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전설 투수 내공최대!

메이저리그 전설 투수 내공최대!

작성일 2008.10.17댓글 2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메이저리그 전설 투수를 찾고 싶습니다&& 듣기엔 5명? 이라던데..

제가 야구에 관심이 많은지라^^

역대 메이저리그 투수 5명을 찾고 싶어요&&

글구 그 투수들이 던지는 공의 종류도 알고싶어요

예): 슬라이더 사이드암 직구 너클볼 이런거...

부탁드리고요 내공냠냠이나 따른 홍보는 올리지 말아주세요&& 정말 부탁드릴게요^^ㅠㅠ

아 그리구 그 전설의 메이저 투수들 5명 중에서 렌디 존스 형님도 들어있다고 들었어요~

제우상이신..... 노장이신데도 아직까지 메이저에서 뛰시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ㅎㅎ

그런데..... 렌디존스 형님이 던지는공은 뭔지 모르겠어요 ㅠㅠ 존스 형님이 던지는 공 좀 알려주세요

부탁드릴게요 ㅎㅎ


#메이저리그 전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랜디존슨의 주무기는 208cm에 달하는 신장에서 쓰리쿼터형식으로 뿌리는 160km에 가까운 직구와

140km의 슬라이더입니다

존슨의 이 슬라이더와 포심패스트볼은 빌리와그너와 그외 여럿의 투수들에게이어져 새로운 삼진공식이 되었죠

 

 

그리고 제가 임의로 선정한 가장 위대한투수 5인입니다

 

 

덴튼 트루 사이 영(Denton True Cy Young)은 1890년부터 1911년까지 다섯 개의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 팀에서 활약했던 선수이다. 그는 메이저리그 통산 22년의 프로 생활 기간동안 수많은 기록을 수립했으며, 그 중 몇몇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사이 영은 511승을 올렸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승수이며 2위 월터 존슨과는 94승 차이가 난다.

메이저리그에 끼친 사이 영의 영향력을 기리는 의미에서, 메이저리그는 미국 프로야구 양대 리그에서 가장 효과적인 투구를 선보인 투수 1명씩을 뽑아 사이 영 상을 수여하고 있다. 1939년 사이 영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프로로 뛰는 동안 다섯 시즌동안 30승 이상을 올렸고, 열 시즌에 걸쳐 20승 이상을 올렸다. '근대 야구'에서 처음으로 나온 완전 경기을 포함하여 세 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승수 외에도 사이 영은 최다 이닝 투구(7,355이닝), 최다 선발출장(815경기), 최다 완투(749경기), 최다 완봉승(76회) 기록 보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패배(316패)를 기록, 푸드 갤빈과 함께 300패 이상을 기록한 역대 유이한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사이 영의 사후(死後) 44년이 흐른 1999년 스포팅 뉴스 논설위원들은 사이 영을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 중 14위로 꼽았다. 같은 해 야구 팬들은 사이 영을 메이저리그 20세기 최고 선수팀 일원으로 지명했다.

[편집] 어린 시절

영은 오하이오 주 동부에 있는 마을 길모어에서 태어났다. 시골 농가에서 자랄 때 그는 덴트 영으로 불렸다. 때때로 '농부 영', '농사꾼 소년 영'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은 6학년까지만 학교를 다니고 학업을 중단했다.

[편집] 프로 전적

사이 영은 1889년 마이너리그 프로 팀인, 오하이오 캔턴 팀(트리 스테이트 리그 소속)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영은 입단 테스트에서 스카우터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영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속구로 관람석 보드를 거의 깨버릴뻔 했어." 당시 사이 영의 공을 받았던 포수는 그의 공이 매우 빠르다는 뜻에서 '사이클론'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기자들은 그 이름을 '사이'로 줄여서 불렀다. 이후 '사이'는 영의 남은 일생 동안 그를 따라다니는 애칭이 된다. 영은 캔턴 팀에서 일 년 간 활약하면서 15승 15패를 기록했다.

당시 내셔널 리그의 프랜차이즈 팀들은 실력 있는 선수를 원했고, 영은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와 연봉 500달러에 계약했다. 스파이더스는 아메리칸 리그 소속이었지만 영과의 계약 1년 전 내셔널 리그로 옮겨온 팀이었다.

1890년 8월 6일 메이저리그 첫 등판에서 영은 3안타를 허용했다. 영이 스파이더 팀에 있는 동안 치프 짐머가 다른 포수들보다 더 자주 그의 공을 받았다. 저명한 야구 통계학자 빌 제임스는 역사상 모든 배터리 중 짐머가 영과 가장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었음을 알아냈다.

일찍이 영은 역사상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 중 한 명이었다. 구속 측정기가 없던 시절 그의 공이 얼마나 빨랐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빌 제임스는 포수 짐머가 영의 빠른 공으로 인한 통증을 줄이기 위해 종종 글러브 속에 비프스테이크 조각을 집어 넣었다고 기록했다. 영은 그 해 역투를 거듭했고 1890년 마지막 날 경기 더블헤더에서는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투수가 된다. 신인 첫 해 영은 팀 내 최고의 투수였다.

