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까지! 급해요~

내일까지! 급해요~

작성일 2011.07.13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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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정학습을 하게 되어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조사해야 합니다

내일까지 되도록이면 이미지와 함께 대략10가지 정도의 문화유산들이 필요합니다. 내공 20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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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문화유산

 

(국보)

 

1.숭례문


종 목  국보  제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소실되어 현재 복원 중에 있다.


2.원각사지 십층석탑


종 목  국보  제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3.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종 목  국보  제3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신라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고달사지 부도


종 목  국보  제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 
시 대 고려시대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5.법주사 쌍사자석등


종 목  국보  제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통일신라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6.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종 목  국보  제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시 대 통일신라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섬약해져 있어 당시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봉선홍경사 사적 갈비

 

종 목  국보  제7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홍리 320 
시 대 고려시대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이 갈비만이 남아 있다.

 

갈비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을 새겼는데 그 모양이 자못 도식적이다.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 

 

8.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종 목  국보  제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2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9.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종 목  국보  제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시 대 백제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10.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1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 실상사 백장암 
시 대 통일신라


실상사는 지리산 천황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과 신장상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을, 3층에는 천인좌상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보물)

 

보물 제5호로 지정이 되었던 중초사지 삼층석탑이 1997년 1월 1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 변경이 되어 보물 제5호가 없습니다.

 

1.흥인지문


종 목  보물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 대 조선시대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2.보신각종


종 목  보물  제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3.대원각사 비


종 목  보물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탑골공원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4.중초사지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시 대 통일신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이곳을 중초사터라고 하는 것은 서쪽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기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어져 있는데, 8·15해방 후 인근의 석수들이 석재로 반출하기 위한 자취라고 전해진다.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5.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종 목  보물  제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7-3 
시 대 고려시대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으며, 비몸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6.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

 

종 목  보물  제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3 
시 대 고려시대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부도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은 4면에는 문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부도는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입적한 고승이다.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7.고달사지 석불좌

 

종 목  보물  제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20-5 
시 대 고려시대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석불좌는 불상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고달사지부도가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8.서봉사 현오국사 탑비

 

종 목  보물  제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읍 신봉리 산111 
시 대 고려시대


서봉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보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곳은 탑비의 비각을 세우는 공사를 하던 도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명종 15년(1185)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오국사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이 비석만 남아 있다. 화강암의 비받침위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비몸돌이 놓여있는 단촐한 모습이다.

 

비받침부분의 윗면은 4변을 비스듬히 잘라내었고,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에도 윗부분의 양 귀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서 마무리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15세에 불일사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로 삼고 시호를 ‘현오’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그 외에도 글을 지은 이와 건립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한 고려 후기 석비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9.강화 하점면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93 
시 대 고려시대


이 탑은 무너져 있었으나 1960년 수리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파손된 곳도 많고, 없어진 부재도 많아서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머리장식 부분 등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낮은 언덕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그 규모를 알 수가 없으며, 가람을 배치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은 1층 몸돌만 두 장의 돌로 짜여있고, 그 이상은 각각 하나의 돌이다.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 몸돌의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나머지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올려져 있다. 탑이 무너졌을 때 추녀마루가 깨어져, 치켜오른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며, 각 부분에 두는 장식이 많이 생략되었고, 형식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은 탑이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변형된 고려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10.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

 

종 목  보물  제11-1호 
지 정 일 2000.02.15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22 보경사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중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꼭대기에는 종을 매달기 위한 둥근 고리가 있다. 어깨 부분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40개의 연꽃잎을 세워 두어 넓은 띠를 형성하였다. 이 띠 아래로는 일반적으로 9개의 돌기가 있는 것에 반해 5개의 돌기를 가지고 있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부처의 말씀인 진언을 새겨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사인비구의 초기 제작기법을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조선 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적)

 

1.경주 포석정지


종 목  사적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동 454-3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2.김해 봉황동 유적


종 목  사적  제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외 
시 대 청동시대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 쌓여 있는 곳으로,‘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무덤유적이 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뼈·뿔도구, 석기,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 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천은 중국 신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한다.

 

조개더미의 동쪽에서 고인돌,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다.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해봉황동유적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다. 

 

3.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4.부여 성흥산성


종 목  사적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시 대 백제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5.부여 부소산성


종 목  사적  제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시 대 삼국시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자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6.황룡사지

 

종 목  사적  제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 
시 대 신라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7.망덕사지

 

종 목  사적  제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956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낭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년(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려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사천왕사 건너편에 이 절을 지어 보여 주었고,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에서 망덕사라 하였다고 한다.

