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구)우리고장의 동명유래조사...사회숙제

(중랑구)우리고장의 동명유래조사...사회숙제

작성일 2009.10.28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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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안녕하세요?울 쌤님께서 사회숙제 (중랑구)우리고장의 동명(동이름)유래조사를 해 오라고 하셨어요.....그리고 서울의 다른 동명 유래조사를 해 오라고 하셨는데..우리 고장이 서울 중랑구이거든요? 근데 다른 고장동명은 하지 말아주세요. 헷갈리거든요....ㅠㅠ그러니깐 이렇게 답해주세요. 채택해드릴게요.

 

          *우리고장의 동명 유래조사:............

 

 

         *서울의 다른 동명 유래조사:............

 

 

         이렇게 해 주세요........음......내일 까지요.(10.29.)알겠죠?

 

 

~부탁드립니다.~

 

              내공추가를 100으로 해 드릴게요...ㅋㅋ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중랑구청-동명유래)

 

1. 면목동(面牧洞)
면목동의 [면목]이라는 지명은 말목장 또는 목문의 소재지를 의미하는 지명으로 마목 또는 목문·문목의 의미와 유사하고 또 목장을 앞에 두었다는 의미로도 통할 수 있어 면목으로 바뀌었다고 전합니다.
면목동은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했고, 갑오개혁 때에는 남서 두모방 전관중, 하계 면목리동으로 되었습니다.
면목동의 위치는 동쪽으로는 용마봉등 산등성이를 경계로 하여 경기도 구리시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중랑천을 경계로 동대문구 휘경동, 장안동과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광진구의 중곡동과 경계하며, 북쪽은 상봉동, 망우동 등과 연접하여 있습니다.
따라서 동쪽으로는 산록을 따라 높은 지대가 많고 서쪽으로는 중랑천 연안등 저지대가 제방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 설화 1(중랑이야기)
조선시대에는 중랑천 근방에 국립여관인 송계원이 있었기 때문에 중랑천을 송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송계교를 석교로 개축할 때 인근 마을의 장정은 모두 부역으로 동원되었는데 열여섯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 장님 중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를 안 딸은 아버지 대신 부역을 하겠노라고 관아를 찾아가 여러날을 지내며 대신 부역시켜줄 것을 간청하자 부역허가가 떨어졌는데 반드시 남장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관아에서 시키는 대로 남장을 하고 참여했으나 문제는 생리현상이었습니다.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대나무를 잘라서 옷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 하고 가능한 한 수분섭취를 줄여서 배뇨 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함으로써 부역을 대신하던 그녀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남자인줄로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그가 사실은 남장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녀를 중랑(仲狼)이라 불렀고 다시 중랑(中浪)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 설화 2(행주형지세)
면목동의 행주형(行舟形)지세는 면목배수펌프장 일대를 말합니다. 배가 움직이는 것을 행주라 하는데 풍수에서 행주의 위치는 보통 좋은 집터를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이곳이 행주형이 되는 것은 동이로를 중심으로 면목동 네거리에서 면목배수펌프장을 지나 동남쪽으로 긴 타원형으로 중곡 국민학교까지 이르는 지점입니다.
돛대에 해당되는 곳은 면목 네거리이고 배의 후미 선실쪽이 중곡국민학교입니다. 배가 갖추어야 할 기본설비로는 키, 돛대, 닻입니다. 풍수지리에서는 이들 셋 모두를 갖추면 대길(大吉)한 땅으로 보는데 그중 하나만 갖추어도 배가 갈 수 있으므로 길지(吉地)로 쳐준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닻은 배의 후미 쪽에 있는데 이곳 지형은 돛대 부근에 닻을 갖추었는데 닻에 해당되는 곳이 면목배수펌프장입니다. 배의 사명은 강을 향해서 돌진하여 물 위에 떠있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만일 배의 앞쪽이 산을 향해 있다면 배가 지녀야 하는 본질을 벗어나므로 흉지(凶地)로 칩니다. 그러나 이곳은 중랑천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고 있으므로 이 배의 앞날은 무궁한 발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주형은 물위로 배가 움직이고 있는 형태이므로 절대로 우물을 파면 안된다는 속설을 갖고 있습니다. 땅속에 있는 물줄기를 잡아올리는 것이 우물을 판다는 것인데 곧 밑바닥을 깬다는 뜻이고, 이렇게 되면 침수해서 단번에 흉지로 바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면목동의 행주형에 해당하는 곳에는 옛부터 우물이 없었습니다.



