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역사신문 기사

고려 역사신문 기사

작성일 2005.06.21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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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학교숙제로 역사신문을 만들어야 되는데요...

고려 무신집권기 하층민의 농민봉기에 대해서 기사를 하나 써야되는데요.....

고려 무신집권기 하층민의 농민봉기에 대해서 기사하나만 써주세요.....ㅎㅎㅎ;;

제가 글을잘못써서요.....그럼 부탁드립니다...


#고려 역사신문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도 지금 그 수행평가를 하는중이라 제가한 방법 가르쳐드릴게요.

 

1. 통일신라에비해 고려는 어떤 점이 발전했는지 알아보자!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태조 왕건의 뜻은 후대의 왕들에게도 이어져 여러가지 면에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1.귀족이 아닌 양인도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될수있었다.

2.세금이 신라 때보다 크게 줄었고,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는 기관도 생겼다.

3.지방에 관리가 파견되어 왕명을 지방에까지 전하였고, 지방의 호족은 향리가 되어 지방관을 도왔다.

4.고을 마다 학교가 세워져 유학의 정신이 널리 보급되었다.

 

2.거란의침입!!그리고 서희의 외교담판!!

고려가 송나라와 가까이 지내자 거란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거란 군대가 청천강까지 공격해 오자, 서희는 당당하게 거란의 장수 소손녕을 찾아가서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땅이니 돌아가라며 외교담판을 하여 서희의 정당한 주장을 들은 소손녕은, 마침 식량이 떨어지기도 한 참이라 대군을 돌려 물려갔다고 한다.

                     ㅡ지금까지 00 기자였습니다.ㅡ

3.거란!! 1차 침입과 2차침입후, 3차침입을 하다!!

서희의 외교담판이 있은지 20여 년 후, 힘이 더욱 강해진 거란이 또 다시 침입을하였다!!

하지만 강감찬장군의 작적으로 거란은 10만 군사 중에 살아서 돌아간 거란의 군사는 겨우 수천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내용부실한거 죄송합니다.)

                 ㅡ00기자.ㅡ

 

4. 여진족의침입!!그리고 윤관의 여진정벌!!

여진족은 만주에서 일어난 민족으로 그들은 일찍히 우리나라를(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면서 말이나 모피 등을 가지고 와 식량, 옷감, 농기구등을 바꾸어 갔다. 그러나 세력이 커지자 우리나라의(고려의)국경을 위협하였고, 결국그들은 우리나라(고려) 를 침범을하였으나, 윤관장군 으로 "별무반" 이라는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게 되었고 9성을 쌓았다고한다.

                                            ㅡ00기자.ㅡ

이렇게하고 윤관이랑 인터뷰기사 하나정도 넣어주시면 될겁니다^^

출처 : 좋은자료됬으면좋겠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기삿거리는 아니지만 역사에대해 알려드리겟습니다 좀 길군요






