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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간의 버스기사 생활을 Rewind 해보자

작성자 익명 작성일 2023-02-16 15:44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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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군대를 전역하고 코로나 학기에 복학을 했다.

첫학기에는 그럭저럭 잘 다닌것 같다.

코로나 시기의 수혜를 받아서 성적도 노력에 비해 후하게 받았다.

나름 만족하며 다니고 있었는데 나에게는 한가지 불안감이 있었다.

언젠가는 물리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난 물리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물리학과에 입학했었고

1학년 시절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에 좌절감을 느끼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중에 듣겠지란 생각에 부전공인 컴퓨터 공학수업을 들으며 학점을 채우고 있었지만 불안감은 마주하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난 다음 학기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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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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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외로움, 낮은 자존감, 미래로 밀어둔 수많은 공부할 꺼리를 피해서 난 또 다시 도피처를 찾았다

롤이었다.

게임에서 만난 여대생 그룹과 난 밤새 게임을 했다.

그들은 롤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이었는데 난 그들보다 조금더 나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과 게임을 하면 외로움도 사라지고 자존감도 올라가는것 같았다.

그렇게 난 성적을 말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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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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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영부영 세월을 보낼바에 차라리 일이나 하자고 생각한 나는

9급 운전직 공무원을 목표로 정했다.

운전직이면 따로 공부할 필요도 없고 그냥 아무생각 없이 살다가

쉬는 날에는 게임이나 하면서 살고 싶었다.

운전직을 지원하려면 1~2년 정도 버스를 운전한 경력이 필요했다.

나의 경우에는 대형면허 없이 군면허로 버스를 운전했기에 운전경력이 인정이 안됐다.

그래서 일단 시내버스 회사에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대형면허 & 버스기사 자격증을 취득하는데 4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집근처 시내버스회사에 지원했다.

다행히 버스회사들은 만성적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양아치거나 심각한 환자가 아니면 다 뽑아줬다.

난 대표이사님 면접을 보고 최종 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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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양복 빌려입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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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양복은 아닌것 같아서 걍 캐주얼하게 입고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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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정도의 교육기간을 가졌다.

차고지에서 동기들과 번갈아가면서 버스운전을 했다.

동기는 총 3명으로

서울교통공사에서 정년퇴임 하고 나오신 65세 형님, 다른 버스 회사에서 운전하다가 이직한 50세 누님 그리고 26세 형이 있었다.

다들 좋으신 분들이었고 호칭을 형님, 누님, 형으로 하기로 했다.

훗날 26세 형은 출근마다 하는 음주체크에 전날 마신 술이 걸려서 퇴사했고

65세 형님은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보행자와 비접촉사고가 나서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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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차고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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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는 무조건 카운티부터 시작하는데 내가 배정받은건 36번이었다.

한바퀴 도는데 2시간 정도 걸리고 하루에 8바퀴 돌아야했다.

순번에 따라 다르지만 새벽 4시 ~ 5시에 일어나서 출근하면

저녁 12시에서 다음날 새벽 1시에 끝난다.

하루에 16시간 운전을 하고 다음날 쉬는 격일제 근무였는데

군대 전역하고 복싱하다가 다친 어깨 + 발목

하루종일 게임하다가 얻은 목디스크 + 허리디스크의 고통을 느끼며 운전해서 더 힘들었다.

1주일간은 진짜 퇴사 마려웠다.

여기 입사하느라 4개월의 시간을 보낸게 아까워서

1주일을 견디다보니 1달을 견뎠고

1달을 견디니 3개월을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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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번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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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하는 길에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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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에 맨뒷자리에 누워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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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 키로를 넘은 계기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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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가 퍼져버린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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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져버린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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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피똥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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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간 많은 일이 있었다.

버스회사는 평균 연령이 5, 60대이다.

내 나이가 당시 24세였으니 많이 어렸다.

어려도 존중해주는 분들도 있었지만 무시하고 막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난 군시절 남에게 화를 내지 못해서 가슴앓이 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의 경험상 화를 내지 않고 참다보면 자신만 더 힘들어졌다.

난 용기를 내서 5, 60대 형님들과 싸웠다.

그렇게 내 권리를 지켜냈다.

싸우는것도 유쾌하진 않았다.

그래도 호구취급을 받는것 보다는 나았다.

운전을 하며 사고날뻔한 순간도 엄청 많았다.

졸음운전도 ㅈㄴ 많이했다.

그래서 수첩에 드라이브 포인트라는걸 기록했다.

운전을 좀 잘못했으면 badpoint, 위험한 순간에는 deathpoint를 체크해서 포인트를 줄여나가는걸 목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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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쓴 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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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4개월차가 됐을때 중형버스로 승급이 되었다.

중형버스는 CNG 차량이었는데 버스도 새거여서 잘나가고 좋았다.

16번으로 배정됐는데 이건 회사에서 제일 꿀빠는 노선이었다.

하루에 13바퀴를 타는데 한바퀴에 45분이면 됐다.

난 이때쯤 생애 첫 플레를 찍었다.

더 이상 여대생들과 같이 겜을 하지는 않았다.

성취감이 있을것 같았지만 허무함 뿐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롤을 접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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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플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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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번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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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터져버린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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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시간 맨 뒷자리에 누워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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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회사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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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 차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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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썼던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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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썼던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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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 걸렸을때 크리스마스 트리가 예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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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쯤 나와 친하게 지내던 대부분의 기사들이 사고가 나서 퇴사했다.

나도 운이 좋아서 지금까지 남아있었지 사고날뻔한 순간들을 숱하게 마주했다.

'이 일을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평생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쉬는 날 난 ebsi에 들어가서 고등학교 수학, 국어, 영어를 조금씩 공부했다.

오랫만에 마주한 칠판과 선생님을 보고 감동이 몰려왔다.

그렇게 난 복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팀장님에게 전화를 했다.


"저 이번달 까지만 다니고 퇴사하려고 합니다."
"어디 좋은 자리 있어요?"
"아뇨, 그냥 다른 일을 해보려고요"
"그치 젊으니까 여러가지 도전해봐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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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사고 주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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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ve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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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난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순식간에 지나간 1년이었다.

'시간낭비를 한건가?'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역시 그렇지 않다.

나에게 많은 배움이 있는 시간이었다.

난 1년간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일찍 일어나는 법을 배웠고

화를 잘 내는 법도 배웠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의 소중함도 배웠다.

학생때가 무언갈 할 기회와 시간이 제일 많다.

그 시간이 공짜가 아닌것도 배웠다.

난 남은 3년간의 대학생활로 1억의 가치를 만들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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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아침 출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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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쉬는날 회사에 갔다가 돌아오며 찍은 모교 사진>





가톨릭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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