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콘래드

조지프 콘래드

다른 표기 언어 콘래드 , Joseph Conrad 동의어 유제프 테오도르 콘라트 코제니오프스키
요약 테이블
출생 1857. 12. 3, 러시아령 폴란드 베르디체프(지금의 우크라이나에 있음)
사망 1924. 8. 3, 잉글랜드 켄트 캔터베리
국적 폴란드/영국

요약 폴란드 태생 영국의 소설가·단편작가. 화려체 산문과, 바다와 이국에서 겪은 험난한 삶을 훌륭하게 묘사해 찬사를 받았다. 대표작으로 <로드 짐>이 있다.

주요작품은 〈로드 짐 Lord Jim〉(1900)·〈노스트로모 Nostromo〉(1904)·〈비밀 첩보원 The Secret Agent〉(1907) 같은 장편소설과 〈어둠의 한가운데 Heart of Darkness〉(1902) 등의 단편소설이 있다.

일생 동안 화려체 산문과, 바다와 이국에서 겪은 험난한 삶을 훌륭하게 묘사해 찬사를 받았다(해양소설). 바다에서의 모험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이야기꾼이라는 초기 명성 때문에, 그가 매력을 느낀 것은 변함 없이 냉담한 자연에 직면한 개인, 자주 일어나는 인간의 악의, 인간 내부의 선과 악의 투쟁 등이었다는 사실은 가려져 있다.

그에게 바다는 무엇보다도 고독이라는 비극이었다. 복잡한 기교와 탁월한 통찰력을 가졌으며, 개인적 시각이 강한 그는 영국의 위대한 소설가로 간주되고 있다.

아버지 아폴로 날렝치 코르제니오프스키는 폴란드의 시인이며 열성적인 애국자로, 러시아의 지배에 대항한 폴란드인들의 봉기를 지휘하기 위해 1863년까지 존속했던 위원회의 창설위원이었다. 아버지는 1861년말 체포되어 북부 러시아에 있는 볼로그다로 유배되었다.

당시 4세였던 콘래드도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갔다. 결핵 환자였던 어머니는 그곳의 혹독한 기후 때문에 1865년에 죽었다. 콘래드는 〈자전적 기록 A Personal Record〉에서 아버지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셰익스피어와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을 번역할 무렵 처음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아버지와 외롭게 보낸 이 시절에 그는 월터 스콧 경,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찰스 디킨스, 윌리엄 메이크피스 섀커리의 작품을 폴란드어와 프랑스어로 읽었다.

아버지도 결핵을 앓다가 1869년 크라쿠프에서 죽었다. 그후 변호사였던 외삼촌 타데우슈 보브로프스키가 콘래드의 양육을 맡아 재정적인 도움과 사랑을 주었다. 외삼촌은 콘래드를 크라쿠프에 있는 학교와, 그후 스위스에 있는 학교로 보냈으나 콘래드는 학교 생활을 따분해 했으며 선원이 되기를 갈망해 1874년 마르세유로 향했다.

외삼촌은 1년치 용돈으로 2,000프랑을 주고 들레스탕이라는 상인에게 콘래드를 소개시켜주었다.

콘래드는 들레스탕의 프랑스 상선을 타고 항해했다. 승객으로서 '몽블랑호'를 타고 마르티니크까지 갔던 것이 콘래드의 첫 항해였으며 2번째는 견습선원으로 항해했다. 1876년 7월에는 승무원으로서 '생탄투안호'를 타고 서인도제도까지 항해했다. 이 여행에서는 총기 밀수와 같은 불법 사업에 관여해 베네수엘라 해안을 항해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에 관한 기억이 장편소설 〈노스트로모〉에서 발견된다.

1등항해사인 코르시카인 도미니크 체르보니는 이 소설 주인공의 모델로서, 콘래드의 삶과 작품에 뚜렷한 역할을 했다.

콘래드는 마르세유에 돌아오자마자 빚더미에 올라 자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프랑스 상선대의 선원으로 있다가는 성년이 되면 프랑스 해군으로 징집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건강이 회복되자 1878년 4월 석탄을 싣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영국 화물선에서 갑판원으로 일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같은 해 6월 그 배는 귀항하면서 콘래드를 영국 로스토프트에 내려놓았다. 이때 콘래드는 처음으로 영국에 발을 디뎠으며, 뒷날 영어의 대가가 된 그는 당시에는 몇 마디만 구사할 수 있었다. 영국에 체류하다가 10월 양모를 싣고 런던과 시드니를 항해하는 쾌속 범선에서 보통 선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6년간 영국 상선대에서 일했는데, 1880년 6월 2등항해사 자격시험에 합격했고 1881년 4월에는 425t급 바크 범선 '팔레스타인호'를 탔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되었는데 처음으로 극동지방을 여행할 수 있었는데다가 끊임없이 험난했던 이 항해가 후에 작품의 소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풍에 시달리고 갑자기 기선과 충돌하고, 상당수 승무원들이 하선한 뒤에도 팔레스타인호는 멀리 동인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때 배에 싣고 가던 석탄에 불이 붙어 나머지 승무원들도 구명 보트를 타야만 했다. 갑판 없는 작은 배를 타고 13시간가량 항해한 끝에 콘래드는 극동, 즉 수마트라 앞바다의 한 섬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되었다.

