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군 문화유적 전설 알려주세요

신안군 문화유적 전설 알려주세요

작성일 2011.04.2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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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의 문화유적)

 

1.김환기 가옥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51호 
지 정 일 2007.10.12
소 재 지 전남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955번지외 1필지 
시 대 일제강점기


한국의 대표적 서양화가로 우리나라 전통미를 현대화시키는데 주력한 수화 김환기(1913~1974) 화백이 태어난 곳으로 현재 안채와 화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환기는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제1세대 화가로 한국의 고전적 소재를 추상적 조형언어로 양식화하여 한국미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인물로, 이 곳은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 작품활동이 이루어졌던 공간이라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와 함께 20세기 초반 전통가옥이 근대로 들어서면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실용적으로 변용되어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2.신안 읍리 삼층석탑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1호

지 정 일 1978.09.22
소 재 지 전남 신안군  팔금면 읍리 350-1 
시 대 고려시대


들판 한 가운데 서 있는 탑으로, 탑이 속했던 절의 구체적인 역사는 전하고 있지 않다. 탑은 1층 기단 위에 탑신부를 세우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조각을 가지런히 새겨 넣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 한돌로 이루어졌으며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알맞게 줄고 있어 안정감을 준다. 두꺼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이는 파손된 석재가 놓여있다.

 

기단이 1층인 점과 가운데기둥조각이 생략된 점, 두꺼운 지붕돌, 4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3.도창리 고분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07호

지 정 일 1987.06.01
소 재 지 전남 신안군  장산면 도창리 산93-1 
시 대 백제시대


전라남도 신안군 도창리 마을 독서회관을 세우다가 발견된 널방(현실)과 널길(연도)이 있는 백제의 돌방무덤(석실분)이다.

 

천장은 커다란 판돌로 벽면을 세우고 그 위에 괴임돌을 얻어 천장의 공간을 좁게 한 후 천장돌을 덮은 꺾임천정이다. 이러한 형식은 백제가 부여로 수도를 옮긴 후인 7세기 중엽부터 백제 존속기간까지 지배계급의 무덤 형식으로 쓰였다.

 

신안 도창리무덤은 전남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발견된 것으로 이 지역 백제무덤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4.가거도 패총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30호

지 정 일 1990.02.24
소 재 지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 산4 
시 대 신석기시대


패총이란 수렵·어로·채집에 의하여 살아온 옛 사람들이 조개를 먹은 뒤 버린 조개껍데기와 생활쓰레기가 함께 쌓여 이루어진 유적으로 조개더미라고도 한다.

 

신안 가거도패총은 가거도 북쪽 끝에 있는 등대의 서쪽 경사면에 있다. 이 패총은 1968년 서울대학교 인류학 조사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처음 조사될 당시에는 연대가 신석기 후기의 것이며 서해안의 신석기유적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이 유적에서 돋을무늬토기나 눌러찍은무늬토기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연대가 신석기 전기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남해안 일대에 퍼져있는 신석기시대 패총과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안 가거도패총은 고고학계 연구가들의 귀중한 자료로서 활용가치가 있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전하고 있다. 

 

5.암태도 송곡리 매향비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23호

지 정 일 2004.09.20
소 재 지 전남 신안군  암태면 송곡리 산185번지 
시 대 조선시대


신안 암태도 송곡리 매향비는 조선시대 초기인 1405년(태종 5, 영락 3)에 세워진 매향비이다. 매향이란 미래 구복적인 성향이 강한 미륵신앙의 한 형태로 향나무을 묻는 민간불교 신앙의례이다. 향나무를 민물과 갯물이 만나는 지역에 오래 묻었다가 약재나 불교의식용으로 썼으며, 그 매향의 시기와 장소, 관련 인물들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또는 암각)이다. 매향의 장소로서는 산곡수와 해수가 만나는 지점이 최적지라 구전된다.

 

암태도 매향비는 7행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남북한 전지역에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섬에서 발견된 점이 특이하며 1982년 7월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의 도서지방 공동학술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매향비는 '비석거리' 서쪽 해발 80여m되는 산 동쪽 기슭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제보에 따르면, 원래 이 비석은 현 위치보다 약간 높은 산릉에 있었는데, 수로공사에 사용하기 위해 현 위치로 옮겨졌다고 하며 정제되지 않은 자연석의 편평한 면에 음각되어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음각된 자형의 크기는 6cm∼11cm로 일정하지 않다. 또 비석의 좌측 상단이 훼손되어 일부 글자 판독이 안된다. 비문 내용을 살펴보면 매향처, 사방기준지, 매향시기, 주도집단, 매향과 비석을 세운 경위, 참여자, 시주자 들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암태도 매향비의 특징은 매향의 주도층으로 '향도'가 명시된 점과 '매향처'를 명확하게 기록한 점이다.