1초기 송나라와의 관계 고려초기의 정책은 친송정책과 북진정책이었다. 중국에서는 당의 뒤를 이어 907년에서 960년에 이르는 사이에 5대10국(五代十國)의 여러나라가 흥망하다가 다시 송(宋)에 의하여 통일되었는데 918년에 일어난 고려는 5대의 나라들과도 관계를 가졌으나 특히 송과의 관계가 깊었다. 송나라는 북방민족의 나라인 요(遼)나 금(金) 그리고 원(元)등과는 달리 고려와의 관계가 비교적 평화적이었다. 송은 북송과 남송을 합하여 약 320년 계속하는 동안 점차로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그 대외관계가 개방성에서 폐쇄성으로 옮아갔으며, 고려와의 관계도 그러하였다. 고려와 5대의 나라들과의 사이의 쌍방의 사신의 내왕과 문물의 교류는 상당히 성하였다. 유교와 불교의 경전이 중국에서 고구려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하고 고려에서 중국에 보낸 것으로 유교의 별서효경(別序孝經) 등이 있고, 천태종(天台宗)의 교권(敎券)등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 중국에 보낸 물품으로 저포(苧布) · 도검 · 말(馬) 등이 있고, 중국에서 역서(曆書) · 비단 · 동기 등을 가져왔다. 중국인으로서 고려에 귀화하여 관직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송이 건국한 2년 후인 962년에 고려의 사신이 송에 간 이후 약 30년 동안 사신이 내왕하였다. 986년에 송은 북쪽의 거란 즉 요(遼)를 원정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여 고려는 이에 응하였으나 고려의 군사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993년부터 요가 고려에 침입하기 시작하였으나 고려는 이에 굴복하지 않다가 1018년에 요에 사신을 보내고 이에 따라서 송과의 관계는 한때 단절되었다. 그래도 1030년에는 일행 293인의 사행이 많은 물자를 가지고 송에 간 일이 있다. 한편 중국의 민간의 상선(商船)이 자주 고려에 내왕하여 많은 물자를 교역하였으며, 이 기회에 아랍인 상인들도 고려에 온 일이 있다.11세기 말에 고려와 송이 다시 공적으로 통교하게 되었다. 고려의 문종이 송나라의 문화를 중시하여 친송책을 쓴 것과 같은 시기에 송의 신종(神宗)은 거란에 대항하기 위하여 연려대료책(聯麗對遼策)을 썼기 때문이다. 거란은 한때 그 세력이 매우 팽창하였으나, 한편으로 혁신파와 보수파와의 파쟁이 심하고 종실 내부의 반란까지 일어나서 국력이 쇠퇴하였는데 고려와 거란의 표면상의 내왕은 계속하였고 1063년에는 거란이 고려에 대장경을 보내온 일이 있다.송의 신종은 신법(新法)을 실시하고 적극적으로 거란에 대항하기 위하여 1068년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오고 2년 후에도 사신을 보내왔다. 이 시기에 송에서 고려에 보내온 예물은 진귀한 물건들이 많았다. 즉 각종의 금 · 은 장식품, 국왕의 의복, 안구마(鞍具馬), 인삼, 잣, 향유, 포(布)등 막대한 물량이었다. 그후 송의 의원(醫員)도 자주 고려에 왔으며 개성에 체류하는 송의 상인도 상당한 수였다. 송의 사신의 숙소로 개성에는 순천관(順天관)이 있었고 상인들을 위하여도 영빈관(迎賓관) 등 10개의 객관(客관)이 마련되고 있었다. 송의 사신이나 상인이 가져온 물품은 100종을 넘고 6천 여건이 될 때도 있었으며, 주로 채단(綵緞), 안마, 옥(玉)과 여러 가지 장식품과 차(茶), 주(酒)와 각종 약품이었다. 또 《자치통감》을 비롯하여 《책부원귀》 · 《태평어람》 등 서적도 들어왔다.송의 민간 상인이 고려에 온 회수는 100회를 넘으며, 한번에 수십명에서 100명, 1056년에는 240명의 대규모의 상인들이 온 일이 있다. 송의 사신이나 상인이 고려에 귀화한 일이 많고, 반대로 고려에서 송에 귀화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도 있다.거란의 침입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여 요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넓혀 고려를 침입하였다.1차 침입 - 성종12년에 요는 마침내 소손녕을 장수로 삼아 고려에 침입하여 옴으로써 여·요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소손녕은 적극적인 군사행동은 취하지 않고 위협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적장의 석연치 않은 행동을 간파한 서희는 직접 적진에 나아가 소손녕과 담판하게 되었던 것이다.여기에서 소손녕의 침입이유로,1)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자기네가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2)자기 나라와 땅을 연접하고 있으면서 송을 섬기고 있다 는 점을 들었으며,땅을 베어 바치고 조공을 닦으면 무사할 것이라고 제의했다.이에 대해 서희는1)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땅이다. 그런 까닭으로 국호를 고려라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만약 경계를 논한다면 너희나라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경계안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빼앗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2)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계 안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몰래 점거하여 완악하고 교활하며 변덕스럽고 간사하며, 길이 막혀 통하지 못하는 것이 바다를 건너기보다도 심한편이니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축출하여 우리의 옛땅을 수복하고 성보를 쌓고 길을 통하게한다면 감히 수빙하지 않겠는가."2차 침입 - 현종 1년(1009) 고려의 김치양 사건에 강조가 나선 것을 빌미로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강조 장군은 크게 패하고 전사하였으며 현종이 거란에 가기로 하고 끝냈다.3차 침입 - 현종 9년(1019) 고려의 혼란한 틈을 타서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까지 침입하였으나 감강찬 장군은 귀주에서 수공 작전과 잠복, 기습으로 물리치고(귀주대첩 )두 나라는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무찌른 고려는,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성을 튼튼히 하고 함을 더욱 기르려고 노력하였다. 천리장성 은 바로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여진족의 정벌퉁구스계인 여진족의 명칭은 중국 역사책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에는 숙신(肅愼), 한 대에는 읍루(揖婁),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勿吉), 수·당 시대에는 말갈(靺鞨) 등으로 부르다가 발해가 멸망한 후부터는 여진(女眞)으로 불렀다. 중국의 북사(北史)에 여진족은 율말부, 백출부, 안거골부, 불열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의 7부족이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분산되었던 여진이 발해가 망한 뒤인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통일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숙종 때, 북만주의 완옌부 추장 영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북간도 지방으로 세력을 뻗쳐 왔고, 그 아들 우야소는 다시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하여 있던 동여진을 아우르게 되자, 정주를 경계로 고려군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여진족과의 충돌에서 보병 부대 중심의 고려군은 기병인 여진군에게 번번히 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 부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승병 부대인 항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을 편성하게 되었다. 신기군은 문무 산관(散官)과 서리로부터 상인, 노복에 이르기까지 무릇 말을 가진 자로 편성하였고, 말을 가지지 않은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 응시자가 아닌 사람은 신보군에 편성시켰다. 항마군은 승려를 뽑아 조직하였는데, 국초부터 노동력에 동원되던 승려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이처럼, 전시 체제하의 총동원 태세를 갖추어 가던 중, 숙종이 돌아가고 그의 아들 예종이 즉위하였다. 여진 토벌군의 군용과 군율이 갖추어 지자, 예종 2년 12월에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는 17만의 출정군은 천리 장성을 넘어 여진족의 거점인 함흥 평야와 그 이북 지방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고, 그 땅에 함주를 중심으로 9성을 쌓고 방비하였다. 그러나 거처를 잃은 여진족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인한 방비의 곤란, 서북쪽 거란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 및 여진의 환부 애원과 조정에서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어 9성은 1년 7개월 만에 다시 여진족에게 되돌려 주었다 만주의 여진족의 추장 아골타(阿骨打)가 1115년에 자립하여 금(金)나라를 세우고 다음해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와서 통교를 청하였으나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았으나 1125년에 금이 요를 멸망시키자 드디어 고려는 금에 굴복하였다. 한 때 고려에서는 금에 대한 북벌론(北伐論)도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금에 멸망된 송은 남중국에 남송(南宋)을 세웠으나 고려와 남송의 공적 관계는 끊어졌다. 그러나 남송초의 약 40년 동안에 송의 상인들은 20여회에 걸쳐서 고려에 왔었다.
2충렬왕이후 고려는 원의 내정간섭을 심하게 받았는데 특히 공녀문제가 심각하였습니다. 원에서는 고려 처녀들이 인기가 높아 고위층에서는 앞다투어 고려 처녀들을 원하였다는데 이걸 고려판 한류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그 폐단이 심각하여 처녀들이 잡혀간 집안에서는 대성통곡이 끊이지 않았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속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충렬왕 2년 대부경 벼슬에 있는 박유라는 자가 상소를 올립니다. 박유가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이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처를 하나 두는 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컨대 여러 신하, 관료들로 하여금 여러 처를 두게 하되 품위에 따라 그 수를 점차 줄이도록 하여 보통 사람에 이르러서는 1인 1첩을 둘 수 있도록 하며 여러 처에게서 낳은 아들들도 역시 본처가 낳은 아들처럼 벼슬을 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 안에 원한을 품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이 없어지고 인구도 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잡혀가는 고려 처녀들의 수를 줄여(당시 원의 징발대상은 처녀에 한하였습니다.) 어떻게든 그로 인한 불상사를 막고자 하는 고육지책이었으나 부녀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원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읍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연등회 날 저녁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위하여 따라갔는데 어떤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첩을 두고자 요청한 자가 저 놈의 늙은이이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서로 가리키니 거리마다 여자들이 무더기로 손가락질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상들 가운데 그 부인을 무서워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건의를 정지하고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고려사회는 여성들의 지위가 매우 높았으며 조정의 대신마저도 대놓고 비난할 정도로 발언권이 강했음을 알게 해주는 사실입니다.
3단군(檀君)에 대한 일변(一辨) 근일에 일본인은 단군(檀君)이 무(無)하다고 주장하나 그는 정치상 감정으로 출래(出來)한 조사(造辭)인즉 오인(吾人)은 차(此)를변명코저 아니하노라. 그러나 근일에 조선인중에서 단군에 대한 논의가 유한 동시에 단군(檀君)을 단군(壇君)으로 서(書)하는 인이 종종(種種)하니 차(此)는 일변(一辨)치 아니할 수 없는 사(事)이라 하노라. 무릇 국조(國租)의 유무(有無)를 논함은 마치 자기 조선의 유무를 논함 같으니 곳 하인(何人)이든지 자기 최고의 조선(祖先)이 여하한 인인지는 상지(詳知)치 못하나 자기의 조선(祖先)이 유한 것은 사실이니 국가.도 역연(亦然)하야 일민족이 국가를 조직 생활한 이상에 국조(즉, 그 민족이 국가를 창설할 시에 그 대표가 될만한 인을 지칭함)가 유한 것은 사실이라. 고대(古代) 조선민족이 국가를 조직한 이상에 그 국조가 유한 것은 사실인 동시에 고사에 그 국조는 곳 왕검이라 하였고, 왕검의 호는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그러면 조선의 국조는 곳 단군왕검이라 아모이논(異論)할바 없느리라. 이제 단군(檀君)을 단군(壇君)으로 서(書)함을 불가하니 그는 곳 단군(檀君)을 단군(壇君)이라 서(書)하는 이유는 단군사의 최고 기록이라 할만한[지금 여존한 사서(史書)중에) 삼국유사 (약700년전 고려승 일연의 선(選)]에 단군(壇君)이라 서(書)한 때문이라 하나 그러나 그러하다고 단군(壇君)이라 서(書)함이 불가한지라 곳 삼국유사에는 무론 단군(壇君)이라 서하였다. 그후, 약 200년후에 조선초엽 곳 태조 태종시대의 選(선)한 동국사략권근의 단군시(檀君詩)등에다 단군(檀君)으로 서(書)하고 태종의 언(言)에 단군제천(檀君祭天)을 논한중에도 단군(檀君)이라 서(書)하였고 그 후 세종 11년 곳 거금(距今) 약 500년 전에 국가에서 단군묘(檀君廟)를 건(建)하고 단군(檀君)의 위(位)를 서(書)할시에 단군(檀君)이라고 명서하였고 성종 3년 곳 거금(距今) 약 450년 전에 三聖祠(삼성사)를 준공하고 단군(檀君)의 위(位)를 서(書)할시에 또한 단군(檀君)이라고 명서하였고 기여제종서적(其餘諸種書籍) 문헌(文獻)에 전부 단군(檀君)으로 서(書)하였으니 연(然)즉 조선의 국조는 단군(檀君)으로 칭호를 확정한지라 곳 삼국유사에 단자(壇字)로 서하였으나 그는 일사인(一私人)의 찬술(撰述)한 것이요 조선의 국가적으로 확정한 칭호는 단자(壇字)로 書한것이니 단군(檀君)의 호는 단군(檀君)으로 칭함이 지당(至當)함이다. 조선(朝鮮)의 국조(國祖)는 왕검이니 그 호를 단군(檀君)이라 하거나 왕검은 불변할지라 삼국사기, 고구려(高句麗) 동천왕기에 평양(平壤)은 신인(神人)왕검의 댁(宅)이라 명서(明書)함을 보면 단군(檀君)이나, 단군(檀君)이라는 칭호는 곳 후세의 존칭한 명사일지오 조선의 국조는 본명이 왕검인 것만은 명백하나니 조선의 국조를 왕검이라고 직서함이 가하고 그를 조선국가적으로 존칭한 명사가 단군(檀君)이라 하였은즉 왕검의 존칭을 書하려면 단군(檀君)으로 서함이 가한지라. 지금 일본인이 단군(檀君)의 유무를 논하야 세인에 이목을 현란하는 시에 제하야 조선인중에서 단군(檀君)이라는 명사를 단군(e壇君)이라 개서함은 더욱 불가한 사(事)니 오인은 왕검의 칭호는 檀君이라고 서함이 가하니라. 또 삼국유사에는 단군(壇君)이라고 서하였으나 그 동시대 곳 고려사 지리지에 강화, 구월산, 서경(평양)조에 다 단군(檀君)이라 서하였나니 혹자 이 고려사는 조선 세종시대 정인지등의 찬(撰)인즉 고려시대를 인할 수 없다 하나 그러나 전조의 지리지는 전조 시대의 원본을 그대로 두는 것이 원칙이니 곳 후세(後世) 정인지의 등이 단(檀)자로 개조하였다고 할 수 없고 또 후세의 인이 단(壇)자를 단(檀)자로 개하였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있을지니 곳 동국사략이나 권근의 단군시(檀君詩)나 고려사에서 모두다 단(壇)자를 단(檀)자로 개하였으면 그는 당시 학자 곳 권근 정인지의 동이 고래 기록을 조사한 결과에 단(檀)자가 가한 줄로 인한 때문일 것이라. 곳 삼국유사에 단(壇)자로 서한 것을 권근등이 인식하였음은 아닐지니 그는 곳 삼국유사에 단군(壇君)이라는 단(壇)자가 수다한 때문이라. 또 고려사 지리지에 고려시대부터 있는 삼성사(三聖祠)에 단군(檀君)이라 명서하였은즉 후세 조선 성종이 단(壇)자를 단(檀)자로 개서하였음은 아닐지요 고려시대부터 단(檀)자로 있었음이 사실일지라. 그런즉 도리어 삼국유사의 단(壇)자가 단(檀)자의 오서인지 모를지요, 또 권근등이 삼국유사의 외에 다른 고서를 참고하여 단(檀)자가 정당한 것을 발견한 것으로 추인할 수도 잇는지라[권근의 저한 동국사략의 등에 단군(檀君)의 기사가 삼국유사의 단군(壇君) 기사의 대동소이함을 보면 삼국유사의 외에 다른 고기(古記)가 유하였던 것을 추인함]. 하물며 고대에 복사하는 술이 부정하야 오자가 다하기 쉬운즉 삼국유사의 단(壇)자를 정확(正確)히 신용(信用)할 수 없나니라. 요컨대 왕검의 칭호를 조선국가적으로 공칭하기를 단군(檀君)으로 하야 단군전묘(檀君殿廟)의 신위에나 관찬(官撰) 서적에 필개단군(畢皆 檀君)으로 書하였고 조선인이 필개 단군으로 전수 인지하였으니 설혹 고대 서적에 단군(壇君)이라 서하였더라고 [삼국유사에 단군(壇君)이라 서하였을뿐이요 고대 타서에는 결코 단(壇)자가 무함을 주의하라. 단 고대 타서(古代他書)에는 왕검(王儉)이라고 서(書)하였을뿐이라] 후세(後世)에 국가적 민족적으로 단군(檀君)이라고 존칭하였은즉, 오인(吾人)은 단군(檀君)이라고 함이 정당하니라
