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샤

하르샤

다른 표기 언어 Harsa 동의어 시라디티야, 戒日王
요약 테이블
출생 590경
사망 647경
국적 인도

요약 북부 인도에 있던 광활한 제국의 통치자.
Harsha라고도 쓰며 Harṣavardhana라고도 함.

힌두교 시대에 불교로 개종했다. 그의 통치기간은 분권화된 지방 제국들의 주도권 쟁탈전이 끊임없던 시기로 고대에서 중세로 변천해가는 과도기였다. 스탕비슈바라(펀자브 타네사르)의 왕 프라바카라바르다나의 둘째 아들인 하르샤는 형 라지아바르다나가 암살되고 불교의 관세음보살상과의 '교감'이 있은 후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곧 카마루파의 왕 바스카라바르만과 동맹을 맺고, 형의 암살자인 가우다의 왕 샤샹카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다. 처음에 그는 왕의 칭호를 취하지 않고 단지 섭정의 위치에서 행동했다. 그러나 지위를 확고히 한 후 자신을 칸나우지의 최고 통치자로 선포하고 수도를 칸나우지로 옮겼다. 그는 샤샹카를 무찌르지는 못했지만, 막강한 군사력으로 6년간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발라비·마가다·카슈미르·구자라트·신드로 여겨지는 '다섯 인도 왕국'들을 정복했다. 그의 영향력은 구자라트에서 아삼에까지 뻗쳤으나 직접적으로 통치한 지역은 펀자브와 라자스탄의 일부와 함께 지금의 우타르프라데시 정도였던 것 같다. 620년경 데칸 제국을 정복하려 했지만 찰루키아 황제 풀라케신 2세에 밀려 나르마다 강까지 후퇴했다. 하르샤는 북부지방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중앙집권화된 제국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고 정복한 지역 왕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물과 신하로서 예를 갖추는 데 만족하면서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통치했다.

하르샤는 하르샤의 초기 행적을 서술한 바나의 작품 〈하르샤의 공적 Harṣacarita〉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고, 하르샤의 절친한 친구가 된 중국인 구법승 현장(玄奘)의 작품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하르샤와 그의 강력한 불교적 인연으로 현장은 통치 초반에 정통적인 힌두교를 지원하던 하르샤를 확신에 찬 대승불교도로 묘사하고 있다. 하르샤는 자비롭고 정력적이며 공정하고 제국을 다스리고 번영시키는 데 적극적인 통치자의 모범으로 묘사되어 있다.

641년 그는 중국 황제에게 외교사절을 보내 인도와 중국 간의 첫번째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하르샤는 그의 제국 전역에 여행자와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위한 자선기관들을 설립했다. 많은 선물을 마련하여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5년마다 집회를 열어 과거 4년 동안 축적해온 보물들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연대기편자 바나와 서정시인 마유라 등 학자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 자신이 시인으로서 〈나가난다 Nāgānanda〉·〈라트나발리 Ratnāvalῑ〉·〈프리야다르시카 Priyadarśikā〉 등 3편의 산스크리트 작품을 지었다. 하르샤가 죽고 후기 굽타 왕조가 인도의 일부를 다스리게 되면서 무정부시대에 가까운 제국의 분열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