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메니우스

코메니우스

다른 표기 언어 John Amos Comenius
요약 테이블
출생 1592. 3. 28, 모라비아 니브니케
사망 1670. 11. 15, 암스테르담
국적 체코

요약 언어교수법을 혁신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유럽 문화에 대한 연구를 수월하게 해주는 방편으로 라틴어 학습을 옹호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열려진 언어의 문>이라는 저서에서 혁신적인 라틴어 교수법을 제시했으며, 이 책은 이후 16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보헤미아 형제단으로 알려진 독실한 개신교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코메니우스는 프로테스탄트의 천년지복설에 영향을 받아 인간은 지상에서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믿었다. 코메니우스는 12살 때 부모가 죽었는데, 이후 4년 동안 우울하게 생활하다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다녔다. 젊은 사제로서 행복한 사제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1618년 30년 전쟁이 일어나고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를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하자 일단의 동포교단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로 도망가 1628년 레슈노에 정착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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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교육개혁
  2. 사회개혁
  3. 코메니우스에 대한 평가
코메니우스 (John Amos Comenius)
코메니우스 (John Amos Comenius)

교수법 특히 언어교수법을 혁신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유럽 문화에 대한 연구를 수월하게 해주는 방편으로 라틴어 학습을 옹호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열려진 언어의 문 Janua Linguarum Reserata〉(1631)이라는 저서에서 혁신적인 라틴어 교수법을 제시했으며, 이 책은 이후 16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코메니우스는 보헤미아 형제단으로 알려진 독실한 개신교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독자였다. 부모들은 그가 12세가 되었을 때 모두 죽었는데, 이후 4년간 우울하게 생활하다가 프르제로프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비록 학교교육은 형편없었지만 교장은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성직자가 되도록 격려하면서 그를 돌보았다. 그는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 다니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천년지복설(Protestant millennialist)에 영향을 받아 인간은 지상에서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저작에 심취하여 천년지복설이 과학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고국에 돌아왔다.

코메니우스는 젊은 사제로서 행복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1618년 30년전쟁이 일어나고 황제 페르디난트2세가 보헤미아를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하자 그와 다른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도망가야 했다. 숨어 지내면서 〈미로의 세계와 마음의 천국 The Labyrinth of the World and the Paradise of the Heart〉이라는 우화를 썼는데, 여기에서 절망감과 위안의 근원을 묘사했다. 일단의 동포교단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로 도망가서, 1628년 레슈노에 정착했다.

교육개혁

코메니우스 (John Amos Comenius)
코메니우스 (John Amos Comenius)

코메니우스는 교육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첫째, 교수법을 혁신하여 학습이 빠르고 즐거우며 철저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교사들이 아이들의 마음 상태와 배우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자연의 발달 단계에 따른' 교수법을 주창했으며, 이러한 생각을 주제로 하여 〈위대한 교육 The Great Didactic〉과 유아를 기르는 어머니를 대상으로 하는 〈유아학교 The School of Infancy〉라는 저서를 집필했다. 둘째, 모든 어린이가 유럽 문화에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라틴어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당시의 비효율적이고 형식에 얽매인 교수법과는 다른 보다 좋은 라틴어 교수법이 있다고 확신했다. 즉 문법이 아니라 사물을 배우는 '자연의 방법'을 주창했다. 이런 취지로 〈열려진 언어의 문〉을 저술했는데, 이 교재에는 세계에 대한 유용한 사실들이 라틴어와 체크어로 나란히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학생들이 2개의 언어를 서로 비교할 수 있고, 사물 또는 사실을 통해 단어의 뜻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열려진 언어의 문〉은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곧 유럽 전역에서 유명해졌으며, 결국 유럽과 동양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코메니우스는 자신의 책이 예상보다 크게 인정받자 용기를 얻었다(언어습득).

보헤미아의 해방이 점점 불확실해지자 코메니우스는 교육을 통해 인간사회를 개혁한다는 보다 야심적인 계획으로 관심을 돌렸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이 견해에 동의했다. 그중에는 런던에 거주하는 독일인 상인 사무엘 하르트리프가 있었다.

그는 코메니우스를 영국에 초청하여 사회개혁을 위한 대학을 세웠다. 코메니우스는 동포교단의 승인을 얻은 후 1641년 런던으로 가서 "저는 영국 종교인에 걸맞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라는 회신을 보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많이 접촉했고 많은 토론에 참석했으며, 가장 유명한 수필이면서 자신의 계획을 제시한 〈빛의 길 The Way of Light〉을 저술했다. 영국 의회도 '세계 각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학을 설립할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영국내란(청교도혁명)의 발발로 무산되었으며, 1642년 영국을 떠나야 했다.

