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켈라우

토켈라우

다른 표기 언어 Tokelau
요약 테이블
위치 남태평양 중부
인구 1,499명 (2016 추계)
면적 10.12㎢
대륙 오세아니아
국가 뉴질랜드

요약 남태평양에 있는 뉴질랜드령 제도.
Toke-lau Islands(1946∼76)라고도 함.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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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연환경
  2. 국민
  3. 경제
  4. 정치와 사회
  5. 역사
토켈라우
토켈라우

서사모아에서 북쪽으로 480km, 하와이에서 남서쪽으로 3,900km 떨어져 있다.

지도
토켈라우 위치

자연환경

파카오푸(2.56㎢)·누쿠노누(4.5㎢)·아타푸(2㎢)의 3개 환초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일렬로 늘어서 있다. 각각의 환초는 '모투'라고 불리는 매우 많은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투는 해안 가까운 곳에 있는 산호초에 있다. 초호는 매우 얕고 산호초가 바다 위로 드문드문 솟아 있어서 항해가 불가능하다.

해발 2.4∼4.5m의 저지대이며, 토양은 다공성인 산호모래로 되어 있어 비를 집수하는 것이 필요한데, 전통적으로 속이 빈 코코스야자 줄기가 이용된다.

평균강우량은 2.500㎜이며, 주로 무역풍 계절(4∼11월)에 내리는데, 이때 가끔 태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그밖의 계절에는 대체로 가뭄이 든다. 평균기온은 28℃이나 장마철에는 좀더 시원하다. 식생은 코코스야자·판다누스 및 폴리네시아의 다른 나무와 관목을 포함해 40여 종의 식물이 밀생하고 있다. 야생생물로는 쥐·도마뱀·해조·철새류 등이 있다. 모기를 비롯한 곤충들이 많고, 알려진 광상은 없다.

국민

폴리네시아인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문화와 언어에 있어서는 사모아와 가깝다. 토켈라우어가 공식어이나 영어가 널리 사용된다. 주민의 98%가 그리스도교도(이들 중 70%는 회중교회 교도들이고, 28%는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아타푸의 주민은 회중교회 교도이고, 누쿠노누 주민은 로마 가톨릭교도이며, 파카오푸에는 두 교도 모두 있다. 2016년 추계인구는 1,499명이며, 이민으로 인해 매해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경제

토켈라우의 경제는 주로 자급농업에 기반한다. 1981년 국민총생산(GNP)은 100만 달러였고, 1인당 GNP는 670달러였다. 혈통에 근거해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으며, 공동으로 사용되는 토지도 있다. 산호초 가장자리까지의 수역이 이 제도에 속한다.

코프라용으로 재배되는 코코넛은 유일한 환금작물이고, 자급작물로는 타로토란·빵나무·포포나무·바나나 등이 있다. 돼지와 닭은 자급용의 주요가축이다. 초호와 대양에서 어패류가 내수용으로 잡히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에 310km의 배타적 경제수역이 설정되었고, 남태평양 위원회에 의해 수산업 양성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카누·가옥 및 그밖의 여러 가정용품을 제작하기 위해 타우아나베 나무가 지정된 작은 섬에서 특별히 재배된다.

제조업은 코프라·카누·목공품, 전통적인 기술로 짜서 만드는 모자·돗자리·가방 등의 생산으로 한정된다. 1980년대초 전기발전기가 설치되어 모든 환초에서 전기를 이용했다. 우표·동전 판매가 부수입원이 되고 있으나 예산이 세입을 초과해 뉴질랜드의 원조를 받는다. 토켈라우의 노동력은 자급농업과 어업, 공공사업, 전통적 수공예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국외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이 송금하는 돈이 이 나라의 주요수입원이다.

공식적인 유통 화폐 단위는 뉴질랜드 달러이다. 그러나 토켈라우의 1달러짜리 기념주화나 서사모아의 통화도 사용된다. 초호로 들어가는 항해로가 없으며 좋은 항구도 없다. 따라서 배들은 산호초 밖에 정박해야 하며, 거룻배를 이용해서 승객이나 짐을 실어나른다. 1982년부터 수상 비행기가 운항되었다. 무역상대국은 뉴질랜드로 코프라가 수출되며, 식품·건축자재·연료가 주로 수입된다.

