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를란트

쿠를란트

다른 표기 언어 Courland 동의어 Kurland, 쿠르제메, Kurzeme

요약 발트 해 연안의 지역.
Kurland라고도 씀. 라트비아어로는 Kurzeme.

쿠를란트(Courland)
쿠를란트(Courland)

서(西)드비나 강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의 명칭은 이곳에 살던 라트비아족 계열의 쿠로니아인에서 유래했다. 1561년에 성립된 쿠를란트 공작령은 이 지역과 원래의 쿠를란트 동쪽에 있던 세미갈리아를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검의 형제기사단(1237년부터는 리보니아 기사단 또는 리보니아의 튜튼 기사단으로 불렸음)이 서드비나 강 북쪽의 라트비아 영토를 정복한 뒤, 9세기말경에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했던 쿠로니아인을 대상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1230년 쿠로니아의 왕 람메키누스는 기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로마 교황의 사절과 직접 협상하여 세례를 받고 교황의 봉신이 되었다. 그러나 기사단은 이러한 협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쿠로니아 왕이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하사받지 못하도록 했다. 결국 이들은 1234년 쿠를란트의 주교로부터 영토의 2/3에 대한 명목상의 소유권을 획득한 뒤, 1269년 쿠로니아인들을 정복하여 그 이후 300년 동안 그들의 봉건군주로 군림했다.

1561년 리보니아 기사단은 자진 해체하면서, 쿠를란트와 1290년경에 정복했던 세미갈리아를 합병시켜 쿠를란트 공작령을 만들었다. 그뒤 이 공작령은 폴란드의 봉토가 되었다.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인 고타르트 케틀러와 그 후예들을 위해 건설된 이 공작령은 공작 야코프(1649~82 재위)가 통치하던 17세기에 특히 번영을 누렸다. 그는 강력한 해군, 대규모 상선, 유리한 해외무역의 기반이 된 조선업을 비롯한 각종 산업의 발달을 장려했으며, 유럽의 주요강대국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의 시대에 이 공작령은 서인도제도와 서아프리카(잠비아, 1651~65)에 식민지를 건설할 만큼 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1658년 대(對)폴란드 전쟁을 일으킨 스웨덴에게 옐가바(미타우, 쿠를란트의 수도)가 점령되고 공작이 포로로 붙잡혀 간 뒤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야코프는 1660년에 되돌아왔지만 공작령은 이미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그의 후손들은 공작령 왕실의 영화를 유지하고 유럽의 왕실들과 왕조적 유대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예를 들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작이 표트르 1세의 조카딸이자 후에 러시아의 황후가 된 안나와 결혼했음), 농민들의 생활은 더 궁핍해지고 쿠를란트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더욱 증대했다.

1737년 케틀러 가문의 마지막 공작이 죽자 러시아가 지명한 에른스트 요한 폰 비론이 그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비론이 러시아 황실의 총애를 상실하면서 러시아가 지지하는 색슨족의 통치기(1740~63)가 이어졌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협정에 따라 쿠를란트 공작령은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1817년 러시아의 통치하에서 쿠를란트의 라트비아인 농노들은 해방되었지만 토지를 할당받지 못했으며 독일인 귀족들은 계속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19세기말 마침내 러시아화 조치들이 무차별적으로 시행되면서 독일 귀족들은 기득권의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쿠를란트와 젬 갈레의 공작령(Duchy of Courland and Semigallia)
쿠를란트와 젬 갈레의 공작령(Duchy of Courland and Semigallia)

19세기에 라트비아 민족주의가 강력하게 대두되었으며,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자 쿠를란트는 새로 발족한 라트비아 독립국의 일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