4몽고는 중국 대륙을 정복한 후에 고종 18년(1231년) 8월에 고려를 침범하였다. 몽고 장수 살례탑은 고려의 북방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고려 조정에 사자를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고하였다. 조정에서는 갑작스러운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예물을 후하게 보내니 살례탑은 이듬해 정월에 요동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몽고는 북방지역에 다루가치를 72명이나 파견하고 부당하게 과중한 물자를 요구하면서 압력을 가하여 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고와 항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는 몽고군이 대륙 유목민이므로 육전에는 능하나 해전에는 약한 것을 노린 것이다.그리하여 고종 19년(1232년) 6월에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고 지방 백성들에게는 섬이나 산으로 피난하도록 하였다. 몽고는 동년 12월에 살례탑을 재차 침입시켜 강화도에서 나와서 항복하도록 하였으나 고려 조정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살례탑은 그대로 남하하여 한양산성을 함락시킨 뒤 처인성(지금의 수원성)을 공격하다가 승장 김윤후의 화살을 맞고 죽자 몽고군은 철수하였다.고종 22년(1235년) 7월에 몽고는 고려의 반역자 홍복원을 앞장 세우고 침입하여 강화도에서 출륙하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 불응하므로 동 26년(1239년)까지 4년 동안 전국을 유린하여 막대한 인명과 재물에 피해를 입혔다. 경주 황룡사 9층탑도 고종 25년 4월에 몽고군의 만행에 의하여 소실되었다. 이리하여 고종 46년(1259년)까지 28년 동안에 일곱 차례의 침입으로 전국은 쑥밭이 되고 인명 살상과 참상이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특히 고종 41년(1254년) 7월에 악귀 차라다가 침입하여 동 43년(1256년) 9월에 돌아갈 때까지 몽고에 잡혀간 사람이 남녀 20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이외에 그들에 의하여 학살된 백성이 수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려 조정이 몽고인의 약점을 노려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적중하였으나 전 국토에 대한 방어 대책은 마련하지 못한 까닭에 이와 같은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문신들 간에는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강화도에서 버티는 것이 상책이 못된다 하여 몽고와의 화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고종은 46년(1259년) 4월에 태자 전을 청화사로 보내어 화의를 성립시켰다. ==================================================================================================참고 : 삼별초의 난삼별초의 난 원종의 명령에 불복하고 항몽태세를 갖춤.강화도에 삼별초의 혁파를 명하자 삼별초는 원종을 적으로 돌리고 난을 일으킴.고종은 태자를 목고로 보낸 다음 6월에 돌아가셨으므로 임시로 왕손이 국정을 보다가 이듬해 3월에 태자가 귀국하여 등극하니 이가 원종(元宗)이다.이 때, 몽고에서는 헌종(憲宗)이 죽고 그의 동생 홀필렬(忽必烈)이 계승하니 그가 세조(世祖)이다. 원종은 세조와도 간 때에 접촉이 있었으므로 왕족 희(僖)를 축하사절로 보내니 세조도 고려에 대해서는 관용하였다.한편 최우(崔瑀)는 고종 36년(1249년)에 죽고 그의 아들 최항(崔沆)이 뒤를 이었는데 그도 44년(1257년)에 죽으니 그의 서자 최의(崔誼)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최의는 연소하였으므로 45년(1258년) 3월에 김준(金俊)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그 후 김준은 원종 9년(1268년) 12월에 임연(林衍)에게 제거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문신 이장용(李藏用)등은 몽고와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데 반하여 삼별초 무신들은 항거할 것으로 일관하였다.이러한 화의론(和義論)과 항쟁론(抗爭論) 틈바구니에서 원종(元宗)이 화의론으로 기울어지자 임연(林衍)은 10년(1269년) 6월에 원종을 폐하고 왕제(王弟)인 창(猖)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이 때 세자 심(諶)이 국사로 연경(燕京)에 가 있었으므로 이 소식을 듣고, 원 세조(世祖)에게 아뢰어 임연(林衍)에게 죄를 사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세조는 고려를 복종시킬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강경하게 압력을 가하여 그 해 11월에 원종(元宗)을 복위시켰다. 복위한 원종은 동년 12월에 연경에 가서 사례하고, 항구덕인 평화를 위하여 원 왕실과 혼인을 맺는 일과 강화도에서 출륙하여 환도(還都)하는 일과 권신(權臣)을 제거하는 일 등을 약속하고 다음해 2월에 세자 심(諶)과 함께 귀국하였다.원종은 귀국하자 개성(開城)에 머물면서 강화도에 있는 문무백관에게 출륙을 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삼별초 군인들은 곧 불복하여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을 각도에 파견하고 항몽태세(抗蒙態勢)를 취하였다. 원종은 장군 김지저를 강화도로 보내어 삼별초의 혁파(革罷)를 명하였다. 그러자 삼별초는 무기고를 점거 봉기하여 왕족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받들고 원종을 적으로 돌리니 이를 삼별초의 난이라 한다. 이 때 주동자는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지유(指愉) 노영희(盧永禧) 등이었다. 이때 안방열은 환도파를 따라 출륙할 것이냐, 아니면 삼별초를 따라 입해할 것이냐 하는 것을 봉은사에 모시고 있는 태조의 그림 앞에서 점을 쳤다. 점괘는 '반은 보존하고 반은 망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풀이하여 말하기를 '망한다는 것은 출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보존한다는 것은 삼별초를 따라 바다로 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그리하여 삼별초는 원종 11년(1270년) 6월 1일부터 3일 사이에 강권을 발동하여 천여척의 크고 작은 배에 사람과 물자를 싣고 남하하였다.개성의 조정에서는 김방경을 추토사로 삼아 군사 60여명으로 몽고의 송만호 천여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였다. 삼별초가 영흥도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김방경이 공격하려 하였으나 송만호가 두려워하며 이를 말리었다. 이리하여 삼별초는 8월에 진도에 도착하여 용장성을 쌓는다.
5몽고와의 전쟁 12세기 초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가 금을 정벌하자 금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이 몽고의 공격에 밀려 고려의 영토로 밀려왔다. 몽고는 금의 장군 포선만노가 간도 지방에 세운 동진국을 정벌한 후 이들과 함께 거란을 추격하여 고려에 공동작전을 제의해 왔다. 평양 동쪽에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을 몽고와 연합하여 섬멸하였는데, 이를 '강동의 역'이라고 한다. 이후에 몽고와의 접촉이 시작되었다.'강동의 역'이 끝난 후 몽고는 고려에 막대한 공물을 요구해 왔다. 종래, 고려는 요나 금에게 공물을 보냈으나, 상대국으로부터 공물의 대가에 상당하는 답례가 있었다. 그러나. 몽고의 경우는 답례가 없는 일방적인 징발이었다. 고려가 몽고의 과중한 공물 요구에 시달리던 때에, 공불을 징수하고 귀로에 오른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변에서 피살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몽고의 엄중한 책임 추궁과 국교의 단절을 가져왔다. 국교의 단절은 고려에 대한 몽고의 출병을 뜻하는 것이었다. 몽고의 국교 단절 7년 만인 1231년 고려에 침공해 왔다.몽고가 점령 지역에 두었던 관직으로 다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점령한 지역의 백성을 직접 맡아 다스리던 것과 다른 하나는 국사 전반에 간섭하던 것이었다. 고려에 침입한 몽고는 첫째인 경우 서경 등 서북면 지방 14개성에 72명의 다루가치를 두어 지배하였으나, 그 후 고려에 의하여 모두 살해되었으며, 둘째의 경우 고려가 원에 항복한 후 원종 11년(1270)에 설치하여 고려에 대한 철저한 내정 간섭보다는 왕의 잘못을 충고하고 고려에 나와 있는 원의 관원과 고려인 사이에 분쟁을 해결하고 원에 죄를 지은 고려인을 처단하는 데 그 임무가 컸다.제 1차 참입 때의 몽고 침입군은 충주성에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당시 충주성에는 양반 별초와 노군(奴軍) 및 잡류 별초가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막상 적이 쳐들어오자 양반 별초는 달아나고, 지광수의 지휘하에 노군 및 잡류 별초가 끝까지 성을 사수하였다.고려 고종 때의 승려이다. 몽고 장군 살리타가 고려에 2차 침입해 왔을 때 백성과 힘을 합쳐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결사 항전을 폈다. 항전 중 화살을 날려 적장 살리타를 살해하였다. 그 후, 몽고가 충주성을 공격할 때에도 천민들을 이끌고 70여 일간 혈전을 벌여 성을 사수하였다. 살리타를 사살한 공으로 상장군의 관직을 내렸으나 사양하였다고 한다.최씨 집권 시대의 군대로 별초는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시초는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하여 야별초를 설치하였는데, 그 수가 증가되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었고, 그 뒤 몽고에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자들로 신의군을 조직하여 삼별초라 하였다. 삼별초의 성격은 권신에 의해 설치되고, 권신의 무력 기반으로 이용된 私兵이나, 경찰과 대몽 항전의 군사적 기능을 도맡아 공적인 성격도 갖춘 군대이다. 그 지휘자는 도령, 지휘, 교위 등 국가 관료가 배치된 점도 삼별초의 그러한 이중성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삼별초는 도둑을 잡고, 죄인을 심문하고, 경찰권을 행사하였으며, 전투에서는 수도 경비대, 친위대, 특공대 등과 같은 성격의 군사 활동을 수행하였다. 삼별초가 군사적 활동을 도맡은 까닭은 1253년경 이후 정규군의 활동이 거의 없어진 때문이며, 이후 삼별초는 대몽 항전의 주력 부대로, 또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으로 기능하였다.원종 때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삼별초의 영수로서 왕족 승화 후 온을 임금으로 추대한 후 강화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대몽 항전을 시작하다가 여·몽 연합군의 공격에 의하여 전사하였다.배중손과 함께 삼별초를 이끌고 몽고에 항복한 조정에 반기를 들고 몽고와 항전을 계속한 장군으로 여·몽 연합군에 의하여 진도가 함락당하자,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가 재기를 다짐하였으나, 뒤쫓아돈 고려 장군 김방경에 의하여 패하고 무리들과 함께 장력한 자살을 하였다.13세기 말 원에 의하여 일본 정벌을 위한 전방 사령부로서 고려에 설치되었다가, 그 뒤에도 기능은 전환되엇으나 고려 말까지 존속하였던 관서이다. 정식 명칭은 征東行中書省으로서, '정동'은 일본 정벌을 뜻하는 것이고, '행중서성'은 중앙 정부의 중서성의 지방 파견 기관을 뜻하는 것이다. 정동행성은 명의상으로는 엄연한 관서였으며, 그 우두머리인 좌승상은 고려 왕이 겸임하였다. 정동행성은 그 부속기관으로서 이문소(理問所)를두었다. 이는 대원 관계에서의 범죄 행위를 다스리는 업무를 맡았는데, 이로써 부언 세력을 뒷받침하였다. 정동행성의 존재는, 첫째, 행성의 승상으로 고려 왕을 임명함으로써 고려를 형식상 원의 한 행성과 같은 관계로 규정하려 하였고, 둘째, 고려와 원과의 교섭 통로를 확보하였으며, 셋째, 부원 세력을 뒷받침하는 기관으로서 기능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려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연호도 그들의 것을 사용하고, 관제도 그들의 주장에 따라 고쳐야 했다. 즉, 종래의 중서 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도 첨의부로 하여, 그 장관인 첨의중찬은 오늘의 국무 총리와 같았다. 그리고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도 고쳐 이부와 예부를 합쳐 전리사로, 병부를 군부사로, 호부를 판도사로, 형부를 전법사로 고치고 폐지하였다. 그리고 중추원은 밀직사로,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어사대는 감찰사로 강등시켰다. 각부의 장관인 상서는 판서로, 차관인 시랑은 총랑으로 개칭하였다. 군제에도 변화가 나타나, 개경에는 중방에 대신하여 순마소가 설치되어 경찰과 시위를 맡았다. 여기에는 총관, 만호, 천호 등 몽고식 군직이 설치되었다.원의 지배를 받던 충렬왕 초기에 재래의 도병마사를 개칭한 것이다.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던 기관으로 회의는 만장 일치제였으며, 참가 관리는 도평의사사 소속의 3품 이상의 관원과 첨의부 밀직사의 고관이 참가하였다.왕실의 결혼을 비롯하여 貢女, 流民, 歸化人, 學者의 교루 등 광범위한 인물의 교루가 있었다.몽고의 오랜 간섭 속에서 관직명, 인명을 비롯하여 일상 용어에 이르기까지 몽고어가 사용되었으니, 치(사람), 수라(왕의 식사) 등은 몽고어의 흔적이다.몽고의 복장, 두발 등 몽고풍이 유행되었고, 고려의 의복, 음식, 풍속 등 이른바 고려양이 몽고에 전해졌다.충선왕의 萬卷堂을 중심으로 원의 학문, 서예(송설체)가 전래되었고, 朱子學이 도입되어 불교에 대신하여 조선 왕조의 이념이 되었다.원의 개방 정치에 따라 사라센 문화가 들어와 天文, 醫學, 曆法, 建築 등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화약과 목화의 전래로 고려 사회에 큰 변화가 있었다.몽고의 궁중 등에 유행하던 고려의 풍속, 고려와 원은 약 1세기 간 인적, 물적 교류가 많았다.. 몽고의 관리와 공주가 고려에 왔는가 하면, 고려에서도 왕세자, 인질, 공녀, 내시, 학자, 승려들이 원의 수도인 연경에 가게 되었다. 특히, 원 말기에는 원 궁중에서는 시중드는 여자의 태반이 고려 여자들이었기 때문에 의복과 기물까지 고려식, 즉 고려 풍속(고려양)이 유행하게 되었다.고려가 원에 복속된 후, 원 왕실로부터의 처녀 공납 요구가 빈번, 과중함에 따라 그 선출이 지극히 곤란해졌다. 따라서, 충렬왕은 그 실천을 독려하고자, "16세 이하 13세 이상의 여자는 함부로 결혼할 수 없고 반드시 곤에 신문(申問)한 후에 허용할 것이며, 위반자는 벌한다."라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금혼의 법령이 엄격히 시행됨에 따라 사회적으로 각종 폐단이 유발되었으니, 양가에서는 그의 딸을 감추려는 나머지 자녀를 어릴적부터 출가시키고, 혹은 머리를 깎아서 중 행세를 시키는 등의 기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자녀를 단신 무언으로 이역만리에 보내게 되는 것을 미리 피하고자 하여 어렸을 때부터 부부 관계를 맺어 주는 것으로, 조혼 폐풍이 연원이 되었다. 원종 때 고려의 다루가치로 있던 자가 그의 며느리를 고려 명문 자녀 중에서 구하려 하였을 때, 여식을 가진 자들은 미리 겁을 내어 사위를 맞아들이니, 국가는 할 수 없이 귀족 집안 한둘을 적어서 그에게 선택을 맡겼다. 다루가치는 김연의 딸이 좋음을 알고 그 딸을 며느리로 삼으려 하였으나, 김연도 이미 사위를 맞아들이고 말았다. 그래서 조혼의 악습을 야기시킨 악법을 폐지시키고자 여러 가지 상소가 있었으니, 그 하나가, "아국은 본래 남자보다 여자가 많으니, 일처제를 버리고 관품에 따라 다첩제를 허락함으로써 몽고인에게 여자를 빼앗기는 것을 방지하자."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부녀자들은 매우 놀라, 연등회 날 저녁에 그 제안자가 나타났을 때, "축첩하기를 청한 자가 저 늙은이이다."라고 외치고 사방에서 손가락질을 함에 따라 그 제안은 흐지부지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소실을 가졌던 재상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였다. 몽고족에게 끌려감을 한사코 거부하던 고려의 여성의 기백은 부패한 도덕관을 가진 귀족들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6왕건(王建)이 신라말에 분열된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여 세운 왕조(918∼1392)로 공양왕(恭讓王)까지 34대 475년간 존속했다. 신라 말에 송악(松嶽:開城)의 토호(土豪)였던 왕건은 태봉(泰封)의 왕인 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다가 918년 궁예를 추방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1. 건국과 민족의 재통일 고려 태조 왕건은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복지겸(卜知謙) 등의 추대를 받아 철원(鐵圓:鐵原)에서 즉위하여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 통합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崇佛政策) 등으로 세력구축에 힘썼다. 이때 한반도 내의 형세는 후삼국(後三國)의 분열기였는데 935년 신라를 병합하였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하였다. 2. 왕권의 안정 고려 초 태조 때는 호족세력 통합의 방도로 호족과의 정략결혼이 성행함에 따라 대두한 많은 외척세력과 종실세력(宗室勢力)이 왕위 계승을 놓고 대립, 왕실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그 실례가 왕규(王規)의 난이다. 4대 광종(光宗) 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956년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958년 과거제도, 그리고 공복제도(公服制度)·칭제(稱帝)·건원(建元)을 실시하는 등 왕권의 위세를 과시하고 불평 귀족을 숙청하여 정치기강을 확립하였다. 5대 경종(景宗)은 전시과(田柴科)라 하여 전국가적 규모의 토지제도를 마련하여 관리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였고, 최승로(崔承老)의 보필을 받은 6대 성종(成宗)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하여 유교적 정치사상에 입각한 2성(省) 6부(部)의 중앙관제를 마련하였으며, 성종 때는 지방관제를 정비하여 최초로 지방관(地方官)을 파견하는 등 중앙집권제 강화에 힘쓰는 한편, 학문과 산업을 장려하여 국가기반을 굳혔다. 11대 문종(文宗)에 이르러 율령(律令)·전제(田制)·관제(官制)·병제(兵制) 등이 완비되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 3. 