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하디

토마스 하디

다른 표기 언어 하디 , Thomas Hardy
요약 테이블
출생 1840. 6. 2, 잉글랜드 도싯 어퍼보컴프턴
사망 1928. 1. 11, 도싯 도체스터
국적 영국

요약 〈테스〉를 쓴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이다.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의 한 건축회사에서 일하며 시와 소설을 썼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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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성숙기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개요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영국 남서부 지역의 한 가공의 시골 '웨식스'를 배경으로 씌어졌다.

이런 작품으로는 〈귀향 The Return of the Native〉(1878)·〈캐스터브리지의 시장 The Mayor of Casterbridge〉(1886)·〈테스 Tess of the D'Urbervilles〉(1891)·〈미천한 사람 주드 Jude the Obscure〉(1895) 등이 있다.

초기생애

하디는 건축업자이며 숙련된 석공이었던 토머스 하디와 한 제미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양친은 모두 오래 전부터 도싯에 정착했던 가문 출신이었다.

하디는 네 자녀 중 맏이였다. 어린시절 허약한 편이었으나 8세에 벅햄프턴에 새로 생긴 마을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년 뒤 도체스터에 있는 비국교도 학교에 들어갔다. 그후 이 학교의 교장이 도체스터에 아카데미라는 학교를 열었을 때 하디는 그를 따라 이 학교로 왔다. 이 교장은 유능한 라틴어 학자였으며 하디에게 고전 작가들에 대한 사랑을 고무시켜 하디의 작품에는 그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856년 학교를 떠나 도체스터에서 개업하고 있던 건축가이자 교회 복원자인 존 힉스의 제자가 되었다. 그당시 하디는 사제가 될 생각으로 폭넓은 독서를 했다. 1862년 도체스터를 떠나 런던으로 향했고 유명한 건축가이며 후에 아서 경이 된 아서 블럼필드와 함께 일자리를 얻었다. 이 건축가는 고딕 양식 설계사로 교회와 사제관을 설계하고 복원했다. 건강의 악화로 도싯으로 되돌아와야 했던 1867년까지 블럼필드와 일했고 도싯에 돌아와서는 또다시 힉스를 위해 일했다. 런던에 체류하던 시절 하디는 진지하게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씌어진 시 가운데 〈중립의 목소리 Neutral Tones〉는 그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하고 특성이 있다. 하디의 시에는 미성숙·성숙·쇠퇴 같은 단계가 없고 우수한 작품과 열등한 작품이 혼재하며 시의 양식도 중대한 변화를 겪지 않았다.

1867~68년에 첫 소설 〈가련한 남자와 숙녀 The Poor Man and the Lady〉를 썼는데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두 출판사로부터 지나치게 풍자적·사회주의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두 출판사 중 하나인 채프먼앤드홀출판사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던 소설가 조지 메러디스는 하디에게 더 순수한 예술적 의도를 지닌 복잡한 구성의 소설을 써보라고 충고했는데, 하디는 이 충고를 충실하게 받아들여 처음으로 〈최후의 수단 Desperate Remedies〉(1871)을 출판했다.

1870년 3월 그는 웨이머스 지방의 한 건축가로부터 교회 복원사업 관계차 콘월 주에 있는 보즈캐슬 부근의 세인트줄리엇으로 가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곳에서 사제의 처제이며 후에 하디의 아내가 된 에마 라비니아 기퍼드를 만났는데, 이와 같은 만남과 배경은 40년 뒤 그의 가장 통렬한 시 〈옛 연인의 자취 Veteris Vestigiae Flammae〉에서 재창조되었다. 〈최후의 수단〉은 익명으로 출판되었고 독자들의 반응은 찬사와 비난의 반반이었다. 1872년 하디는 런던으로 돌아와 건축업을 했고, 이때 〈녹음 아래에서 Under the Greenwood Tree〉를 써서 1872년 5월 출판했다.

그뒤에 나온 비극 소설과 비교해볼 때 이 작품은 멜스톡 성가대를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구애를 섬세하게 다루면서 유머와 동정적인 시각을 두드러지게 표현한 작품이었다. 웨식스 소설들 중 첫번째 작품이지만 이 웨식스에서 쓴 소설들이 전원의 리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하디의 그다음 소설 〈푸른 눈동자 A Pair of Blue Eyes〉는 〈틴슬리 매거진 Tinsley's Magazine〉에 연재되었는데(1872~73) 배경과 사소한 세부묘사는 세인트 줄리엇과 그 주변에서 따온 것이다.

1873년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 Far from the Madding Crowd〉를 쓰기 시작해 1874년 〈콘힐 매거진 Cornhill Magazine〉에 익명으로 연재했다. 이 작품은 인기를 얻은 첫 작품이었으며 이 소설의 성공으로 완전히 작품에만 전념할 자신을 얻게 되었다.

또한 이 작품은 처음으로 '전형적인' 하디식 소설로 간주될 수 있는데, 시골 사람들을 익살맞게 표현했고 해피 엔딩으로 결말지어졌으나 구성과 일반적인 어조가 희극보다는 비극에 더 가깝다. 하디가 연재 형태로 대부분의 소설을 출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디가 자신의 소설에 대한 초연한 태도를 잘 설명해준다. 이 사실은 또한 그의 작품이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는데 매회분의 내용이 1개월 뒤 그 다음 회가 나올 때까지 독자의 관심을 지속될 수 있도록 강렬하게 끝맺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디는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가 연재되고 있던 당시 레슬리 스티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언젠가는 더 높은 목표를 가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현재의 상황으로는 능란한 연재 작가로 여겨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말년에 이르러 그의 유일한 야심은 프랜시스 펄그레이브의 〈명작 시집 Golden Treasury〉 같은 명시선에 실릴 만한 시를 쓰는 것이었다. 하디는 1874년 8월 에마 기퍼드와 결혼했다. 신혼초에는 런던·도싯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다가 1885년 맥스게이트에 정착했는데 도체스터 교외에 집을 짓고 평생 동안 살았다.