2. 상봉동(上鳳洞)
상봉동은 조선시대부터 유래하는 상리, 봉황동 등의 자연부락을 통합하여 상리의 [상]자와 봉황동 등의 [봉]자를 따서 상봉리라고 붙인데서 연유하고 중화동, 묵동, 신내동과 같이 봉화산을 끼고 있으며 대한제국 시대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에 속해 있었습니다.
1963년 1월 1일(법률 제1172호)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어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중앙선 철도와 망우로가 동서로 관통하고 동2로가 남북으로 지나고 있으므로 교통의 요지입니다.
상봉동의 동쪽은 망우동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면목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중랑천에 연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중화동, 묵동, 신내동과 접경해 있습니다.
또한 동의 지형이 망우로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어 상가가 형성되어 있으며, 특히 동북부 서울의 관문인 상봉터미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설화 1(봉황동지세)
상봉동의 옛지명 가운데 하나인 봉황동(鳳凰洞)은 중앙선 철로 남쪽에서 상봉2동에 해당되는데 102번지와 103번지 일대입니다.
이곳의 지형은 낮지만 날으는 봉황의 모습(飛鳳形)이어서 알을 까기 위해 봉황이 막 날아와 앉는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동명입니다. 새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것이 봉황새이고 이런 봉황새가 알을 까기 위해 내려왔다는 것은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을 예견해주는 것은 물론 무한한 발전이 있을 것을 알려주는 곳입니다.
곧 이 일대가 앞으로 발전을 거듭해서 상봉동 중에서 가장 번창한 지역이 될 것이라는 것인데 다만 비봉의 북쪽이 되는 지점, 곧 봉황의 벼슬에 해당되는 부분을 살려두어야 새 가운데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인데 이를 없앨 경우 닭벼슬 역할 밖에 못하는 것이므로 관청과 같은 건물보다는 상업성이 짙은 건물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인지 이 일대는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려서 일찍부터 주막거리로 통했습니다.

- 설화 2(장사바위이야기)
옛날 서울에서 전국 장사모임이 있었는데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경상도 장사가 허겁지겁 짐을 꾸려 서울로 오던 도중 집으로 돌아가는 강원도 장사를 만났습니다.
강원도 장사는 "서울의 도성문을 닫을 시간이 다 되었고, 오느라고 기운이 다 빠졌으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며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상도 장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상봉동까지 왔을 때 갈증이 나서 중랑천의 물을 마시기 위해 엎드리자, 이때 짚었던 바위에 손과 무릎의 자국이 깊게 패이게 되었습니다.
물을 마시고 일어나는데 포졸을 앞세운 마을 사람들이 "저 사람이 냇물을 모두 마셔 농사를 지을 수 없음은 물론 식수마저도 없어져 버렸으니 이는 요물임이 틀림없다"며 에워싸는 것이었습니다.
장사는 "나는 요물이 아니고 사람이며 강원도에서 온 사람이 먼저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조금 마셨는데 그것도 죄가 되느냐"며 오히려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관아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죽음을 진전에 둔 그는 "내 한이 물을 말려 사람이 살 수 없는 검은 땅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며 저 중랑천은 해마다 홍수로 넘쳐흘러 농사를 망치게 될 것이다"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후 해마다 중랑천은 범람하였고 엎드려 자국이 생긴 바위가 있던 마을 일대는 검은 가루(석탄)가 날리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으므로 이곳에 삼표 연탄이 들어서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 중화동(中和洞)
중화동의 동명은 옛부터 봉화산 아래 자연부락인 가운데 마을(중리)과 아랫 마을(하리)의 글자를 따서 중하리로 칭하였는데 1963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될 당시 동민들의 의견이 [하]자 대신 화목을 도모하는 의미로 [화]자를 넣어 중화동으로 개칭할 것을 서울특별시에 건의하였기 때문에 중화동으로 되었습니다. 이곳의 공식적인 지명은 일제침략초까지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중리, 하리 일부지역이었으나, 1914년 4월 1일 일제의 면, 리, 동 통폐합시 양주군 구리면 중하리로 칭하였으며, 해방후에도 이 지명은 변함이 없었으나, 1963년 1월 1일(법률 제1172호)서울특별시의 확장으로 동대문구에 편입하고 동명도 중화동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중화동은 봉화산 산기슭에 중랑천을 끼고 있으며 동1로가 중심부를 남북 으로 관통하고 중앙선과 망우로가 동서로 달리고 있습니다. 또한 봉화산 능선을 끼고 상봉동과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망우로를 경계로 상봉동과 나누어지며 북쪽으로는 묵동과 접하고 있습니다.