사회동요와 무신의 난 고려 사회는 문종의 문치정책(文治政策)에 따라 최충(崔) 등이 12도(徒)를 설치하고 인재를 배출하여 문운(文運)을 크게 떨쳤으나,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풍조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종 이후 17대 인종 때까지 인주이씨(仁州李氏)인 이자연(李子淵)→이호(李顥)→이자겸(李資謙)이 7대 80년간 왕실과 중복으로 혼인관계를 맺고 외척세력으로 등장하자, 왕권의 쇠약과 더불어 권력층은 토지를 겸병하기 시작하여 농민들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이자겸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자 인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1126년 이자겸의 난을 일으켰으며,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 사이의 반목으로 척준경·정지상(鄭知常)·김부식(金富軾)의 순으로 집권자가 바뀌는 등 귀족정치의 모순이 폭발되어 고려는 내란기로 접어들었다. 1135년(인종 13)에는 묘청(妙淸)이 서경천도와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을 주장하자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으로 묘청의 난이 일어나 귀족정치의 내분이 폭발하였다. 인종에 뒤이어 즉위한 의종(毅宗)은 군신과 더불어 향락을 일삼고 정사를 소홀히 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과거부터 불만이 많았던 무신들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보내고, 명종(明宗)을 즉위시켰다(정중부의 난). 그 후 무신간의 정권쟁탈전이 전개되어 1179년(명종 9) 경대승(慶大升)은 정중부를 죽이고 집권하였고, 경대승이 병사하자 1183년 천민출신인 이의민(李義旼)이 집권, 또 1196년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하여 최씨 무신정권은 우(瑀)·항(沆)·의() 4대 60여 년간(1196∼1258) 계속되었다. 이 결과 전시과의 붕괴로 농장이 확대되었고, 노비 증가·사병(私兵) 양성·하극상(下克上) 풍조의 대두로 천민 및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 사회질서가 붕괴되었다. 무신집권 기간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1173년 문신과 결탁하여 의종 복위운동을 한 김보당(金甫當)의 난, 1174년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난과 승려들의 반란, 하층민의 반란으로는 1176년 공주(公州) 명학소(明鶴所)의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 1182년 전주(全州)의 관노(官奴)인 죽동(竹同)의 난, 그리고 1193년 신라 부흥을 외쳤던 김사미(金沙彌)의 난과 효심(孝心)의 난, 1217년(고종 4) 서경에서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했던 최광수(崔光秀)의 난, 1137년 전라도 담양에서 백제 부흥을 표방했던 이연년(李延年)의 난, 그리고 1198년(신종 1) 최충헌의 사노(私奴)인 만적(萬積)이 노비신분 해방운동을 전개한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231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강화(江華)로 천도하였으나 1259년 원(元)나라와 화의하여 충렬왕(忠烈王) 이후 공민왕(恭愍王) 때까지 80여 년간은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자주성을 잃었다. 4. 대외관계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 대륙의 정치형세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고려가 건국할 때는 916년 요(遼:거란)나라, 5대 10국, 그리고 960년 5대 10국을 통일한 송(宋)왕조가 일어났다. 이때 고려는 대외정책으로 친송배요(親宋排遼)를 표방한 북진정책을 썼으므로 세 차례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962년 광종 때(송나라 태조 3) 송나라와 국교를 맺은 양국간의 관계를 보면 송나라는 북방에 위치한 요나라와 금(金:女眞族)나라를 의식하여 정치적·군사적 의도에서 제휴하려고 하였으나,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화 수입에 주목적을 두고 친선관계를 맺었다. 고려와 여진족과의 관계를 보면 숙종 때 만주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엔부[完顔部]의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북간도 지방을 통일한 후 우야소[烏雅束]가 함흥(咸興)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자, 숙종은 임간(林幹)에 이어 윤관(尹瓘)을 파견하여 여진정벌을 단행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윤관은 별무반(別武班)을 편성, 1107년(예종 2)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이 여진을 토벌하여 9성(城)을 축성하였으나 1년 후 9성을 포기하였다. 그 이유는 여진족이 환부(還附)를 애걸해왔고, 수비의 곤란 및 보수세력의 성장 때문이었다. 그 후 여진족은 1115년 아구타[阿骨打]가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1125년(인종 3) 요나라를 멸한 뒤 1126년 금나라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하기에 이르러 당시 집권자 이자겸 등의 주장으로 사대관계를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사회는 내분만 격화되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의 난 등으로 더욱 혼란하여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자주성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그 후 1370년 공민왕 때에 이르러 지용수(池龍壽)와 이성계(李成桂)가 랴오둥[遼東] 지방을 공략하여 랴오양[遼陽]을 점령하였다. 공민왕 때 2차에 걸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과 특히 우왕(禑王) 전후기의 왜구(倭寇)의 침입은 국정을 불안하게 했고 국력을 소모시켰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불안기에 명나라가 만주를 점령한 뒤 원나라가 지배하였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자, 이에 분개한 최영(崔瑩)은 우왕에게 품의하여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때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4불가론(不可論)을 내세워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을 고양(高陽)으로 귀양보내고, 우왕을 폐위시켜 강화로 추방한 뒤 아들 창(昌)을 즉위시켰는데, 이가 곧 창왕(昌王)이다. 이렇게 하여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새 왕조 조선을 개창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5. 중앙관제 고려의 관제는 후삼국 통일 후 태봉과 신라의 관제를 병용하였는데, 당(唐)·송(宋)나라와 고려의 독자적인 제도도 섞여 있었다. 이러한 관제는 6대 성종 때에 정비되기 시작하여 문종에 이르러 일단 완성되었다. 체제의 특징을 보면 2성 6부는 당제(唐制)에 가깝고, 중추원(中樞院)과 삼사(三司)는 송제(宋制)를 채용한 것이며,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식목도감(式目都監)은 고려 자체의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다. 관직상의 품계는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인 양반제도를 두고, 관등급은 정(正)·종(從) 각 9품의 도합 18품으로 나누었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宰府)과 중추원은 각각 2품과 3품을 획선으로 하여 상하 이중적 조직으로 그 직무도 달랐다. 중서문하성의 2품 이상의 고관은 재신(宰臣:省宰·宰相)이라고 하여 정책을 수립·결정하고, 3품 이하의 관원은 성랑(省郞:郞舍·諫官)이라고 하여 봉박(封駁)과 서경(署經) 등의 임무를 맡고 있었으며, 정책의 실무를 담당한 것은 상서육부(尙書六部)였다. 여기에는 상서(尙書:정3품)가 책임자였지만, 그 위에 판사제(判事制)를 따로 두어 중서문하성의 성재(省宰)로 겸직시킨 점은 고려의 정치체제가 귀족중심이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특히 왕권의 전제성(專制性)을 규제하는 대간제도(臺諫制度)가 있었는데,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御史臺)의 관원(官員)을 대간(臺諫)이라고 하였다. 대간제도를 보면 간쟁(諫諍)·봉박(封駁:중서문하성의 심사권과 도병마사의 의결권)·서경제도(署經制度)가 있었다. 이것도 귀족적 성격을 농후하게 반영해 주고 있다.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기에는 관제상의 격(格)을 낮추어 다음 도표와 같이 개편하여 운영하다가 공민왕 때에 관제가 다시 복귀되기도 하였다. 6. 지방관제 고려시대 기구 개편의 연혁을 보면 983년(성종 2) 12목(牧), 995년에 10도(道)·3경(京)·5도호부(都護府)·8목(牧)·양계(兩界)가 설치되고, 1018년(현종 9) 전국을 도와 양계로 나누어 그 밑에 4도호(都護)·8목을 비롯해 군(郡)·현(縣)·진(鎭) 등을 설치하였다. 5도제(道制)가 전국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예종(睿宗)·인종(仁宗) 이후이다. 지방행정기구의 운영상의 내용을 보면 3경은 풍수지리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태조 때는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을, 성종 때는 동경(東京:慶州)을 설치하였으며, 문종 이후 동경 대신에 남경(南京:서울)을 넣었는데, 서경에는 분사제도(分司制度)를 두어 왕이 머무를 경우 정무처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경기는 특수행정구역으로 전시과의 사전(私田) 지급의 대상지로 삼았으며, 5도는 일반 행정구역으로, 도 밑에는 주(州)·현을 두고 군·현에 한하여 외관(外官)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을 주군(主郡:領郡)·주현(主縣:領縣)이라고 하였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屬郡)과 속현(屬縣)이 더 많아 외관이 없는 속군과 속현은 외관이 파견된 군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최하층인 촌(村)과 천민집단으로 구성된 향(鄕)·소(所)·부곡(部曲)은 현에 소속되어 향리(鄕吏)가 직접 다스렸다. 향리는 일반 평민이나 천민집단의 조세·공물의 징수와 노역징발의 사무를 관장했으며, 일품군(一品軍)의 장(長)이 되기도 하였다. 영향력이 있는 향리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와 기인제도(其人制度)를 실시하였다. 군사적 특수지역인 양계(兩界)는 진(鎭)과 촌(村)을 두어 군사적 체제를 갖추었는데, 외관은 진까지 파견하였다. 7. 군사제도 고려의 기본군제는 중앙의 2군(軍) 6위(衛)와 지방의 주현군(州縣軍:도)과 주진군(州鎭軍:양계)으로 편성되었다. 6위가 형성된 것은 995년(성종 14)경이며, 2군이 형성된 것은 현종(顯宗) 무렵이고, 친위대인 2군은 6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2군 6위는 각각 정·부 지휘관으로 상장군(上將軍)과 대장군(大將軍)이 있었다. 이들 2군 6위는 8개 군단의 정·부 지휘관으로 구성된 군사최고 합좌기관(合坐機關)인 중방(重房:정원 18명)을 갖추었다. 2군 6위의 병력은 모두 1,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영(領)으로 구성되었다. 영은 병종(兵種)에 따라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常領)·해령(海領)·감문위령(監門衛領)으로 구분되어 도합 45령으로 4만 5000명이었다. 영(領)의 지휘관은 장군(將軍) 1명, 중장군(中將軍) 2명, 그 아래 낭장(郞將)·별장(別將)·산원(散員)·위(尉)·대정(隊正) 등 군관이 배치되었으며, 이들도 합좌기관인 장군방(將軍房)을 가지고 있었다. 2군 6위의 중앙군은 신분과 군역 의무를 세습하는 군반씨족(軍班氏族) 출신의 전문적 군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에게는 군인전(軍人田)이 지급되었으며, 중앙군과 지방군과는 교류가 없었다. 지방군은 도와 계(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도의 주현군 중 보승과 정용은 주현군의 핵심으로 치안(治安)·방수(防戍)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일품군(一品軍)은 노동부대로서 공역(工役)에 동원되었다. 양계는 국경지대의 군사적 지역인 만큼 진마다 초군(抄軍)·좌군(左軍)·우군(右軍)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이 주둔하였다. 주현군은 947년(정종 2) 광군(光軍)이 그 효시가 된다. 주현군은 군인전이 지급되지 않는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인이었다. 이 밖에 광군(光軍)·별무반(別武班:神騎軍·神步軍·降魔軍)과 최우(崔瑀) 집권 때는 삼별초(三別抄)가 있었다. 8. 토지 ·조세제도 고려의 토지제도 정비과정을 보면, 940년(태조 23) 역분전(役分田)을 실시하였다. 역분전은 고려 건국과정에서 태조를 도운 조신(朝臣)과 군사(軍士)에게 품계가 아닌 충성도(忠誠度)에 따라 지급된 토지로 논공행상의 성격을 지녔다. 그 후 집권체제가 안정된 976년(경종 1) 전시과제도가 전국가적 규모로 실시되어 현직 및 퇴직자에게 관직의 고하[四色公服:紫·丹·緋·綠]와 인품에 따라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땔나무를 얻는 땅)를 지급하였고, 따라서 이 제도 역시 역분전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후 토지제도 체제가 정비된 것은 998년(목종 1)에 비로소 성종 때의 관제를 기준으로 관직의 고하에 따라 18과(科)로 나누어 토지를 지급한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18品田柴科)를 마련하면서부터였다. 개정전시과는 1076년(문종 30) 갱정전시과(更定田柴科)로 개정되었는데, 이의 특징은 토지지급의 결수가 줄고, 무관에 대한 대우가 상승하였으며, 퇴직자는 토지 지급대상에서 제외되고 현직관리에게만 지급하되 경기에 한하였다. 전시과의 규정에 따라 지급된 토지는 수조권(收租權)의 귀속 여하에 따라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나누어 지급하였다. 지급된 토지는 완전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수조권만을 일정기간 인정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토지 관리권을 국가가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토지의 종류로는, 과전(科田)·공음전(功蔭田)·공해전(公田)·군인전(軍人田)·외역전(外役田)·내장전(內庄田)·구분전(口分田)·한인전(閑人田)·궁원전(宮院田)·사원전(寺院田)·둔전(屯田)·투화전(投化田) 등이 있었다. 조세(租稅)의 납부는 성종 때 수조권이 개인 또는 관청에 있는 사전은 수확의 1/2을 조(租)로 바치고 수조권이 국가에 있는 공전은 1/4을 조로 바치게 하였다. 공부(貢賦)는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것인데, 주와 현에서 해마다 바치는 상공(常貢)과 소(所)에서 생산된 특정물건(금·은·동·종이·먹 등)을 바치는 별공(別貢)과 과일나무·삼밭[麻田] 등에 부과하는 잡공(雜貢)이 있었다. 또 요역(役:賦役)이라고 하여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평민 남자는 병역과 부역의 의무가 있었다. 병역은 군포(軍布)로 대납할 수 있었으며, 부역으로 토목공사에 동원될 때의 식사(食事)는 자기가 부담하였다. 호적(戶籍)은 3년마다 재작성하였다. 9. 화폐제도 농업을 기본 경제로 한 당시 고려의 사회는 곡물(쌀)과 베[布]로 물물교역의 기준을 삼았으며, 996년(성종 15) 건원중보(乾元重寶)라는 한국 최초의 철전(鐵錢)을 만들어 썼으나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 7대 목종 때는 차·술·음식의 매매시에 국한했다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15대 숙종(肅宗) 때 의천(義天)과 윤관(尹瓘)의 주전론이 대두되어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 1101년 은병(銀甁:은 600g으로 주전하였다)을 만들었으나 귀족들 사이에서만 거래되거나 뇌물을 주고받는 데 많이 이용되었다. 1102년(숙종 7) 다시 해동통보(海東通寶)·해동중보·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를 주조하였으며, 1278년(충렬왕 4) 쇄은(碎銀), 1331년(충혜왕 1) 소은병(小銀甁), 34대 공양왕 때 한국 최초의 지폐인 저화(楮貨)를 발행하였하였다. 10. 교육제도 고려는 태조 때부터 교육기관으로 개경학(開京學)·서경학(西京學)을 두었으나 학교기관의 정비는 성종 때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한 정치기구 정비에 따라 관료 양성기관이 필요하여 992년(성종 11) 중앙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고, 지방의 12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를 1명씩 파견하였다. 국자감의 특징을 보면 삼학(三學)은 동일한 내용을 교수했으나, 입학자격은 신분이 각기 달랐다. 삼학에는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두고 가르쳤으나 잡학에는 박사만 두었다. 문종(文宗) 때는 개경에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 등 12도의 사립학교 설치로 사학(私學)이 발달함에 따라 관학(官學)이 쇠퇴하자, 16대 예종은 관학 진흥책으로 국자감을 국학(國學)으로 개칭하고 국학 내에 최충의 9재학당을 모방하여 7재(七齋)를 설치하고 중국 고전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한편, 국학 발전을 위한 육영재단으로 양현고(養賢庫)와 학술기관인 청연각(淸閣)·보문각(寶文閣)을 설치하였다. 1127년(인종 5) 지방교육기관으로 향학(鄕學)이 설치되어 교육기관이 완비되었다. 잡학 이외의 기술교육은 그 특수성에 따라 사천대(司天臺:천문·역법·지리·측후)·태사국(太史局:음양·술수)·태의감(太醫監:의학)·통문관(通文館:외국어)에서 담당하였다. 교육시설과 교육재단은 수서원(修書院:성종)·비서원(秘書院:성종)·서적포(書籍:숙종)·섬학전(贍學錢:충렬왕)이 있었으며, 국학과 향학의 교육운영을 위하여 학전(學田)을 지급하였다. 11. 사회 고려사회도 신분의 세습을 원칙으로 하는 양반관료와 중인·평민(농민)·천민으로 구성되었다. 