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딩

하딩

다른 표기 언어 Warren G(amaliel) Har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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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5. 11. 2, 미국 오하이오 코르시카
사망 1923. 8. 2, 샌프란시스코
국적 미국

요약 제1차 세계대전에 뒤이어 과거 지향적인 '정상으로의 복귀'를 선언한 공화당 정강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임기 3년째 되던 해 죽었으며 캘빈 쿨리지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처신이 바르고 대중 연설 능력이 뛰어난 그는 공화당 선거 운동에 참여하면서 오하이오 주의 정계에 들어갔다. 주 상원의원(1899~1902), 부지사(1903~04) 및 연방 상원의원(1915~21)을 지냈는데 공직에 있는 동안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으며 보수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시카고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에서 막후협상을 통해 후보로 지명된 하딩은 '프런트 포치' 선거운동 방식을 택했다. 그는 국내 개혁이나 국제 사회에 대한 개입을 강요하지 않고, 겸손하고 별다른 요구도 없는 중서부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것이 전쟁에 지치고 환멸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호응을 얻게 되어 하딩은 일반투표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높은 60.3%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재임중 하딩은 대륙횡단 여행을 떠났다가 탈진한 상태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죽었다. 병명에 관해서는 여러 소문이 나돌았다. 하딩의 개인적인 정직성은 사후에도 의심받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커다란 신임을 받았던 많은 공직자들이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그의 정치적 순진성과 행정의 방만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하딩
하딩

제1차 세계대전에 뒤이어 과거 지향적인 '정상으로의 복귀'를 선언한 공화당 정강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임기 3년째 되던 해 죽었으며 캘빈 쿨리지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하딩은 20대에 오하이오 주 메리언에서 〈메리언 데일리 스타 Marion Daily star〉지를 발간했으나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1891년에 아내(플로렌스 클링 드울프)가 경영을 전담하면서부터 이 신문은 번창하기 시작했다. 하딩은 여러 지방회사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특히 공제조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처신이 바르고 대중 연설 능력이 뛰어난 그는 공화당 선거 운동에 참여하면서 오하이오 주의 정계에 들어갔다.

주 상원의원(1899~1902), 부지사(1903~04) 및 연방 상원의원(1915~21)을 지냈는데 공직에 있는 동안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으며 보수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시카고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1920. 6)가 3명의 뛰어난 경쟁자들의 경합으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유력한 보수 정치가들이 미국 정치에서 전통적으로 '막후 협상실'(smoke-filled room)이라고 알려지게 된 곳에서 야간 회의를 열어 타협적인 후보자로서 하딩을 지명하기로 결정했다. 후보로 지명된 하딩은 '프런트 포치' 선거운동 방식을 택했다.

그는 국내 개혁이나 국제 사회에 대한 개입을 강요하지 않고, 겸손하고 별다른 요구도 없는 중서부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것이 전쟁에 지치고 환멸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호응을 얻게 되어 하딩은 일반투표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높은 60.3%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하딩의 건의에 따라 의회는 연방정부를 위한 예산체제를 편성하고, 보호주의적 성격이 강한 포드니-매컴버 관세법을 통과시키고, 전시의 과세 체계를 개선했으며, 이민을 제한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하딩 행정부는 1922년 워싱턴 회담을 개최하여 군사력을 제한하고 감축하는 내용의 조약을 협상하기도 했다.

하딩의 가장 큰 취약점은 각료의 선발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내각에 대한 감독이 허술한 점, 공직을 맡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신인 정치가거나 부정직한 인물인데도 친구 또는 후원자라는 이유로 하위 공직에 임명한 점이다. 1923년 봄에 행정부의 부패에 관한 소문들이 워싱턴 정가에 나돌았다. 토머스 J. 월시 상원의원은 앨버트 B. 폴 내무장관이 연방 소유의 유전 지대를 재계의 친구들에게 비밀리에 빌려준 '티폿돔 부정사건'을 폭로하기 위해 증거들을 수집하고 다녔다. 조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하딩은 대륙횡단 여행을 떠났다(7. 20).

그는 탈진한 상태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죽었다. 병명에 관해서는 여러 소문이 나돌았다. 하딩의 개인적인 정직성은 사후에도 의심받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커다란 신임을 받았던 많은 공직자들이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그의 정치적 순진성과 행정의 방만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들 중 일부는 사기죄로 장기복역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