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차범근,
내 이야기 들어볼래?
70년대 한국축구는 아시아의 절대 강자였다.
그 중심에는 항상 차범근이 있어 가능했다.
그리고 목표는 월드컵 진출!
74년 서독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77년 박스(대통령)컵 개막전 말레이시아 전
약체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홈에서 1 : 4로 고전하고 있었다.
경기 종료 7분을 남겨놓고 나는 헤트트릭 기록했다.
그리고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또한번 플레이오프에서 호주에게 패하며
월드컵의 꿈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미 아시아를 호령하는 한국,
그러나 세계축구 앞에서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멀리서 지켜봐야 했던 월드컵
나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도전하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세계최고의 리그, 독일 분데스리가!
70년대 최고의 축구선수인 베켄바우어, 루메니게
그들은 분데스리가가 배출해낸 최고의 스타였다.
분데스리가는 나에게 꿈의 무대였다.
더이상 보이는 것이 없었다.
오직 세계를 향해 앞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다녀온 교수를 통해 분데스리가 진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검증되지 않은 한 동양인에 대한 의심으로 쉽지 않았다.
나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독일 프로팀으로부터 입단테스트가 왔다.
테스트라고?
아니!? 우리의 국민 영웅이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고?
당시 국민들은 최고의 선수에게
입단테스트라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또한 당시 국민들은 외국으로 떠나는 것은
나라를 버리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부딪히고 싶었다.
미지의 세계, 유럽!
그 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들고 싶었다.
힘들게 건너가 처음으로 밟은 독일땅
낯설었다. 그곳엔 모든 것이 달랐다.
준비한 것이라고는 유니폼과 축구화뿐이였다.
분데스리가 최하위인 다름슈타트팀 신인선수 테스트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로타 부흐만 코치가 나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즉시 6개월 단기 계약이 체결되었다. 당시 나이는 적지 않은 27세
그리고 데뷔전 경기를 치르는데 성공했다.
분데스리가는 달랐다.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였다.
세계의 벽을 눈앞에서 실감했다.
세계축구에서 발을 내딛는데 성공한 것이다.
독일언론에서도 동양에서 온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왔다.
한국으로부터 군대로 소환명령이 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국민영웅 차범근이라는 자산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1979년 1월 나는 소환되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꼭 독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에 당시 반대했던 국민들이 발벗고 나섰다.
국민들이 나의 포부에 동의했다.
스타를 키울 줄 모르는 한국사회에 대한 질타섞인 원망이였다.
"우리는 스타를 키울 줄 모르는가"
차범근을 다시 독일로 보내자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수백만청소년의 꿈을 깨지말라"
"교민의 희망과 긍지를 밟아서야 한다."
그리고 5개월간의 병역의무를 마친 후 나는
국민들에게 고별인사를 가졌다.
"저는 22일날 저녁 9시 독일로 떠납니다.
앞으로 가서 좋은 축구 기술을 배워서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의 축구발전을 위해서
기여하겠습니다."(1979년 6월)
다시 독일로 떠나는데 성공했다.
나는 한국의 대표였다.
1960년대 광부, 간호사 등 독일로 떠나던
대한민국의 유일한 수출품 코레아노.
그들의 희망은 또다른 코레아노,
바로 나, 차범근이였다.
나는 힘들게 타지에서 생활하는 그들을 모습을
보면서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1979년 8월 프랑크푸르트 입단했다.(당시 28세)
데뷔전 상대 도르트문트
스타팅 멤버로 75분간 종횡무진 활약하며 어시스트 기록했다.
최고 축구전문지 'KICKER' 선정 주간 베스트 11
세번째 경기 슈투트가르트 전
헤딩으로 결승골을 넣는데 성공한다.
네번째 경기 바이에른 뮌헨 전
선취골 기록
다섯번째 경기 최강호 보루시아 MG 전
선취골로 세경기 연속골 기록
이날 KICKER지 처음으로 <차붐>을 사용했다.