정치와 사회

토켈라우는 1948년의 토켈라우 제도 법령에 의해 뉴질랜드령이 되었다. 뉴질랜드 외무장관이 3년 임기의 행정관을 임명하지만 서사모아의 아피아에 주둔하는 토켈라우 담당 사무관이 더 큰 권한을 가진다. 토켈라우의 자치정부는 각 환초에 있는 원로평의회·파이풀레(마을 대표)·풀레누쿠(마을 행정관)로 구성되며, 파이풀레와 풀레누쿠는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토켈라우 의회(fono)는 3개 환초의 평의회에서 각각 15명씩 선출되어 총 45명으로 구성된다. 의회에서는 예산을 편성하고, 이렇게 편성된 예산안을 뉴질랜드 의회에 보낸다. 1970년 이래로 니우에의 고등법원에서 토켈라우의 민사·형사 재판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파이풀레 사이에서 뽑힌 각 섬의 판무관이 재판을 담당하고 있다.

각각의 환초에는 레지던트 의사가 있는 병원이 있고, 각 섬을 순회하며 치료하는 치과의사가 있으며, 공중위생과 주민 건강을 돌보는 보건소도 있다. 담수가 늘 부족하지만 물 저장소와 저수 탱크의 설치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5∼15세의 아동들에게는 무상교육이 실시되는데, 입학률이 100%에 가깝다. 각각의 환초에는 초등학교가 있고, 중등교육은 서사모아와 니우에에서 받을 수 있다. 그 이상의 고등교육은 뉴질랜드와 피지에서 이루어진다.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이 자금을 제공한 1982∼86년에 계획이 실행되어 장거리 무선통신이 크게 발전했다.

역사

언어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사모아인이 표류하다가 토켈라우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지며, 작은 환초에는 사람들이 살게 되면서 빠른 속도로 밀집되었다. 이곳을 찾은 최초의 유럽인은 영국의 제독 존 바이런이다. 그는 아타푸 섬을 듀크오브욕 섬으로 명명했다.

1791년 영국 군함 '판도라호'의 선장 에드워즈가 군함 '바운티호'의 반란자를 찾던 중 누쿠노누 섬을 발견하고, 듀크오브클래런스 섬으로 명명했다. 1820년대에 고래잡이들이 이 제도를 방문하기 시작했으며, 1841년 미국 탐험대에 의해 철저히 탐사되었다. 이 탐험대원인 인류학자 호레이쇼 헤일은 이 제도의 풍습과 언어에 관한 자세한 논문을 썼다. 이 탐험대에서 파카오푸 섬을 보디치 섬으로 명명했다. 프랑스가 후원한 사모아의 선교단이 1840년대 중반부터 누쿠노누의 주민들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시켰다. 그리고 런던 선교회가 후원한 사모아인들이 1858년에 아타푸에 도착했다. 이 두 선교 그룹은 후에 파카오푸 섬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1863년 페루의 노예 사냥꾼들이 많은 섬 사람들을 유괴해갔고, 거의 같은 시기에 질병이 유행하여 인구가 약 200명으로 줄었다. 그후 여러 나라에서 온 백인 부랑자들이 정착하여 토켈라우인들과 결혼했다. 1877년 피지 주재 고등판무관이 토켈라우에 있는 영국 교민에 대한 사법권을 가지게 되자, 영국에서도 이 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89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1916년 토켈라우는 유니언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길버트엘리스 제도 식민지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많은 토켈라우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바나바 섬으로 이주했다. 1925년 뉴질랜드는 토켈라우 제도 지배권을 획득했고, 서사모아에 파견된 뉴질랜드의 사무관이 이 제도를 통치했다.

1948년 토켈라우 제도 법령에 의해 뉴질랜드의 영토가 되었다. 문화적·언어적 유대관계에 이끌려 1962년까지 토켈라우인들이 서사모아로 다소 이주했다. 이 제도의 행정관을 임명하는 뉴질랜드로의 이주가 1962년부터 시작되었다. 1976년 토켈라우가 이 제도의 공식 이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