영이 프로에 데뷔한 지 몇 주 안 되어, 당시 시카고 컵스의 유명한 감독이자 선수였던 캡 앤슨은 그의 능력을 점찍었다. 앤슨은 스파이더스 감독 거스 쉬멜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경험이 너무 부족해서 당신 팀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제대로 가르치면 몇 년 내로 그를 제대로 된 투수로 키울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실력에 비해 비싼 값이기는 하지만, 영을 1,000달러에 우리 팀에 주십시오." 여기에 쉬멜즈는 이렇게 대답했다. "캡 감독, 돈은 필요 없습니다. 영은 우리가 데리고 있을 겁니다."

영의 프로무대 데뷔 2년 후 내셔널 리그는 투수판에서 타석까지 거리를 종전(1881년부터 썼던 기준) 15미터에서 18.44미터로 늘렸다. 스포츠 저널리스트 랍 네이어는 사이 영, 아모스 루시, 주엣 미킨 등의 공이 타자들에게 너무 빠르게 느껴졌기 때문에 이런 조치가 취해졌다고 했다.

사이 영은 1892년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냈는데, 리그 최다 36승에 평균자책점 1.93, 9완봉승을 기록했다. 오늘날 마이너 리그처럼, 그 당시 내셔널리그는 1892년부터 스플릿 시즌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 해 전반기 우승은 보스턴 비니터스가 따 냈고, 스파이더스는 후반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후반기 스파이더스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스는 비니터스에게 시리즈 전적 5대 0으로 완패했다. 영은 시리즈에서 세 번 완투하였으나 2만을 기록한다. 완봉 경기도 한 번 있었지만 그 경기는 0대 0으로 종료되었다.

1895년 스파이더스는 월드 시리즈 전에 치르는 템플 컵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맞붙게 된다. 여기서 영은 3승을 기록하면서 팀을 4승 1패로 월드 시리즈로 이끄는 데 기여한다. 이 시점에서 영은 팔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구종에 느린 공을 섞어 던지기 시작하게 된다. 오늘날 이 공은 체인지업으로 불리고 있다.

1896년 7월 영은 필라델피아 필리스 선수 에드 델러헌티에게 9회 투아웃 상황에서 안타를 허용하여 노히트 경기를 놓친다. 1897년 9월 18일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자신의 프로통산 첫 노히트 경기를 달성했다. 영은 볼넷을 한 개도 내주지 않았지만 스파이더스 동료들은 수비에서 네 개의 실수를 범하여 영의 완전 경기를 무산시켰고 영은 노히트에 만족해야 했다. 실수 네 개 중 원래 하나는 안타로 기록되었으나, 당시 클리블랜드 3루수는 8회 종료 후 기자석에 안타가 아니라 자신이 실수를 범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고, 기록은 정정되었다. 영은 동료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게임을 1안타 경기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1899년 시즌 전 스파이더스 팀의 구단주 프랭크 로빈슨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팀을 사들여서 두 개의 팀을 동시에 거느리게 되었다. 브라운즈는 팀 이름을 퍼펙토스로 바꾸었고, 클리블랜드 선수들로 퍼펙토스 엔트리를 채워 넣었다. 시즌 시작 몇 주 전 스파이더스의 실력 있는 선수들은 세인트 루이스로 옮겨 갔으며, 여기에는 미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 세 명(사이 영, 제시 버켓, 바비 월러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퍼펙토스는 그 해 134패를 기록하게 된다.

영은 세인트루이스에서 2년을 뛰었고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포수 루 크리거를 찾았다. 두 사람은 이후 10년간 호흡을 함께 맞추게 된다.

1901년 아메리칸 리그가 내셔널 리그와 리그전을 시작했다. 그 해 영은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아메리칸리그 보스턴 아메리칸스와 연봉 3,500달러에 계약한다. 영은 이후 1909년까지 보스턴에서 뛰게 된다.

아메리칸 리그로 이적한 첫 해 영은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함께 같은 팀으로 온 포수 크리거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영은 리그 다승왕, 삼진왕 및 평균자책점왕을 차지하며 투수부문 아메리칸리그 삼관왕을 차지한다. 그 해 그는 아메리칸 리그 사상 처음으로 완전 경기를 달성한다. 영은 1901년 팀의 승수 중 42퍼센트를 책임졌는데 이는 70년 후 스티브 칼튼이 필리스의 59승 중 27승 10패 기록을 내며 경신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는 기여도였다.

1902년 2월 시즌 시작 전 영은 하버드 대학에서 투수 코치로 봉사했다. 학력은 6학년 졸업에 불과한 영이 하버드생들을 가르치는 상황은 보스턴 신문기사로 대서특필되었다.

1903년 보스턴 아메리칸스는 근대 야구사 최초의 월드 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맞붙게 된다. 1차전 선발로 나온 영은 월드시리즈 역사에서 최초로 공을 던진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파이어리츠는 1회 4점을 얻고 영은 패전 투수가 된다. 영은 뒤이은 등판에서 두 번 선발승을 거두면서 좋은 모습을 보인다. 영은 월드시리즈에서 네 번 등판하여 2승 1패 1.85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면서, 보스턴이 파이어리츠를 5승 3패로 물리치는데 기여한다.

1904년 5월 2일 보스턴의 1안타 완봉패 경기 후 필라델피아 유명투수 루브 와델은 영과 맞대결을 하면 자신은 보스턴을 다시 한번 1안타로 막을 수 있다고 도발했다. 사흘 후 영은 와델과의 맞대결에서 완전 경기를 달성한다. 이는 아메리칸리그 사상 최초의 완전경기이었다. 와델은 스물 일곱번째로 마지막 상대 타자였는데, 그가 친 공이 뜬공으로 잡히면서 영은 와델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맛이 어때, 시골뜨기야?"

