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2세

페르난도 2세

다른 표기 언어 Fernando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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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52. 3. 10, 아라곤 소스
사망 1516. 1. 23, 스페인 마드리갈레호
국적 아라곤

요약 아라곤의 왕.
(영). Ferdinand Ⅱ. 별칭은 가톨릭 왕 페르난도(Fernando el Cat대체이미지lico).

1479년부터 여왕 이사벨 1세와 공동 군주로서 카스티야의 왕(페르난도 5세)을 겸했다(그는 또한 이탈리아 남부를 다스린 스페인 통치자로서, 나폴리에서는 페르디난도 3세, 시칠리아에서는 페르디난도 2세로 불렸음). 그는 스페인의 여러 왕국을 통일하여 스페인을 단일 국가로 만들었고, 이때부터 스페인은 근대 제국주의 팽창기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페르난도는 아라곤의 후안 2세와 후아나 엔리케스(양친 모두 카스티야 출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위 계승 다툼이 한창 치열하던 1461년에 후안 2세는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후안 2세는 궁극적으로는 아들을 카스티야 왕위에 앉히고 싶어했기 때문에, 카스티야 궁정에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1466년에 성년을 맞은 아들을 1468년에 시칠리아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의 장래는 보장되었다.

젊은 왕자는 궁정 생활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카탈루냐 전쟁 때는 직접 전투에도 참가했다. 1468년 여름에는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여 여자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이리하여 태어난 아이가 아라곤의 알폰소와 후아나였다. 알폰소는 나중에 사라고사 대주교가 되었고, 아버지 페르난도의 총애를 받았다.

후안 2세는 페르난도의 교육에 많은 정성을 쏟아, 그 교육을 몸소 감독했으며 페르난도가 체험을 통해 되도록 많은 것을 배우게 하려고 애썼다.

후안 2세가 선정한 교사들은 페르난도에게 인문주의적인 견해를 가르쳤고, 통치술에 관한 글을 써서 읽히기도 했다. 페르난도는 틀에 박힌 딱딱한 학문은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예술의 후원자였고 음악에 심취했다. 페르난도는 인상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결코 상냥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현명함과 정직함, 용기, 계산된 자제력을 물려받았고, 어머니에게서 충동적인 성격을 물려받았지만 이러한 것을 평소에는 억누르고 있었다.

국왕의 막중한 책임 때문에 그는 좀더 강한 열정을 감추고 냉정하고 완고한 가면을 써야 했다. 그는 1469년 10월 바야돌리드에서 카스티야이사벨 공주와 결혼했다. 이것은 사랑의 결합이 아니라 정략 결혼이었다. 아라곤 궁정은 카스티야로 복귀할 꿈을 꾸었고, 이사벨은 카스티야의 왕위계승권을 얻기 위해 도움이 필요했다. 이 결혼으로 페르난도는 우울하고 어수선한 생활을 시작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통일은 이처럼 정략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페르난도는 이사벨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사벨은 곧 자식을 낳았다. 1470년에 태어난 공주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왕위 후계자 후안은 1478년에 태어났고, 공주인 후아나('미치광이 후아나'라는 뜻의 후아나 라 로카로 불림)와 카탈리나(뒤의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의 첫 아내가 되어 아라곤의 캐서린이라고 불림) 및 마리아가 잇달아 태어났다. 그러나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신혼 때부터 거의 끊임없이 별거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카스티야의 여러 도시들을 순방하거나 아라곤으로 여행하느라 카스티야 궁정을 자주 비운 페르난도는 아내에게 너무 편안하게 산다고 나무랐다. 또한 20년에 걸친 불안정한 생활은 다른 여자들의 품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는 다른 여자들에게서 적어도 딸을 둘 낳았지만, 이들이 태어난 연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20~30세에 페르난도는 일련의 영웅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이 위업은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가 왕위 계승자를 확정하지 않은 채 1474년 12월 11일에 세상을 떠났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사벨은 12월 13일에 세고비아에서 스스로 카스티야의 여왕임을 선언했고, 페르난도는 사라고사에서 세고비아로 달려갔다. 이곳에서 페르난도는 여왕의 부군이라는 불편한 신세로 1479년까지 머물러 있었다. 이사벨은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벌인 왕위계승전쟁에서 승리한 뒤 페르난도를 명실상부한 왕으로 인정했다(1479). 같은 해에 아라곤의 후안 2세가 죽자, 페르난도는 아라곤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리하여 제도적으로 근대 스페인의 기초가 된 두 왕국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이무렵에 일어난 사건들은 젊은 왕의 성격을 좀더 분명히 보여준다. 초상화에 묘사된 페르난도의 모습은 부드럽고 균형잡힌 이목구비, 작고 육감적인 입과 애수 어린 눈을 갖고 있다. 글로 묘사된 그의 모습은 좀더 복잡하지만, 그가 중키의 잘 생긴 남자이고 말을 잘 탔으며 놀이와 사냥에 열중했다는 데에는 모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그는 맑고 우렁찬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제법 그럴 듯한 '여자의 남자'였고, 이때문에 오랫동안 이사벨의 질투를 받았다.

