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스

후스

다른 표기 언어 Hu Shih , 胡適
요약 테이블
출생 1891. 12. 17, 상하이[上海]
사망 1962. 2. 24, 타이완
국적 중국

요약 후스는 자유주의적 입장의 정치가로, 1922년 중국의 구어체인 백화가 공식 문어로 정착되는 데 공헌했다. 또한 스승 듀이의 실용주의적 방법론을 통해 중국을 개혁하고자 했다.
1910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며, 철학가인 존 듀이로부터 실용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귀국후 베이징 대학교를 중심으로 아직도 구식 유교적 전통을 따르며, 민중의 90%가 문맹인 중국 문화를 서구식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백화로 글을 써 발표해 문학 혁명을 일으키며 백화가 표준어가 되는 데에 기여했고, 중국의 전통문화를 재평가하기 위해 실용주의적 방법론을 도입했다. 1938년 이후 주미중국대사, 베이징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1949년에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자 뉴욕으로 이주하여 1957년 타이완 정부의 UN주재 대사직을 맡았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교육
  3. 언어와 교육의 개혁
후스 (胡適)
후스 (胡適)

개요

1922년 백화(白話)가 공식 문어로 정착되는 데 공헌했다.

또한 미국의 실용주의적 방법론을 널리 전파한 영향력 있는 교육가였다. 중화민국 수립 후에는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대중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중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한 자유주의적 입장의 정치가로 활약했다.

초기생애와 교육

후스의 아버지는 안후이 성[安徽省] 지시 현[績溪縣] 출신의 학자 겸 관리였는데 후스가 3세 때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후스의 교육에 큰 관심을 보였다. 당시 관리로 입신출세하는 길은 과거에 급제하는 길뿐이었고 그렇게 하자면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과거급제가 교육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과거시험에 출제되는 내용이 그대로 학과내용이 되었다(중국문관제도). 후스가 학업을 시작했을 때 중국의 전통적인 교육방식은 경직되어 하나의 의식으로 굳어졌고, 실생활 및 유용한 지식습득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통교육은 유교경전의 학습 및 군주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주족이 내세운 편협한 유교경전 해석에 입각한 것이었다. 게다가 유교경전의 내용보다는 그 문학형식을 공부하는(거의 숭배에 가까운) 쪽으로 학습의 방향이 바뀌었다. 학자의 글은 전통적인 문학양식과 일치되게 씌어져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어떤 학자의 생각이 기존의 문학양식에 따라 서술될 수 없으면 양식이 아니라 그 생각을 바꾸어야만 했다. 중국어 자체도 새로운 사상의 발달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이 일반대중에게 전파되는 것을 가로막았다. 일부 학자들이 구어를 사용했으나, 저명한 책들은 전통적인 문어체로 씌어져 있었다. 중국의 문어는 구어와 큰 차이가 있어 배우기가 어려웠다. 대체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중국은 문맹률이 매우 높았다. 근대화의 압력으로 중국의 전통적 교육방식은 서구의 학문과 타협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이로 인해 1905년에 청조는 과거제도를 폐지했다.

4세의 후스가 학업을 시작했던 1895년에는 서구학문의 수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시 현에서 작은아버지와 사촌형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일찍이 재능을 발휘한 후스는 유교경전과 고대 백화체 소설들을 읽었다. 1904년 후스는 신식 교육을 받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 1910년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주 이시카에 있는 코넬대학교에서 농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14년 이 대학을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철학자 존 듀이의 가르침을 받았다. 듀이의 철학은 절대진리의 탐구를 억제하고 특정 상황 속에서 유효하게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을 권장했다. 듀이는 인간은 '결과의 검증'을 거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듀이의 철학은 후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후스의 이성적·회의적·자유주의적 성향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조국 중국을 오랜 전통에의 맹종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1917년 후스는 듀이의 지도 아래 박사논문을 완성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군주제가 붕괴되고 서구식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장래에 대한 희망이 중국 내에서 커져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스는 7년 전과 비교하여 귀국 직후의 중국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름만 공화국일 뿐 지방군벌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었고, 청조를 다시 일으키려는 시도가 2번이나 있었다. 보수적인 문인 관료들이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중국의 정치적·경제적 주권은 여전히 외세로부터 위협받고 있었다.