와델과의 전투는 영의 투쟁심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와델 간의 완전 경기는 그 중 백미였다. 영은 최다이닝 연속무실점 기록최다이닝 연속 무피안타 기록을 세운다. 그는 24.3이닝동안 73명의 타자를 맞아 한 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고, 이후 안타를 허용한 다음에도 20.1이닝동안 더 무실점 행진을 이어갔다.

사이 영 이전 완전 경기를 달성한 선수는 단 두 명 뿐이었다. 1880년 시즌 중 리 리치먼드존 워드가 5일 간격으로 각각 완전 경기를 달성했다. 그러나 당시 리치먼드와 워드가 있던 환경은 영과는 매우 달랐다. 그 때 투수판은 타석에서 더 가까웠고, 8개를 던져야만 볼넷으로 인정되었으며, 투수들은 사이드암으로만 던졌다.

1년 후 1905년 7월 4일 루브 와델은 20이닝 맞대결에서 영을 맞아 승리를 거둠으로써 복수에 성공한다. 영은 13이닝 연속 무실점 투구를 보였으나 마지막 회에서 비자책 2점을 내준다. 영은 이 경기에서 볼넷을 한 개도 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내게 있어서 그 경기는 내가 등판했던 경기 중 가장 멋진 게임이었다." 이후 1907년 영과 와델은 다시 13이닝 무실점 맞대결을 기록한다.

1908년 6월 30일 영은 통산 세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당시 영의 나이는 41세 3개월로, 이는 82년 후 43세 놀런 라이언이 기록을 깨기까지 역대 최고령 등판 노히트 노런의 기록이었다. 영은 이 경기에서 선두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낸 것을 제외하면 완벽한 투구를 펼쳤다. 볼넷으로 나간 타자는 도루에 실패했고 이후 한 명의 주자도 1루를 밟지 못했다. 이 당시 영은 리그에서 두번째로 나이 많은 선수였으나, 여전히 최고의 투수였다. 노히트 게임을 하기 한 달 전에도 그는 28명 타자를 상대로 1안타만 허용하는 경기를 펼친 적이 있었다.

1908년 8월 13일 리그는 '사이 영의 날' 행사를 열었다. 이 날 아메리칸 리그 경기는 치뤄지지 않았고, 올스타 선수들은 보스턴에 모여 레드 삭스 팀과 사이 영을 상대로 경기를 벌였다.

영은 1909년 그의 프로 인생 절반을 뛰었던 클리블랜드(아메리칸 리그, 클리블랜드 냅스)로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1911년 마지막 해 영은 시즌 절반을 각각 냅스와 보스턴 러슬러스에서 뛰었다.

1911년 9월 22일 영은 피츠버그 파이러츠 선발 베이브 애덤스와의 맞대결에서 1대 0 완봉승을 따냈는데 이는 그의 마지막 승리였다. 2주 후 영의 906번째 프로생활 마지막 경기는 본인에게 그리 만족스럽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상대한 여덟 명의 타자들은 3루타 한 개, 단타 네 개, 2루타 세 개를 영에게서 뽑아냈다.

[편집] 사이 영이 남긴 것들

1908년 영의 투구 모습을 찍은 사진과 그것을 본따서 그린 그림.

영은 1911년 시즌을 마치고 통산 511승을 뒤로 하고 은퇴했다. 그의 승수는 역대 투수들 중 최고이다. 당시 2위는 푸드 갤빈으로 364승을 기록 중이었다. 417승으로 사이 영에 이어 통산 승수 2위를 훗날 기록하게 될 월터 존슨은 당시 네번째 시즌을 치르고 있었다. 존슨은 이후 통산 탈삼진에서 사이 영을 제친다.

사이 영은 미국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십 년 남짓 활약했다. 그는 1876년 내셔널 리그가 생겨났을 때 멤버였던 캡 앤슨을 상대로 공을 던졌고, 1930년까지 선수 생활을 한 에디 콜린스와도 투타 대결을 펼쳤다. 영이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 투수들은 언더핸드 폼으로 공을 던졌고, 파울스트라이크 숫자로 치지 않았다. 영이 데뷔한 지 4년만에 투수판은 이전보다 3미터 뒤로 물러났다. 영은 프로 6년차까지 글러브를 사용하지 않았다.

영은 리그에서 다섯 번 다승왕을 차지했고(1892년, 1895년, 1901년부터 1903년까지 3년 연속) 2위는 두 번 기록했다. 본인 최다승 기록은 1892년의 36승이었다. 15년간 20승 이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공동 2위 크리스티 매튜슨워렌 스판보다 2년이 많다. 평균자책점에 있어서 리그 1위 2회(1892년 1.93, 1901년 1.62)에 세 시즌에 걸쳐 2위를 차지했다. 영은 여섯 번 2.00 미만 평균자책점을 찍었으나 데드볼 시대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데뷔 후 4년 연속 400이닝 이상씩을 투구했지만 1902년까지 리그 최다이닝을 투구한 적은 없었다. 영은 아홉 해에 걸쳐 매해 40경기 이상 완투했다. 리그 탈삼진왕은 두 번 차지했고(1896년 140개, 1901년 158개) 리그 최다 완봉승은 아홉 번 차지했다.