1475~79년에 페르난도는 젊은 아내와 함께 카스티야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으며, 아라곤 왕국의 제도에서 일부 착상한 새로운 제도적 틀을 이용하여 카스티야 왕국을 정치적으로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이 근대화 정책에는 가톨릭 이외의 다른 종교를 금지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종교적 획일성을 강요하기 위한 스페인 종교재판소 설치(1478)와 유대인 추방(1492)은 둘 다 교회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정책의 일부였고, 이렇게 하여 강화된 교회는 왕을 지지하게 되었다.

페르난도는 1482~92년을 정신 없이 지냈다. 봄이면 그라나다 왕국에 대한 원정대를 몸소 지휘하여 군사적 재능을 효과적으로 과시했으며, 그라나다 왕국을 조금씩 점령하다가 마침내 1492년 1월 2일에는 그라나다의 최후 항복을 받아냈다. 전쟁을 하지 않고 쉬는 달에는 자신의 왕국들을 방문하여 지형을 직접 익히고 문제점을 파악했다. 그라나다 정복으로,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항해를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페르난도가 콜럼버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또는 콜럼버스의 계획을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첫번째 항해가 아라곤 왕국의 재정지원으로 이루어졌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115만 7,000마라베디에 이르는 항해 자금은 '산타 에르만다드'라는 단체의 기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르난도는 이 모험적인 사업에 대해 교황의 지지를 얻기 위한 교섭 및 항해 결과로 생긴 아메리카 식민지를 조직하는 일에 모두 참여했다.

50세 때 페르난도는 왕권의 화신이었고, 행운은 계속 그의 편이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특히 페르난도가 이탈리아에 개입했기 때문에 1496년 12월 2일 그에게 '가톨릭 왕'이라는 명예칭호를 주었다(이탈리아 전쟁). 그러나 그는 잇따른 비극도 겪어야 했다. 후계자와 맏딸이 죽었고, 딸 후아나마저 광기의 초기 증상이 나타났다. 1493년에 바르셀로나에서 부상을 당했지만, 이것은 그가 겪은 가족의 불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불행은 1504년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왕비' 이사벨의 죽음으로 최고에 달했다.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에서 자신의 지위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1505년 10월 19일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의 조카인 제르멘 드 푸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도 역시 정략결혼이었지만, 항상 아내에게 최고의 경의와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1506~07년에 이탈리아에 머물렀는데, 그의 부재는 그가 스페인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반증해 주었다. 다시 카스티야로 돌아온 페르난도는 유럽 정책을 교묘히 추진했다. 이 정책은 지중해 지역과 아프리카에 대한 팽창주의를 달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교회가 분열한 직후인 1512년 그는 교회 분열에 개입한 나바라 왕국을 점령하여 카스티야에 합병시켰다. 이것은 그의 통치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1513년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대외 정책을 주도하고 손자(뒤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왕위계승을 준비했다. 1516년초에 그라나다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길에 성녀 과달루페의 성소가 있는 작은 마을 마드리갈레호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 그는 마지막 유언장에 서명했는데, 이 문서는 페르난도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뛰어나게 묘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페르난도를 그의 왕국들의 구세주이며 통일의 아버지로 생각했지만, 억압자라는 이유로 싫어한 사람들도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르네상스 시대 군주의 반감을 살 만한 특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페르난도를 개인적으로 잘 아는 독일의 여행가 토마스 뮌처와 이탈리아의 외교관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그를 샤를마뉴 대제에 비유했다.

그의 유언장은 그가 또렷한 의식을 가진 상태로 죽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언장에서 시신을 그라나다로 옮겨 아내 이사벨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도록 그 곁에 묻어달라고 명령했다. 그는 스페인 왕국이 지난 700년 동안 그렇게 강력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그 모든 것은 내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일하고 노력한 덕분"이라고 확신하면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