 

매향의식은 고대로부터 행해져 왔는데, 그 시기와 장소 참여인물 등을 기록한 매향비(암각명문)자료는 역사적 성격은 물론 불교문화사나 향촌 사회사 연구 등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신안 암태도 매향비는 1405년에 세워진 것으로 1982년에 발견되어 매향비 자체로서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 외에도 매향비 조사연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비의 발견 이후 많은 조사 연구가 있었고, 뒤따라 여러 곳의 매향사례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도서 지방에서는 거의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6.흑산도 상라산성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39호

지 정 일 2008.04.11
소 재 지 전남 신안군  흑산면 진리 산7 외 
시 대 통일신라


신안 흑산도 상라산성 일원에는 상라산성을 비롯한 제사유적, 관사터, 무심사지 등 4개 유적으로 이루어진 복합유적이 있다. 상라산성은 고대~고려시대 국제 해양도시의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흑산도 읍동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축조한 관방시설로 추정된다. 읍동마을 뒤편의 계곡 초입부에는 고려시대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관사터가 위치하고 있다. 이 관사의 맞은편 골짜기에는 무심사지가 들어서 있고, 바로 위쪽의 봉우리에 상라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상라산성 서쪽의 상라산 정상에는 봉화 불을 피우던 봉수대와 제사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 유적들이 모두 상라산성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이내에 분포하고 있으며, 같은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상호 관련성을 살필 수 있다.

 

상라산성은 신안군 흑산면 진리 2구 읍동마을의 바다와 만나는 상라산 북쪽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길이 280m의 소형산성으로 남사면만을 반월형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순수 석축부만의 길이는 220m이다. 해안에 면한 북쪽 능선의 경우는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고 100m에 가까운 깎아지른 해안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험준한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 중간지점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나 바위 사이에만 돌로 쌓는 등의 간단한 축성만으로도 손쉽게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자연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한 우리나라의 산성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성벽은 대체로 남사면의 6부 능선을 반월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일반적으로 산 정상 부근이나 중복부를 거의 동일한 레벨로 둘러싼 전형적인 테뫼식과는 달리 산복식에 가까운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우리나라에서 돌로 산성을 쌓을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편축법으로 쌓았는데 상라산성과 같이 성 안팎의 높이 차이가 심한 지형에 적합한 축성법이다. 성돌은 기저부에만 부분적으로 장대석을 사용하고 있을 뿐 상·하단의 구별 없이 거의 같은 크기의 성돌로 수직으로 쌓아 올렸는데 다만 성벽 통과선의 경사도에 따라서 쐐기돌로 고정하여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면석은 성벽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충 다듬은 면을 바깥으로 하여 가로 쌓기와 세로 쌓기로 서로 결구하고 있으며, 안쪽에는 잡석으로 뒷채움하였다. 상라산성의 부속시설로는 동문지와 건물지 1개소가 확인되고 있다.

 

관사터는 상라산 전망대에서 동쪽의 읍동마을을 향해 뻗은 능선의 끝자락에 형성된 ‘해내지골’에 위치하고 있다. 읍동마을 뒤편의 길이 100m, 너비 50m 정도의 그리 깊지 않은 골짜기로 능선의 끝자락에는 동서로 긴 30m 정도의 평탄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건물지의 방향은 남향으로 축대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읍동마을 학술지표조사에서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절터와 건물터, 그리고 상라산성 주변에서는 통일신라 후기~고려시대의 유물이 주로 수습되었다. 관사터에서는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유물인 주름무늬병과 줄무늬병, 해무리굽 청자 등이 기와편과 함께 수습되었다. 무심사지에서는 고려시대 삼층석탑과 석등 외에도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편이 많이 수습되었다. 제사유적에서는 철마와 주름무늬병, 주름병편 등이 수습되었다. 이처럼 흑산도 상라산성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한국과 중국간의 활발한 교류 양상을 살펴볼 수 있고 당시 남방항로상에서 흑산도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7.지도향교

 

종 목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지 정 일 1984.02.29
소 재 지 전남 신안군  지도읍 읍내리 112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지도향교는 조선 후기 행정 개편으로 건양 원년(1896) 지도군을 새로 설치하면서 1군 1향교 원칙에 따라 지은 향교이다. 이후 1947∼1948년 명륜당을 다시 지었고, 1966년 대성전 수리, 1968년 명륜당을 수리하여 지금과 같은 규모를 갖추고 있다.