 

경덕왕 14년(755)에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신라사람들은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한다. 또한『삼국유사』에는 절을 지은 후 잔치를 베풀 때 효소왕이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하여 조롱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반야경』을 베껴쓰다가 죽은 승려 선율이 불경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 제69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8.사천왕사지

 

종 목  사적  제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2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낭산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9.서울성곽

 

종 목  사적  제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시 대 조선시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10.광주 풍납리토성

 

종 목  사적  제1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풍납동 72-1외 
시 대 삼국시대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풍납리식 민무늬토기·신라식 토기들과 그물추·물레·가락바퀴(방추차)·기와 등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더욱 연구·조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중요민속문화재)

 

1.덕온공주 당의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64.12.07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126번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순조(재위 1800∼1834)의 셋째 공주인 덕온공주가 입었던 당의이다. 이 옷은 그녀의 손녀인 윤백영이 저고리, 노리개, 원삼 등과 함께 아버지인 윤용구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7세 되던 해에 대궐에 입궐하면서 자신의 몸에 맞게 고쳐 입으면서 개조하였다.

 

당의란 조선시대 궁중과 사대부 여인들이 저고리 위에 입던 예복으로, 모양은 저고리와 비슷하지만 앞과 뒤의 길이가 길고 옆이 터져 있는 옷이다. 자주색 비단에 옷 전체에 수·복이라는 글자를 금실로 새겼다.

 

이 옷은 착용자 신분이 뚜렷하고 연대가 확실한 왕실의 유물로서 조선 후기 상류층의 복식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심동신 금관조복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64.12.07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126번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으로, 조복이란 문신, 무신들이 동지와 설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또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지낼 때 입었던 옷으로,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적초의를 입었다. 심동신이 참판 당시에 입던 유품으로 금관, 적초의, 적상, 청초의(청초중단), 운학금환수, 패옥, 서대, 홀 등이 있다.

 

금관은 5개의 금색선이 붙여진 오량관으로 나무비녀로 고정시키게 되어있다. 조복인 적초의는 날씨가 더울 때 쓰는 항라로 만든 붉은색의 홑옷인데, 깃은 직선이고 넓은 동정이 달렸으며 소매가 넓고 양 옆이 트였다. 청초의는 조복인 적초의 바로 안에 입는 옷으로 중단이라고 하는데, 청색 명주로 된 홑옷이다. 직선으로 된 깃에 동정이 있고 소맷부리와 도련 등에 검은선이 둘러져 있다. 적상는 조복인 적초의와 같이 항라로 만들었으며, 전체를 잔주름으로 처리하였고 앞 3폭, 뒤 4폭의 양식으로 앞면이 뒷면보다 좁게 되어 있다. 운학금환수는 후수를 말하는데 큰대와 함께 달려 있으며 붉은색 바탕에 파란색, 노란색, 흰색의 세가지 색으로 구름과 학을 수놓았다. 윗부분 양쪽에는 금환 2개가 달려있다. 패옥은 조복을 입을 때 허리 양 옆에 하나씩 달아 늘어뜨리던 장신구로, 한쌍이 온전히 남아있으며 위에는 놋쇠로 된 고리가 달려있다. 서대는 조복에 쓰던 허리띠이며, 홀은 조복을 입을 때 갖추어 양손에 쥐어 예를 표시하던 물건인데, 상아로 만들었다.

 

이 금관조복은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추정되며, 부속품까지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어 복식사적 가치가 많다.
 

 

3.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65.10.12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그의 비(妃) 유씨, 그리고 궁중의 정5품 상궁이 입었던 의복 4점이다. 1965년 해인사 장경판고를 수리할 때 남쪽 지붕 아래 구멍에서 건물 완공에 대한 기록과 상궁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 이 의복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발견된 의류는 담청색 직령 1점, 백삼 1점, 홍삼 1점, 자주저고리 1점 등 4점이다.