왕족과 귀족으로 편성된 상류층은 족벌세력을 형성하였고, 과전·공음전·공신전을 소유하여 경제적 부(富)를 독점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에 참여하여 출세의 길도 독점하였다. 특히 5품 이상의 귀족에게 음서(蔭敍)나 공음전과 같은 특권을 부여한 것을 보더라도 특권계급을 공공연히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류층은 남반관리(南班官吏)·기술관·하급관리·하급장교로 지배층의 말단에 포섭되었고, 하류층인 평민은 일반 주·군·현에 거주하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여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들이었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백정(白丁)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특정한 직역(職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국가에 대한 조세·부역·역역(力役) 등을 부담하였으며, 제도적으로는 과거에 응시하여 관인(官人)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 점은 국학에 입학할 수 없었던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천민층은 향·소·부곡의 주민과 진척(津尺)·화척(禾尺:조선시대 백정)·재인(才人) 및 공·사의 노비뿐만 아니라 역(驛:교통기관)·관(館:숙박소)의 주민들이었다. 특히 노비들은 신분을 세습하여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이 편제된 고려사회는 평민으로부터 상류 귀족에 이르기까지 종(縱)으로는 5대, 횡(橫)으로는 8촌까지 포함하는 친족공동체를 이루고, 다시 가장이 통솔하는 몇 개의 가족단위로 분화되었는데 이러한 단위로 편제된 이유는 세·역·공물의 편리한 운영을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姓)이 보편화되자 출신지를 본관(本貫)으로 정하고, 본관을 세력평가의 표준으로 삼기도 하였다. 12. 법률과 풍속 당률(唐律)을 모방한 71조의 법률과 보조법률이 있었으나 일상생활과 관계되는 관습법을 중심으로 자치 질서를 인정하였다. 형벌은 태(笞)·장(杖)·도(徒:징역)·유(流:귀양) ·사(死:사형)의 5형으로 나누었고, 죄의 종류는 모반죄·대역죄·악역죄·불효죄·살인죄·강도죄·절도죄 등이 있어, 그 중 모반죄·대역죄·악역죄·불효죄를 중죄로 다스렸으며, 관리의 독직(瀆職)은 과전(科田)을 몰수하고 장·도형에 처하였다. 풍속은 부처에게 제사지내는 연등회(燃燈會)와 토속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팔관회(八關會)가 성행하였으며, 명절은 설날·대보름·삼짇날[上巳:3월 3일]·석존제(釋尊祭)·단오절(5월 5일)·유두(流頭:6월 15일)·백중(百中:7월 15일)·중추절(가위:8월 15일)·중양절(重陽節:9월 9일)·상달(10월 15일)·동지 등이 연중행사로 발전하였다. 오락으로는 공치기·씨름·제기·석전(石戰)·바둑·장기·윷·연·광대놀이·꼭두각시놀이 등이 있었다. 의복관계는 4대 광종 때 공복제도를 마련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달랐다. 평민은 대개 흰옷을 입었고, 여자들은 홍색(紅色)·황색(黃色)의 옷도 입었다. 남자는 상투·두건(頭巾)을 썼고, 부인은 머리에 쪽을 쪘으며, 귀부인은 외출 때 너울을 썼다. 처녀는 붉은 댕기, 총각은 검은 댕기를 달았고, 귀족은 가죽신, 서민은 짚신을 신었다. 죄인은 관이나 두건을 쓰지 못하였다. 장례풍속은 불교의 성행으로 화장(火葬)하는 풍습이 퍼졌고, 부모상은 100일 동안 복상하였으며, 고려 말에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가 수입된 뒤에 3년 동안 복상(服喪)하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13. 유학과 한문학 고려의 4대 광종은 유학을 중심으로 한 과거제도 실시로 새로운 지식계급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고, 6대 성종은 국자감·비서원·수서원을 설치하여 유교정치의 실천력을 담당할 수 있는 지식계급을 형성하였다. 특히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김심언(金審言)의 활약으로 유교의 정치사상체계를 성립시켰는데, 이것은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전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한 것이다. 문종 때 최충의 9재학당을 비롯한 12도의 사학(私學)이 출현하여 경서(經書)·사적(史籍)·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정배걸(鄭倍傑)·노단(盧旦)·곽여(郭輿) 등의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이후 15대 숙종과 예종·인종 등의 관학진흥책으로 최약(崔)·홍관(洪灌)·박승중(朴承中)·김인존(金仁存)·김부식(金富軾)·정지상(鄭知常)·최윤의(崔允儀) 등이 활약하여 유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은 고려 말 문화변동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1289년(충렬왕 15) 안향(安珦)이 연경(燕京)에 갔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이것을 유교의 정통이라고 생각하여 책을 베끼고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 가지고 왔다. 충선왕(忠宣王)은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하여 양국의 문인(중국측:趙孟·虞集·閻復, 고려측:李齊賢·白正)들을 교류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때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10년간 받들었던 백이정(白正)이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온 뒤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에게 전하여 고려 말기에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길재(吉再) 등 뛰어난 성리학자가 배출되었는데, 특히 정몽주의 노력으로 철학적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다. 성리학은 고려 말 신흥 사대부 계급에 수용되었다. 고려 초기 한문학(漢文學)의 학풍은 중국을 모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독자적 성격을 지니고 관념적이며 사대적 경향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9대 덕종(德宗) 말년에 왕가도(王可道)를 중심으로 한 북진파가 몰려나고, 인주(仁州)이씨가 집권하자 보수적 성격을 띤 유교 경전(經典)보다 안일함만을 찬미하는 한문학이 발달하였다. 이때 시(詩)나 문장에 뛰어난 사람은 김인존 ·김부식 ·정지상 ·홍관 등을 꼽을 수 있다. 무신의 난 이후 한문학 경향은 고려 초기 향가문학이 차츰 사라지면서 패관문학(稗官文學)이 대두되어 최씨 무신집권 하에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패관문학은 주로 전설·신화·일화·풍속을 주제로 서술되었는데, 필자마다 색다른 성격을 띤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은 무신의 난 이전 시대에 대한 회고,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종래의 한문학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체를 이룩하여 한국 전통과 연결된 새로운 문학체계를 발전시켰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은 무신의 난이 일어나기 전 천태종의 정치 참여를 비난하였고, 무신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자들의 많은 문집이 나왔는데 전기의 시(詩)·문(文)과는 달리 정치·사회 등에 관한 논설이 중심이었다. 14. 국문학 고려 초기에는 향가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한문학은 과거제도에서 문예를 중시하여 한시(漢詩)가 발달하였고 귀족들의 필수적 교양이었으나 국문학은 대중 사이에 행해졌고, 민중은 향가 대신 민요를, 지식계급에서는 향가에서 변모한 경기체가(景幾體歌)가 유행되었다. 15. 역사편찬 고려 초부터 춘추관(春秋館)에서 역사편찬을 담당하였다. 거란 침입 후 전란으로 소실된 사적을 편찬하기 위하여 1013년(현종 4) 최항(崔沆)·김심언(金審言) 등은 태조 때부터 7대 목종 때까지의 사적을 편찬, 1032년(덕종 1) 황주량(黃周亮)은 《칠대실록(七代實錄)》(30권)을 완성하였다. 문종 때 박인량(朴寅亮)의 《고금록(古今錄)》, 예종 때 홍관은 연대미상인 《편년통재(編年通載)》의 뒤를 이은 《속편년통재(續編年通載)》를 편찬하였으나, 모두가 전하지 않는다. 1145년(인종 23)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삼국의 역사를 보수적 유교사관에 맞추어 기록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전한다. 역사의식은 무신의 난과 몽골침입으로 시련을 겪은 뒤, 고려의 지식계급은 유교사관에 입각한 사학(史學)의 경향이 새로 대두되어 불교의 폐단, 권문세가들의 횡포 등 사회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이에 대한 비판과 민족적 자주성을 재인식하고 여기에 정통과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사관을 받아들여 새로운 역사학이 성립되었다. 23대 고종(高宗) 때 각훈(覺訓)은 불교계 정리책의 일환으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편찬하였고, 25대 충렬왕 때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불교 입장에 서서 고대문화와 관계되는 주요한 사실을 기록하여 정통적 사관을 제시하였다. 또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는 한시(漢詩)로 중국과 한국역사를 적은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썼다. 특히 이제현은 고려국사를 편찬하다가 중단하였으나 그의 사학은 조선시대의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 그의 사관은 정통과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16. 인쇄술 고려문화 중 특히 발달한 것이 출판문화이다. 목판인쇄로 된 현종 때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숙종 때의 《속장경(續藏經)》, 1251년(고종 38)에 완성된 《팔만대장경》 등 많은 장경사업을 이루었으며, 숙종 때는 서적포를 두어 서적출판을 담당하였다. 금속활자로는 1234년 최윤의(崔允儀)가 편찬한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이 독일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200년이나 앞선다. 이 사실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전한다. 1377년(우왕 3)에 인쇄되었고, 하권이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직지심경(直指心經:直指心體要節)》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17. 예술 고려예술은 귀족적·불교적 색채를 띤 미술이 성행했으나, 석탑·석등·불상 등 조각분야는 퇴화되고, 귀족들의 생활기구를 중심으로 한 자기·나전칠기·불구(佛具) 등이 발달하였다. 예술품 중 상감청자(象嵌靑瓷)는 세계적 공예품으로 민족예술의 정수이다. 자기의 발달을 보면 11세기 예종·인종 때에 이르러 송자(宋瓷)의 영향을 벗어나 장식이 없는 푸른 하늘색과 선(線)이 특징인 비색청자(翡色靑瓷)를 제작하였다. 12세기 중엽 의종 때에 이르러 고려인의 독창적 재능을 발휘한 자기가 상감청자이다. 상감청자는 비색청자의 표면에 양각(陽刻)·음각(陰刻)의 무늬를 넣고 백토와 흑토를 그릇 표면에 새겨넣는 방법으로 완성한 것이다. 고려 전기의 건축은 왕궁(滿月臺)·사찰(興旺寺)·귀족의 저택 등 귀족적·불교적인 건축에 치중하였으나, 말기에는 고려의 독특한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건축의 특색은 층단식으로 외관이 높고 웅대하며, 건물의 기둥은 안쪽을 약간 기울게 하였고, 기둥을 주심포형(柱心包形)으로 하여 안정감을 보였으며, 태양광선의 이용법도 답변확정하였다. 대표적 건축으로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안동 봉정사(鳳停寺)의 극락전(極樂殿), 예산 수덕사(修德寺)의 대웅전(大雄殿)이 현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정돈된 형태를 중시하지 않는 양식이 유행하여 안정감·정돈미가 무시되고, 탑의 형식이 다양화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1020년 현종 때 만든 신라계통의 양식인 현화사(玄化寺) 7층석탑, 광종 때 만든 송나라 때의 모형인 월정사(月精寺) 8각 9층석탑, 충목왕 때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만든 목조형(木造形) 양식인 경천사(敬天寺) 10층석탑이 유명하다. 그 밖에도 1009년의 예천(醴泉) 개심사(開心寺)의 5층탑, 1021년의 흥국사(興國寺)의 탑, 1022년의 제천(堤川) 사자빈신사석탑(獅子頻迅寺石塔) 등이 있다. 부도(浮屠)로는 신종(神宗) 때의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강원도 원성군 법천사)과 태조 때의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충북 중원군 정토사)이 대표적 걸작으로 현재 경복궁 안에 있다. 불상(佛像)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 안에 있는 소조여래상(塑造如來像)은 목조좌상(木造坐像)인 아미타여래상으로 신라불상 형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제일의 걸작이다. 이 밖에도 967년에 세운 은진미륵(恩津彌勒), 충주(忠州)의 철불좌상(鐵佛坐像)이 있다. 이 철불은 양 팔이 없어졌으나 아담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범종(梵鐘)으로는 천흥사범종(天興寺梵鐘:덕수궁 소장), 수원의 용주사 범종(龍珠寺梵鐘), 탑산사 범종(塔山寺梵鐘:해남 대흥사 소장) 등이 있는데, 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종이다. 또한 연복사 범종(演福寺梵鐘)·조계사 범종(曹溪寺梵鐘) 등이 있고, 일본 등지에도 20여 개의 고려범종이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석비(石碑)로 남아 있는 것은 937년에 세운 해주의 광조사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 940년의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와 강릉의 보현사 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碑), 943년의 충주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975년의 여주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 1017년의 정토사 홍법대사실상탑비(淨土寺弘法大師實相塔碑) 등이 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석등(石燈)으로는 은진(恩津)의 관촉사석등(灌燭寺石燈), 회양(淮陽)의 정양사석등(正陽寺石燈), 나주 서문내석등(西門內石燈), 신륵사 보제석종전석등(普濟石鐘前石燈), 개풍의 공민왕현릉비정릉석등(恭愍王玄陵妃正陵石燈)이 있다. 당간(幢竿)으로는 청주 용두사(龍頭寺)의 철당간(鐵幢竿), 나주 동문 밖의 석당간(石幢竿)이 유명하며, 당간지주(幢竿支柱)로는 남원의 만복사(萬福寺)와 천안의 천흥사(天興寺) 옛터, 홍천 희망리(希望里)와 춘천 근화동(槿花洞)의 것이 유명하다. 【그림과 글씨】 그림은 국초 이래 화가 양성을 위하여 도화원(圖畵院)을 설치하였다. 대표적 화가로는 《예성강도(禮成江圖)》의 이령(李寧),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의 이광필(李光弼),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의 공민왕, 혜허 등이 유명하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안향(安珦)의 초상화가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있고, 혜허의 양유관음상이 일본에 있다. 벽화로는 모란과 들국화를 그린 예산 수덕사의 벽화와 사천왕상과 보살상을 그린 부석사 조사당의 벽화가 현존한다. 개풍군 수락암동(水落岩洞) 및 장단군 법당방(法堂坊) 고분의 벽화가 있다. 고려시대의 서체(書體)는 무신 집권기까지는 왕희지체(王羲之體)와 구양순체(歐陽詢體)가 유행하였고, 충선왕 때부터는 조맹부체(趙孟體)인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그 중 유명한 사람은 유신(柳伸)·탄연(坦然)·최우(崔瑀)·이암(李) ·유공권(柳公權)·한수(韓脩) 등이다. 18. 음악 고려의 음악으로는 속악(俗樂)·아악(雅樂)·당악(唐樂)이 있었다. 속악은 한국 고유음악으로 가곡에는 《동동(動動)》 《대동강》 《한림별곡》 등이 있고, 악기에는 가야금·비파·장구·퉁소 등이 있다. 아악은 궁정·종묘 등에서 연주하는 정악(正樂)으로 송나라에서 예종 때 안직숭(安稷崇)이 전래하여 궁중음악으로 발달, 현재까지 한국에만 보존되어 있는 동양의 고전적 정악(正樂)이다. 악기로는 금종(金鐘)·옥경(玉磬), 각종 현금(絃琴)과 피리·퉁소 등이 있는데, 1370년 공민왕 때 명나라 태조가 고려 사신에게 새로 악기를 보내어 내용이 풍부해졌다. 이러한 음악은 가면극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져 처용무(處容舞) 등 탈춤을 중심으로 한 산대극(山臺劇)도 크게 유행하였다. 19. 불교 고려는 태조 이래 불교를 국교로 숭상함으로써 정치·사회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불교의 경향을 보면 사찰에는 사원전(寺院田) 외에 왕실 귀족들의 희사로 토지와 노비가 증가되어 대장원(大莊園)을 소유하였고, 광종 때는 승과제도(僧科制度)를 마련하여 승과에 합격하면 교·선종을 막론하고 대선(大選)이란 첫 단계의 법계(法階)를 주었으며, 또 왕사(王師)·국사(國師) 제도로 승려들을 우대하였다. 문종 때 승려 개인에게도 별사전(別賜田)을 지급하였으며, 사원에는 면세·면역의 특전까지 부여하는 등 보호책이 강구되었기 때문에 많은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불교의 성격은 호국적·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귀족적 불교로 보호육성되었다. 따라서 역대 군왕들은 국가의 대업이나 안태(安泰)를 위하여 대사찰의 건립, 연등회 행사, 대장경 조판 등 국가적 불교사업을 추진하였다. 고려 초기 불교의 종파는 5교(五敎:敎宗)와 9산(九山:禪宗)이 양립, 존재하면서 대립 침체된 상태에 있었다. 