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발

폼발

다른 표기 언어 Sebastião de Carvalho, marquês de Pombal 동의어 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 1st Marquis of Pombal, 1st Count of Oeiras, Conde de Oeiras
요약 테이블
출생 1699. 5. 13, 리스본
사망 1782. 5. 8, 포르투갈 폼발
국적 포르투갈

요약 포르투갈의 개혁가, 실질적인 통치자(1750~77).
정식 이름은 Sebasti대체이미지o Jos대체이미지 de Carvalho e Mello, Marqu대체이미지s de Pombal. Conde de Oeiras라고도 함(1759~69).

폼발(marquês de Pombal)
폼발(marquês de Pombal)

기병대장이며 왕실 귀족이었던 마누엘 데 카르바요 아타이데의 아들로, 아버지가 요절한 후 어머니는 재혼했다.

쿠임브라대학교의 교수이자 가톨릭 수석사제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삼촌 파울루 데 카르바요는 폼발을 쿠임브라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폼발은 학업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해 상병계급까지 진급했다. 곧 군대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군을 떠나 역사와 법률공부에 전념했으며 34세에 포르투갈역사대학에 입학했다. 1733년 폼발은 콘데 데 아르코스의 조카인 과부 테레사 마리아 데 노로냐에 알마다와 결혼했다. 그들은 쿠임브라 근처의 소레 마을로 이주해 농장을 마련했고 폼발은 이곳에서 학문과 농사에 열중했다.

1738년 리스본으로 귀향한 그는 삼촌의 도움으로 당시 국왕 주앙 5세의 총리였던 주앙 다 모타의 천거를 받아 영국주재 포르투갈 대사에 임명되었다. 허약했던 그의 아내는 함께 영국으로 가지 못하고 1739년에 죽었다.

폼발은 외교 경력을 통해 정치적 영역까지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수차례의 외교적 협상과정에서 보여준 열정적인 업무 스타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런던에 머물렀던 7년 동안 영국의 정치·경제·사회 현상을 면밀하게 공부했다. 1745년 리스본으로 돌아온 후 즉시 빈 주재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로마 교황청 간의 분쟁해결을 위한 중재자로 나섰다.

중재의 성공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으나 그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여제의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곳에서 다운 백작의 딸 엘레오노라 폰 다운과 사랑에 빠져 1745년 12월 재혼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기후가 그에게 맞지 않아 전권대사직을 사임하고 1749년말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국왕 주앙 5세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나마 폼발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그러나 주앙 5세가 죽은(1750. 7. 31) 후 그를 총애하던 왕비 마리아 아나가 그를 왕실회의의 일원으로 임명했다. 왕위계승자인 주세 왕자는 즉위하자마자 폼발을 다른 2명의 총신과 함께 총리자리에 앉혔다. 폼발은 이때부터 포르투갈의 정치를 장악했고 국왕은 그에게 무한한 재량권을 부여했다. 이른바 '폼발 후작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폼발은 국내 행정개혁에 착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포르투갈의 명성을 높이는 데도 성공했다.

그는 영국의 제조품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영국이 상당량의 포르투갈 금을 가져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반면에 특정 원자재의 수출을 금지하고 비단·모직·도자기·유리 산업을 육성함으로써 국내산업을 발전시켰다. 동방무역을 개설하기 위해 영국이 시도한 것처럼, 인도와의 무역을 위한 회사를 설립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브라질과의 통상을 목적으로 설립한 '콤파냐 도 그랑파라'는 성공적이었다.

1755년 11월 1일 리스본의 1/3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은 대지진이 일어나 폼발의 개혁 작업에 제동이 걸렸다. 그는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보급품을 공급하고 피난처와 병원을 설치했다. 동시에 재해 발생 직후에 그는 이미 도시 재건계획을 구상해놓았다. 이렇게 해서 건축가 에우게니오 도스 산투스의 설계에 따라 중세의 리스본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은 그의 위상을 한층 높여놓았고 국왕의 신임도 더욱 확고부동해졌다.

그러나 폼발의 부상은 처음부터 강력한 두 집단인 고위귀족층과 예수회로부터 질시와 견제를 받고있었다. 그러던 중 1758년 9월 3일 밤 국왕 살해 음모가 무산된 사건이 발생했다. 폼발은 이 사건을 빌미로 자신의 정적인 고위귀족들과 예수회파를 국왕살해 음모자로 몰아 제거해나갔다. 폼발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법정은 아베이루 공작과 타보라가(家) 사람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으며 그들은 심한 고문 끝에 모두 죽었다(1759. 1. 12). 이어서 폼발은 예수회 인사들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여 예수회 사람들은 대부분 로마로 추방되거나 일부는 유죄가 입증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귀족들과 함께 투옥되었다(타부라 음모). 폼발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1759년 오에이라스 백작작위를 받은 그는 계속해서 대학교육 개혁, 상업교육의 도입, 무역회사 창설, 군의 재편성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1769년 9월 국왕은 그에게 폼발 후작작위를 내렸다. 그러나 1777년 2월 24일 주세 왕의 죽음과 함께 폼발의 모든 권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여왕 마리아 1세가 즉위한 후 정치범들은 석방되었고 폼발은 권력남용죄로 구속되었다. 1779년 10월부터 1780년 1월까지 재판부의 가혹한 심문 끝에 유죄판결을 받고 마리아 여왕에 의해 리스본에서 추방된 후 폼발로 내려가 1782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