구속이 줄어들면서 영은 뛰어난 제구력으로 타자들을 제압했다. 영은 이렇게 회고했다. "혹자는 어떤 것보다 변화구를 잘 구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공을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는 젊은 투수는, 제구력과 변화구 구사력을 둘 다 잡으려 하는 투수보다 훨씬 빨리 좋은 변화구 투수가 될 수 있다. 변화구는 제구력에 붙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1893년부터 1906년까지 14년 연속 사이 영은 리그에서 9이닝당 가장 적은 볼넷만 허용한 선수였고, 두 번의 시즌은 두 번째로 적은 볼넷 비율을 기록했다. 22년간 프로에서 활약하면서 영은 이 분야에서 6위 이하로 떨어진 적이 두 번밖에 없었다. 영이 죽고 난 한참 뒤까지도 (WHIP) 개념은 없었으나, 소급하여 적용할 경우 영은 일곱 시즌에 걸쳐 리그에서 가장 낮은 휩을 기록했고 또다른 일곱 시즌동안 2위 혹은 3위를 차지했다.

뛰어난 제구력 외에도 그는 부상을 모르는 철완이었다. 영은 1891년부터 1909년까지 19년 연속 리그내 최다이닝 투구 10걸 안에 꾸준히 들었고, 14년에 걸쳐 다섯 손가락 내에 들 정도로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프로인생 초기 10년 동안, 영은 하루 동안 연속 두 경기에 등판한 적도 많았다.

습관적으로, 영은 춘계 훈련 시기를 제외하고는 연습투구를 하지 않았다. 영은 이렇게 말했다. "공을 너무 많이 던져서 팔이 지친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굳이 혹사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영은 경기를 하기 전의 자세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대부분 투수들처럼 10분, 15분 전 연습투구를 한 적이 없다. 3~4분 동안 몸을 풀고, 5분이 되면 투수판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불펜 투구를 한 적도 전혀 없다. 나는 많은 구원등판에서 내 임무를 잘 수행했지만, 대기석에서 곧장 투수판으로 나갔다. 연습투구 몇 개로 등판준비를 끝냈다. 그러고도 제구력에 문제가 없었다. 내 목표는 타자들이 내 공을 맞춰서 투구수를 최대한 절약하는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나는 매일매일 등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은 시즌 종료 후 벌목 등 농장 잡일에 전념했고 이로써 44세까지 투구에 필요한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은퇴한 후에도 영의 팔은 싱싱했지만 그의 체중은 불어나 있었고 더 이상 투수로 뛰기는 힘들어졌다. 은퇴 4년 전의 기간 중 3년 동안 그는 리그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였다.

최초 사이영상 수상자 투표는 1956년에 있었고 그 영광은 브루클린 다저스돈 뉴컴에게 돌아갔다. 원래 사이영상은 양대 리그를 통합하여 한 명에게만 주는 것이었다. 1967년 사이영상은 각 리그 당 한 명씩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이 영은 보스턴에서 선수 생활을 한 기간 중 따낸 통산 승수에 있어,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로저 클레멘스와 함께 192승으로 공동 1위이다.

 

 

월터 존슨 (Walter Perry Johnson)
-------------------------------------------------------------
△ 통산 417승 (역대2위)
△ 1913,18,24년: 투수부문 트리플크라운
△ 통산 3,508탈삼진 (역대7위)
△ 통산방어율: 2.17
-------------------------------------------------------------
월터 존슨은 메이저리그사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 중 하나로 꼽힌다.

통산 승수가 416승으로 사이영에 이어 통산2위이나, 그가 거둔 416승은 몸담았던 팀은 만년하위팀이라 그의 통산기록은 더욱 값진 것이다.

416승중 110승이 완봉승인데 통산 완봉부문에서는 단연 1위로 사이영 조차도 그를 앞지르지 못했다.

그의 본명은 Walter Perry Johnson 이며 "Big Train"이라는 애칭으로도 유명하다. 1887년 캔사스의 Humboldt 에서 태어난 그는 1907년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21년간 워싱턴 시내터스에서 뛰면서 통산 416승과 통산방어율 2.17을 기록했다. 1913시즌엔 56이닝 무실점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 기록은 후일 다저스의 명투수 돈 드라이스데일에 의해 1968년에야 깨졌다.

11시즌을 1점대의 환상적인 방어율을 기록했고, 리그 탈삼진왕 12차례, 다승왕 6차례, 방어율왕 5차례를 기록했고, 통산 방어율에서 3000이닝이상을 투구한 선수들중에는 단연 1위이며, 투수전의 백미라고 하는 1:0완투승을 36차례나 거뒀다.

존슨의 투구 스타일은 강속구를 바탕으로 하는 정통파로 낙차큰 좋은 커브 까지 갖고 있었다. 몸을 한번 뒤로 제쳤다가 쓰리쿼터 스타일로 던지는 투구폼을 구사했다. 워낙 부진한 팀성적때문에 그의 뛰어난 투구에도 불구하고, 월드시리즈에서 그가 활약한 것은 1926시즌, 그의 나이37세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해 월드시리즈에서 최종전 승리투수가 되면서 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월터 존슨을 메어지리그사의 가장 위대한 투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사이영이 통산 511승을 거두었다고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메이저리그의 제도와 규칙이 정비된 1903년 이전부터 였다.

즉, 규칙과 제도가 완비된 오늘날과 같은 메이저리그가 정착된 20세기 이후에 활동한 투수들중에는 그를 가장 훌륭한 투수로 꼽고 있는 것이다.
-------------------------------------------------------------
저명한 메이저리그 칼럼리스트 레더드 코페트는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투수로 놀란 라이언을, 가장 완벽했던 투수로 클리블랜드 그로버 알렉산더(피트 알렉산더)를 꼽았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가장 위대한 투수'는 월터 존슨이었다.