당시의 고승으로는 균여대사(均如大師)·혜거(惠居)·탄문(坦文)·제관(諦觀)·의통(義通)이 있고 그들의 활약이 컸다. 이때 제관은 오월(吳越)에 건너가 《천태사교의(天台四敎義)》를 저술하여 천태종(天台宗)의 기본교리를 정리하였고, 의통은 오월에 건너가 중국 천태종의 13대 교조(敎祖)가 되어 교세를 떨쳤다. 문종의 아들인 의천(義天)은 송나라에서 화엄교리와 천태교리를 배우고 돌아와 교·선종의 대립으로 침체된 불교를 통합 발전시킬 의도에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고, 숙종 때 천태종을 창설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하였다. 천태종은 무신의 난 이전까지 왕실과 귀족의 보호로 육성되었으나, 그후 교단 자체 내의 변동으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조계종(曹溪宗)을 개창하여 고려의 불교는 양종으로 분리되었다. 조계종은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며, 좌선(坐禪)을 주로 하여 마음에 경전을 깨닫도록 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수도방법으로 수행을 강조하였다. 조계종이 교리상 발전을 보자 최씨정권은 왕족 문신들과 연결, 현실참여적인 천태종 세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조계종을 후원하여 조계종을 무신정권의 사상적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 간섭기에 미신적인 면이 강한 라마 불교가 들어오면서 폐해가 많아져 불교행사, 사탑의 건립 등으로 재정의 낭비가 컸다. 또한 승려들의 토지겸병과 고리대금업·상업행위·군역도피의 소굴 등으로 그 부패가 심하여져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성리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정도전은 그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를 멸륜해국(滅倫害國)의 도(道)라고 공박하였다. 후기의 고승으로 보우(普愚)는 임제종(臨濟宗)을 전래하여 조선 선종의 주류가 되었고, 혜근(慧勤)은 인도의 지공(指空)에게 구법, 조계종을 발전시켰으며, 자초(自超)는 조선 태조의 왕사(王師)로 활약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변화는 원효(元曉)의 사상적 기반이 있었으므로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할 수 있었고, 지눌도 의천의 사상적 통일 경험과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조계종의 사상체계가 수립된 것이다. 조계종도 고려 후기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는 원동력은 못되었으나 교리상의 발전으로 불교계에 신풍을 불러일으켰다.
7590년 평원왕이 승하하고 태자 원이 즉위하니, 26대 임금 영양왕이다. 영양왕 9년(598), 수나라가 통일된지 거의 10년이 되고 나라가 안정되어 가니 주변국가(돌권,고구려) 로 눈을 돌렸다 이를 눈치챈 영양왕은 망갈의 군사 1만여 명을 동원해 요서를 침공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를 들은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한왕 양에게 30만의 군사를 주며 고구려를 치게 했다. 한왕 양은 육군을 이끌고 주나후는 수군을 이끌며 평양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수나라 30만 대군은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사기가 떨어져 고구려에게 참패 당하고 만다 그후, 영양왕 15년(604) 수나라에서는 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이 아버지 문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해 양제로 즉위했다 영양왕 18년(607) 수나라와 돌권이 손을 잡았다 이를 눈치 챈 고구려는 전쟁 준비를 하기위해 남쪽을 안정시키려고 백제의 손상선을 쳐서 빼았고 608년엔 신라의 우면산성을 쳐서 백성 8천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영양왕 23년(612)정월, 양제는 결국 전투병력만 113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로 진격한다 수나라의 군사는 좌 12군과 우 12군으로 나누어져, 매일 1군씩 출발했다. 24군이 준비하고 출발하는 데만 40여일이 걸렸으며, 그 행렬이 960리(-10리=4km-약384km) 나 되었다. 2월에 양제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요수에 이르렀으나 고구려군의 철벽 같은 수비로 강을 건널 엄두도 못 내고 30만이 넘는 군사가 강도 못 건너고 황천길로 가게된다. 양제는 장군 우문개를 불러 부교를 짓게 하였으나 그 길이가 짧아 이 틈을 이용해 가해진 고구려군의 집중 공격으로 또 10만에 가까운 수나라군이 화살에 맞거나 물에 빠지게 된다 수나라군은 다시 부교를 만들기 시작해서 결국 요수를 건너왔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양제는 요동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군이 나와 싸우지 않고 요동성을 굳게 지키자 요동성을 겹겹히 포위해서 항복을 권유 했다 하지만 요동성이 전혀 흔들리지 않자 양제는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고 양식을 뺏기 위해 가까이 있는 육합성을 공격했으나 육합성 역시 고구려군의 철벽수비에 밀려 함락되지 않아 수나라군의 사기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때 수나라의 내호아 장군은 수군을 거느리고 발해를 건너 평양성으로 진군하다가 고구려군이 싸우다 패하여 달아나자 내호아가 평양성으로 곧바로 진격하였다.하지만 고구려군의 작전에 휘말려 내호아 군대가 전멸하다시피하고 내호아는 간신히 달아나 남은 군사와 함께 해포에 진을 쳤다 이 소식을 들은 양제는 격분하여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요동을 돌아서 압록강 부근으로 진격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래서 우중문과 우문술은 압록강 근처까지 오게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양왕은 장군 을지문덕을 불러 항복하는 체하고 적진으로 들어가 정세를 염탐하라는 명을 내리자 을지문덕은 수나라 진영으로 찾아갔다 그러자 사기가 떨어지고 군량이 부족한 수나라군은 항복을 얼른 받아들이자며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다 을지문덕이 이를 보고 다시돌아가 이를 샅샅히 보고했다 그러자 우문술과 우중문은 뒤늦게 속은 것을 알고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군대를 추격하자 을지문덕은 싸우다 패하는 척하여 달아나기를 7번이나 거듭했다 이에 의기양양해진 우문술과 우중문은 방심하여 더욱 깊숙히 들어와 평양성 근처에 진을 치자 그때 을지문덕이 시를 한수 적어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보낸다 그 시의 내용은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꿰뚫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에 이르렀네. 전쟁에 이겨 이미 그 공이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하리?》라는 내용의 시이다 이것을 본 우중문과 우문술은 속은것을 알고 급히 퇴각하였으나 살수(청천강) 을 건너다가 매복된 군사들에게 급습당해 수나라 군대를 아작내버렸다 이 30만수나라군 중에서 살아 돌아간 사람은 2천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양제는 크게 노하여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돌아감으로써 2차 침입도 수나라의 완벽한 대패로 끝났다 그후 영양왕 24년(613) 양제는 "황제로써 바다를 옮기고 산을 능히 빼낼수 있다" 라고 하며 다시 군사와 군량을 모으며 침략 준비를 했다 그러나 신하 곽영이 "바다를 옮기며 산을 빼내는 일은 오히려 고구려 정벌보다 쉽다고 하며 정벌을 포기하소서"라고 했으나 결국 양제는 그 해 4월 우문술을 대장군으로 삼아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몇달을 공격해도 꿈쩍도 하지않자 흙포대 1백만개를 만들어 쌓아 성보다 높에 만들고 성안으로 화살을 퍼부었다 이 때 수나라 예부 상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켜 양제는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고구려군에게 거의 전멸당하다 시피한다 그리고 고구려와 싸우다 국력이 쇠할 대로 쇠한 수나라는 결국 618년에 암살 당한후 결국 수나라는 망하고 중국엔 새로이 당나라가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영양왕도 승하했다 고구려에는 영류왕이 즉위하였다 하지만 야심많은 당태종이 진대덕을 불러 고구려의 정세를 살펴보고 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 때 쯔음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 실권을 잡고 영류왕을 죽이고 반대파마저 모조리 죽여버린 후 보장왕을 즉위시키고 실권을 잡는다 당태종은 이를 구실로 보장왕 4년(645) 10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오게된다 이세적은 육군 6만여 명을 이끌고 요동으로 침입하였고 장량은 수군 4만여 명을 전함 5백여 척에 나눠 싣고 평양으로 향했다 당나라군은 개모성 비사성 등을 함락시키고 요동성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군하였다 마침내 부교를 설치해 요수를 건너 요동성 까지 진격한 태종은 배수진을 치고 포차를 이용해 커다란 바위를 날리며 밤낮으로 공격했고 나중에는 거세게 부는 남풍을 이용해 성에 불을 질렀다 수나라 백만대군도 함락시키지 못한 요동성은 결국 당태종의 10만정예군에게 12일 만에 함락당하게 된다 이 싸움으로 고구려군은 1만여 명이 목숨을 잃고 양곡 50만섬을 잃게 된다 이어 당태종이 백암성까지 함락하고 안시성으로 진격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으로 하여금 15만 명을 주어 안시성을 방어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어리석은 고연수는 안시성 동남쪽에서 8리 되는 곳까지 진격해 진을 쳤다 그러나 당태종의 정예부대는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하고 만다 이로써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략하게 되는데 안시성의 고구려 군사들이 태종을 놀리자 격분하여 쉬지 않고 성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당나라 군은 결국 안시성보다 높게 토성을 쌓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은 성안에 더 높은 토성을 쌓아 대응하였다 그러자 당나군이 포차를 앞세워 바위를 수없이 던지며 성벽을 무너뜨리자 고구려군은 목책을 세워 이를 막아 냈다 그러자 당태종은 무식하게 인근 주민과 군사를 모두 동원해 토성을 쌓았다(그 토성이 진짜 산보다 컸다고 한다) 하지만 고구려 군사가 몰래 나아가 토성을 급습하여 빼았아 버린다 그리고 고구려군이 토성에서 당나라군을 쉬지 않고 공격하자 결국 당태종이 군사를 돌려 돌아가게 된다 이때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을 극찬하며 비단 100필을 보내며 끝까지 왕께 충성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데 양만춘이 성에서 손을 흔들며 당군을 보냈다고 한다 한편 장량의 수군도 비사성 함락 이후 연개소문의 작전에 휘말려 3만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거듭 패하자 돌아가버린다.당태종이 돌아가며 수양제가 113만명의 대군으로도 고구려를 깨지 못한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통곡하며 돌아간다8고려와 몽고는 한동안 긴장 상태를 유지했으나, 결국 몽고의 침입으로 전쟁 시작(1231)당시 고려는 백성들과 관군이 하나가 되어 몽고군에 맞서 싸웠다.특히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고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켰다. 충주 지방에서는 몽고군이 침입하자 관리들은 도망갔으나, 관노비들은 끝까지 싸워 성을 지켰다.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초적들도 몽고군이 침입하자 맞서 싸웠다. 최씨 정권은 모든 주민이 섬이나 산성에 들어가서 몽고군에 항전하도록 하고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같은해에 몽고군이 다시 침입했으나, 광주주민들은 이에 맞서 몽고군을 격퇴했으며, 특히 처인성 전투에선느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고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철수 하였다. 몽고는 금나라를 정복한 후, 남송과 고려 정벌에 본격적으로 나서 여러차례 고려에 침입하였다. 이 때에도 김윤후는 노비들과 함께 끝까지 충주성을 지켰다. 최씨 정권은 민심을 모으고 부처의 힘으로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해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 조성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16년 간의 대역사 끝에 완성 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대몽 항쟁의 산물이며, 우리가 자랑하는 문화 유산의 하나이다. 그러나 대구 부인사에 보관 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탑은 몽고군에 의해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피난해 있으면서도 몽고군의 침입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외면한채 사치한 생활을 하고 정권 유지를 위해 조세를 더 거두어들이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펴 민심을 잃었다. 이러한때에 최고 권력자 최의가 피살되고 최씨 정권은 무너졌다. 몽고에 대한 항전을 주도해 온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몽고와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왕과 문신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무신들은 강화의 조건인 개경으로 환도하는 일을 거부하였으나,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했다.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대몽 항쟁을 계속했다. 이들은 강화도에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여.몽 연합군과 싸웠다.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인의 자주 정신을 보여 준 것이었다. 이로써 40여년 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은 끝났다.고려와 몽고와 최초의 접촉을 가지게 된것은 몽고에서 쫓겨오는 거란인을 협공하던 때부터였다. 거란인은 금이 망할 무렵 독립하였다가 다시 몽고에게 쫓기어 고려의 국경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들은 강동성에 의거하였으나 고려는 몽고와 함께 이를 함락하여 벼렸다(고종 6년, 1219년).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으로 자처하고 매년 고려로부터 공물을 취하여 갔다. 그 요구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는 이에 불응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계기로 고려와 몽고와의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로부터 귀국 도중에 살해되는 일을 구실로 드디어 고종 18년(1231)에 제1차 침입을 하여 오게 되었다.살례탑이 거느린 몽고군은 구주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이를 버려 둔 채로 수도 개경에 임박하였다. 이에 고려가 강화를 청하자 몽고는 다루가치를 서북면에 두고 군사를 철퇴시켰다. 그러나, 최이는 몽고와의 항쟁을 결의하고 서울을 강화로 옮기었다(고종 19년, 1232). 이것은 바다를 두려워하는 몽고의 약점을 찌른 것이었다. 귀족들이 강화로 들어감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에게도 산성이나 섬으로 피난케 하였다. 이러한 몽고의 항몽정책은 몽고를 자극하여 재차의 침입을 보게되었다. 비록 몽고의 장군 실례탑이 처인성(용인)에서 김윤후가 거느린 처인부곡민에게 사살된 후 곧 물러갔으나, 뒤에도 몽고의 침략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몽고는 전후 30년 간에 6차례의 침입을 해오기에 이르렀다. 무인 정권의 대몽항쟁은 처음 농민이나 천민들의 뒷받침을 받아서 수행되었다. 몽고의 제1차 침입 때에는 관악산의 초적들이 스스로 항복하여 몽고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지광수 등이 지휘한 충주 노비군의 항쟁은 특히 유명하였다. 그들은 귀족관리들이 모두 도망치는데도 끝까지 성을 지키며 용감히 싸웠다. 완강한 저항을 받아 이를 함락시키지 못한 몽고군은 평야의 곡식을 불태어 버리는 전술을 쓰게 되었다, 그 때문에 식량이 부족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농민들은 적지 않은 곤란을 받았다. 농촌이 황폐해지면 농민들의 생활이 곤란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도(강화)의 정부는 농민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 대책을 서둘기보다는 오히려 가혹한 수취로 그 생활을 더욱 곤란케 할 뿐이었다. 이러한 귀족들의 수취는 농민들의 정부에 대한 반항심을 조장시킬 뿐 아니라 몽고에 대한 항쟁 의욕을 꺾어 주었다. 그리고 민심의 이반은 강도정부(강화도정부)에 대하여 커다란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씨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가 문신 유경과 무신 김준 등에 의하여 살해된 것은 고종 45년(1258)의 일이었다. 이리하여 정권은 일단 국왕에게로 돌아가고 몽고에 대한 강화가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다음해인 46년(1259)에는 태자 전(뒤의 원종)이 몽고로 가서 강화의 뜻을 표시하였다.

