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다른 표기 언어 Friedrich Wilhelm II
요약 테이블
출생 1744. 9. 25, 베를린
사망 1797. 11. 16, 베를린
국적 프로이센

요약 프로이센의 왕(1786. 8. 17~1797 재위).
(영). Frederick William Ⅱ.

그 자신은 특별한 군사적 재능이나 정치적 역량이 없었음에도 그의 통치 시기에 프로이센은 상당히 영토를 확장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동생 아우구스트 빌헬름의 아들로 1758년 아버지가 죽자 왕위계승 추정자가 되었다. 그는 지적 감수성이 뛰어나고 예술을 사랑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는 백부의 독재정부체제를 지속시킬 능력이 없었으므로 프로이센의 운명은 몇몇 총신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의 국력은 신장되었다. 카를 알렉산더 후작이 자신의 영토를 스스로 넘겨줌에 따라 안스바흐와 바이로이트를 얻었고(1791), 단치히(그다인스크)와 토른, 그리고 폴란드의 제2차 분할(1793)과 제3차 분할(1795)을 통해 바르샤바를 포함한 중부 폴란드 지방 대부분을 획득했다.

외교면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협력했으며 1792년 2월 7일에는 주로 프랑스 혁명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동맹을 맺었다. 제1차 대(對) 프랑스 동맹전쟁에서 그는 폴란드를 얻는 데 열중한 나머지 전쟁을 수행하는 데는 별로 마음이 없어, 1795년 별도의 바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맹에서 탈퇴했다.

국내 문제에서는 커피와 담배에 대한 국가의 전매를 폐지하고 이로 인한 소득 감소를 벌충하기 위해 맥주·밀가루·설탕 등에 대한 소비세를 인상했다. 그러나 전매 폐지로 그는 쉽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악명 높은 그의 국내 정책은 1788년의 '종교 칙령'(Religionsedikt)이었다. 이는 대체로 그의 총신인 요한 크리스토프 폰 뵐리너의 작품이었는데, 종교 교육의 자유를 제한하고 성직자들에게 협소한 개신교 신앙만 가질 수 있도록 속박하는 반면, 관용(신앙의 자유)의 원칙을 법적으로 승인한 모순된 조치였다. 이 칙령은 철저히 시행되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다양한 자유주의적 법령을 비롯해 주목할 만한 법전인 '프로이센 민법전 토지법'(Allgemeines Preussisches Landrecht : 1794)이 공포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치하에서는 주로 베를린을 중심으로 문화활동이 꽃을 피웠다. 회화·건축·연극이 장려되었고 특히 음악은 큰 후원을 받았는데,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그를 알현해 실내악을 헌정했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자신은 첼로를 연주했다. 그는 2번이나 왕가 출신과 결혼했는데 첫번째 결혼은 이혼에 이르렀다. 이 2명의 왕족 배우자 외에도 2명의 귀족 출신의 아내를 맞이했다. 왕족이 아닌 아내 중 2번째로 결혼한 된호프 여백작 조피아 율리아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후에 정치가로 성장한 브란덴부르크 백작 프리드리히 빌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