 

봉정산의 완만한 경사지를 2단으로 하여 앞쪽에 교육 공간을 두고, 뒤쪽에 제사 공간을 두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반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그 외 건물로는 양사재와 내삼문, 외문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8.안좌 방월리 지석묘군 


종 목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

지 정 일 1984.02.29
소 재 지 전남 신안군  안좌면 방월리 401-1 외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전라남도 지방은 전국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지역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해도 약 2만 여기가 넘는다. 이곳 신안군 안좌면에서만 47기의 고인돌이 알려져 있다. 안좌면 방월리에 있는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마을 길가에 있는데, 크기는 길이 3.75m, 너비 2.6m이다. 이 외에도 인근 민가에 3기의 고인돌이 더 있으며 이곳에서는 돌칼·돌끌·돌도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마을에는 원래 7기의 고인돌이 있어 칠성바위라고 불렀다고 하나 현재는 4기만 남아 있다.


 

9.흑산 진리 무심사지 삼층석탑과 석등 


종 목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3호

지 정 일 1994.01.31
소 재 지 전남 신안군  흑산면 진리 721-1 외 
시 대  고려시대


읍동마을 당산나무 밑에 놓여 있는 석탑과 석등으로, 주위에는 밭이 펼쳐 있고 뒤로는 상라산이 병풍처럼 배경을 이루고 있다.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주위에서 토기나 기와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 지금도 불교신도들이 이곳에 찾아와 불공을 드리고 있다.

 

석탑은 땅 위로 기단의 맨 윗돌만 드러나 그 아래는 모두 묻혀 있으며, 위로는 3층의 탑신이 쌓여 있다. 탑신의 세 몸돌은 모두 위아래와 서로 틀이 딱 맞지 않아 원래의 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보인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네 귀통이에게 위로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받침돌만 남아있다.

 

탑 옆에 놓여 있는 석등은 3단을 이루는 받침돌 위로,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불을 밝혀두던 화사석이 없어져 버린 상태이다. 각 부분이 8각을 이루는 받침돌은 아래·위에 서로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길쭉한 기둥을 두어 아래·윗받침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지붕돌 역시 8각이나, 각이 뚜렷치 않아 윗면의 여덟 모서리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둥근 돌이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석탑도 거의 본모습을 잃고 있고, 석등 역시 화사석이 없는 상태이나,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에까지 불교가 전파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시대 당시 섬사람들의 신앙생활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석등은 비록 일부이긴 하나 각부분들이 온전히 남아있어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충분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10.흑산 진리 지석묘군

 

종 목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

지 정 일 1994.01.31
소 재 지 전남 신안군  흑산면 진리 102-2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전라남도 지방은 전국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지역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해도 약 2만여기가 넘는다. 흑산진리 고인돌군은 흑산초등학교에서 약 100m 떨어진 구릉 위에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 2.25m, 너비 1.57m이고 6기의 고인돌 중 3기에서는 덮개돌을 지탱하고 있는 작은 받침돌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흑갈색 민무늬토기와 회갈색 토기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인근에서 조사된 선사시대의 조개더미와 더불어 신석기∼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 지역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인돌의 전파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1.도초 고란리 석장승

 

종 목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4호

지 정 일 2005.02.26
소 재 지 전남 신안군  도초면 고란리(고란마을) 1631 
시 대 일제강점기


고란리 장승은 마을 입구 '장석거리' 또는 '삼거리' 라고 불리는 곳에 서 있다. 화강석으로 형태는 머리에 약 30cm 높이의 갓모양의 모자를 쓰고 몸에 도포형의 긴 옷을 걸친 모습이다. 어깨에서부터 반듯이 내린 소맷자락 아래로 다섯 개의 손가락이 펼쳐져 있다. 80cm 길이의 얼굴은 290cm의 장승 전체 크기에 비해 다소 긴 편이다. 커다란 타원형의 눈이 툭 튀어나와 있고, 좁은 양미간에서 길게 내려 온 삼각형 코는 두툼하며 투박한 느낌을 준다. 한편 얼굴 측면의 귀는 길고 두툼하게 이어 내려와 투박하면서도 일면 석가모니 귀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입의 묘사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행인에게 위압감을 주려는 의도에서였는지, 윗니 아랫니를 드러낸 형상인데, 오히려 웃는 모습같이 보이기도 한다. 장승의 전체적인 인상은 일견 투박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듯하면서도 차츰 접할수록 오히려 포근하고 익살스러운 느낌을 준다. 몸에 새겨진 명문은 없고 뒷면에 건립년대(을축십삼년)가 새겨져 있다.