그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초청으로 프랑스를 방문했으며, 그를 하버드대학의 총장으로 영접하기 위해 유럽에 와 있던 미국인 존 윈스럽 2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이를 고사하고 스웨덴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열려진 언어의 문〉을 모델로 한 일련의 교과서들을 제작하여 학교개혁을 도왔다.

그는 스웨덴 정부와의 계약으로 자신이 발전시켜온 이른바 '범지'(pansophy) 철학의 바탕 위에 교과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과서를 제작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후 그것들이 결국 아무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빙에 있는 동안 교육학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최신 언어학 방법 Newest Method of Languages〉의 한 부분을 이루는 〈분석교수법 The Analytical Didactic〉에서 이전의 〈위대한 교육〉에서 기술한 자연의 원리를 논리의 원리로 재해석했다.

그는 자명한 원리들을 제시하여 여기서 많은 실천원리를 끌어냈다. 그중의 몇은 상식적이었고 다른 것은 상당히 진부한 내용이었다. 그의 주요관심은 자신의 범지사상체계에 있었다. 그는 "범지사상은 그 자체가 확장성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사물 자체가 즐거운 것이면서 욕구를 확장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터득할 수 있도록 해준다"라고 썼다.

그의 주요목표는 범지적인 이해를 위해 '욕구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인간생활 개선에 관한 보편적 진단'(A General Consultation Concerning the Improvement of Human Affairs)이라고 기술했다.

사회개혁

30년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베스트팔렌 평화조약(1648)은 코메니우스와 다른 체코 망명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조국에서 윤리적·종교적 자유를 회복하려는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해야만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코메니우스는 엘빙을 떠나 절망에 빠져 있는 레슈노의 동포교단을 찾아 폴란드로 돌아갔다. 1648년 그는 보헤미아-모라비아의 마지막 성직자로서 모라비아 교단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코메니우스는 헝가리의 젊은 왕자 지그몬드 라코치의 초대를 받았는데, 그는 샤로슈포토크에 범지학교를 설립하기를 원했다. 코메니우스는 1650년 그곳에 도착하여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코메니우스는 자신이 폴란드에서 학생들을 위해 제작했지만 필요한 목판이 없어 사용할 수 없었던 그림교재의 필사본을 가지고 레슈노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필사본을 목판이 만들어져 있던 독일의 뉘른베르크에 보냈다.

그의 책 〈가감계도표시 Orbis Sensualium Pictures〉(1658)는 2세기 동안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이후 그림이 있는 학교 교재의 선구가 되었다. 이 책은 라틴 문장을 설명하는 그림에 모국어 번역을 곁들인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코메니우스가 레슈노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슈노는 점령되어 파괴되었는데, 이때 많은 필사본들이 소실되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으로 달아났고 나머지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1657년 교육에 관한 대부분의 저작들을 모아 〈교육학 총서 Didactica Opera Omnia〉를 발간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을 자신의 위대한 저작 〈상담 Consultation〉을 완성하는 일에 바쳤다. 그는 가까스로 그 책의 일부분을 발간할 수 있었는데,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1670년 죽으면서 가까운 친지들에게 발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들은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고, 1935년 독일 할레에 있는 한 고아원에서 일부 필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대부분이 유실되어버린 후였다.

코메니우스에 대한 평가

코메니우스의 명성은 주로 2개의 유명한 저작 〈열려진 언어의 문〉·〈가감계도표시〉에 기인한다. 그러나 자신은 사회개혁가로서 영향력을 쌓아가려 했고, 그러한 활동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다.

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은 코메니우스를 그들의 지도자로 생각했다. 그의 견해는 보다 역동적인 종교형식을 구하려는 사람이나 과학을 개혁의 길로 생각했던 사람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반면에 범지주의는 그가 살아 있을 당시나 그후에도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이미 공리주의적·물질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17세기의 관념에는 우주적 조화에 대한 그의 꿈이 너무나 모호하고 거대해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종교지도자로서의 코메니우스는 가장 암울했던 시절에 교회에 대한 신앙을 지켰고, 18세기에 니콜라우스와 그라프 폰 친첸도르프의 지도하에 모라비아 교회와 같은 부흥운동으로 이어지는 종교적 영감을 제시했다. 그는 분파주의자였다기보다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옹호자였다. 또한 국제주의를 옹호했지만 체코가 억압받던 시절의 애국자로서 "나는 나의 나라와 언어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나라가 문명화되는 것입니다"라고 썼다.

코메니우스의 명성은 19세기에 교육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특히 독일에서 되살아났다. 코메니우스는 200편 이상의 작품을 썼고 그 가운데 많은 책이 번역되었다. 뛰어난 전기로는 매슈 스핀카가 쓴 〈존 아모스 코메니우스 : 비할 데 없는 모라비아인 John Amos Comenius : That Incomparable Moravian〉(1943)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