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나크

하르나크

다른 표기 언어 Adolf (Karl Gustav) von Harn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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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1. 5. 7, 러시아 에스토니아 도르파트
사망 1930. 6. 10,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신학자·역사가.

초기 교회교부들을 연구한 주요 학자로서 학문적인 노력을 인정받았다.

〈교리사 The History of Dogma〉(3권, 1886~89)·〈고대 그리스도교 문학의 역사 The History of Ancient Christian Literature〉(3권, 1893~1904) 등의 독창적인 작품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현대 세계와의 관련성을 신학적 독단론에서 찾지 않고, 종교를 역사적 발전과정으로 이해하는 데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1914년에 귀족에 봉해졌다.

하르나크는 그의 조상들이 독일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하르나크(1817~89)는 실천신학·조직신학 교수였는데, 처음에는 도르파트에서, 다음 13년 동안은 독일의 에를랑겐에서, 다시 죽을 때까지 도르파트에서 강의했다. 루터의 신학을 다룬 그의 주요작품은 아직도 널리 읽힌다. 아돌프 폰 하르나크는 에를랑겐·도르파트·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이단(영지주의)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874년 라이프치히대학교의 강사가 되었고, 2년 후에는 교회사담당교수로 승진했다.

1879년에는 기센으로 옮겼고, 1886년에는 마르부르크로 옮겨갔으며, 1888년에는 베를린대학교의 교수로 초빙받았다. 특히 역사상의 그리스도교 신조들의 타당성에 대한 그의 자유주의적인 신학 견해 때문에 베를린대학교의 교수직 임용은 프로이센 개신교회 최고협의로부터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총리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황제 빌헬름 2세에 의해 극복되었다.

빌헬름 2세는 하르나크가 베를린대학교에 임용된 해인 1888년에 황제가 되었다.

생애를 통해 하르나크는 신학과 교회사 분야에서 학문적으로 종사하기는 했지만 교회의 직위는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훌륭한 가르침과 탄탄한 학식으로 인해 열정적으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고, 그 제자들 중 다수가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역사가로서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기초적인 자료를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비판가로서의 주요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기를, "역사의 과정에 개입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통찰력이 부족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단지 역사적 과정에 놓인 하나의 대상물로 취급하거나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개입하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과거가 우리를 봉쇄하기 위해서 현재로 들어와 있을 때는 우리는 그 과거를 거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는 현재에서 옳은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를 예견하고 신중한 태도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르나크의 방대한 저술은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역사적 '발전'으로 해석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역사철학). 이것은 초기 독일의 성서 및 역사신학자들인 요한 잘로모 제믈러,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어, 알브레히트 리츨 등이 가르쳐온 것이다.

하르나크의 목적은 신학적 독단론을 역사적인 이해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된 그의 주요작품들에는 〈교리사 : 처음 3세기 동안의 그리스도교의 선교와 확장 The History of Dogma;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2권, 1902)·〈고대 그리스도교 문학의 역사〉가 있다. 그는 〈초기 3세기 동안의 그리스 그리스도교도 저자들 The Greek-Christian Authors of the First Three Centuries〉(1891~)이라는 비평본의 주요편집인이었다. 이런 저술들 외에 그는 〈신약성서〉와 고대 교회의 교리 및 제도에 관한 많은 학술논문을 출판했다.

신학자로서 그가 프로이센 아카데미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역사 The History of the Prussian Academy of Sciences〉(3권, 1900)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은 큰 영광이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현대 학문을 섭렵한 역사가로 인정받았다. 생애를 통해 그는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삶과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에 관해 몇 권의 심오한 연구서를 내기도 했다.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책인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 Das Wesen des Christentums〉(1900)는 그가 베를린대학교에서 했던 강의를 한 학생이 강의 도중 속기타자기로 기록하여 옮긴 것이다.

이런 모든 저서를 통해 하르나크가 목적한 것은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복음은 권위적인 교회의 법령이나 교리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교회의 교리로 체계화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복음이 현대세계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헬레니즘 세계에서 그리스도교가 살아 남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복음과 동일시되던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도그마로부터 복음을 해방시켜야만 한다는 그의 신념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애의 절정기에 3개의 중요한 지위를 가진 하르나크는(그들 중 하나의 지위를 갖는 것도 보통사람에게는 전적인 노력을 요구될 것임) 역사와 신학에 심오한 충격을 주었고 자연과학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베를린대학교의 교회사 교수로서 그는 역사와 신학이라는 학문에 중요하고도 창조적인 공헌을 했고, 그것을 인정받아 베를린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또한 프로이센 국립도서관의 관장이 되었고, 1911년 이후에는 카이저-빌헬름-게젤샤프트의 회장이 되었다. 하르나크는 이 재단을 위해 정부와 산업체로부터 지원을 받아냈고, 자연과학 및 의학 분야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하르나크는 1921년 은퇴할 때까지 내내 베를린대학교의 교수로 있었으며 은퇴할 때는 명예교수직을 수여받았다. 그가 죽은 후 열린 추모식에서 베를린대학교의 총장은 그를 다음과 같이 추도했다. "그는 고상하고 귀족적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관대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성격으로 온화함을 풍겼다.

대화할 때는 다른 사람이 그의 탁월함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대신 그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말했든지 간에 가장 만족할 만한 방법으로 다시 정리해줌으로써, 또한 그가 표현한 사상에 다른 사람이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함으로써 자신감을 갖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