- 설화(성덕사이야기)
중화동 303-10번지에 있는 성덕사는 1957년 대지 800평 위에 신설된 사찰로 이곳은 터가 세서 사람 살 곳이 못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던 곳이었습니다.
구한말 노부부가 땔감을 하러 산으로 갔는데 아이 키만큼 자란 나무가 빽빽하게 모여있는 곳을 발견하고 부지런히 도끼질을 하여 "이제 마지막 나무구나!" 하고 힘껏 도끼질하여 드디어 마지막 나무가 쿵하고 쓰러지자 지금껏 해놓은 나무를 보기 위해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끔껏 쓰러뜨린 나무는 한그루도 누워 있지 않고 원래대로 빽빽이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무꾼은 혼비백산하여 마을로 돌아와 이 사실을 동네사람에게 알렸습니다.
이때 지나가던 승려가 "그곳은 호열자가 나돌 때 채 죽지 않은 아이들까지도 한꺼번에 내다 버려 어린이들의 원한이 서린 곳이니 매년 정월 보름에 짚으로 만든 인형에 이름을 써서 나무에 걸어놓고 애동지가 들었을 때 절대 팥죽을 쑤어 먹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만한 숫자의 아이들이 죽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고 한 과부만이 이를 지켰는데 다음해 봄 질병이 크게 유행해 아이들이 많이 죽게 되었으나 과부의 아이들은 무사하였다고 합니다.
광복이 되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이곳에도 집을 지으려고 했으나 공사 도중 서까래가 무너지거나 기둥이 내려앉아 인부가 다치는 일이 많아 집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1957년 대한 불교 조계종에서 성덕사라는 절을 지을 때에도 건축목재를 실어나르던 황소가 죽고 인부 여러사람이 다쳤으나 절이 건립된 다음부터는 마을에 액이 떠다니는 경우도 없고 사람이 사고로 다치는 일도 없어졌으니 성덕사가 치성을 대신 들여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4. 묵동(墨洞)
묵동이라는 이름은 [먹골]이라는 지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묵동은 옛날 이곳에서 먹을 제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국립여관인 송계원이 있었기 때문에 송계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후 조선말까지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에 속해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 속했으나, 1963년 1월 1일(법률 제1172호) 상봉리, 중하리, 망우리, 신내리와 함께 동대문구에 편입되었습니다.
묵동은 봉화산을 끼고 있는 동 중의 하나로써 서쪽으로는 중랑천에 연해 그 건너편에는 성북구 석관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묵동천을 경계로 노원구 공릉동과 인접해 있습니다. 또한 동쪽으로는 봉화산 능선을 따라 신내동과 구분되고 남쪽으로는 중화동이 있습니다.

- 설화(먹골배이야기)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대항하여 단종복위 운동을 꾀한 사육신은 처형당하고 단종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호송을 책임졌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단종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목적지까지 가슴 졸이며 호송한 후 서울로 돌아와 관직을 그만두고 봉화산 아래 중랑천가에 자리를 잡아 필묵과 벗하며 키우기 시작한 것이 배나무였습니다.
유배지를 떠나는 단종이 갈증으로 인해 물을 마시고 싶어했으나 물 한 그릇도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못했던 그는 단종이 승하한 날이 되면 자신이 가꾼 배나무에서 수확한 배를 가득 바구니 담아 영월을 향해 절 을 했다고 합니다.
왕방연의 무덤은 후손에 의해 이장되었으며 그가 손수 심었다던 배나무만 자라 사방으로 번식하여 이 일대가 배밭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는데 먹골배는 왕방연의 눈물과 정성이 그가 가꾼 배에 스며들어 단듯하면서 혀 끝에 여운이 남고 씹을수록 단맛이 납니다.



