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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포왜란-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

작성자 익명 작성일 2021-08-10 19:05 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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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의 왜관(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을 그린 초량왜관도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일본인 해적들이 피해를 입히는 일이 많았고, 한편으로는 밀수를 위해 조선에 모여드는 일본인들도 잦았다. 때문에 1500년대 초반에는 일본인이라면 일단은 해적이나 밀수꾼의 무리, 혹은 이리저리 흘러들어와서 민폐를 끼치며 사는 무리 정도로 보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더우기 군인들로서는 일본 해적들과 싸우는 것이 실전에서 공을 세우는 가장 흔한 기회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일본인을 멸시하고 학대하는 경우가 잦았다.

당시 일본인들 중에는 조정의 허가를 받고 해변에 머물며 지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 때문에 조선 당국은 여러가지 골치아픈 문제를 많이 겪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일본인들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단적인 예로 수사(水使)로 재직하고 있던 이종의(李宗義)는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던 일본인 10여명을 보고는, 괜히 해안에 온 해적이라고 착각이라도 했는지, 이유 없이 마구잡이로 죽여 버린 일도 있었다.

이중에 가장 악명 높은 사람으로는 부산포 첨사로 재직하고 있던 이우증(李友曾)을 꼽을 수 있다. 군인이었던 이우증은 일본인들을 여러가지로 괴롭히는 것을 일종의 놀이로 여기며 즐기곤 했는데, 그중에서 활쏘기 놀이가 널리 회자 되었다.

이우증은 일본인을 붙잡은 뒤에 머리카락에 노끈을 묶고는 그 끈 끝트머리를 집의 천장에 그대로 매달아 놓았다. 그러면 매달린 사람은 머리카락이 아파서 매달린 채로 팔다리를 버둥거리게 되는데, 이우증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으로 부터 한참 떨어져서 서서는 갑자기 자신의 활솜씨를 자랑하겠다고 활을 빼든다. 그리고, 이우증은 화살을 쏘아서 일본인을 매달아 놓은 끈을 맞추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매달린 일본인은 화살을 잘못 맞을 까봐 크게 겁을 먹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다가 화살을 맞춰서 끈이 끊어지면 일본인이 바닥에 떨어져 나동그라지게 되고, 그러면 이우증은 그 모습을 보며 유쾌하게 즐거워하며 자신의 활솜씨를 뽐냈다.

이우증이 일본인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그 끈을 활쏘기하면서 노는 것은 당시에 절도사로 재직하고 있던 유계종(柳繼宗)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계종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즐거워 하면서 크게 칭찬하였고, 덕분에 이우증이 매달아 놓은 일본인에게 활을 쏘면서 괴롭히는 행동이 크게 유행해서 일본인들이 머무는 곳 근처에 있는 조선군 부대 각지에 이렇게 일본인을 괴롭히는 것을 따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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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를 약탈하는 왜구 그림



얼마후, 조선에 거주하던 부산 일대의 일본인들이 대마도주 휘하 세력의 지원을 얻어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삼포왜란인데, 이우증은 바로 전날까지도 일본인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묵살했고, 도리어 화를 내며 보고한 사람를 문책하였다. 이우증은 뒤늦게 일본인들이 급습해 오자 황급히 도망친다. 그러나 결국 풀섶에 숨어서 떨고 있던 이우증은 일본인들에게 발견되었고, 여러 일본인들에게 마구 난도질 당하여 죽게 된다.

폭동이 일어나자 일대의 조선군들은 겁을 먹고 대부분 도망치거나 후퇴해 버려서, 일본인들은 부산 일대의 마을들을 장악한다. 일본인들은 마을의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여 매일밤 술판을 벌이며 놀기 시작했다. 이때 불탄 조선의 민가가 1천채에 가까웠는데, 공식 기록에는 796호가 불에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퇴한 조선군은 반격하지 않고 숨어 있으면서 조정에 계속 지원군을 보내줄 것만을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마땅히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서, 폭동을 일으킨 일본인들의 관련 세력과 어떻게 화친을 맺어보자는 다소 얼토당토 않은 논의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마침내 조선군에서는 유담년을 지원군을 이끄는 장군으로 삼아 부산 방향으로 지원군을 보낸다. 유담년은 지나치게 잔인한 일을 많이 저지른 부패한 군인으로, 그 죄로 자리에서 쫓겨나 집에서 놀고 있었다. 유담년은 다시 장군이 되어 군사를 이끌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팔뚝을 걷어 붙이며 "나는 가뭄이 들었을 때의 나막신과 같아서, 아무 쓸모 없이 여기다가, 장마가 졌을 때가 되면 그제서야 쓰일 뿐이다"라고 비아냥 거리면서 소리 질렀다. 당시 조선 군인들은 대낮에 괜히 약탈을 하는가 하면, 서울 시내의 폭력배와 범죄자들이 약탈을 하기 위해 군인들 사이에 끼어들어 같이 약탈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군은 일본인들을 전멸시키는데 성공하여, 일본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끝없이 널브러져 있게 된다. 이때 가장 악명을 떨친 사람은 소기파(蘇起坡)라는 군인이었다. 소기파는 재물이나 승진에는 큰 관심이 없으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면서 오직 전투에만 전념하는 사람이었다. 소기파는 이미 북방의 여진족들과도 전투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고, 아마도 전쟁터에서 사람과 싸우고 사람을 죽이는데, 기괴한 취미를 갖게 된 듯 보인다.

소기파는 당시 죽은 일본인 시체들 사이를 뒤지고 다니며 혹시 살아 있는 사람이 없는지 찾아 다녔다. 만약 시체들 사이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소기파는 자신의 칼을 뽑아서 그 사람의 배를 갈라버렸다. 그리고 얼굴과 손에 그 피를 묻혀 바르며 즐거워 했고, 그 자리에서 술병에서 술을 따라마시면서 그 사람의 내장을 그대로 꺼내어 씹어먹으며 안주로 삼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끔찍하게 여겨서, 소기파를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의 마귀인 야차와 같다고 하여, 소야차(蘇夜叉)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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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그린 조선 병사들



이 사건은 295명의 일본인의 목을 잘라서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곳에 높다란 무덤으로 쌓아 놓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삼포왜란 당시의 초라한 후퇴와 문제가 많은 전투들에 대해서는 책임 문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당시에 이르렀던 졸렬한 화친 논의에 대해서도 뒤에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덮어 놓고 잊고 넘어가기에 급급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에 대한 반발심과 적개심만 더욱더 극심해졌는데, 그러다보니 어이 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1545년 전라도 흥양(興陽)에서는 중국배 세 척이 표류하여 해변에 도착한다. 당시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소연(蘇連)은 이 배에 탄 중국인들이 일본인 해적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인근 부대에 연락하여 일대의 모든 군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은 일본인도 아니고 일본인 해적은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울부짖으며 도망치면서 산속으로 숨었는데, 조선군은 끝까지 이들을 추적하여 표류한 중국인 108명을 학살해 버렸다.

조정에서는 표류한 중국인들을 잘못 죽인 것을 나중에 알고, 이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지 않도록 고민해야 했고, 괜히 학살당한 중국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성대하게 치러주는 따위의 일을 벌였다. 당시 역사를 편찬하던 기록을 보면 삼포왜란을 기점으로 일본인들이 조선을 무시하고 가소롭게 보기 시작한 것으로 볼만하다는 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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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안태어난게 다행이다 저러고 또 임진왜란...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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