차붐에서 붐(Bum)은 독일어로
폭발할 때나는 소리였다.
그렇게 독일에서 차붐의 시대가 왔다.
9월 강호 함부르크 전, 첫 헤트트릭 기록!
내가 분데스리가에 진출하기 전에
한 일본인 선수가 먼저 진출해있었다.
바로 오쿠데라였다.
그리고 오쿠데라와의 맞대결, 쾰른 전
내가 선취골과 결승골을 넣으며 3 : 1로 승리했다.
오쿠데라는 7번의 헛발질을 해서 상당히 뿌듯했다.
(한마디로 개발랐음)
오쿠데라 "차범근은 매우 강하고 빠른 선수"
그리고 UEFA 컵 출전.
첫번째 경기에서 유럽의 디펜딩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를 맞아 선취골을 넣어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두번째 경기 AC밀란 전.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찬 강슛이 포스트 맞고 튀어나왔으나
골대 5초이상 흔들려 특종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3 : 2로 프랑크푸르트 승리)
당시 AC밀란 골키퍼 "지금도 그 골대의 떨림을 잊을 수 없다."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의 1차전.
"뭐? 마테우스가 날 마크한다고?"
"그래, 차붐. 신문 톱기사에 떴더라고!"
"마테우스라면 20세의 나이로 독일 대표팀의 최후방을 전담하는 그가?"
"그렇다니까! 제 2의 바켄바우어가! 집중대상이 되었군! 하하"
세계 최고의 수비수 마테우스가 나를 전담마크 했다.
그만큼 나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것이였다.
마테우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
1차전 그의 마크 앞에 나는 힘을 내지 못했다.
보루시아 MG와 2차전
이번에도 마테우스가 나를 전담 마크했다.
1차전에서 당한 설욕을 그대로 갚아주었다.
우측사이드에서 마테우스를 여유롭게 제치고
어시스트를 기록하였고 1:0 프랑크푸르트 승리했다.
나는 이날의 선수로 선정되며
프랑크푸르트는 창단이후 첫 UEFA컵 우승을 거두었다.
마테우스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범근은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다"
31경기 출장하며 12골을 넣으며
성공적인 첫시즌(79/80)을 보냈다.
그리고 독일에서 나는 인정받았다.
"뭐!? 내가 세계 상승세 베스트 4에 뽑혔다고?"
"그뿐만이 아냐, 세계축구 베스트 11에도 뽑혔어!
그것도 그 선수가 동양 선수라니 하핫!"
그리고 다음 시즌을 앞두고
나는 팀내 최고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면서
연봉 독일에서 세번째 액수를 받게 되었다.
또한 독일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독일 대표팀 감독 "차붐을 귀화시켜야 한다!"
(그당시 세계축구는 귀화선수룰이 엄격하지 않았던 모양)
당연히 거절하였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수준 높은 축구를 배우기 위해 독일로 왔을 뿐이다.
또한 언젠가는 한국대표로 월드컵에 도전할 것이며
한국으로 돌아와 축구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나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아진 다음 시즌
80/81 서독 FA 컵 우승을 거두었고
세계 축구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81 시즌 경기 중
레버쿠젠의 겔스도프에게 태클을 당해
선수생명에 큰 위기를 겪었다.
겔스도프는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용서했다.
"경기 중 일어난 단순한 사고에 불과하다.
그를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재활에 성공하며
81/82 시즌에 31경기 출장 12골
82/83 시즌에는 33경기 출장 15골을 넣으며
프랑크푸르트에서 122경기 출전하며 46골을 기록했다.
83 시즌에는 팀의 사정상 정들었던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리그 하위팀 레버쿠젠으로 이적했다.
레버쿠젠에서도 나의 활약은 계속 되었다.
첫 시즌 레버쿠젠을 7위로 급상승 시켰고
두 시즌 전 경기 출장을 하였다.
85/86 시즌에는 34경기 출장 17골을 성공시키며
분데스리가 MVP로 선정되었다.
34세에 이루는 쾌거였다.