 

이 의복들은 재봉질 못지 않은 정교한 바느질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세련되었던 바느질법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의복 습관을 잘 나타내고 있어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4.외재 이단하 내외분 옷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65.10.12
소 재 지 강원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 21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 이단하 선생의 옷과 그의 부인이 입었던 옷, 그리고 그에 따른 머리 장식품들이다. 이단하(1625∼1689) 선생은 송시열 선생의 제자로 현종 3년(1662)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숙종 때에는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재직할 때에는 청렴하기로 이름이 났고 죽은 뒤에는 그의 학문과 충성심을 높이 여겨 나라에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 유품은 좌의정 시절 그가 입었던 중치막 1점과 정경부인으로서 그의 부인이 입었던 대례복 1점, 누비저고리 1점, 그리고 머리 장식물인 봉대 1점, 다리 1점, 도투락댕기 1점, 용잠 1점 등 모두 7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치막은 사대부들이 관복 속에 입거나 겉옷으로 평소에 입는 옷인 창의의 일종으로,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동정이 없고 소매가 넓고 길며 옆이 터져있는 흰 모시로 만든 겉옷이다.

 

대례복은 녹색으로, 어깨와 밑부분에 금실로 수놓은 넓은 단이 있고 안쪽은 붉은색으로 선이 둘러져 있다. 뒤가 앞보다 길고 소매가 길고 넓으며, 소매 끝에는 홍·황색의 줄과 덧댄 소매인 흰색의 한삼이 붙어 있다. 이 대례복을 입을 때 큰 머리를 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103㎝나 되는 가발과 자주색 바탕에 금박을 입힌 도투락댕기, 동에 금을 입힌 용무늬가 있는 비녀, 그리고 붉은색 바탕에 봉황무늬를 금박한 봉대 등은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 누비저고리는 방한용으로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에 따라 복식은 양식이 달라지는데 이것들은 시대와 착용자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조선 중기의 복식 형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5.강릉 선교장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67.04.18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운정동 43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선교장’이라는 이름도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6.사영 김병기 일가 옷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68.02.19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동 1 고려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병기(1818∼1875)와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아들 김용규와 손자 김승진이 입었던 옷이다. 김병기는 헌종 13년(1847)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찬성까지 오른 인물로, 아들인 김용규는 참판을 지냈으며, 손자인 김승진은 정 9품의 벼슬을 지냈다.

 

유품에는 김병기 조복과 제복이 각각 1점씩, 구군복 2점, 쾌자 2점, 땀받이용 배자류 1점, 아들 김용규와 손자 김승진의 관복 각각 1점씩, 부인 송씨의 원삼 2점과 그 밖에 아들 김용규의 호패와 술이 남아있다.

 

조복은 신하가 왕에게 아침 문안을 드릴 때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입던 옷이며, 제복은 왕이 종묘사직 등에 제사 지낼 때 함께 참여한 신하들이 입었던 옷이다. 구군복은 문관과 무관이 입던 군복이며, 쾌자는 전복이라고 부르는 옷으로 구군복을 차려 입을 때 협수 위에 입는 옷이다. 배자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조끼 모양의 옷이며, 원삼은 궁중의 여인들과 사대부인들의 대례복일 뿐만 아니라 결혼식을 올릴 때 신부의 예복으로도 사용하였던 옷이다.

 

 

7.충무시 문화동 벅수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68.11.23
소 재 지 경남 통영시  문화동 95-123 
시 대 대한제국시대

 

세병관(국보 제305호)으로 오르는 길가 오른쪽에 서 있는 돌장승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 등에 세워져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도 한다. 남녀 한 쌍이 짝을 이루어 서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장승은 하나만 있는 독장승이다. 이 부근의 위치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낮은 지대로 기를 보강해주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 장승이라는 명칭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벅수’라고도 한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있고 둥근 눈은 튀어나왔으며 코는 삼각형으로 뭉툭하다. 머리 위에는 벙거지를 쓰고 턱 밑에는 굵은 선으로 세 가닥의 수염이 표시되었다. 활짝 웃고있는 입에는 송곳니가 길게 삐져나와 있는데 험상궂은 모습이기 보다는 익살스럽다. 앞면 몸체에는 ‘토지대장군’이라는 이름이 새겨있다.

 

광무 10년(1906)에 세워진 이 장승은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친근하고 익살스러운 민간 특유의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유례가 드문 독장승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8.구례 운조루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68.11.25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집으로 영조 52년(1776)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집의 구성은 총 55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T자형으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큰 부엌이 없는데 이곳에는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누마루가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있어 특이하다.

 

안채는 사랑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매우 크며 평면이 트인 'ㅁ'자형이다. 중심부분은 대청이며, 좌우로는 큰방과 작은방이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一'자형으로 2칸이 앞쪽으로 튀어나와 누형식을 취하고 있다. 1칸은 방이고 다른 1칸은 다락으로 되어있다. 누각아래 기둥 서쪽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층계로 하지 않고 경사진 길로 만들어 특이하다.