존슨은 1907년부터 27년까지 워싱턴 세너터스(현 미네소타 트윈스)에서만 21년(풀타임 19시즌)을 뛰며 역대 최다승 2위(416), 방어율 1위(2.17 · 3천이닝 이상), 탈삼진 8위(3,412), 완봉승 1위(110), 완투경기 1위(531)의 화려한 업적을 남긴 투수다.

최다승투수인 사이 영에는 106승이 모자라지만, 영은 피칭이 한결 여유로웠던 1890년대에만 267승을 올렸다. 또한 영이 대체로 강팀에 몸을 담았던 반면, 워싱턴은 존슨이 뛰었던 동안의 대부분을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존슨은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1910년부터 19년까지의 10년 동안 264승을 올렸는데, 이는 팀이 10년 동안 기록한 승수의 35%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존슨이 당한 65번의 완봉패와 26번의 1-0 완봉패는 모두 메이저리그 최다기록에 해당된다.

놀란 라이언이 5,71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고 로저 클레멘스(뉴욕 양키스)와 랜디 존슨(애리조나)이 모두 3,500탈삼진을 넘어선 마당에 존슨이 기록한 3,412삼진은 대수롭지 않게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슨이 활동하던 시절은 타자들이 삼진을 죽기보다 싫어하던 시절이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첫번째 3천탈삼진 투수인 존슨은 생애 11번의 탈삼진왕을 차지했는데, 1912년부터 19년까지는 9년 연속으로 1위에 올랐다.

존슨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직구를 던졌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빅 트레인(Big Train)'은 그의 공이 들어올때 큰 기관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타자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사이드암스타일로 유난히 긴 팔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타자들은 존슨의 공을 더욱 빠르게 느꼈다.

존슨은 첫 15년 동안 오로지 직구만을 던지다 어깨부상을 당한 이후에야 커브를 섞기 시작했다. 디트로이트의 외야수 도니 부시는 "존슨이 처음부터 커브를 던졌다면, 불패의 투수가 됐을 것이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피칭실력 뿐만 아니라 성격적으로도 야구계의 진정한 신사였다. 당시 모든 투수들이 빈볼과 몸쪽 위협구를 피칭의 한 수단으로 삼았지만, 존슨은 타자들이 자기의 공에 맞을까봐 몸쪽공을 던지지 않았다. '그라운드의 여우' 타이 콥은 이를 이용해 타석에 바짝 붙어 존슨을 상대했다. '백기사(White Knight)' '월터경(Sr. Walter)'은 그의 또 다른 별명들.

1887년 캔자스주 험볼트에서 태어난 존슨은 세미프로팀에서 뛰던 1907년 워싱턴으로 스카우트됐다. 풀타임 첫 해였던 1908시즌의 막판에는 4일 동안 3개의 완봉을을 거두며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뽐냈다. 이듬해 존슨은 최악의 득점지원으로 25패를 당했다.

1910년 존슨은 25승 방어율 1.36으로 자신의 전성기를 열었다. 존슨은 이후 10년 연속 20승, 7년 연속 1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 존슨이 1912년에 거둔 16경기 연속 승리는 아직도 아메리칸리그의 최고기록으로 남아있다.

1913년은 존슨의 최고시즌이었다. 36승7패 방어율 1.14 303탈삼진에 29완투승, 11완봉승, 1안타경기 5회로 첫번째 MVP를 수상했다. 이 해 존슨은 55⅔이닝 연속무실점의 대기록을 세웠다. 훗날 돈 드라이스데일과 오렐 허샤이저가 이를 넘어서긴 했지만, 드라이스데일과 허샤이저의 기록은 심판진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1920년에는 어깨부상으로 11년 연속 20승에 실패했지만, 갑자기 등판한 포스턴 레드삭스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노히트노런을 따내는 기쁨을 맞이했다. 2루수 실책만 없었다면 퍼펙트게임이었던 경기였다.

1924년 만 36세가 된 존슨은 트리플크라운으로 두번째 MVP를 차지하며, 팀을 월드시리즈에 진출시켰다. 존슨은 두차례의 선발등판에서는 부진했지만, 최종 7차전에서 구원투수로 나와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워싱턴은 연장 12회말의 극적인 끝내기 불규칙바운드안타로 뉴욕 자이언츠를 꺾었다.

이듬해 워싱턴은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존슨은 1,4차전에서 승리를 따냈지만, 7차전에서는 2루수 로저 페킨포의 결정적인 수비실책으로 패전의 멍에를 썼다. 경기가 끝난후 존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페킨포를 찾아가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준 것이었다.

1927시즌을 끝으로 현역생활을 접은 존슨은 워싱턴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감독을 맡기도 했다. 존슨은 1936년 타이 콥, 베이브 루스, 호너스 와그너, 크리스티 매튜슨과 함께 최초로 명예의전당에 헌액된 5명으로 기록됐다.

 

 

 

 

 

 

워렌스팟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21년간 통산 363승245패,방어율 3.09를 기록한 전설적인 왼손 투수.

애틀란타 브레이브스(Atlanta Braves)의 투수로 활약하며 13차례 20승과 2번의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으며, 4년연속 내셔널리그 최다탈삼진을 기록했다. 그의 등번호 21번은 현재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영구결번으로 남아있다.