5. 망우동(忘憂洞)
망우동의 동명은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특별시의 경계되는 곳에 망우고개가 있기 때문에 붙여졌습니다.
망우고개라는 명칭은 조선초부터 불리워져 왔으며, 조선시대 이래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으로 있다가 일제 때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로 개칭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편입되었습니다. 편입된 후에도 동대문구 망우출장소에서 1968년 1월 1일(조례 제491호)까지 행정을 담당하였습니다.
망우동은 경기도 강원도 방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 망우리 고개와 공동묘지가 있는 험준한 지형 때문에 옛부터 수도방어의 요충지였습니다.
공동묘지와 고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도로확장 및 구획정리사업 후 교통이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신흥주택가와 교육지구로 변모하였습니다.
망우동의 동쪽으로는 망우산(281미터)의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와 인접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면목동에 맞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봉동과 경계를 짓고 북서쪽으로는 신내동과 접해 있습니다.

- 설화(신장사이야기)
망우동 359번지 일대는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방면에서 서울로 오는 길목 역할을 하던 곳으로 망우리고개를 기점으로 길손이 쉬어가는 주막거리였습니다.
주막거리 부근에는 세 살 때 돌절구를 번쩍 들고 다섯살에 아름드리 서낭목을 뽑아올릴 정도의 힘이 장사인 신(申)씨가 살았습니다.
신장사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관직을 받기 위해 대기상태이던 어느날, 주막거리에 나갔는데 왕의 행차를 알리는 깃발이 나타나고 곧 호위군사들의 길을 비키라는 호령이 있었습니다.
호위군사들은 모든 사람들을 엎드리게 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신장사는 말을 듣지 않아 대여섯 군졸이 몰려나와 서로 당기고 밀던 중 신장사에게 잡힌 호위대장이 근처 개울로 처박히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본 임금은 비록 불손하다하나 용력이 있고 힘이 장사인데다 담대한 성격도 지닌 것 같아 호위대장의 밑으로 오게 하여 왕의 행차 때마다 호위 담당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왕의 행차중 갑자기 강풍이 일어 모든 것을 날려 버렸는데 왕의 어가가 날리려하자 군사 여럿이 잡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고 신장사가 달려와 어가를 잡아 나무에 고정시킴으로써 왕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신장사는 임금의 신임을 받아 빠른 출세길로 접어들어 재상의 지위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6. 신내동(新內洞)
신내동의 동명은 일제 때 봉화산 동쪽 아래 여러개의 자연부락 중에서 신현마을의 [신]자와 내곡마을의 [내]자를 각각 따서 신내리라고 정한데서 기원됩니다.
신내리는 해방 후에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신내리로 있다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372호)서울특별시 동대문구로 편입되면서 동명도 신내리에서 신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신내동의 동쪽은 구룡산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와 인접되고 남쪽으로는 망우동과 경계로 합니다. 또한 서쪽으로는 봉화산 능선을 따라 상봉동, 묵동이 연접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노원구 공릉동과 맞닿아 있습니다.
현재 이곳은 신내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많은 아파트 신축공사로 신흥주택단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 설화1(유어형지세)
신내동 가운데서 신내동 동사무소를 중심으로 용마산길과 이어지는 중앙선 철길 부근까지의 지형은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는 모양인 유어형(遊魚形)입니다.
물고기가 움직일 때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데 가만히 있으면 잠을 자거나 죽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움직인다는 것은 먹이가 있는 곳을 발견했다거나 아니면 알을 낳을 장소를 물색할 때에 부산하게 움직입니다. 물고기는 한꺼번에 수만마리의 알을 낳고 또 움직일 때도 수만마리가 떼지어 다닙니다. 이러한 유형은 자손이 끊임없이 배출되는 곳인데 특히 뛰어난 인물이 나오는 것을 예시해 줍니다. 물고기는 떼지어 다니지만 그 가운데 우두머리 한마리에 의해 전체 무리가 이동되는 것이므로 바로 이 우두머리를 우수한 인물로 보는 것입니다.
이곳의 지형은 물고기의 입이 묵동천을 향하고 있는데 물고기는 입부분보다 양쪽 지느러미와 꼬리쪽에 힘이 더욱 많이 모여있습니다. 방향을 잡아 속력을 조절하는 곳이 꼬리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물고기에서 힘이 모이는 꼬리쪽이 세찬 기운을 더 받으므로 이곳의 지형은 묵동천 반대 방향, 곧 용마산길과 동사무소쪽이 더 많은 기운이 발복되는곳이라고 합니다.

