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브먼

터브먼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V(acanarat) S(hadrach) Tubman
요약 테이블
출생 1895. 11. 29, 라이베리아 하퍼
사망 1971. 7. 23, 런던
국적 라이베리아

요약 라이베리아의 정치가.

1847년에 독립을 선포한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인 라이베리아의 제17대 대통령으로서 라이베리아 역사상 최장기간인 27년 동안 대통령직을 고수했다.

터브먼은 수많은 개혁과 사회정책을 실행했다.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에게 참정권과 재산소유권을 인정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인구의 약 80%를 점유하고 있는 토착부족들이 모두 정부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국고수입의 절반 이상되는 재원을 전국적인 공립학교 체제 확립에 투자했다. 한편으로는 전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라이베리아 정부의 주권을 보호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천연자원을 외국의 자본과 전문기술에 개방했으며,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아프리카 평화의 주창자이며 중재자로서 라이베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자 했다. 대부분이 해방된 노예들로 구성되어 있던 초기 미국계 라이베리아 이민자의 후손인 터브먼은 가난하지만 엄격한 규율아래에서 성장했다.

터브먼의 아버지는 석공이었는데 그와 다른 4명의 아이들에게 교회집회나 지역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매일 가족기도에도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침대가 너무 부드러워 아이들의 성격을 버려놓는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을 마루에서 재웠다. 둘째 아들로 태어난 터브먼은 처음에 목사가 되려고 19세 때 감리교 목사자격을 취득했지만 그무렵 하급세무관리라는 임시직도 얻게 되었다. 터브먼은 유능하고 정직했으므로 부업으로 교회일을 하면서 공무원직을 수행했다. 그는 근무시간 후에 법학을 공부하여 23세 때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터브먼은 나중에 지방의회선거에서 당선되어 예심판사를 비롯해 검찰관·중재심판인 등과 같은 공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35세 때 라이베리아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터브먼은 수도인 몬로비아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견될 만한 난제를 떠맡았는데, 그 난제는 오랫동안 라이베리아 중앙정부를 지배해온 미국계 라이베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영구집권을 위해 철옹성처럼 구축해놓은 파벌에 맞서는 일이었다. 시가를 애용하고 재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오지에서 온 우호적인 식인종"이라고 불렀던 터브먼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토착부족들의 합법적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터브먼의 책략은 너무나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소속정당(진정한 민권당 True Whig) 지도자들은 그를 대법원으로 전보 발령하여 1943년까지 그곳에서 배석판사로 근무하게 했다. 그후 터브먼은 뜻밖에도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고 곧이은 선거에서 교묘하게 승리한 다음 그후 6번을 연이어 당선되었다. 1944년 6월 터브먼과 그의 전임자 에드윈 바클리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것은 아프리카 국가원수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