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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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기 언어 Pyotr Leonidovich Kapit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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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4. 7. 8(구력 6. 26), 러시아 크론슈타트
사망 1984. 4. 8, 모스크바
국적 소련

요약 소련의 물리학자.

자기학과 저온물리학에 대한 연구로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헬륨 Ⅱ(2.174K 이하에서의 액체 헬륨의 안정된 형태)가 거의 점성(흐름에 대한 저항)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 성질을 초유동성이라고 한다.

페트로그라드공과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1921년까지 이 대학의 강사를 지냈다. 러시아 혁명에 이어 일어난 내전의 혼란 속에서 첫번째 아내와 두 자녀가 병으로 죽은 후, 영국으로 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E. 러더퍼드와 함께 연구했고 1924년 캐번디시 연구소의 자기 연구부 차장이 되어 50만G(가우스)의 자기장을 형성할 수 있는 기구를 설계했는데, 1956년까지 이것의 강도를 능가할 수 있는 기구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1925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이 되었고, 1929년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특별히 그를 위해 케임브리지에 왕립학회 몬드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헬륨을 액화시키는 팽창기관에 대한 그의 논문을 출판하기 전인 1934년 그는 소련에서 열리는 물리학 회의에 참석하러 갔는데 거기서 여권이 압수되었고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억류되었다.

1935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물리문제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러더퍼드의 중재를 통해 몬드 연구소에 있던 기구들을 모스크바로 실어오게 했다. 그는 저온 물리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고 헬륨 Ⅱ의 열전도 특성을 연구하던 중 그것의 초유동성을 발견했다. 그의 발견은 1938년 처음으로 발표되었고, 이 주제에 대한 더 깊은 연구는 〈헬륨 Ⅱ의 열전도와 초유동성 The Heat Transfer and Superfluidity of Helium Ⅱ〉(1941)·〈헬륨 Ⅱ에서의 열전도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 Research into the Mechanism of Heat Transfer in Helium Ⅱ〉(1941)에 서술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중 소련의 강철산업을 위해 액체 산소를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기구를 만들었다. 1930, 1940년대에 그의 과학적인 업적에 대해 소련 정부는 사회노동당 영웅의 칭호(1945)와 소련 최고시민상을 포함해 많은 명예를 안겨주었다. 1946년 그는 핵무기 개발에 관한 연구를 거절함으로써 스탈린의 미움을 샀고 물리문제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었으며,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까지 시골집에 거주했다. 은둔하는 동안에도 구상 번개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를 했다. 1955년 연구소 소장에 복귀되어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1950년대말 고출력 마이크로파 발전기에 대한 연구로 인해 그는 제어된 열핵융합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고, 1969년부터 이 주제에 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과학사상을 드러내놓고 주창했던 그는 1960년대 바이칼 호를 산업공해로부터 보존하자는 캠페인을 벌였던 소련 과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과학 연구를 파괴적이기보다는 건설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 일련의 국제회의인 퍼그워시 운동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