- 설화2(박수고개이야기)
능마을에서 구릉산으로 넘어가려면 박수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곳에는 서낭당이 있어 고개를 넘은 사람들이 무사하길 비는 제사를 반드시 지내야 했는데 그 까닭은 옛날 해질녁 이 고개를 넘어야 하는 한 나무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종일 비가 내려 땅이 질퍽거리고 물안개로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데 게다가 구릉산에서 숱하게 많은 나무를 하면서도 한 번도 산신께 제사를 드린 적이 없었던 나무꾼은 산신의 미움을 받고 있는 터였습니다.
막 고개를 넘으려는데 "네가 넘어뜨린 소나무에 살던 귀신이다. 오갈데가 없으니 네 몸을 내 집으로 대신 삼겠다"며 커다란 물체가 따라오는 것이었습 니다.
그 순간 가까운 곳에서 박수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치는 우뢰와 같은 소리로, 이 바람에 소나무 귀신은 물러나고 정신을 차린 나무꾼이 박수소리를 다시 들으니 그동안 나무꾼이 밥을 먹을 때마다 한알두알 밥알을 얻어먹던 짐승들이 일부러 내는 소리였습니다.
그후 이 고개를 넘을 때는 일부러 박수를 치며 여럿이 산을 넘은 것과 같은 소리를 하였고 다 넘은 후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낭당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로구지역- 동명유래)

 

신도림동

신도림동이란 도림동에서 새로 분동되면서 불리어진 이름입니다. 도림동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 마을 일대의 들판이 억새풀 종류의 초목이 많았으며, 특히 길옆에 삿자리 종류의 풀이 숲을 이룬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산의 형국이 마을 뒤로 산처럼 둘러 싸고 있고 이 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않아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도야미리(陶也味里)`가 도림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 옛지명 : 원지목리, 상원지목, 하원지목, 아랫말, 웃마을, 별동네, 모랫말다리

구로동

구로동이란옛날 이곳에는 9명의 장수한 노인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합니다.

  • 명물·명소 : 상나무재, 구로공단, 구로산업용품유통단지, 애경백화점, 중앙유통상가
  • 옛지명 : 구루치마을, 늑대다리, 각인이마을, 새말, 주막거리, 웃우물약수터

가리봉

가리봉이란 이 지역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또 하나는 그 연원을 고을(谷)과 같은 의미를 갖는 `갈` 혹은 `가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가리`는 `갈라졌다` 는 뜻에서 유래하는데, 구로구의 전체적인 땅 모양이 바지 가랭이처럼 갈라져 있는 것과 연관된 명칭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 명물·명소 : 향나무(수령 약 350년, 높이 10m)
  • 옛지명 : 큰논배미, 모아래

고척동

고척동이란 이 동네의 한 자연 마을인 고좌리(高座里) 즉 높은 곳에 생긴 마을이라는 데에서 연유되었다는 설과 경기도 부천·안양·강화 사람들이 서울지역 사람들과 안양천을 경계로 하여 생필품 및 농산물을 교환하여 오던 곳으로서 당시 계량기가 없어 측정이 곤란하자 긴 자(高尺)로 재서 서로 교환 측정하던 것을 고척이라 칭한 데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것입니다.

  • 명물·명소 : 우정바위와 도당제, 고척공구상가, 동양공업전문대학, 함양여씨 묘역
  • 옛지명 : 고좌리, 고잘마을, 장터골, 덩어리, 삼공구, 능골, 가는골, 단혈고개

개봉동

개봉동이란 현재 경인선과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남쪽에 있는 개웅산의 `개` 자와 양천구 신정동과 경계를 이루는 매봉산의 `봉` 자를 합하여 붙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 명물·명소 : 닥나무(수령400년, 높이 16.5m)
  • 옛지명 : 잣절, 덕고개, 가린열, 부누꿀, 광주물, 개웅마을, 학산(두루미산)

항동

항동이란 동명의 연원에 대하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의 형태가 배 모양이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며, 옛날 이곳 일대가 바다처럼 물이 많을때 배가 이 마을에 닿았으므로 항동이라 했다는 전설적인 해석도 있습니다.

  • 명물·명소 : 수문장느티나무(수령 약 400년,수고 12m,둘레 1.2m), 항동저수지,원종장
  • 옛지명 : 망골, 서낭당고개, 앞내깔, 절알

천왕동

천왕동이란 명칭은 동네 뒷산이 굴봉이고 골짜기에 천왕사(天旺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 아래 마을이란 뜻에서 천왕골 또는 천왕리로 불려진 것입니다.