그리고 또 한번의 꿈이 이루어졌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잠시나마
꿈의 무대 월드컵에 데뷔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
88년 또한번의 UEFA컵 결승
나는 아직도 그때를 떠올려...
"스페인의 에스파뇰을 맞아 1차전 원정에서 3 : 0으로 패한 레버쿠젠!"
"차붐의 어깨에 달린 레버쿠젠"
홈에서 열린 에스파뇰과 2차전
반드시 3점차 이상으로 이겨야 하는 경기이다.
경기 전 감독님께서 나에게 당부하셨다.
"이번에도 부탁한다, 차붐!"
"....네! 반드시 우승컵을 가져오겠습니다."
홈팬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후반전 레버쿠젠의 티타 바스가 첫 골을 넣었습니다! 1 : 0"
그러나 아직 2골이 남아 있었다.
"골! 괴츠 선수의 골이 터졌습니다!!"
드디어 1골 차 추격에 성공했다.
그리고 후반 종료 직전....
"레버쿠젠의 마지막 기회,
오른쪽에서 프리킥이 올라갑니다!"
골문 앞으로 날아오는 공...
나는 힘껏 뛰어올라 헤딩했다..
공은 골네트를 흔들었다!
"골!!! 미칠 것 같습니다!
차붐! 3 :0입니다!"
"나 좀 꼬집어봐요. 못 믿겠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레버쿠젠이 극적으로 동점에 성공한 것이다.
홈 구장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리고...
승부차기 승리!
레버쿠젠의 창단 첫 UEFA컵 우승이자
나의 두번째 UEFA컵 우승을 거두었다!
나는 감독님과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그렇게 나는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독일에서 아니
세계의 정상에서 훌륭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 힘차게 그라운드를 뛰어다녔다.
세계에 도전하며 거침없이 달렸다.
분데스리가 308경기 98골(당시 외국인 최다골)
페널티킥은 단 한번도 차지 않았다.
거칠기로 유명한 분데스리가에서
10년동안 받은 경고는 단 한장(마지막 시즌)
나는 27세에 세계로 뛰어들었고 34세에 최고의 선수가 될수 있었다.
이미 늦었다고?
늦었다고 생각할 수록 그때 시작해야 하는 거야.
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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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도록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축구가 아닌 그 무엇이 나에게 이런 감격을 안겨줄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때 우리는 월드컵 무대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저 우리들에게 월드컵은 멀리서 지켜봐야 하는 이루고 싶은 꿈이였습니다.
축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
그 이름 앞엔 모든 것이 무너져도 저에겐 항상 축구가 있었습니다.
과장하지 않아도, 포장하지 않아도
눈물나게 고맙고 행복했던 제 인생의 축구 이야기
축구로 인해 축구를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있어 항상 감사했습니다.
전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차범근-
(2006. 차범근 스페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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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 커리어
"나는 차붐 선수를 존경한다. 난 어릴 때부터 차붐을 보고 자라왔다. 나도 그 선수처럼 되고 싶다."
- 마이클 오웬 (뉴캐슬 Utd)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당시)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너무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
- 미카엘 발락 (첼시FC)
"차범근이 세계 최고의 공격수인 건 분명하다. 그리고 나의 자만을 깨우쳐 줬다."
- 로타르 마테우스 (前 독일국가대표,A매치 150경기출장)
"난 차붐을 낳은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가 독일에 있었다면 어김없이 독일 대표팀에 넣고 싶다."
- 프란츠 베켄바우어 (前 독일국가대표,A매치 103경기출장)
"내가 그런 공격수랑 붙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다."
- 파울로 말디니 (AC밀란)
"붐은 진정으로 축구를 할 줄 알고 즐길 줄 안다."
- 펠레
(2004년 방한시) "당신에게 사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 자리는 제게 정말 큰 영광입니다."
- 올리버 칸 (바이에른 뮌헨)
"차붐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웅이다."