 

사당은 안채 동북쪽에 있는 건물로 따로 담장을 둘렀으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운조루는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살림살이와 청주성의 지도, 그리고 상당산성의 지도 등의 유물도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
 

 

9.삼덕리마을제당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68.11.23
소 재 지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산128 
시 대 조선시대

 

제당은 마을의 신앙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인간의 일상생활과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성지의 일종으로 이곳에서 마을을 축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장군봉과 마을 입구에 넓게 분포하는 삼덕리부락제당은 신을 모셔놓고 위하는 집(당집)과 여러 개의 신이 있다고 믿고 섬기는 대상물(당산)로 구성된다. 장군당 안의 장군신도와 2개의 목마 중 큰 목마, 원항마을 입구의 돌장승이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그밖에도 천제당과 당산나무 10여 그루, 나머지 돌장승 2쌍이 이곳의 동제당이다.

 

장군봉 정상에 위치한 장군당과 천제당은 각각 장군신과 천신을 모신 곳으로서 규모가 작고 조촐한 건물이다. 장군신화는 장군당 내부에 걸려있는 그림으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장군의 단호함이 잘 표현되었다. 이 앞에는 목마 한 쌍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큰 것은 원래의 철마를 도둑맞은 후 1940년경 새로 만들어진 것이고, 작은 것은 근처에 살던 일본인이 기증한 것이다. 장승은 대청·관유·원항마을 입구에 남녀 한 쌍으로 세워졌다. 관유마을의 것만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고 나머지는 돌로 만든 석장승이다.

 

이 마을의 동제는 설날 첫새벽에 시작되어 며칠에 걸쳐 진행되는데 마을 공동으로 제사비용을 추렴하고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한다. 마을에서 선출된 대표가 제관이 되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제사를 주관한다. 천제당에서 천제를 지내고 장군당에서 장군제와 용마제를 지낸 다음 산기슭 바위에서 잡신제를 지낸다. 이때 쯤 각 가정에서는 조상제를 지낸 후 장승 앞에서 벅수제를 지낸다. 그리고 원항마을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내며 어로의 무사고를 기원하는 별신제를 지낸 후 주민 모두가 어우러지는 풍물놀이를 끝으로 이 의례는 막을 내린다. 마을 전체를 위한 제사이고 마을의 구성원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기능을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동제가 잘 보존되어있고 다양한 신앙 대상물이 공존하고있어 주목되는 이곳은 민간신앙, 마을신앙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10.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1968.11.25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29 
시 대 조선시대

 

창녕 지방에 있는 옛집으로 안채·사랑채·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안채만 지정되어 있다. 안채는 현소유자 하경목 씨의 18대 조상이 이 마을에 들어와 세종 7년(1425)에 지은 건물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건륭 25년’<영조 36년(1760)>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이 때에 다시 지었거나 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남향한 안채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일반적인 앞면 4칸·옆면 1칸의 '一'자형 홑집으로, 왼쪽부터 작은방·대청·큰방·부엌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처마는 이 집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기둥의 높이에 가까울 정도로 깊다. 이는 일조량과 강우량을 고려한 남부지방 가옥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살림집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붕은 억새풀을 엮어서 얹은 초가로 수명이 길 뿐만 아니라 예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대청은 통나무를 윗부분만 편평히 깎아 깔았는데 매우 오래된 것이다. 또한 목재는 못을 쓰지 않고 구멍을 뚫어 연결하였으며, 천장은 흙을 깔지 않은 상태로 구성하여 가볍게 한 점 등이 내부의 특징이다.

 

앞마당에는 작은 텃밭을 가꾸었고 부엌 앞쪽에는 장독대가 있으며, 안채 뒤로는 꽃계단을 꾸며 몇그루의 오래된 나무들이 어울러 숲을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약간의 변형이 있었지만 일반가옥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술정리란 창녕현감 한강 정구가 지은 정자를 '술정'이라 한데에서 지어진 마을 이름으로 지정 당시에는 '창녕하병수씨가옥'이었으나, 마을이름(술정리), 거주한 내력(하씨), 가옥의 형태(초가) 등을 나타내는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로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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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문화유산

 

(국보)

 

1.숭례문


종 목  국보  제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소실되어 현재 복원 중에 있다.