민중은 90%가 문맹으로 여전히 구식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언어와 교육의 개혁

해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스와 동료들은 서구식의 정부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전통적인 중국문화를 재검토하여 서구식 모델로 개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같은 문화개혁운동의 중심지는 베이징대학교[北京大學校]였고, 후스는 1917년 이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다. 베이징에 있는 일부 지식인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정치지향적이었다. 그러나 1917년 당시 그들은 앞으로 20년 동안 정치를 멀리하고 교육·지식·문화 활동에만 전념함으로써 비정치적 수단으로 정치적 기반을 재건하기로 합의했다.

1917년초 천두슈[陳獨秀]가 창간한 유력잡지 〈신청년 新靑年〉에 후스의 글 〈문학개량추의 文學改良芻議〉가 발표되었다(천두슈는 후스의 베이징대학교 동료교수로서 후일 중국공산당의 창립자가 되었음). 이 글로 후스는 백화운동의 기수가 되어 살아있는 새로운 문학을 제창했다.

이 문학을 통해 사어(死語)와 사문(死文)의 횡포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손쉽게 이해할 수 있고, 모든 종류의 새로운 사상을 유연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천명했다. 1918년 그가 쓴 시들은 1920년 〈상시집 嘗試集〉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작품은 백화로 씌어진 새로운 문학의 효시였다. 그뒤를 이어 새로운 형태의 단편소설·에세이·희곡 및 근대 유럽문학의 번역물이 쏟아져나왔다.

전통보수주의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백화문학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1922년 중국 정부는 백화를 표준어로 선포했다. 그러나 문학혁명은 정체에 빠진 전통가치관을 겨냥한 폭넓은 운동의 한 단면에 불과했다. 중국의 전통문화를 재평가하기 위해 후스는 듀이의 실용주의적 방법론을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19년에 그가 제창한 표어는 지식인들 사이에 많은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표어의 내용은 과감하게 가설을 주장하되 가장 잘 절제된 사실확인을 수반하라는 것이다. 후스의 작품 〈중국철학사대강 中國哲學史大綱〉(1919)은 중국 고대철학자들의 논리를 검토하고 후대의 백화문학 연구 및 그 저자의 진위여부와 신빙성을 검증한 것인데, 전통적인 중국문학 연구에 어떻게 과학적인 방법이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실용주의적 방법론에 대한 그의 주창은 많은 공명을 얻어, 고대 중국사의 통설(通說)과 허설(虛說)의 상당 부분을 재검토하여 폐기시키게 했다.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후스의 운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후스와 그 동료들이 약조한 정치불간여 합의는 1919년에 깨졌다. 이해에 5·4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일본의 산둥 반도[山東半島] 조차를 승인해준 베르사유 강화회의의 결정에 반발하여 학생들이 벌인 애국 반일 시위사건이다(5·4운동). 이 운동은 필연적으로 적극적 행동주의자들인 좌파 지식인들과 정치적 적극행동주의를 회피해오던 우파 지식인들 사이에 분열을 촉진시켰다.

1919년 7월 20일 후스가 〈문제를 보다 많이 연구하고 주의를 보다 적게 말하라 多硏究問題少談主義〉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좌파 지식인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자 좌·우파의 분열이 공공연해졌다. 후스는 냉정과 반성에 바탕을 둔 실험적 방법의 실행가능성을 확신하고, 정치의 점진적 발전과 개인문제의 개인적 해결을 주장했다(실험주의). 그의 견해는 특정 서구의 사상이 중국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기대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나 무정부주의 같은 추상적 원리에 의존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실제적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있어서 그같은 원리는 비참한 결과를 낳기 십상이라고 생각했다. 중국 전역이 흥분에 들끓어 전투적인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 냉정한 이성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한 후스와 동료 우파 지식인들은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모든 주의는 증명되지 않은 조작이라고 매도하는 실용주의(이 주의 자체가 하나의 주의를 형성)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함으로써, 후스의 입장은 더이상 버티기도 어렵고 설득력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같은 입장 때문에 후스는 공산당에는 원수가 되었고, 국민당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후스와 국민정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1938~42년에 후스는 주미중국대사를 역임했고, 1945년에는 베이징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49년 공산당 정부가 중국에 수립되자 후스는 뉴욕 시에 살면서 1957년에 타이완 정부의 국제연합(UN)주재 대사를 역임했다. 1958년 타이완으로 돌아와 국립중앙연구원의 원장직에 취임했고, 1962년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