9.반원..권문세족타파광종의 개혁 광종의 개혁은 한마디로 왕권강화차원에서 나왔다. 광종의 재위기간을 소위 3시기로 분류하는데 첫째시기는 모색기로 즉위 이후 7년간이 이에 해당한다.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성종에게 올릴때 이시기를 평가하면서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하은주 삼대와 견줄 만하다.라고 했다. 광종이 즉위한 시기에는 충주 유씨와 평산 박씨의 호족세력이 강하여 광종은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따라서 광종은 7년동안이나 왕권을 강화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이에 광종은 정치적 능력을 기르기 위해 당나라 태종이 자신의 신하들과 정치 토론을 벌인 내용을 기록한 "정관정요"를 숙독할 정도로 열의를 가졌다.두 번째 시기는 왕권강화기로 7년에서 11년까지이다.이시기에 중국은 `5대시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대외적으로 광종은 "광덕"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나중에 다시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이는 광종의 정치적 역량과 대외적 위상을 제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민심안정을 위해 불교진흥책을 폈다. 951년에 대봉은사를 개성 남쪽에 세워태조의 원당으로 하고, 불일사를 동쪽에 세워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원당으로 하였다. 또한 954년에는 신명순성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숭선사를 창건하였으며, 화엄종 균여와 교분을 갖고 그의 성상융회사상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광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토대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그 토대가 구축 되자 그는 중앙집권화를 위한 급진적인 개혁작업에 돌입하였다. 비로소 모색기를 끝내고 왕권강화기로 접어들었다. 이시기에 광종은 후주의 신하인 쌍기를 자신의 개혁작업에 끌여들었다. 개혁작업은 두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첫째는 호족의 경제력을 원천적으로 약화시킬 목적으로 노비안검법을 마련했고, 두번째는 조정 내에서 호족의 전횡을 막을 새로운 세력을 키우기 위해 과거제를 도입했다.노비안검법은 노비들의 실태를 파악하여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종의 노비해방법이다. 당시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의 상당수는 고려 통일전쟁 과정에서 포로로 붙잡힌 양인이거나 대호족의 강압에 의해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로서 대호족들의 경제적,무력적 기반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대호족의 경제적, 무력적 기반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과거제의 도입은 호족들이 중심이 된 공신세력에게 큰 타격이 된다. 왜냐하면 광종의 즉위 당시에는 대부분의 실력자들이 고려 건국과 통일 전쟁과정에서 전공을 세웠거나 무력을 제공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무인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학문을 기반으로 하여 과거제에 의해 선출된 자를 관리로 등용하는것은 그들의 자제를 제도적으로 정계진출을 막는 장치였다. 또한 과거제 실시와 함께 960년에는 관료들의 공복을 제정하여 품계별로 옷을 달리 입게 함으로써 왕과 신하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관리의 상하를 쉽게 판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호족의 기반을 약화시킨 다음 광종의 세번째 시기인 호족의 숙청이다. 이는 피의 숙청기로 대부분의 호족은 숙청당하여 죽음을 맞이 하거나 유배를 당하였다. 배경은 평농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과 좌승왕동을 역모혐의로 고변하면서부터이다. 결과적으로 광종의 개혁은 가혹할 만큼 잔인한 면도 있지만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이끌어 후에 성종이 중앙집권제를 실시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었다. 공민왕의 개혁공민왕의 즉위할 당시의 국제적 상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원나라는 폐망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새로운 명나라가 세워지고 있었다. 또한 왜구의 고려 침입은 내적으로도 몹시 혼란을 가져왔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정치의 불안정과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민생이 피폐해지고 있어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국가기강을 바로잡는 한편 적극적인 배원정책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1351년 공민왕이 원에서 돌아오자 그 이듬해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무신정권의 최이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개혁교서를 발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정책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1366년에 신돈의 주도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귀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키게 된다. 공민왕은 첨의사. 전법사, 감찰사, 개성부, 선군도관이 판결송사에 대해여 5일에 한번씩 계를 올리도록 교서를 내렸다. 이것은 곧 왕이 친정체제 구축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를 말했다.또한 각부서의 중요안건을 직접 챙기며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통치기반을 확립하려 했다. 이러한 공민왕의 친정체제 구축작업은 무신정권 이후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정치토론장인 서연을 재개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는 서연에서 원로와 사대부들이 교대로 경서와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할 것과 전답 및 가옥, 노비와 억울한 죄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첨의사와 감찰사를 자신의 눈과 귀로 규정하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위해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기탄없는 보고를 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작업은 조일신의 난으로 한때 위기를 맞지만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고 다시 개혁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공민왕의 정치개혁은 몰락해가는 원나라에 대한 배척운동과 함께 이루어졌다. 1352년 고려 풍속을 회복하기 위해 변발과 호복 등의 몽고 풍속을 금지시켰으며, 1356년에는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문종대의 제도에 맞춰 복구하였다. 또한 내정간섭을 일삼아오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원나라 왕실에 의지하여 권세를 부리던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숙청했으며, 이자춘의 내조에 힘입어 원나라 복속 이후 1백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했다. 공민왕은 승려 보우의 선 사상에 몰입하여 보우를 왕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승직에 관한 모든권한을 대행토록 하는 등 불교의 중흥을 도모했다. 이것은 태조의 유지를 받들고 문종 시대의 태평성대를 재현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던 유학자 출신 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공민왕은 영토확장을 위해 민족성 회복운동을 내세워 쌍성을 함락시키고, 고종말년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함주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공민왕의 개혁작업에는 신돈이라는 인물을 빼놓지 못하는데 공민왕이 신돈을 개입시킨 배경에는 유학자 중심의 관료체제의 강한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공민왕이 유학자 관료집단의 힘이 너무 강성해지자 불교세력을 통하여 그들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돈에게 강력한 권한을 주며 개혁을 추진하지만 신돈의 개혁은 점차 타락으로 빠져들고 끝내 공민왕에게 제거된다. 이후 인덕왕후가 난산후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타락해가는 공민왕은 살해되고 개혁은 실패한다

