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백제 수도에서 발견된 일본인 무덤...
-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후기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웅진)에서 발견된 일본식 고분인 횡혈묘...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놀랍게도 이러한 공주, 부여에서 발견되는 횡혈묘의 주인들은 일본인이 맞았다 !
특히 규슈 동북부 지역의 5~6세기 횡혈묘와 매우 유사하다.
게다가 공주 부여의 횡혈묘 세력들은
같은 일본계 세력인 전남의 전방후원분 세력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고 한다
도대체 어째서 백제의 수도에 북규슈 양식의 일본인 무덤이 발견되는 것일까?
놀랍게도 일본서기에서 이에 관련되는 문헌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
5세기 후반, 일본의 유랴쿠 천황이 일본에 인질로 있던 어린나이의 동성왕을 특히 귀여워 하였고
궁궐로 불러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제로 돌려보내 왕위를 잇게 했는데,
이 때, 동성왕을 호위하기 위해 축자국(츠쿠시노쿠니)의 군사 5백인을 함께 보냈다는 것이다.
이 축자국의 위치는?
그렇다.. 축자(츠쿠시)국의 위치는 바로 '북부 규슈' 였다.
그렇다면 공주(웅진)의 북규슈식 횡혈묘에 묻힌 일본인들의 정체는
바로 동성왕을 백제까지 호위한 일본군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본군의 흔적은 백제의 수도에만 있을까?
충북 음성 망이산성에서 발견된 갑옷.. 이 갑옷의 정체는?
한반도의 판갑은 4세기에 철판을 세로로 잘라붙인 종장판갑이 있긴 했지만
이미 5세기에는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더 이상 판갑을 제작하지 않고 찰갑(비늘갑옷)으로 갈아탄다.
반면 판갑을 가로로 잘라붙인 횡장판갑은 5세기 일본에서 유행했고,
이는 아직 찰갑의 영향을 받기 전인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러한 대금식 판갑(횡장판갑)이 한반도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학자는 한명밖에 없고
이미 한일 학계에서는 '왜계 판갑'으로 부르며 일본산 갑옷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단순히 일본갑옷을 수입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것은 일본 갑주를 입은 일본군이 백제 가야로 들어와 신라 고구려와의 싸움에 참전했음을 뜻한다.
자세히 보면 망이산성 외에 청주 신봉동 고분도 보이는데?
청주 신봉동 고분은 특히나 많은 일본계 유물들과 무기, 마구등이 발견되어
일본의 군사집단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문헌자료는 없을까?
실제로 망이산성이나 청주 신봉동 고분이나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 기준으로 동쪽인데...
놀랍게도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동방령(동쪽 장관)으로 '모노노베노 마카무' 라는 일본계 장군이 나온다... ㄷㄷ
게다가 중국에선 흑치상지와 함께 귀순한 백제 장군으로 모노노베노 슌(물부순)이라는 장군이 확인된 상태...
그다면 신봉동 고분은 백제의 동방이었으며, 이곳의 지휘관인 동방령은 일본인이었다는 것일까?
게다가 웅진 사비시절 백제 (5세기 이후) 왕릉에는
'일본산 금송 목관'이 항상 사용되었는데
이는 야요이 시대(기원전 3세기)부터 일본에서 고위층이 사용하던 목관 재료였다..
백제왕들은 어찌하여 일본의 전통을 따르게 되었을까?
참으로 미스터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제와 일본... 도대체 무슨관계였을까?
진실은 무엇일까?
주식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