- 루이스 피구 (前 포르투갈 국가대표,A매치 127경기)
"내 자신은 어느정도 성공한 공격수로 평가받지만 차붐정도는 아니다."
- 위르겐 클린스만 (前 독일국가대표,A매치 108경기출장)
"방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양국의 발전과 우호증진이어야 한다.
하지만 난 차붐부터 만나고 싶다."
- 슈뢰더 (독일총리)
"우리가 풀지 못했던 주요한 문제는 차붐이었다. 차붐을 막을 수 없었다. 해결 불가능한 존재였다."
(79년 에버딘감독 당시 프랑크푸르트와의 UEFA컵 1라운드 경기 후)
-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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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s 비하인드 스토리 1
2007년 발락은 그의 우상과 뜻깊은 만남을 가졌다.(차범근 첼시 방문 당시)
발락은 레버쿠젠에서 데뷔하였고 레버쿠젠에서 활약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축구를 했다고 한다.
차범근 역시 자신을 동경하던 아이가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 기쁘다고 밝혔다.
비하인드 스토리2
차범근 축구교실의 강태풍군은 한 인터넷까페에 차범근씨의 사진과 함께 이런글을 올려놓았다.
"저 뒤에 망치들고 계시는 저분 저분이 바로 우리 감독님 이시다.우리다칠까봐 망치들고 얼음 깨는 저분. 저분이 바로 세계속의 갈색 폭격기 우리 감독님이시다."
그리고 저기 작은 축구교실에서 아이들이 다칠까봐 묵묵히 얼음을 깨고 있는 허리숙인 저 사람이 바로 우리가 묻어버린 .. 그를 버린 한국축구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차범근인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3
태고적부터
남성다움과 고결함이
찬란했던 곳,
용맹스런 한국이여
그대가 차붐을
우리에게 보냈도다
환희의 음악이여
더 크게 울려라
차붐.
자네를 오랫동안 사랑하리
독일시인 헨샤이트의 '차붐찬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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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이 한 일에 대해서는 딴지일보에서 기막히게 묘사를 해놓았기에 이를 인용한다.
"느낌이 잘 안오신다..?
박찬호가 데뷔 첫해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뛰어 데뷔하자마자 메이저리그를 통털어 투수부문 7위의 성적을 거두고, 그 다음 해 동양인 최초의 사이영상을 수상하고, 얼마 후 동양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MVP를 먹고, 다저스를 월드시리즈 결승에 두번이나 진출시키고 그때마다 마지막 7차전에서 완벽한 투구로 승리투수가 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라.
그리고는 그가 마운드에 등장하면 관중들이 전부 찬호를 연호하며 박수를 치고,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유니폼이 영구전시되고 도대체 박찬호를 모르는 미국시민이란 없는 그런 상황... "
차범근이 한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가.조선일보에서조차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에 선정한 위인이다.1998년 독일 축구역사가협회에서는 20세기최고의 아시아선수로 차범근씨를 선정했다.1999년 축구잡지로는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월트사커지는 차범근씨를 잊을수 없는 100대 스타로 선정했다.그가 차지했던 분데스리가 MVP 는 지금의 세리에 리그의 MVP나 다를바가 없다.80년에는 세계축구 베스트 11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인 차범근인 것이다.그가 바로 변변한 홈페이지 하나 없이 매장당해버린 대한민국이 낳고 대한민국이 버린 차범근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국내 축구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내고 가장 위대한 선수인 차범근.
지금 우리는 EPL에서 활약하는 태극전사들을 보며 잠 못이루는 밤을 보내며 그들의 골을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차범근이 당시 세계 최고의 무대에 활약하며 매경기 골을 넣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국내 축구 역사상 가장 두꺼운 허벅지를 가진 선수이기도 한 차범근
그러한 차범근의 파워넘치는 플레이를 눈 앞에서 볼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앞으로 더이상 나오기 힘들 인물, 차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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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chiwoopyein
님이 차범근에 대해서 궁금한것 같아서 이렇게 올려봅니다 답변확정부탁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