고려 역사신문 기사

제가 학교숙제로 역사신문을 만들어야 되는데요... 고려 무신집권기 하층민의 농민봉기에 대해서 기사를 하나 써야되는데요..... 고려 무신집권기 하층민의 농민봉기에 대해서...

삼국 통일 한계 역사 신문 기사

삼국 통일의 한계에 대한 기사문 좀 써주세용 삼국 통일 한계 역사 신문 기사 삼국... 동시에 발해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균형있는 역사 인식의 태도일 것이다.

고려시대 역사신문(기사or인터뷰)내공만땅

제가 이번에 국사시간에 역사신문을 만들어야되여 -_- 수행이라... 안할수도없구 ........ (약700년전 고려승 일연의 선(選)]에 단군(壇君)이라 서(書)한 때문이라 하나 그러나...

고구려역사신문기사

... 역사신문을 만들어 오래요,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에 관계 되는 기사를 좀... 옛날 중국이나 한국 사료를 보면 고구려를 고려 라고 적은 경우도 많다.고려라는 이름도...

고려 문화를 소재로한 신문기사 작성 ㅠㅠ

고려 문화를 소재로 신문기사를 작성해야하는데요ㅠㅠ.. 고려와 관련된? 그런 신문... "고려 문화의 흥미로운 이야기: 역사를 재발견하고 자랑스러움을 느끼세요" 4. "고려의 맛...

김정호에 대한 것을 역사 신문 기사에...

김정호에 대한 것을 역사 신문 기사에 쓸 것인데요.. 어 떡 기사를 써야할 지 고민이네요.... 4군6진 정벌이후 세종대왕은 김종서를 친견하시어 "고려조에 윤관이 9성을 쌓았다...

고려 역사신문

... 어제 선생님께서 고려 역사 신문 기사와 사진 등을 넣어서 역사신문을 만들어 오는 것을 숙제로 해오는데 좀 간단하게 해야 한다는 과제를 내 주셨답니다. 사람마다 각자...

역사,사회 관련 신문기사ㅜㅜㅜ

역사,사회 관련 신문기사좀요ㅜㅜ 역사 5개 사회 5개 방학숙제라서 도와주세요ㅜㅜㅜ... 경천사 10층석탑(고려 1348년 제작, 높이 13.5m, 현재 국보 86호)에도 불행한 역사가 담겨...

역사신문(삼국시대~고려시대)

...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와관련된 내용좀 써주세요 이상한 거 쓰시지 마시고요 ㅠ.ㅠ... 후기의 역사 신문 기사 3개 입니다. 정치 상황과 경제상황을 다루었습니다. 사진은 2장이...

역사에 대해 신문기사

우리나라에 역사에 대해 신문기사를 찾아야 하는데요 어떤 주제가 있을까요?... 고려의 건국과 지방호족의 관계 4. 고려중기의 중국 이민족의 침략 5.삼별초 항쟁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