2.원각사지 십층석탑


종 목  국보  제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3.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종 목  국보  제3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신라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고달사지 부도


종 목  국보  제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 
시 대 고려시대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5.법주사 쌍사자석등


종 목  국보  제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통일신라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6.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종 목  국보  제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시 대 통일신라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섬약해져 있어 당시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봉선홍경사 사적 갈비

 

종 목  국보  제7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홍리 320 
시 대 고려시대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이 갈비만이 남아 있다.

 

갈비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을 새겼는데 그 모양이 자못 도식적이다.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 

 

8.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종 목  국보  제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2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9.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종 목  국보  제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시 대 백제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10.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1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 실상사 백장암 
시 대 통일신라


실상사는 지리산 천황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과 신장상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을, 3층에는 천인좌상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보물)

 

보물 제5호로 지정이 되었던 중초사지 삼층석탑이 1997년 1월 1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 변경이 되어 보물 제5호가 없습니다.

 

1.흥인지문


종 목  보물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 대 조선시대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2.보신각종


종 목  보물  제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3.대원각사 비


종 목  보물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탑골공원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4.중초사지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시 대 통일신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이곳을 중초사터라고 하는 것은 서쪽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기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어져 있는데, 8·15해방 후 인근의 석수들이 석재로 반출하기 위한 자취라고 전해진다.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5.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종 목  보물  제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7-3 
시 대 고려시대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으며, 비몸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6.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

 

종 목  보물  제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3 
시 대 고려시대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부도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은 4면에는 문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부도는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입적한 고승이다.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7.고달사지 석불좌

 

종 목  보물  제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20-5 
시 대 고려시대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석불좌는 불상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고달사지부도가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8.서봉사 현오국사 탑비

 

종 목  보물  제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읍 신봉리 산111 
시 대 고려시대


서봉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보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곳은 탑비의 비각을 세우는 공사를 하던 도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명종 15년(1185)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오국사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이 비석만 남아 있다. 화강암의 비받침위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비몸돌이 놓여있는 단촐한 모습이다.

 

비받침부분의 윗면은 4변을 비스듬히 잘라내었고,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에도 윗부분의 양 귀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서 마무리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15세에 불일사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로 삼고 시호를 ‘현오’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그 외에도 글을 지은 이와 건립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한 고려 후기 석비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9.강화 하점면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93 
시 대 고려시대


이 탑은 무너져 있었으나 1960년 수리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파손된 곳도 많고, 없어진 부재도 많아서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머리장식 부분 등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낮은 언덕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그 규모를 알 수가 없으며, 가람을 배치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은 1층 몸돌만 두 장의 돌로 짜여있고, 그 이상은 각각 하나의 돌이다.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 몸돌의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나머지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올려져 있다. 탑이 무너졌을 때 추녀마루가 깨어져, 치켜오른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며, 각 부분에 두는 장식이 많이 생략되었고, 형식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은 탑이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변형된 고려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10.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

 

종 목  보물  제11-1호 
지 정 일 2000.02.15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22 보경사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중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꼭대기에는 종을 매달기 위한 둥근 고리가 있다. 어깨 부분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40개의 연꽃잎을 세워 두어 넓은 띠를 형성하였다. 이 띠 아래로는 일반적으로 9개의 돌기가 있는 것에 반해 5개의 돌기를 가지고 있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부처의 말씀인 진언을 새겨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사인비구의 초기 제작기법을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조선 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적)

 

1.경주 포석정지


종 목  사적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동 454-3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2.김해 봉황동 유적


종 목  사적  제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외 
시 대 청동시대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 쌓여 있는 곳으로,‘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무덤유적이 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뼈·뿔도구, 석기,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 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천은 중국 신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한다.

 

조개더미의 동쪽에서 고인돌,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다.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해봉황동유적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다. 

 

3.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4.부여 성흥산성


종 목  사적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시 대 백제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5.부여 부소산성


종 목  사적  제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시 대 삼국시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자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6.황룡사지

 

종 목  사적  제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 
시 대 신라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7.망덕사지

 

종 목  사적  제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956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낭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년(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려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사천왕사 건너편에 이 절을 지어 보여 주었고,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에서 망덕사라 하였다고 한다.