1957년 사이영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1973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의 활약상을 기리기 위해 오클라호마 스포츠박물관은 1999년부터 매년 최고 왼손투수에게 '워렌스판상'을 수여하고 있는데, 1999년 1회부터 2002년까지 랜디 존슨이 연속 4회 수상했다.

 

 

 

 

사첼페이지

 


[ = 세인트루이스 김용철 통신원] 통산 2100승, 단일 시즌 60승, 노히트 노런 55게임, 42살의 메이저리그 신인 등등 수많은 믿기 어려운 기록을 남긴 전설의 투수 사첼 페이지가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1906년 7월 7일생인 페이지는 철저한 몸 관리와 나이를 잊은 투구로 여러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페이지의 기록은 너무나도 놀라워 지금까지도 여러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누구도 정확한 기록을 알지 못한다는 것. 1920년대부터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한 그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남아있는 그의 메이저리그 기록은 1948년 42번째 생일날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것과 최초로 월드시리즈에 출전한 흑인 투수라는 점, 그리고 1965년 60세 나이로 선발 등판해 3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은 정도이다. 통산 메이저리그 기록은 28승 31패 4세이브 방어율 3.29. 45살이던 1952년에는 12승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페이지의 나이는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13남매를 두었던 페이지의 어머니는 자녀들의 생일을 모두 기록해 가족 족보에 기록해 놓았다. 당시만 해도 페이지의 생년은 1904년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서 기르던 염소가 족보의 일부를 뜯어 먹었고, 결국 출생신고를 다시 하는 과정에서 1906년으로 연도가 바뀌었다. 따라서 페이지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실제 나이는 44살이고, 마지막 등판도 62세가 맞다.

페이지가 오랜 기간동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천적인 요인보다는 끝없는 자기 관리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그의 형제들은 대부분 60세를 전후해 사망했다. 페이지는 '차가운 물은 안마신다', '매일 3회 이상 스트레칭을 한다', '술 담배 여자는 모두 멀리한다' 등의 수칙을 적은 17가지 카드를 가지고 다니며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다.

페이지는 생전에 "선수들은 나이 때문에 야구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야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늙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과연 앞으로 페이지 같은 선수가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가장 강렬했던 5년' 샌디 쿠팩스

20세기 최고의 왼손투수는 누굴까?

전문가들의 선택은 레프티 그로브나 워렌 스판, 또는 스티브 칼튼이 될 것이다. 하지만 1999년 말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에서 실시했던 투표에서 팬들이 고른 최고의 왼손투수는 바로 샌디 쿠팩스였다.

쿠팩스의 통산 방어율은 역대 왼손투수 중 최고인 2.76. 하지만 시대와 홈구장의 차이를 반영한 '조정 방어율'로 고치면 그로브와 랜디 존슨(애리조나)보다 못하다(그로브 148, 존슨 143, 쿠팩스 131). 165승(87패)의 통산 승수는 스판(363승)의 절반에도 못미치며, 명예의전당 헌액기준인 300승에도 턱없이 모자르다.

그러나 쿠팩스는 당당히 역대 최연소로 명예의전당에 입성했다. 그리고 12년간의 메이저리그 생활중 그를 명예의전당으로 이끈 것은 단 5년간의 강렬함이었다.

쿠팩스는 1962년부터 66년까지 5년간, 111승34패 방어율 2.02 승률 .766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이 기간 동안 쿠팩스는 방어율을 5연패했으며, 탈삼진과 다승에서는 각각 3차례 1위에 올랐다. 3번의 '트리플 크라운'과 사이영상(당시 사이영상은 양대리그를 통틀어 1명) 1번의 MVP를 차지했고, 65년까지 1차례의 퍼펙트게임을 포함해 4년 연속으로 노히트노런을 따냈다. 또한 월드시리즈에서 거둔 4승(3패) 중 3승이 완봉승이며, 월드시리즈 통산 방어율은 0.95에 불과했다.

이 5년 동안 쿠팩스는 소속팀 LA 다저스의 팬들 뿐만 아니라 모든 미국 스포츠팬들의 우상이었으며, 그가 남긴 강렬한 인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윌리 메이스, 배리 본즈와 함께 자이언츠의 '3대 영웅' 중 1명인 윌리 매코비는 밥 깁슨, 스판, 칼튼, 톰 시버, 돈 드라이스데일 같은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제치고 쿠팩스를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투수로 꼽았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리더 윌리 스타겔은 "쿠팩스의 공을 치는 것은 포크로 커피 떠먹기"란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쿠팩스의 구질은 강력한 직구와 엄청난 낙차의 커브 단 2가지. 직구와 커브를 던질 때의 투구폼이 현격하게 차이났기 때문에 타자들은 무슨 공이 들어올지를 미리 알고 있었지만, 대처를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쿠팩스는 팔꿈치 관절염이 고질병이 된 후 투구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맞춰잡는 피칭을 했지만, 타자들은 그 조차도 맞추지 못하며 그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유태인인 쿠팩스는 1935년 뉴욕 브루클린의 유태계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친구 중에는 토크쇼 진행자로 유명한 래리 킹도 있다. 마침 1935년은 또 한명의 위대한 투수인 밥 깁슨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쿠팩스-깁슨은 월터 존슨-피트 알렉산더(1887년생), 톰 시버-스티브 칼튼(1944년생), 그레그 매덕스-톰 글래빈(1966년생)와 함께 역사상 최고의 '동갑 듀오' 중 하나다.

