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홍영식

다른 표기 언어 洪英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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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5년(철종 6), 서울
사망 1884년(고종 21)
국적 조선, 한국

요약 1869년경부터 박규수의 지도를 받으며, 김윤식·김옥균·박영호·서광범·유길준 등과 교유했다. 이때 위원의 〈해국도지〉, 서계여의 〈영환지략〉 등 중국의 개화서와 박지원의 〈연암집〉 등을 읽으면서 개화사상을 형성해나갔다. 1883년 6월 보빙사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하여 미국에 다녀왔는데, 이때 미국에서 신품종의 농작물과 농기계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884년 3월 우정총국이 설치되자 우정사업을 담당했다. 개화정책이 민씨정권에 의해 벽에 부딪히자 김옥균 등과 함께 일거에 민씨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할 것을 모의하여,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홍영식
홍영식

본관은 남양.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아버지는 영의정 순목(淳穆)이다. 1869년경부터 박규수의 지도를 받으며, 김윤식·김옥균·박영호·서광범·유길준 등과 교유했다. 이때 위원의 〈해국도지 海國圖志〉, 서계여의 〈영환지략 瀛環志略〉 등 중국의 개화서와 박지원의 〈연암집〉 등을 읽으면서 개화사상을 형성해나갔다. 1876년 박규수가 죽은 뒤에는 중인 출신 의관인 유홍기의 가르침을 받았다.

18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규장각의 정자·대교·직각 등을 역임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이 파견되자 조사로 선발되어 일본에 갔다. 그는 일본의 육군을 담당하여 〈일본육군총제 日本陸軍總制〉·〈일본육군조전 日本陸軍操典〉을 작성했다. 귀국 후 군무사부경리사로 총리국을 관장했다.

1882년 홍문관부제학·규장각직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부호군으로 난의 수습을 담당했다. 그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설치되자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참의군국사무·참의교섭통상사무를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협판교섭통상사무를 지냈다. 1883년 6월 보빙사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하여 미국에 다녀왔는데, 이때 미국에서 신품종의 농작물과 농기계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884년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협판군국사무로 전임되고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해 3월 우정총국이 설치되자 총판이 되어 우정사업을 담당했다.

개화정책이 민씨정권에 의해 벽에 부딪히자 김옥균 등과 함께 일거에 민씨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할 것을 모의하여,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정변 직후 좌우영사 겸 우포장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의정이 되었다. 정변이 3일 만에 진압될 때, 박영교와 함께 끝까지 임금을 호위하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신원되었으며 대제학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