1898년 팔레스타인호를 타고 겪은 경험을 약간 손질해 〈청춘 Youth〉이라는 단편소설로 발표했는데, 이는 한 젊은 장교가 지휘관이 되어 첫번째로 승선한 경험을 뛰어나게 그린 소설이다.

증기 여객선을 타고 런던에 돌아온 그는 1883년 9월 '리버즈데일호'에서 항해사로 일하다가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에서 하선하고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에서 '나르시소스호'를 탔다. 이 항해는 한 이기적인 흑인 선원이 선상에서 겪는 타락과 죽음을 다룬 장편소설 〈나르시소스호의 흑인 The Nigger of the 'Narcissus'〉의 소재가 되었다.

콘래드는 이무렵에 처음으로 영어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뒤이은 항해 사이사이에 1등항해사 자격시험을 준비했으며, 1886년에는 2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8월에 영국국민이 되고, 3개월 후에는 상선장 자격증을 딴 것이다. 1887년 2월에는 자바 섬의 세마랑으로 출발하는 '하일랜드 포리스트호'에 1등항해사로 승선했다. 선장은 존 맥휘였는데 그는 후에 〈태풍 Typhoon〉에서 증기선 '난 샨호'의 영웅적이고 상상력 없는 선장으로 등장한다.

콘래드는 이후 동남아시아 군도 사이를 항해하며 장사하는 지방 소유의 증기선인 '비다호'에서 일했다. 4개월 15일 동안 5~6차례 항해하면서 발견하고 탐험한 세계를 여러 단편소설과 초기 장편소설들 〈올메이어의 우행 Almayer's Folly〉·〈섬의 부랑자 An Outcast of the Islands〉·〈로드 짐〉에서 재창조했다.

비다호를 떠난 후 예기치 않게 방콕에서 출항하는 '오타고호'에서 선장으로 지휘하는 첫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항해는 단편소설 〈그림자의 선 The Shadow-Line〉·〈포크 Falk〉의 소재가 되었다. 1889년 여름 런던으로 돌아와 템스 강 부근에 방을 구해 발령을 기다리며 〈올메이어의 우행〉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가장 기이하면서 중요할지도 모르는 모험으로 중단되었다. 어린시절 폴란드에서 콘래드는 아프리카 지도의 중앙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른이 되면 여기에 갈거야"라고 말한 바 있다. 1889년 당시 콩고 자유국은 탄생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제국주의자들의 착취 지역이 되었다.

콘래드의 어릴 적 꿈은 콩고 강 증기선의 선장직을 맡겠다는 야심으로 구체화되었다. 가능한 모든 영향력을 이용하여 브뤼셀로 가서 선장직을 확보했다. 콩고 강에서 보고 행하고 느낀 점은 그의 가장 유명하고 훌륭하며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인 〈어둠의 한가운데〉에 대부분 기록되어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한가운데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허무주의적이고 악의에 찬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나아가, 즉 악의 핵심으로서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콘래드의 작품과 관점의 핵심으로, 콩고 강에서 겪은 경험이 그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콩고 강에서 심리적·정신적·형이상학적 충격을 겪었으며, 육체적 건강 또한 손상되어 남은 생애 동안 열병과 통풍으로 고통을 받았다.

콩고 강에서 4개월을 보낸 후 1891년 1월 영국으로 돌아왔다. 1등항해사로 몇 차례 더 항해를 떠났으나 후견인이던 외삼촌 타데우슈 보브로프스키가 1894년에 죽자 해양생활을 마감했다. 1894년 봄 콘래드는 〈올메이어의 우행〉을 런던의 출판업자 피셔 언윈에게 보냈고 이 작품은 1895년 4월 발간되었다. 그는 이 소설의 저자로서 콘래드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오랜 경험으로 코제니오프스키라는 이름은 영국인들이 발음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이름을 고쳤다.