고등학교 시절 쿠팩스는 농구팀의 최고 스타이자 야구팀의 후보 1루수였다. 쿠팩스는 농구 장학금을 받고 신시내티대학에 진학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꿈은 건축가였다. 하지만 서부여행을 가기 위해 야구팀에 가입하면서 그의 운명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예 야구선수로 진로를 수정한 쿠팩스는 만 19세였던 1955년,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인 1만4,000만달러의 보너스를 받고 고향팀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에 입단했다.

쿠팩스는 당시의 보너스 규정에 따라 메이저리그에 직행하게 되면서 마이너리그에서 체계적인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그해 8월에는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탈삼진 14개를 곁들인 완봉승을 따내며 가능성을 내비쳤다.

1958년 11승을 올리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자리를 잡은 쿠팩스는 이듬해에는 경이로운 삼진 퍼레이드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샌프란시스코전에서 탈삼진 18개를 기록, 메이저리그 타이기록(밥 펠러)을 세웠고, 다음 선발등판에서 13개로 '2경기 신기록', 그 다음경기에서는 다시 10개를 추가해 '3경기 신기록'을 이어나갔다. 쿠팩스는 1960년 역시 175이닝에서 197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그러나 58년부터 60년까지의 3년간 쿠팩스가 올린 승수는 27승에 불과했다. 심각한 컨트롤 불안 때문이었다. 3년간 쿠팩스는 487이닝에서 297개 볼넷을 허용, 무려 5.48이라는 9이닝당 볼넷허용율을 기록했다.

1961년은 그의 운명이 두번째로 바뀐 해다. 참다 못한 월터 올스턴 감독이 백업포수인 놈 셔리에게 쿠팩스의 개인코치 역할을 맡긴 것. 셔리의 도움으로 인해 쿠팩스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던져도 직구스피드가 전혀 줄지 않음을 알아냈다. 이밖에 셔리는 쿠팩스의 투구폼을 수정해줬으며, 커브의 그립을 바꾼 후 커브의 비중을 늘리게 했다. 쿠팩스가 구장내에서의 소음에서 자유롭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 해 쿠팩스는 18승(13패)와 함께 269개의 탈삼진으로 내셔널리그 왼손투수 신기록을 세웠으며, 풀타임 이후 가장 좋은 3.52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마침내 '쿠팩스의 시대'가 열렸다.

1962년 쿠팩스는 왼팔의 혈행장애로 인해 중지손가락이 마비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26경기에 선발등판, 14승7패 방어율 2.54를 기록, 힘찬 발동을 걸었다.

1963년은 '건강한 쿠팩스'의 진가가 나타난 해였다. 25승5패 방어율 1.88로 첫번째 20승과 1점대 방어율을 기록했으며, 첫 '트리플 크라운'으로 첫 사이영상과 MVP를 싹쓸이했다. 쿠팩스는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첫 5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등 탈삼진 15개를 곁들인 완봉승을 따냈고, 4차전에서도 2-1 승리를 이끌어 팀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선물했다.

'월드시리즈의 투수' 화이티 포드는 쿠팩스와의 2차례 대결로 인해 처음으로 단일 월드시리즈에서 2패를 당했으며, 양키스의 케이시 스탱걸 감독은 이때부터 '쿠팩스 매니아'가 됐다. 또한 양키스 포수 요기 베라는 "그가 정규시즌에서 왜 5패나 당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겼다.

1964년 그의 운명이 세번째로 바뀌었다. 쿠팩스는 왼손타자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사이드암 커브'를 개발했다. 실제로 사이드암 커브는 정말 강력했다. 하지만 팔꿈치에 엄청난 무리를 줬고, 결국 관절염이라는 치명적인 고질병을 불러왔다. 쿠팩스는 아픈 팔꿈치를 참고 28경기에서 19승5패 방어율 1.74를 기록했다.

이듬해 다시 기력을 되찾은 쿠팩스는 26승9패 방어율 2.04로 두번째 트리플 크라운과 사이영상을 따냈다. 또한 382개의 탈삼진으로 루브 웨델(1904년 349개)의 종전 기록을 61년만에 경신했다. 현재 메이저리그 기록은 1973년 놀란 라이언이 세운 383개.

미네소타와의 월드시리즈. 하지만 1차전의 선발투수는 놀랍게도 쿠팩스가 아니었다. 1차전이 열리는 날이 모든 일을 쉬고 단식을 해야하는 유대교의 명절인 '욤 키푸르(속죄일)'와 겹치자 쿠팩스는 마운드 대신 예배당을 택했다. 쿠팩스는 대신 2차전에 나서 패전투수가 됐지만, 5·7차전에서 완봉승을 따내 다시 팀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선물했다.

당시 다저스에는 또 한명의 걸출한 투수인 돈 드라이스데일이 버티고 있었다. 드라이스데일이 최고의 터프가이였던 반면, 쿠팩스는 온화하고 공손한 성격으로 대조를 이뤘다. 역대 최고의 '좌우 원투펀치'인 그들은 1966시즌을 앞두고 공동으로 연봉투쟁에 나서 최초로 10만달러 연봉의 시대를 열었다.

