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지

하위지

다른 표기 언어 河緯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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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12(태종 12)
사망 1456(세조 2)
국적 조선, 한국

요약 단종 복위에 힘쓰다가 목숨을 잃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성품이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남효온은 <추강집>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길바닥에 물이 고였더라도 그것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가지 않았다”라고 평했다. 1450년 사헌부장령이 되어 대신들의 비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였고, 1454년 춘추관편수관으로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유응부 등과 함께 비밀리에 단종 복위를 추진하여 명의 사신을 위해 베푸는 연회에서 세조를 제거하기로 했으나 발각되어 주모자로 체포, 죽임을 당했다.

하위지의 글씨
하위지의 글씨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집현전학사·사관으로 활약했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본관은 진주. 자는 천장·중장, 호는 단계·연풍. 아버지는 군수 담(澹)이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로서 〈오례의주 五禮儀註〉의 상정에 참여했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재직하던 형 강지가 탐간죄로 투옥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 형을 보살폈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했고, 이듬해 춘추관사관으로 〈고려사〉 개찬에 참여했다.

1450년(문종 즉위) 사헌부장령이 되어 대신들의 비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대간의 직분을 다했다. 다음해 직집현전이 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보좌, 〈진설 陣說〉의 교정과 〈역대병요 歷代兵要〉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병서 편찬에 참여했던 학사들의 품계를 올리려 하자, 종신이 함부로 사은을 베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반대했다. 이에 집현전직제학으로 전보되자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갔다. 다음해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하여 춘추관편수관으로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경연시강관으로 단종에게 경사를 강론했다.

1455년(세조 1) 예조참의로 재직중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예조참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세조의 녹을 먹는 것을 수치로 여겨 그해부터의 봉록은 취하지 않고 별실에 쌓아두었다. 세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자 주제를 들어 서사제의 부활을 주장했다. 이에 세조는 그의 관(冠)을 벗기고 장(杖)을 쳤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성원·김문기(金文起)·유응부 등과 함께 비밀리에 단종복위를 추진하여 명의 사신을 위해 베푸는 연회에서 세조와 측근관료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에 차질이 생겨 거사가 연기되자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이 세조에게 이 사실을 알려 복위운동이 탄로나고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당당한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거열형을 당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에서 그의 인품에 대해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길바닥에 물이 고였더라도 그것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가지 않았다"라고 평했다.

1691년(숙종 17) 신원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 민절서원, 선산 월암서원, 홍주 노운서원, 연산 충곡서원, 의성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