언윈의 원고 교열자였던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가넷이 콘래드에게 2번째 작품을 쓸 것을 재촉해 1896년 〈섬의 부랑자〉가 탄생했다. 이 작품 역시 유럽인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한 열대지방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여러 비극적 사건에 부딪히는 어리석고 경박한 인물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 두 소설로 빚어진 콘래드의 재능과 의도에 대한 오해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말레이 열도를 배경으로 삼은 것 때문에 이국 정취의 작가로 분류되었고, 이후에 씌어진 해양소설들, 즉 〈나르시소스호의 흑인〉(1897)·〈로드 짐〉(1900)·〈청춘〉(1902)·〈태풍〉(1903)외 여러 작품들은 이 평판을 더욱 굳혀주는 듯했다. 그러나 콘래드는 〈나르시소스 호의 흑인〉에 관해 언급하며 작품의 무대를 선택하는 진짜 이유를 "내가 즐겨 다루는 문제는 …… 바다가 아니라, 육지의 모든 복잡한 일에서 완전히 고립된 상황으로 인해 특이한 힘과 색채로 부각되는, 배 위에서 일어난 인간들의 문제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다른 작품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로드 짐〉의 후반부는 밀림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작가의 관심을 끄는 감정적·도덕적 문제가 밀림 마을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주인공 짐의 죄의식·책임감·불안감 등으로 표출되는 인간의 공통된 감정이 그의 고립된 처지로 말미암아 더욱 논리와 필연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국 취향이 아닌 바로 이런 의도야말로 19, 20세기초의 많은 소설가의 작품과 콘래드의 작품을 구별짓는다. 다른 작가들은 대부분 소설의 영역을 넓히거나, 발자크의 말대로 사회의 박물학자처럼 행동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으나 콘래드는 대신 비극을 고립·집중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895년 콘래드는 22세의 제시 조지와 결혼해 2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뒤로는 주로 영국의 남동지방에서 살았는데 작가로서 그의 삶은 나쁜 건강과 가난, 까다로운 성격으로 평탄하지 못했다. 재정 상태가 비교적 안정된 것은 1910년, 즉 대표작인 〈로드 짐〉(1900)·〈노스트로모〉(1904)·〈비밀 첩보원〉(1907)·〈서구인의 안목 Under Western Eyes〉(1911)을 쓰고 난 뒤였다. 〈로드 짐〉을 제외한 장편소설 3편은 정치음모와 로맨스를 다룬 작품이다. 왕실 연금 100파운드를 받았고, 미국인 수집가 존 퀸에게 육필 원고를 팔기 시작했다.

1912년 장편소설 〈기연 Chance〉이 〈뉴욕 헤럴드 New York Herald〉지에 연재되었고, 1915년에 발간된 장편소설 〈승리 Victory〉도 성공적이었다.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남은 생애 동안 계속 작품을 써나갔다. 1924년 4월 램지 맥도널드 총리가 제안한 기사작위를 거절하고 그 직후 죽었다.

생전에 콘래드는 바다와 열대지방의 생활을 묘사하는 능력과 작품이 지닌 로맨스적 특징으로 찬사를 받았다(로맨스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야비한 사건에 환상적인 광채를 얇게 입히는 정교한 산문체를 구사하는 그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말임). 죽고 나서 명성은 줄어들었으나 나중에 동시대인들이 강조했던 것과는 다른 특징, 다른 작품에 주의가 쏠리면서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이런 작품들의 주제를 살펴보면 현대 비평가들이 어떤 점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남아메리카의 한 가상 공화국에서 일어나는 혁명과 정치, 그리고 재정의 조작에 관한 이야기인 〈노스트로모〉(1904)는 많은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나 1가지 생각에 집중되어 있다. 등장 인물들의 야심, 즉 그 공화국의 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소설의 구성상 중심 상징인 은을 둘러싼 야심으로 인한 인물들의 정신적 타락이 주제이다.

그 야망은 단순한 욕심부터 개혁과 정의를 원하는 이상주의적 욕망까지 다양하다. 모든 인물들은 도덕적 파멸로 치닫고 그 야심이 숭고할수록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깨달았을 때 자기 혐오는 더욱 커진다.

콩고 여행에서 실제로 겪었던 사건들을 면밀하게 다룬 〈어둠의 한가운데〉는 작중 화자가 쿠르츠라는 한 신비스러운 백인에게 매혹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백인은 웅변술과 매혹적인 성격으로 자기 주위의 야만적인 원주민들을 지배한다. 작중화자는 원주민을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상인들을 몹시 경멸하면서도 자신에게서 내키지 않는 충성심 같은 것을 일으키는 쿠르츠의 힘을 부인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비밀 첩보원〉(1907)은 아이러니에 관한 훌륭한 평론이자 콘래드의 걸작 중의 하나로 런던의 무정부주의자·경찰·정치가·밀정들의 수상한 세계를 다루고 있다. 〈승리〉는 세상과 떨어져 삶의 관찰자로 살아가던 허무주의적인 주인공이 한 고립된 섬에서 3인조 악한의 살인음모에 맞서 자신과 불운한 여자친구를 보호하려다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콘래드의 인생관은 매우 비관적이다.

모든 이상주의에는 부패의 씨가 담겨 있으며 가장 존경받는 사람도 자신의 도덕규범이 악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자신들이 경멸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감정에 유사성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상황을 콘래드가 되풀이하여 만들어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후세의 소설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대가다운 기술 혁신과 이를 통해 표현된 인간성에 대한 시각 때문에 막대한 것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을 다룬 소설가이다. 〈자전적 기록〉의 서문에서 콘래드는 "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 세상, 즉 현세가 매우 단순한 몇몇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는 나의 확신을 압니다.

이 개념은 너무 단순해 아주 오래 버티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실성이라는 개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콘래드의 성실성은 인간이 허무함·타락, 그리고 인간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교활하게 그를 삼켜버리려고 하는 악에 대한 하나의 방벽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인간의 내부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악에 대한 방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충성심이 침몰하고 방벽이 무너지고 마음속에 있던 악이 밖에 있던 악을 인정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것이 콘래드의 위대한 소설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