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히너

키르히너

다른 표기 언어 Ernst Ludwig Kirchner
요약 테이블
출생 1880. 5. 6, 독일 바이에른 아샤펜베르크
사망 1938. 6. 15, 스위스 다보스 근처
국적 독일

요약 표현주의 미술가 그룹인 브뤼케파를 이끈 인물로서 심리적 긴장과 에로티시즘으로 가득한 작품으로 유명했다. 1898년 키르히너는 독일의 후기 고딕기의 미술가들, 특히 그에게 일생 동안 영향을 미친 뒤러의 판화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유겐트스틸 운동과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동적인 화풍에 영향을 받아 단순한 형태와 밝은색을 사용하게 되었다. 1904년 아프리카와 폴리네시아의 미술을 접하게 되면서 이러한 발전은 더욱 촉진되었다. 키르히너는 1901~05년 드레스덴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그림에 매료되어 1905년 에리히 헤켈 및 카를 슈미트 로틀루프와 함께 '브뤼케'를 창설했다. 그뒤 곧 에밀 놀데 등 다른 미술가들이 이 그룹에 참가했다. 키르히너에게 있어서 진정한 미술은 내면세계의 갈등을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시각적인 매체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반 고흐와 뭉크의 감성 위주의 작품들을 미술의 표준으로서 인용했다. 키르히너는 정신과 육체가 쇠약해지자 스위스로 갔다. 그의 후기 풍경화들은 대개 우의적이며 문명에 시달리지 않고 자연과 함께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표현주의 미술가 그룹인 브뤼케파를 이끈 인물로서 그의 성숙한 양식은 매우 개성적이며 심리적 긴장과 에로티시즘으로 유명했다.

1898년 키르히너는 독일의 후기 고딕기의 미술가들, 특히 그에게 일생 동안 영향을 미친 뒤러의 판화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유겐트스틸 운동과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동적인 화풍에 영향을 받아 단순한 형태와 밝은색을 사용하게 되었다.

1904년 아프리카와 폴리네시아의 미술을 접하게 되면서 이러한 발전은 더욱 촉진되었다.

키르히너는 1901~05년 드레스덴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그림에 매료되어 1905년 에리히 헤켈 및 카를 슈미트 로틀루프와 함께 '브뤼케'를 창설했다. 그뒤 곧 에밀 놀데 등 다른 미술가들이 이 그룹에 참가했다. 키르히너에게 있어서 진정한 미술은 내면세계의 갈등을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시각적인 매체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반 고흐와 뭉크의 감성 위주의 작품들을 미술의 표준으로서 인용했다. 〈일본식 우산을 받치고 있는 소녀 Girl Under Japanese Umbrella〉(1906, 독일 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관)·〈미술가와 모델 Artist and His Model〉(1907, 함부르크 미술관)에서는 키르히너가 시각적 충격을 주기 위해 색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티스를 비롯한 프랑스의 야수파 화가들의 그림에 가깝지만 키르히너 그림의 형태들이 갖는 들쭉날쭉한 윤곽선과 긴장된 얼굴 표정은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위협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키르히너의 작품들은 상당수가 증오와 에로티시즘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베를린의 거리 Street, Berlin〉(1907,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산책중인 상류 여성들의 율동적인 곡선은 그들의 우아함을 나타내며 동시에 현대적이고 단정한 옷차림 밑에 숨겨진 투박한 감각성(몸매의 거칠고 짙은 윤곽선과 가면 같은 얼굴 때문에 불길한 느낌을 주는 감각성)을 강조하고 있다. 2번째로 그린 〈베를린의 거리〉(1913, 뉴욕 현대미술관)는 베를린의 건달사회에 대한 그의 냉소적인 시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리츠부르크의 목욕하는 사람들 Bathers at Moritzburg〉(1908, 스위스 에토이 F. 바우어 컬렉션)과 같은 누드 스케치들은 노골적으로 선정적인 경우가 많으며, 석판화 〈누드와 남자의 머리 Head of a Man with a Nude〉(1908)에서는 성적인 침해에 대한 그의 환상이 악몽같이 강렬하게 나타나 있다.

1911년 '브뤼케' 회원들은 베를린으로 활동지를 옮겼으며, 키르히너는 그곳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의 주요한 전위잡지인 〈질풍 Der Sturm〉을 위해 훌륭한 목판화들을 제작했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슐레밀 기담 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1915)과 표현주의 시인 게오르크 하임의 시 〈움브라 비타이 Umbra Vitae〉(1924)에 실려 있는 그의 삽화들은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동판화로 평가된다. 키르히너는 정신과 육체가 쇠약해지자 스위스로 갔다. 그의 후기 풍경화들은 대개 우의적이며 문명에 시달리지 않고 자연과 함께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나치가 그의 작품을 '퇴폐적'이라고 공표하자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