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준

한성준

다른 표기 언어 韓成俊
요약 테이블
출생 1874(고종 11). 6. 12, 충남 홍성
사망 1942. 7
국적 한국

요약 한성준은 한국의 민속무용가로 어릴 때부터 춤과 장단을 배웠다. 상경 후 서구무용 공연에 큰 영향을 받아 놀이마당에서만 행해지던 민속춤을 무대예술로 승화시켰다. 8살 때부터 줄타기와 승무 명인이었던 외할아버지에게서 북과 춤을 배웠다. 그 후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하다가 35세에 상경했다. 서울에서 서구무용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고, 한국의 전통 민속춤 또한 이에 못지않은 무대예술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자각했다. 이를 위해 그 동안 보고 배우고 춤추던 모든 것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집대성하고 무대화 시켰으며, 후진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첫 해외 공연이었던 일본 공연에서 호평을 받았고, 1941년 모던일보사로부터 예술상을 받았다.

한성준
한성준

전통 민속춤을 가꾸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으며, 한국 신무용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8세 때부터 당시 민속무용과 줄타기로 유명했던 외할아버지 백설채(白雪彩)에게서 춤추기와 북치는 법을 배워 어린 나이로 홍패사령·백패사령을 따라다니며 줄을 타거나 재주를 부렸고, 14세 때부터 박순조에게서 줄타기와 재주를 3년간 더 배웠다. 이어 덕산골 수덕산이라는 곳에서 20세가 넘도록 춤과 장단을 공부하면서 예술에 눈뜨게 되었다. 굿중패·남사당패·당굿·모래굿패 등과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방랑의 생활 속에서 그의 예술은 점차로 승화되기 시작했으며, 35세에 서울에 올라왔다. 처음에는 김창환·박기홍·송만갑·이동백·정정렬 등의 고수를 지냈다.

1905년 협률사가 해산된 후 1907년 서울 송만갑에 의해 조직된 송만갑 협률사의 일원으로서, 이동백·유공열·허금파·강소향 등과 정기적으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원각사 등에서 공연되는 서구무용을 대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은 그는 놀이마당에서 행해지던 민속춤을 서구무용 못지않은 무대예술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자각했다. 1930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한 후 음악뿐만 아니라 무용도 가르치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동안 보고 배우고 춤추던 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무대화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되었다. 1933년 창립된 조선성악연구회의 창단 일원으로 명창들과 더불어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첫 작품발표회는 1935년 여름 부민관에서 이루어졌는데, 승무·태평무·학무·한량무·신선무·살풀이춤·검무·훈련무·오방신장무·사공무 등이 공연되었다. 그러나 그중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호평을 받지 못했다. 1940년 4월 제자를 이끌고 일본 도쿄[東京]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첫 해외공연을 가졌다. 일본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그는 1941년 11월 만주·북지 등의 순회공연도 가졌다. 1941년 모던일보사가 제정한 예술상을 받았다.

한량무
한량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