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키스탄

투르키스탄

다른 표기 언어 Turkistan
요약 테이블
위치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중앙 아시아 지역
면적 약 2,600,000㎢
국가 아프가니스탄,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요약 아시아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중앙 아시아의 여러 지역.
Turkestan이라고도 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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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 역사
  2. 러시아의 투르키스탄 침략
  3.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투르키스탄(Turkistan)
투르키스탄(Turkistan)

북쪽으로 시베리아, 남쪽으로 티베트·인도·아프가니스탄·이란, 동쪽으로 고비 사막, 서쪽으로 카스피 해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투르키스탄이라는 명칭은 원래 투르크족이 사는 지역을 뜻하지만 실제로는 옛 오스만 제국의 투르크족과 볼가 지역의 투르크-타타르 민족들을 비롯한 일부 투르크족의 거주지역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으며, 반대로 타지크인들처럼 투르크족이 아닌 민족들의 거주지역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투르키스탄은 파미르 고원과 톈산 산맥[天山山脈]을 사이에 두고 서투르키스탄(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 및 카자흐스탄 남부지역)과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 옛날의 신장 성]인 동투르키스탄으로 나누어진다. 1920년대 중반 이후 한동안 행정상 카자흐스탄을 제외한 서투르키스탄은 소비에트 중앙 아시아로 알려졌다.

지도
투르키스탄 위치

초기 역사

투르키스탄의 역사는 BC 2세기초 훈족의 카슈가리아 정복과 함께 시작되었다. 훈 제국이 무너진 후 동투르키스탄은 중국에 합병되었으며, 서투르키스탄에는 400년경 에프탈족의 제국이 세워졌다. 6세기에 처음 나타난 터키인들은 아무다리야 강(고대명은 옥수스) 동쪽의 트란속사니아에 정착했다.

트란속사니아는 8세기에 아랍인들에게 정복되었으며 아랍인의 후예인 페르시아 사만 왕조 시대에 크게 번성했다. 같은 무렵, 몽골에서 온 위구르인들이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해 지금까지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투르키스탄 전역은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족이 나타날 때까지 여러 투르크 군주들의 지배를 받았다. 칭기즈 칸은 1218년에 카슈가르, 1220년에 트란속사니아를 점령하고 둘째 아들 차가타이에게 투르키스탄을 물려주었다. 그후 차가타이의 후손들은 트란속사니아와 동투르키스탄을 각각 나누어 통치했다. 1369년 티무르가 트란속사니아를 점령하고 사마르칸트를 제국의 수도로 삼았으나 티무르가 죽은 후 그의 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다툼이 일어나 마침내 1500년 우즈베크족 우두머리 샤이바니 칸이 티무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트란속사니아에 자신의 왕조를 세웠다. 1세기 동안에 걸친 불안정한 지배 끝에 샤이바니 왕조가 무너지고 아슈타르하니(또는 아스트라한) 왕조가 대신 들어섰으며, 아슈타르하니 왕조는 다시 1740년 나디르 샤의 손에 무너졌다. 그후 서투르키스탄은 주로 적대적인 세 국가인 부하라·히바(호레즘)·코칸드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동투르키스탄에서는 차가타이 한국이 북동 지방을 서몽골족의 중가르 지파(칼미크족)에 넘겨주었으며, 남서쪽의 오아시스들은 호자스로 알려진 종교 귀족층이 지배했다. 1762년 동투르키스탄 전체가 청(淸)나라에 합병된 후 동투르키스탄의 역사는 서투르키스탄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러시아의 투르키스탄 침략

18세기에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까지 깊숙이 침략해 들어온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투르키스탄 북쪽 변경에 정착하여 아랄 해 양편에 동서로 이어진 요새들을 세웠다. 1850~90년에는 경제적·정치적 이유로 러시아가 서투르키스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부하라 칸국과 히바 칸국만이 전통적인 군주가 지배하는 부분적인 독립국으로 남게 되었다.

서투르키스탄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안정을 얻게 되었으며, 경제·교통·관개 시설도 크게 발전했다. 러시아 정부가 주민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거의 간섭하지 않으면서 이들의 교육을 소홀히 한 결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는 문맹률이 약 97%에 이르렀다. 표트르 스톨리핀 정부 시대(1906~11)에는 유럽에 사는 러시아인들에 의한 투르키스탄 식민지 개척이 이루어져 많은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왔다.

외부인들에게 토지와 물을 우선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준 것이 1916년 반란의 발단이 되었는데 이전에는 의무 병역에서 면제되었던 지방 주민들 가운데 노역병 징집이 결정되자 반란은 더욱 기세가 높아졌다. 반란은 결국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생긴 주민들과 러시아 정부간의 갈등으로 주민들은 뒤에 소비에트 정권을 지지하게 되었다.

1917년 혁명에 앞서 일어났던 민족주의 소요는 러시아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문화와 사법권을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혁명 후에 일어난 내전의 결과 순수한 민족주의 봉기가 몇 차례 일어났으나 결국 소비에트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 이 지역에 대한 레닌과 스탈린의 정책은 여러 민족들을 정확하게 분류한 다음 행정구역을 개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24년 행정개편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우즈베크·투르크멘·키르기스·타지크·카자흐 등 5개 주요민족을 위한 연방 공화국이 각각 수립되었다. 동투르키스탄은 1762년 중국에 넘어갔고 1884년에는 신장 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행정체계에 편입되었지만 19세기 후반까지도 러시아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는 1871~81년 쿨드자와 타란치 술탄령을 점령했으며, 1911년 청이 무너지고 서투르키스탄에 소비에트 정권이 토대를 굳힌 후 더욱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1912년 이후 군벌들의 지배아래 있던 신장 성의 성장 성스차이[盛世才]는 1942년 중국정부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정부에 대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난 후 어느 정도 자치권이 주어졌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신장에도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1950년에는 중국 해방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955년 공산 정권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수립을 공표하고, 자치구 안의 위구르족이 아닌 다른 비중국계 민족 사회에도 상당한 자치지역을 주었다. 소련이 석유, 야금, 그밖의 다른 기업에 대한 공동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소련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