 

경덕왕 14년(755)에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신라사람들은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한다. 또한『삼국유사』에는 절을 지은 후 잔치를 베풀 때 효소왕이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하여 조롱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반야경』을 베껴쓰다가 죽은 승려 선율이 불경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 제69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8.사천왕사지

 

종 목  사적  제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2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낭산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9.서울성곽

 

종 목  사적  제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시 대 조선시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10.광주 풍납리토성

 

종 목  사적  제1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풍납동 72-1외 
시 대 삼국시대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풍납리식 민무늬토기·신라식 토기들과 그물추·물레·가락바퀴(방추차)·기와 등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더욱 연구·조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중요민속문화재)

 

1.덕온공주 당의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64.12.07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126번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순조(재위 1800∼1834)의 셋째 공주인 덕온공주가 입었던 당의이다. 이 옷은 그녀의 손녀인 윤백영이 저고리, 노리개, 원삼 등과 함께 아버지인 윤용구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7세 되던 해에 대궐에 입궐하면서 자신의 몸에 맞게 고쳐 입으면서 개조하였다.

 

당의란 조선시대 궁중과 사대부 여인들이 저고리 위에 입던 예복으로, 모양은 저고리와 비슷하지만 앞과 뒤의 길이가 길고 옆이 터져 있는 옷이다. 자주색 비단에 옷 전체에 수·복이라는 글자를 금실로 새겼다.

 

이 옷은 착용자 신분이 뚜렷하고 연대가 확실한 왕실의 유물로서 조선 후기 상류층의 복식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심동신 금관조복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64.12.07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126번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으로, 조복이란 문신, 무신들이 동지와 설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또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지낼 때 입었던 옷으로,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적초의를 입었다. 심동신이 참판 당시에 입던 유품으로 금관, 적초의, 적상, 청초의(청초중단), 운학금환수, 패옥, 서대, 홀 등이 있다.

 

금관은 5개의 금색선이 붙여진 오량관으로 나무비녀로 고정시키게 되어있다. 조복인 적초의는 날씨가 더울 때 쓰는 항라로 만든 붉은색의 홑옷인데, 깃은 직선이고 넓은 동정이 달렸으며 소매가 넓고 양 옆이 트였다. 청초의는 조복인 적초의 바로 안에 입는 옷으로 중단이라고 하는데, 청색 명주로 된 홑옷이다. 직선으로 된 깃에 동정이 있고 소맷부리와 도련 등에 검은선이 둘러져 있다. 적상는 조복인 적초의와 같이 항라로 만들었으며, 전체를 잔주름으로 처리하였고 앞 3폭, 뒤 4폭의 양식으로 앞면이 뒷면보다 좁게 되어 있다. 운학금환수는 후수를 말하는데 큰대와 함께 달려 있으며 붉은색 바탕에 파란색, 노란색, 흰색의 세가지 색으로 구름과 학을 수놓았다. 윗부분 양쪽에는 금환 2개가 달려있다. 패옥은 조복을 입을 때 허리 양 옆에 하나씩 달아 늘어뜨리던 장신구로, 한쌍이 온전히 남아있으며 위에는 놋쇠로 된 고리가 달려있다. 서대는 조복에 쓰던 허리띠이며, 홀은 조복을 입을 때 갖추어 양손에 쥐어 예를 표시하던 물건인데, 상아로 만들었다.

 

이 금관조복은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추정되며, 부속품까지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어 복식사적 가치가 많다.
 

 

3.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65.10.12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그의 비(妃) 유씨, 그리고 궁중의 정5품 상궁이 입었던 의복 4점이다. 1965년 해인사 장경판고를 수리할 때 남쪽 지붕 아래 구멍에서 건물 완공에 대한 기록과 상궁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 이 의복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발견된 의류는 담청색 직령 1점, 백삼 1점, 홍삼 1점, 자주저고리 1점 등 4점이다.

 

이 의복들은 재봉질 못지 않은 정교한 바느질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세련되었던 바느질법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의복 습관을 잘 나타내고 있어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4.외재 이단하 내외분 옷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65.10.12
소 재 지 강원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 21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 이단하 선생의 옷과 그의 부인이 입었던 옷, 그리고 그에 따른 머리 장식품들이다. 이단하(1625∼1689) 선생은 송시열 선생의 제자로 현종 3년(1662)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숙종 때에는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재직할 때에는 청렴하기로 이름이 났고 죽은 뒤에는 그의 학문과 충성심을 높이 여겨 나라에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 유품은 좌의정 시절 그가 입었던 중치막 1점과 정경부인으로서 그의 부인이 입었던 대례복 1점, 누비저고리 1점, 그리고 머리 장식물인 봉대 1점, 다리 1점, 도투락댕기 1점, 용잠 1점 등 모두 7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치막은 사대부들이 관복 속에 입거나 겉옷으로 평소에 입는 옷인 창의의 일종으로,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동정이 없고 소매가 넓고 길며 옆이 터져있는 흰 모시로 만든 겉옷이다.