1966년 쿠팩스는 27승9패 방어율 1.73으로 2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과 사이영상을 따내며 절정의 기량을 뽐냈지만, 이것이 그의 마지막 해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더이상 공을 던지면 팔을 영영 못쓰게 된다'는 사형선고를 받은 쿠팩스는 월드시리즈 2차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 쿠팩스는 마지막 등판경기에서 훗날 아메리칸리그의 마운드를 호령할 짐 파머가 최연소 월드시리즈 완봉승을 따내는 것을 지켜봤다.

은퇴 후 영화배우 리처드 위드마크의 딸과 결혼한 쿠팩스는 1972년 86.87%의 득표율로 역대 최연소 헌액자가 됐다.

쿠팩스가 과대포장됐다는 지적도 있다. 그가 최고투수로 대변신한 1962년은 마침 다저스가 '투수들의 천국' 다저스타디움을 개장한 해였으며, 그 이듬해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공격력 약화를 위해 마운드를 높히고 스트라이크존을 확대했다. 쿠팩스가 활동했던 시절 자체가 '투수들의 시대'로 메이저리그 평균방어율은 3점대 초반에 불과했다.

그러나 '쿠팩스의 5년'은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남을 만큼 너무도 화려했다. 정상의 자리에서 스스로 거액의 연봉을 포기하고 은퇴를 선택한 모습 역시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일단 5대인지는 몰라도요

 

사이영상 아시죠  그상이름이 사람이름 사이영에서 나왔고요 아.. 사이영밖애 기억이 안뜨내여;;

구질은 잘모르갰내여 커브,직구만 주구질 변화구발달이 덜됬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첼 패이지?   그리고 놀란 라이언  삼진 대단히 많죠 5천몇개인가

메덕스 제구의 제왕이죠

존스몰츠 슬라이더는 랜디와 비견됨

글레빈  매덕스,스몰츠와함깨 에틀란타를 투수왕국으로 만들어버렸죠

뭐이정도 알고있습니다 마무리라면.. 가니애,호프만,리베라 그정도

가니애는 150km가 넘는 직구에 채인지업..., 03인가 02년인가 기억이 잘안나는대

그때 세이브확률 100%기록하면서 ';;;; 어쨋든 무서운투수 채인지업 쩔고요

보통 마무리들은 채인지업은 필수품이어서.. ㅋㅋ 직구랑 섞어서 씀

호프만,리베라도 체인지업임

 

랜디존스는 슬라이더로 먹고살았죠 140km가 넘는 고속슬라이더애 그정도 꺽기면 그냥 스트라이크아웃

그리고 좌완에다가 직구가 153km이상이 그냥찍히니 그개 사람입니까 161km도 던진적있슴

그리고 키도 2m가 넘어서 초괴물임 제구도 못하는편이 아니고요  이닝당 삼진율이 아마 메이저 최고로 기억하고있습니다.

이정도답변 밖애못해서 ㅈㅅ합니다.

 

메이저리그 전설 투수 내공최대!

메이저리그 전설 투수를 찾고 싶습니다&& 듣기엔 5명? 이라던데.. 제가 야구에 관심이... 내 목표는 타자들이 내 공을 맞춰서 투구수를 최대한 절약하는 것이었다. 이것...

메이저리그 투수 최고의 시즌은?

... 167 모두 역대 1위 메이저리그 사상 최고의... 있는 최대 내공 25와 감사내공 역시 최대로... 등의 전설적인 투수들이 당시에도 전성기를 맞고 있었으나...

국내 투수 여러명과 그외 메이저리그...

... 제가 투수들과 선수들에 대해서 좀 알아볼려고... 내공은 가지고있는 80전부요 1. sk 와이번스 김광현 2. 삼성... KIA 타이거즈 최희섭:메이저리그에서 돌아와 아시아...

옛날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던 전설의...

... " 니그로리그에서 21연승을 거두는 등 전설적인 투수로 이름이 높았던 페이지는 41살의 늦은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물론 역사상 최고령 신인선수인...

메이저리그에 관한질문(내공)

... 메이저리그 전문가님들..부탁해욤~ ( 질문에 비해 내공이 적어서 지송합니다..걸수있는 최대내공이라서.....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전설적인 타자 루 게릭을...

야구 선수 (투수)

... 외국 투수 잘하는사람 답변좀요 내공 30 메이저리그에서 뛴 선수를 묻는거겠죠? 전설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니 저의 기준에서 전설이라 생각되는...

요즘 메이저리그에 대해서 (내공 20)

... ㅋㅋ 암튼 성의 있게 써 주시면 ㄳ내공까지 드리겠습니다.. #### 승엽이형 화이팅~~..ㅋㅋ 1. 요즘 메이저리그의... 해도 투수 최대의 영예인 사이영상을 받기는 어려울...

메이저리그 최대실점은???

... 메이저리그 한이닝에 가장많은 실점을 허용한 점수와 그점수를 허용한팀이 궁금합니다 답변주세욤 내공... Odul은 투수를 포기하고 타자로 전향을 선언하고 스스로...

이 상황에 맞는 메이저리그 팀이 있으면...

... 메이저리그 마니아 분들께서 가르쳐 주셨음 좋겠습니다. 1. 역사가 짧고 실력은... 놓고, 투수진에서는 복귀한 전설 로저 클레멘스, '미스터 올모스트' 마이크 무시나, 새로운...

선동열이 선발투수인가요? 내공(100)

... MLB선발투수 아닌가요??? 궁금하내요... 내공... 하면서 최대한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한 상태에서... 한국투수들이나 메이저리그 투수들이나 사실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