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왕사의 변
다른 표기 언어요약 1363년(공민왕 12) 김용(金鏞)이 흥왕사의 행궁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한 사건.
1359, 1361년의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은 복주(福州 : 안동)로 피신했고, 1362년 전란이 평정된 뒤 환도하여 1363년 2월에 흥왕사를 시어궁(侍御宮)으로 삼고 그곳에 머물렀다. 그해 3월 부원배들과 결탁한 김용은 반원개혁정책을 시도했던 공민왕을 살해하기 위해 흥왕사에 그의 도당 50여 명을 보내 침범하게 했다.
이에 왕의 호위인원은 다 달아났으며 안도적(安都赤)·왕자(王梓)·김한룡(金漢龍)·홍언박은 김용의 일당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최영(崔瑩)·우제(禹磾)·안우경(安遇慶)·김장수(金長壽) 등이 서울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반란을 평정했다. 왕은 이인복(李仁復)·정찬(丁贊)·우제·홍선복에게 명령하여 역적들을 순군(巡軍)에서 국문하게 했으며 곧바로 흥왕토적공신을 봉록했다. 김용은 초기에는 반란군 진압에 나서는 등의 행위로 모면했으나 그의 음모가 드러나서 곧 체포되어 밀성(密城 : 지금의 밀양)으로 귀양갔다가 계림부로 옮겨진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했다.
이러한 김용의 공민왕 살해기도가 실패로 끝나자, 5월 원나라가 직접 개입하여 반원정치를 시도하는 공민왕을 일방적으로 폐위하고 원나라에 있는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을 왕으로 삼았다. 또 최유(崔濡)에게 요양의 군사 1만 명을 주어 고려를 침입하게 했으나 수주(隨州 : 지금의 定州)의 달천(達川)에서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참패하고 돌아갔다. 이에 원은 할 수 없이 공민왕을 복위시키고 최유를 보냈지만, 이를 계기로 고려와 원의 관계는 더욱 냉각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