 

대례복은 녹색으로, 어깨와 밑부분에 금실로 수놓은 넓은 단이 있고 안쪽은 붉은색으로 선이 둘러져 있다. 뒤가 앞보다 길고 소매가 길고 넓으며, 소매 끝에는 홍·황색의 줄과 덧댄 소매인 흰색의 한삼이 붙어 있다. 이 대례복을 입을 때 큰 머리를 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103㎝나 되는 가발과 자주색 바탕에 금박을 입힌 도투락댕기, 동에 금을 입힌 용무늬가 있는 비녀, 그리고 붉은색 바탕에 봉황무늬를 금박한 봉대 등은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 누비저고리는 방한용으로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에 따라 복식은 양식이 달라지는데 이것들은 시대와 착용자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조선 중기의 복식 형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5.강릉 선교장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67.04.18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운정동 43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선교장’이라는 이름도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6.사영 김병기 일가 옷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68.02.19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안암동 1 고려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병기(1818∼1875)와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아들 김용규와 손자 김승진이 입었던 옷이다. 김병기는 헌종 13년(1847)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찬성까지 오른 인물로, 아들인 김용규는 참판을 지냈으며, 손자인 김승진은 정 9품의 벼슬을 지냈다.

 

유품에는 김병기 조복과 제복이 각각 1점씩, 구군복 2점, 쾌자 2점, 땀받이용 배자류 1점, 아들 김용규와 손자 김승진의 관복 각각 1점씩, 부인 송씨의 원삼 2점과 그 밖에 아들 김용규의 호패와 술이 남아있다.

 

조복은 신하가 왕에게 아침 문안을 드릴 때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입던 옷이며, 제복은 왕이 종묘사직 등에 제사 지낼 때 함께 참여한 신하들이 입었던 옷이다. 구군복은 문관과 무관이 입던 군복이며, 쾌자는 전복이라고 부르는 옷으로 구군복을 차려 입을 때 협수 위에 입는 옷이다. 배자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조끼 모양의 옷이며, 원삼은 궁중의 여인들과 사대부인들의 대례복일 뿐만 아니라 결혼식을 올릴 때 신부의 예복으로도 사용하였던 옷이다.

 

 

7.충무시 문화동 벅수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68.11.23
소 재 지 경남 통영시  문화동 95-123 
시 대 대한제국시대

 

세병관(국보 제305호)으로 오르는 길가 오른쪽에 서 있는 돌장승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 등에 세워져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도 한다. 남녀 한 쌍이 짝을 이루어 서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장승은 하나만 있는 독장승이다. 이 부근의 위치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낮은 지대로 기를 보강해주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 장승이라는 명칭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벅수’라고도 한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있고 둥근 눈은 튀어나왔으며 코는 삼각형으로 뭉툭하다. 머리 위에는 벙거지를 쓰고 턱 밑에는 굵은 선으로 세 가닥의 수염이 표시되었다. 활짝 웃고있는 입에는 송곳니가 길게 삐져나와 있는데 험상궂은 모습이기 보다는 익살스럽다. 앞면 몸체에는 ‘토지대장군’이라는 이름이 새겨있다.

 

광무 10년(1906)에 세워진 이 장승은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친근하고 익살스러운 민간 특유의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유례가 드문 독장승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8.구례 운조루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68.11.25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집으로 영조 52년(1776)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집의 구성은 총 55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T자형으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큰 부엌이 없는데 이곳에는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누마루가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있어 특이하다.

 

안채는 사랑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매우 크며 평면이 트인 'ㅁ'자형이다. 중심부분은 대청이며, 좌우로는 큰방과 작은방이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一'자형으로 2칸이 앞쪽으로 튀어나와 누형식을 취하고 있다. 1칸은 방이고 다른 1칸은 다락으로 되어있다. 누각아래 기둥 서쪽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층계로 하지 않고 경사진 길로 만들어 특이하다.

