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토

키토

다른 표기 언어 Quito
요약 테이블
위치 에콰도르 북부의 적도 바로 아래
인구 1,874,000명 (2020년 추계)
면적 290㎢
언어 에스파냐어, 케추아어
대륙 남아메리카
국가 에콰도르

요약 1666년 마지막 분출된 피친차 화산 아래 좁은 안데스 계곡 해발 2,850m 지점에 있으며 북쪽에 적도가 지난다. 직물, 경소비재, 피혁·목재·금·은으로 만든 제품들이 생산되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중심지이다.
11세기부터 잉카 제국에 통합된 1487년까지 시리스인들이 지배했다. 벨랄카사르가 1534년 자치시정부를 선포했다. 키토는 에콰도르의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남아 있으며 종교건물들이 많아 도시의 1/4을 차지할 정도이다.
남아메리카 수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키토는 키토 분지를 둘러싼 화산을 배경으로 많은 성당의 탑과 평화로운 광장, 분수대 등 식민지풍의 경관을 보인다.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도시들과는 달리 키토의 빈민들은 도시 중앙의 빈민가에 거주한다.

키토(Quito)
키토(Quito)

1666년에 마지막으로 분출한 피친차 화산의 사면 아래 좁은 안데스 계곡 해발 2,850m 지점에 있다. 바로 북쪽에 적도가 지난다.

고대에 최대 인디언 종족 연합체인 키투 왕국의 중심지였는데 기록은 없다. 11세기부터 도시들이 잉카 제국에 통합된 1487년까지 카라 인디언들을 통치한 시리스인들이 지배했다. 카라 인디언들은 '바다를 지나' 그곳에 온 것으로 전해진다.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부관인 세바스티안 데 벨랄카사르는 1534년 12월 6일 도시를 점령하고 자치시정부(cabildo)를 선포했다.

키토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중심지로서 비중이 컸지만 20세기초에는 과야킬이 경제면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두 도시는 지금도 경쟁관계에 있으며, 키토는 에콰도르의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남아메리카 수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키토는 키토 분지를 둘러싼 화산을 배경으로 많은 성당 탑과 평화로운 광장, 분수대, 발코니가 있는 가옥, 가파르고 좁은 거리, 쇠장식 격자가 있는 대문, 호젓한 정원 등 식민지풍의 경관을 보인다.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도시들과는 달리 키토의 빈민들은 도시 중앙의 빈민가에 거주한다.

1535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이 남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미술학교를 설립했다. 이것을 기반으로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는 도시에서 종교예술운동이 융성했으며, 신대륙에서는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훌륭한 그림들과 다색채 목제 조각품들이 많이 탄생되었다.

키토의 많은 성당과 수도원과 옛 저택들은 그 자체가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성당과 수도원들 중 훌륭한 건물들로는 바로크식 기둥과 천장, 금박을 입힌 거대한 제단들이 있는 라콤파니아(예수회), 웅장한 회랑이 있는 산프란시스코, 키토 태생의 산타마리아나 데 헤수스의 집인 카르멘 알토, 조각된 천장으로 유명한 산아구스틴, 멋진 외관장식으로 유명한 산토도밍고, 1809년 에콰도르 독립이 선포된 사그라리오, 독립 영웅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가 묻혀 있는 17세기 대성당 등이 있다. 종교건물들이 많아 도시의 1/4을 차지할 정도이다.

오랫동안 고립된 고지대의 중심지였던 키토는 과야킬-키토 철도(1908)로 해안까지 연결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제공항이 있으며, 팬아메리카 고속도로가 이 도시를 지난다. 중앙대학교(정부 후원)가 1769년에, 국립종합기술대학이 1869년에, 에콰도르교황청립가톨릭대학교(1963년에 교황재단법인으로 승격)가 1946년에 각각 개교했다.

과야킬과 더불어 에콰도르의 주요 공업 중심지를 형성하는 키토에서는 직물, 경소비재, 피혁·목재·금·은으로 만든 제품들이 생산된다. 동쪽으로 나포 주의 유전(油田)지대에서 생산되는 석유는 적도횡단 송유관을 통해 키토를 지나 에스메랄다스까지 수송된다. 남서쪽의 과야킬까지 뻗어 있는 송유관도 있다.
매주 1번씩 서는 옥외 인디언 시장과 토산 공예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은 키토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광경이다.

지도
키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