  • 명물·명소 : 천왕동 은행나무(수령 약 270~300년), 노승의 묘, 소사천 왕참외
  • 옛지명 : 연지마을, 천왕골, 부평말, 굴봉, 도당골, 모이안밭, 벌뚝, 숫돌고개

온수동

온수동이란 동명은 온수골에서 유래하였는데 옛날 이 지역 일대에서 더운 물이 나왔기 때문에 온수골이라 합니다.

  • 명물·명소 : 온수공단(영등포기계관리공단)
  • 옛지명 : 능안, 도당재고개, 독장이고개, 안산(案山)

오류동

오류동이란 동네 이름의 연원이 된 오류골이 원래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 명물·명소 : 유순정묘, 바가지우물, 도당제터, 오류골 참외
  • 옛지명 : 오류골, 주막거리, 안오류골, 보름외, 응골, 버들이마을

궁동

궁동이란 동명은 조선선조(宣祖)의 일곱째 정선옹주(貞善翁主)가 이곳에 살던 길성군(吉城君) 권대임(權大任)에게 출가하여 살던 집이 여기에 있었으므로 궁궐 같은 큰집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 명물·명소 : 정선옹주묘, 궁골, 유진오 별장, 원각사, 관음사
  • 옛지명 : 갈매, 댓골고개, 동이점골, 불당골, 성짓골, 삭새고개, 양지말

http://k.daum.net/qna/view.html?qid=2e9jI

http://www.guro.go.kr/child/page.jsp?code=chc040000000

우리고장의 동명유래조사...사회숙제

저....안녕하세요?울 쌤님께서 사회숙제 (중랑구)우리고장의 동명(동이름)유래조사를 해 오라고 하셨어요.....그리고 서울의 다른 동명 유래조사를 해 오라고 하셨는데..우리...

우리고장의 유래 조사하는것 아주아주...

... 유래, 이야기, 인물, 산, 강, 땅에 전해오는 이야기 조사... 탈놀이가 끝나게 되면 어느 고장에서나 탈을 불태워... 입은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미인의 조건으로 꼽던 형이다....

우리고장의 자랑거리 조사숙제..

... 4학년 방학숙제우리고장의 자랑거리 를 조사해야라... 무대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어두운 생활을... ☆ 행사의 유래 보령시에는 136km에 이르는 기다란...

사회 우리고장의 중심지 조사하기 숙제...

학교 숙제때문에 질문하는데요. 우리 고장의 중심지 즉,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의 설명 등. 특징 조사하기인데 전과에 보았는데 없네여..... 답변 부탁드려요 중심지 조사하기...

사회숙제우리고장 이름의 유래에...

저는 3학년인데, 우리 고장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알아보라고 사회숙제에 있어요. 우리 고장이름은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 율하리예요. 2010년 5월 3일 (월)요일 까지 정확하고...

우리고장의 유래와 문화재좀여(급해여...

사회 숙제 인데여, 숙제우리고장이 경기도 광주시에여 경기도 광주시의 유래와 문화재좀여 급해여!!!!!!!!!...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상궐, 좌전이 복원되었으며, 일부...

사회숙제인데요...우리고장의 중심지...

사회 숙제 우리고장의 중심지(대구)를 조사 해 라는데 대구의 중심지가 어디 인가요??엄청 급해요!!부탁드립니다.그리고 그곳에서 본 것들,그곳에 있는것들도 조사해 오래요.....

우리고장의 행사(중랑구)

안녕하세여^^ㅎ2 제 (대들어도 넘 대드는)동생이 숙제를... 대하여 조사해오기고여 질문들어갈랍쇼ㅋ-ㅋ 우리 고장의 행사여 중랑구로여꼭! 그리고 내공은 100이고여...

다른 고장의 행사 조사숙제 (사회 3학년)

... 사회 숙제로 <다른 고장의 행사를 조사해봅시다.>라는 문제의 숙제가 있어요.... 5(6일간) * 축제성격 문화예술 ▶ 축제의 유래 및 특성 ▪추석,설,한식과 더불어 우리민족의...

방학 숙제 (우리고장의 전설 조사)

방학숙제인데요.^^ 우리 고장의 전설 조사해오기입니다.^^ 우리 고장은 (파주,경기도)... 5.(파주시 탄현면) 질오목 유래의 전설 장릉 이장으로 박중손(朴仲孫)의 묘소가 헐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