 

고란리 장승의 유래는 마을의 액운과 살(煞)을 막아 주민을 보호하는 마을 수호의 기능과 관련 있다. 원래 목장승을 세웠는데 1938년에는 석장승으로 바꾸어 세워 현재에까지 이른다. 장승 뒷면에는 '乙丑十三年(을축십삼년)' 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본래는 '昭和十三年(소화십삼년)' 이라고 새겨져 있었는데 광복후 '乙丑(을축)' 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이 석장승은 도초면내에 거주하던 석공들을 불러 제작케 했다고 한다.

 

고란리 장승의 관련 의례로 마을 공동 제사인 당제가 있다. 현재는 당제가 단절되었지만 과거에는 상당제와 하당제로 나뉘어 성대하게 지내던 제사였다. 하당제의 신체가 석장승이다. 제의 후에는 일종의 굿놀이인 죽마제를 지냈던 것으로 전한다.

 

신안도초고란리석장승은 원래 목장승이었고 주변에서 당제를 진행하던 전통적 민속공동체 신앙물이며 1938년에 세운 장승으로 조형성이 있고, 도서지방의 장승으로 귀중한 민속적 가치가 있다.

 

(신안군의 전설)

 

1.하의도의 큰바위얼굴

 

신안군 하의도 해안도로 앞에서 보면 작은 섬 한쪽이 영락없는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다. 20~30m 높이의 `얼굴` 쪽은 바위이고 `머리` 쪽은 나무가 머리카락처럼 휘날리는 듯한 모습을 한 `큰 바위 얼굴`이다.

 

신안군에 따르면 옛날 하의도 피섬(어은리)마을 뒷산에 고승이 암자를 짓고 덩치 큰 수사자를 키우며 수도에 정진했는데, 앞산에 큰 범이 살면서 자주 출몰해 가축은 물론 인명까지 해치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이에 수사자와 마을 젊은이들이 스님의 지휘 아래 사생결단으로 공격해 범을 생포했지만, 수사자는 심하게 상처를 입었고 스님 또한 중태에 빠졌다. 마을 사람들의 소생 기원에도 스님은 18일 만에 운명했고, 수사자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울부짖다 죽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주인을 섬기며 의롭게 죽어간 사자와 스님을 양지 바른 곳에 안치하기로 하고, 관을 땅에 묻으려 할 때 하늘에서 사천왕이 내려와 스님과 사자를 바위섬에 안치하라는 부처님의 명을 받고 왔다면서 시신을 안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뒤를 쫓다 보니 하늘에서 "때가 되면 온 천지를 평안케 할 큰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소리와 함께 사천왕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사라졌다는 전설이 하의도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2.우이도의 전설

 

아주 오랜 옛날, 언덕 남쪽의 돈목마을 청년과 북쪽의 성촌마을 처녀가 사랑에 빠졌다. 젊은 연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날마다 이 언덕에서 만났다.

 

둘의 사랑이 깊어만 가던 어느 날, 파도 심한 밤에 청년이 나타나지 않았다. 언덕에서 며칠을 기다리던 처녀는 연인이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음을 알게 된다. 상심한 처녀는 결국 파도치는 바다로 뛰어들고 말았다.

 

주민들은 남자는 죽어서 바람이 되었고, 여자는 죽어서 모래가 되었다고 말한다. 두 연인은 자신들이 사랑을 쌓아가던 그 언덕에서 바람과 모래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3.비금도 떡메산의 전설

 

옛날에 큰 위 산이 공중에 떠오는데 그 산의 바위 위에는 장군이 말을 타고 서 있었다.원래 그 산은 비금 용소리에 내려 앉을려고 했던 것이나 용소리에 채이르기 전 도고리와 가산리 중간쯤 이르렀을 때 마침 아이난 여인이 피묻은 속옷을 빨고 있다가'떠 온다 떠 온다 떡메산' 하고 소리쳤다.
 

그랬더니 여기에 부정을 탄 공중에 떠 있던 산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내려 앉아 버렸다.


그것이 지금의 떡메산이다.지금도 그 산의 바위 위에는 장군이 두던 바둑판이 새겨져 있으며 우산처럼 생긴 우산 바위 장군의 신자욱이 남아있는 신바위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4.고운정의 전설

 

고운 최치원이 12살때 당나라로 가던 중 식수가 떨어져 비금도에 들렀다한다. 그 때 비금도에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 주민들이 곤궁에 빠져 있었다.고운이 주민들에게 수도리 뒷산 봉우리를 파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하여 마을 주민들이 팟더니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샘을 고운정이라고 부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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