 

사당은 안채 동북쪽에 있는 건물로 따로 담장을 둘렀으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운조루는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살림살이와 청주성의 지도, 그리고 상당산성의 지도 등의 유물도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
 

 

9.삼덕리마을제당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68.11.23
소 재 지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산128 
시 대 조선시대

 

제당은 마을의 신앙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인간의 일상생활과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성지의 일종으로 이곳에서 마을을 축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장군봉과 마을 입구에 넓게 분포하는 삼덕리부락제당은 신을 모셔놓고 위하는 집(당집)과 여러 개의 신이 있다고 믿고 섬기는 대상물(당산)로 구성된다. 장군당 안의 장군신도와 2개의 목마 중 큰 목마, 원항마을 입구의 돌장승이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그밖에도 천제당과 당산나무 10여 그루, 나머지 돌장승 2쌍이 이곳의 동제당이다.

 

장군봉 정상에 위치한 장군당과 천제당은 각각 장군신과 천신을 모신 곳으로서 규모가 작고 조촐한 건물이다. 장군신화는 장군당 내부에 걸려있는 그림으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장군의 단호함이 잘 표현되었다. 이 앞에는 목마 한 쌍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큰 것은 원래의 철마를 도둑맞은 후 1940년경 새로 만들어진 것이고, 작은 것은 근처에 살던 일본인이 기증한 것이다. 장승은 대청·관유·원항마을 입구에 남녀 한 쌍으로 세워졌다. 관유마을의 것만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고 나머지는 돌로 만든 석장승이다.

 

이 마을의 동제는 설날 첫새벽에 시작되어 며칠에 걸쳐 진행되는데 마을 공동으로 제사비용을 추렴하고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한다. 마을에서 선출된 대표가 제관이 되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제사를 주관한다. 천제당에서 천제를 지내고 장군당에서 장군제와 용마제를 지낸 다음 산기슭 바위에서 잡신제를 지낸다. 이때 쯤 각 가정에서는 조상제를 지낸 후 장승 앞에서 벅수제를 지낸다. 그리고 원항마을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내며 어로의 무사고를 기원하는 별신제를 지낸 후 주민 모두가 어우러지는 풍물놀이를 끝으로 이 의례는 막을 내린다. 마을 전체를 위한 제사이고 마을의 구성원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기능을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동제가 잘 보존되어있고 다양한 신앙 대상물이 공존하고있어 주목되는 이곳은 민간신앙, 마을신앙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10.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1968.11.25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29 
시 대 조선시대

 

창녕 지방에 있는 옛집으로 안채·사랑채·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안채만 지정되어 있다. 안채는 현소유자 하경목 씨의 18대 조상이 이 마을에 들어와 세종 7년(1425)에 지은 건물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건륭 25년’<영조 36년(1760)>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이 때에 다시 지었거나 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남향한 안채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일반적인 앞면 4칸·옆면 1칸의 '一'자형 홑집으로, 왼쪽부터 작은방·대청·큰방·부엌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처마는 이 집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기둥의 높이에 가까울 정도로 깊다. 이는 일조량과 강우량을 고려한 남부지방 가옥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살림집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붕은 억새풀을 엮어서 얹은 초가로 수명이 길 뿐만 아니라 예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대청은 통나무를 윗부분만 편평히 깎아 깔았는데 매우 오래된 것이다. 또한 목재는 못을 쓰지 않고 구멍을 뚫어 연결하였으며, 천장은 흙을 깔지 않은 상태로 구성하여 가볍게 한 점 등이 내부의 특징이다.

 

앞마당에는 작은 텃밭을 가꾸었고 부엌 앞쪽에는 장독대가 있으며, 안채 뒤로는 꽃계단을 꾸며 몇그루의 오래된 나무들이 어울러 숲을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약간의 변형이 있었지만 일반가옥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술정리란 창녕현감 한강 정구가 지은 정자를 '술정'이라 한데에서 지어진 마을 이름으로 지정 당시에는 '창녕하병수씨가옥'이었으나, 마을이름(술정리), 거주한 내력(하씨), 가옥의 형태(초가) 등을 나타내는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로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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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분 문제집은 우공비 1학기꺼 풀고 있습니다 4월 8일 내일까지 급해요 아침까지는 답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지수가 학교를 출발하여 시속 4km로 걸어가고...

잠자리의 생김세(내일까지) 급해요~~~~~~~!!

잠자리에 생김세좀 가르켜 주세요 급해요 내일까지~~~~ (예)잠자리의 다리수는................ 다리는 3쌍이고 가슴에 붙어 있다. 날개는 2쌍이고 무늬가 있으며, 가슴에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