1720년 2월 헤이그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스페인 왕위계승문제는 결국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인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타결되었다. 영국은 식민지와 통상부문에서 가장 많은 몫을 차지했으며 세계무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이후 20년간 국제정치에 하나의 틀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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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역사

1740

1765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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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트증기기관완성

미국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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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달톤 원자이론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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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루이지애나 프랑스로부터 매입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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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등장

1804

양귀비로 몰핀 첫사용

1806-1812

러시아터키전쟁 오토만 터기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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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리히 운하 개통/찰스다윈 진화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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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1856

크리미아 전쟁

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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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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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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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 프랑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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