성숙기

1878~95년은 하디가 소설가로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귀향〉·〈수석 트럼펫 연주자 The Trumpet-Major〉·〈캐스터브리지의 시장〉·〈삼림지대 사람들 The Woodlanders〉·〈테스〉·〈미천한 사람 주드〉 등을 발표했다. 이에 나타난 하디의 금욕주의적 비관주의는 후에 쓴 산문시극 〈패왕 The Dynasts〉에서 가장 명확하게 개진된 '내재 의지'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었고, 또한 이 소설들에는 인간의 삶은 불가피하게 비극적이라는 생각이 반복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따금 하디는 파멸을 가져오는 우연의 일치를 사용해 소재를 자신의 관점에 맞게 억지로 왜곡시키는 인상을 주었는데, 〈귀향〉의 여브라이트 부인의 죽음을 부른 사건들, 테스가 엔젤 클레어에게 고백의 편지를 쓰는 운명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하디의 비극은 이따금 멜로드라마로 전락하는데, 〈미천한 사람 주드〉의 '시간 영감'의 에피소드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의 헨차드와 테스의 이야기에는 진정한 비극이 가져다주는 장중함이 있다. 특히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에서 헨차드의 과거가 점차 가혹하게 드러날 때 이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Oedipus〉의 무의식적인 회상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며, 한편 마을 사람들이나 캐스터브리지 주민들의 역할은 그리스 비극의 합창 해설과 유사하다. 그러나 웨식스 지방과 시골생활, 그리고 어느 정도 틀에 박힌 것이지만 시골 언어에 대해 친숙하게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소설들을 그리스 비극을 영국 시골에 접목시키려는 의도로만 여길 수 없게 만들고 있다.

〈테스〉를 쓰면서 하디는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관습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일부 장면은 삭제되어 연재되었고 일부는 변경되었다. '한 순결한 여인에 대한 진실된 묘사'라는 부제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사생아를 낳았고 함께 살았던 남자를 살해한 죄로 결국 교수형을 당하는 여자가 동정과 이해로 대접받는다는 것이 기존의 도덕 기준에 대한 모욕으로 비쳐졌다.

〈미천한 사람 주드〉는 더 큰 분노를 유발시켰다. 이 작품에서는 기혼 남녀가 각각 자신의 배우자를 버리고 동거하여 아이를 낳는데도 저자는 이들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웨이크필드의 주교는 이 책을 불 속에 집어던졌다고 공표했고 한 대형 서적상은 이 책이 유통되지 못하도록 회수했다. 그러나 이 두 소설들의 윤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두 소설에서는 똑같이 '죄의 대가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하디의 죄는 죄인들을 타락한 악마가 아니라 불행한 인간으로 그렸다는 것이었다.

〈미천한 사람 주드〉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하디에게 혐오감을 가져다주어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고 시를 쓰는 데 온 힘을 쏟게 했는데, 그는 항상 시를 소설보다 훨씬 중요시했다.

1898년 그 이전에 썼던 많은 시를 포함해 〈웨식스 시집 Wessex Poems〉을 발표했고, 1901년 〈과거와 현재 시집 Poems of the Past and the Present〉을 발표했으며, 그후에도 여러 시집을 냈다. 1903~08년 3번에 나누어 장편 시극 〈패왕〉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상연할 수 없는 작품이었으며, 상연할 의도로 씌어진 작품도 아니었다.

이 시극은 나폴레옹 전쟁을 소재로 다루었고 대부분이 무운시로 씌어졌지만 웨식스 지방 농민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가벼운 장면은 산문으로 처리되었다. 이 작품에 기울인 노력은 인상적이었지만 산문 성격을 띤 많은 무운시 때문에 완전한 성공작은 아니었다. 비극적인 소설 속에 은연중 내포되어 있던 '내재 의지'가 가장 명백하게 언급된 작품은 〈패왕〉이다. 즉 이 의지는 '선도 악도 모르는' 무심하고 무의식적인 힘이며 우주의 원동력이다. 이런 충동적인 힘의 결과는 거의 언제나 변함없이 파멸을 초래한다. 〈패왕〉에서는 이 힘이 자의식으로 성숙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개념이 가장 잘 표현된 시는 1912년에 씌어진 〈타이태닉호의 침몰 The Convergence of the Twain〉이다.

1910년 하디는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1912년 11월 27일 하디 부인이 죽었다. 결혼생활이 행복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하디는 몹시 애도했고, 〈옛 연인의 자취〉라는 걸작의 시집에서 자신의 슬픔을 잘 표현했다. 이 시집에는 〈목소리 The Voice〉·〈여행을 다녀와서 After a Journey〉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14년 하디는 비서인 플로렌스 에밀리 덕데일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하디 사후에 그의 전기를 썼다. 하디는 거의 임종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시를 썼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출생지 부근의 스틴스포드의 교회에 매장되었다. 각색된 그의 작품들이 영화나 텔레비전을 매체로 해 흥미를 자극시킨 덕분에 하디는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 중 가장 널리 읽히는 작가이며 많은 비평과 학술 논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를 더욱 기쁘게 해주는 것은 아마도 시인으로서의 천재성과 중요성을 널리 인정받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