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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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 용어는 원래 공공건물이나 입구 앞에 있는 공간을 가리키는데 쓰였다. 로마에서 이 말은 대규모 공공집회가 열리는 평지를 가리켰다. 포룸이 주로 종교적·세속적 볼거리와 행사의 중심지였던 로마 시대에는 웅장한 신전과 기념물이 포룸에 세워졌다. 카스토르-풀룩스 신전, 카이사르 신전, 마메르티누스 감옥, 쿠리아, 사투르누스 신전, 베스타 신전, 로물루스 신전, 티투스 개선문 등이 그 예다. BC 1세기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제안으로 트라야누스의 포룸은 2세기에 가로와 세로의 비율을 3 대 2로 세워졌다. 포럼의 미학적 조화는 그후 많은 도시 계획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포룸 바닥은 대개 포장되어 있었으며, 입구가 문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폼페이에서 이 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포룸(forum)
포룸(forum)

공공집회 장소로 쓰인 포룸은 그리스의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를 질서정연한 공간으로 바꾼 것이다(→ 아크로폴리스).

12표법에서 포룸은 무덤의 전실(前室)을 가리키는 낱말로 쓰였고, 로마 군대에서는 진영의 정문 옆에 있는 개활지를 가리켰다. 따라서 이 용어는 원래 공공건물이나 입구 앞에 있는 공간에 널리 적용되었다. 로마에서 포룸이라는 말은 팔라티누스 언덕과 카피톨리누스 언덕 사이에 있는 평지(포룸 로마눔)를 가리켰다.

원래 습지였던 이 평지에서는 왕정시대에도 아레아 카피톨리나(주피터 신을 모신 카피톨리누스 신전의 안마당)에서 열 수 없는 대규모 공공집회가 열렸다. 초기에 포룸 로마눔은 검투경기장으로 쓰였고, 주랑 위에는 관람석이 있었다. 또한 여기에는 다양한 상점도 있었다. 포룸이 주로 종교적·세속적 볼거리와 행사의 중심지가 된 로마 제국 시대에는 로마에서 가장 웅장한 신전과 기념물의 대부분이 이곳에 세워졌다. 오늘날 온전하게 또는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구조물로는 카스토르-풀룩스 신전, 카이사르 신전, 마메르티누스 감옥, 쿠리아(원로원), 사투르누스 신전, 베스타 신전, 로물루스 신전, 티투스 개선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그리고 대하수구 등이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새로운 형태의 포룸인 포라 키빌리아(법정)와 포라 베날리아(시장)도 상당히 많이 생겨났다. 포룸 로마눔 이외에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은 전자에 속하고, 포룸 보아리움(가축 시장)과 포룸 홀리토리움(야채 시장) 따위는 후자에 속한다.

BC 1세기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대규모 군중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크되 소규모 군중을 왜소해 보이게 할 만큼 크지는 않은 것이 이상적인 포룸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로와 세로의 비율을 3 대 2로 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다. 로마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포룸은 바로 이 비례에 따라 2세기에 세워졌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의뢰로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루스가 설계한 이 포룸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280m, 190m 정도이며, 면적은 약 10㏊에 이른다. 삼중으로 된 입구를 통해 주랑으로 둘러싸인 안으로 들어가면, 벽을 따라 상인들의 노점이 들어서 있었다. 포룸 옆에는 주랑으로 둘러싸인 2개의 커다란 반원형 의자가 있다. 입구 맞은편에는 바실리카 울피아 성당이 있고, 그 너머에는 트라야누스의 승리를 조각한 트라야누스의 기둥이 있다. 이 공간의 미학적 조화는 그후 많은 도시 계획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폼페이에는 포룸의 북동쪽 끝에 마켈룸(시장)과 식료품 가게들이 있었고, 동쪽에는 직물 거래소가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팀가드에는 포룸의 북쪽 전체를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포룸의 바닥은 대개 포장되어 있었으며, 축제가 열릴 때면 전차들이 지나다녔지만 주요도로는 아니었고, 입구가 문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폼페이에서 이 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